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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어지니
이번 주(4/11) KBS 일요 스페셜은 '수단의 슈바이처 이 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출발한 취재진은 이 신부님이 활동했던 톤즈로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내란이 오래도록 벌어졌던 수단, 톤즈로 가는 길이 총기 사건으로 인해 막혀 있었습니다. 남과 북간의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부족간의 유혈충돌은 여전했습니다. 일박이일을 돌아 취재진이 도착한 그곳은 다른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2001년 신학생 시절 케냐에 도착한 이 신부님이 더 가난한 곳을 찾아 도착했던 바로 그곳 톤즈였습니다.
톤즈로부터 20여분 떨어진 한 마을을 취재진이 찾았습니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시각장애인) 그들이 다 모이자 60여명이 되었습니다. 성한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마을이 이 신부님이 자주 찾던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취재진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은 한국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촌장이 일어나 환영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치 않은 손으로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차라리 성스럽게 보였습니다.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바로 이 옷을 신부님이 주셨다면서 그 옷 덕으로 추위와 모기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자신이 목이 아플 때 신부님이 치료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하나 사람은 이 신부님의 장례식장에 자신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면 모두가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걸린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을 이 신부님은 때로 맨손으로 만져가며 치료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신부님은 그들의 유일한 의사이며 유일한 외국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인답게 그들은 함께 노래를 하였습니다. 그 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졸리 신부님이 가난한 곳에 오셨네. 가난한 곳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을 구했네....." 신부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생전에 이 신부님은 그 사람들을 가리켜 가난하다고 불행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는 단순히 그들이 그렇다는 객관적 진술을 넘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가난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극복하거나 피해야 하는 저주로 여긴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이 신부님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톤즈에는 80여개 마을이 있는데 의사라곤 이 신부님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 눈이 안 보이는 사람, 손이나 발이 그저 뭉툭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이 신부님이 사랑하고 보듬어 안고 살았던 형제와 자매들이었습니다. 옆에 같이 있기도 어려운 그런 사람들이 그의 생명을 바쳐 아끼고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들과 같아진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언어인 '딩카어'를 배우는데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고통을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듣기 위함이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발에 맞는 신발을 주문 하기 위해 신부님이 직접 환자들의 발을 대고 그려서 떠늫은 본은 그분의 마음이었습니다. 톤즈에 가서 1년을 함께 봉사한 의사 신경숙님은 아무리 밤늦게 병원의 문을 두드려도 문이 안 열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을 두 번 두드려야 하는 경우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의 환자를 보아야 하는 과중한 일을 하면서도 그분은 언제든 주인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자세로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그들을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시각장애인 한센병 환자는 취재진이 쥐어 준 신부님의 사진을 받자 더듬더듬 천천히 사진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레이터는 그 입맞춤을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주님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환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그들의 신비한 힘에 오히려 늘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 속에 계신다는 이 신비한 임재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항상 크고 풍족하고 힘 센 것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러한 주님의 임재방식을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행복한 그리스도인을 보기 힘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부님의 삶은 오늘날 보기도, 얻기도 힘든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신부님은 재주가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해야 좋을까요? 톤즈의 학교 건물을 비롯하여 병원 건물 등 모든 건물들은 시멘트를 사다 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린 것입니다. 톤즈 유일의 농구대도 만들고 심지어는 태양열 발전기까지 설치하였습니다. 병원의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냉장고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신부님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혼자서 거울을 보며 뒷머리를 깎는 모습은 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상적인 신부님의 재능은 음악이었습니다. 어려서 성당의 오르간을 통해 피아노 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작곡을 시작하였고, 기타 드럼 등등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신부님의 음악적 재능은 남부 수단 최초의 그리고 유일의 브라스 밴드를 창단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악기의 연주하는 법을 배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악보를 그리고 지휘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정부행사에까지 초청을 받는 브라스 밴드가 톤즈의 명물로 자리잡았습니다.
13세 가장 어린 아이부터 18세까지의 아이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의 단원들은 특히 신부님과의 관계가 돈독하였습니다. 브라스 밴드는 특히 그들에게 공동체의 삶을 가르치는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중3인 수산나는 신부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서로 사랑하고 따로 떨어져 있지 말고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아이들에게 이 신부님의 장례 장면을 틀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스위스 아가씨'를 부르는 신부님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한듯 그 장면을 웃으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심하게 마른 신부님의 모습이 나오자 아이들의 모습은 충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부님의 관을 운구하는 장면이 나오자 흐느낌이 시작 되었고 모든 아이들이 더 이상 화면을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취재진은 더 이상 취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아이들과 함께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낯 설지 않은 그 울음이 사실은 신부님이 심은 씨앗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였습니다.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너무도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겪은 수단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의 눈에 눈물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회복되었다는 표시입니다.
2월 28일 취재진이 나누어 준 사진을 영정 사진 삼아 브라스 밴드는 톤즈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신부님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총기 사건으로 사람들의 모임이 금지되었지만 군인들은 그 행진을 막거나 해산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총상도 신부님이 치료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참된 평화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부님의 마지막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2년마다 한 번 방문하는 한국에서 친지들의 권유로 받은 건강검진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그것이 대장암 말기라는 최종 진단이 내려졌을 때, 신부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톤즈에 관한 걱정들 뿐이었습니다. 파다 만 우물, 지어야 할 건물, 지켜야 할 사람들과의 약속, 신부님의 걱정은 자신이 빨리 톤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 열린 톤즈 후원을 위한 음악회에서 신부님은 자신의 병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초인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걸리는 분이 꼭 한 분 계셨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의대 시절 장학금을 한 번도 받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학비를 대느라 고생하셨다는 그의 말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낙천적인 삶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16번의 항암 치료를 받으며 병원에서 투병하는 중에도 어머니가 오실 때에는 모든 바늘이나 몸에 꽂힌 관들을 잘 싸서 감추고 꼿꼿하게 앉아있는 자세로 웃으며 어머니를 만났다고 신부님의 누이는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힘없이 맥없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신부님의 전해지지 않은 말은 "다이루었다"일 것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그리고 온 몸의 살을 다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장례가 끝난후, 수단을 돕기 위한 후원회의 회원은 천 여명이 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톤즈의 학생 두명을 장학생으로 한국에서 공부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모교인 인제 대학에서도 톤즈에 의사 두명을 보내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삶을 모든 후배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여러 계획들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열매는 톤즈에서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세운 학교 돈 브리스코 고등학교의 학생 하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학이나 의료공학을 공부해서 신부님처럼 다른 이들을 돕고 싶다는 것을 피력했습니다. 모두가 다 아름다운 열매들입니다. 신부님은 심었습니다.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마지막, 브라스 밴드의 아이들이 리코더를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귀에 익은 곡이었습니다. '사랑해 당신을'이었습니다. 리코더의 연주가 끝나자 아이들은 다같이 한국어로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마치 그 노래가 오래 전에 신부님을 위해 작곡된 노래 같았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길지않은 47년 세월을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고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 사는 검은 형제들은 이 요한(John. Lee)신부를 졸리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그 호칭에 담긴 사랑과 존경과 친밀함은 말이나 글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실체입니다. 일출이나 석양, 혹은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경외심에 넋을 잃고 말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졸리 신부님에게서 되살아납니다. 단촐한 유품, 그것은 말없는 신부님의 소탈한 가난의 향기입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던 그분의 사랑과 숭고한 희생의 삶 앞에서 이제까지 신앙인으로 살아왔던 저의 모든 과거가 너무도 하찮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검은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 앞에서 손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제 인생을 다시 한 번 추스립니다. "신부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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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을 여주시여 감사사합니다. 졸리 신부님의 사랑의 정신이 우리들의 마음안에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