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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지도 초안 발표
← 클린턴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인간 유전자 지도를 규명한 `셀레라 제노믹스` 크레이그 벤터 대표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간 유전 정보인 게놈의 분석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온 국제 공공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와 미국 민간업체 '셀레라 제노믹스'가 유전자 염기의 배열 지도를 2000년 6월 26일 워싱턴에서 공동발표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통해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인류가 생산해 낸 가장 경이로운 지도"라며 축하했다.
이날 발표한 '인간 유전자 지도'는 생명공학의 신대륙 발견으로 평가됐다. 인간 게놈은 인체세포에 존재하는 23쌍의 염색체, 염색체를 이루는 DNA(핵산), DNA를 구성하는 30억쌍의 염기들의 이중나선형 조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에 규명된 것은 염기의 배열로, 이제 이 염기배열지도를 통해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작업이 남게 됐다. 인간 유전자 정보의 97%를 해독했고 85%의 염기배열 순서 분석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자들은 암 심장병 당뇨 비만 탈모 천식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머병 에이즈 등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일반인은 현재의 '진료기록'보다 훨씬 정확하고 풍부한 자신의 유전정보를 담은 극소형 DNA칩을 의사에게 제시하고 유전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조선
[2000년] 국회, 이한동 총리서리를 상대로 사상 첫 인사청문회
←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이한동 국무총리서리가 선서를 하고 있다.
2000년 6월 26일~27일 양일간 국회 사상 첫 인사청문회를 실시했다.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명의 신탁 파문으로 물러나 후임 총리로 임명된 자민련의 이한동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였다.
이 총리서리가 총선 당시 "국민회의와의 공조복원은 없다"고 몇차례나 강조한 후 말을 바꾼 점, 또 1970년대 초 포천 농지를 구입한 것은 위장전입이며 농지개혁법 위반이라는 점 등 때문에 자격 시비가 제기됐다.
이 총리 임명동의안은 6월 29일 국회 표결에서 찬성 139, 반대 130, 기권 2, 무효 1로 통과됐다. 139표는 민주당 119, 자민련 17, 민국당 2, 한국신당 1석을 모두 합친 것으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 구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1996년] 영국서 1세기 경 자작나무에 기록된 불교 최고문서 발견
←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중인 1세기 경 불교문서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문서가 발견 확인됐다. 고아시아 전문가인 미시애틀시 워싱턴대의 리차드 살로만 교수는 1996년 6월 26일 영국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인 불교문서가 서기 1세기쯤에 제작된 진본으로 현존하는 불교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학자들은 자작나무 껍질에 고대 간다라어로 기록된 이 문서가 불교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며 기독교의 사해문서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 60개 조각인 이 기록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설교 시 인식론 등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북부 파키스탄과 동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불교 중심지 간다라에서 나온 것으로 초기 불교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됐다./조선
[1987년] ‘6ㆍ26 대행진’, 비폭력ㆍ평화시위
← 1987년 6월 26일 부산에서의 반정부시위 모습. 반 나체의 한 시위자가 "최루탄 쏘지마"라며 절규하며 시위하고 있다.
‘6ㆍ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1987년 6월 26일 오후 6시를 전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전주 춘천 등 전국 37개 시ㆍ군 지역에서 국민운동본부, 민주당, 재야인사, 학생들에 의해 시도됐다.
이날 대행진은 6월 10일 대회에 비해 개최도시 및 시위발생지역, 시위가담인원이 훨씬 많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서울과 지방에서 일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렸고 연도의 시민, 학생들이 태극기와 손수건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일부 성당, 교회, 사찰에서도 타종이 있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7시 이후 시민들의 가세로 규모가 불어나 서울에서는 한때 서울역의 2만여명을 비롯, 동대문 영등포 일대 3만여명, 광주에서는 5만여명, 부산에서는 2만여명 등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했다. 6만여명을 동원해 저지에 나선 경찰은 이날 하루에만 2천9백60여명의 시위참가자를 연행했고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경찰이 버스로 강제 격리시켜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기도 했다./조선
[1970년] 두브체크, 공산당적 박탈
← 자유화의 기대에 부풀어오른 체코 프라하 시민과 두브체크 제1서기(1968년)
1970년 6월26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 공산당으로부터 당적을 박탈당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1968년 `프라하의 봄`도 역사속에 묻히고 말았다.
1968년 1월에 당 노선경쟁에서 보수파 당관료를 물리치고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는 곧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당의 권력독점을 비판하고 집회와 결사를 허용하는 등 체코 전역에 자유화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이 이를 `반혁명`으로 간주한 것은 예상했던 결과였다. "자유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이미 자유를 만끽해 본 체코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소련군을 위시한 20만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 국경을 넘었지만 국민들은 온 몸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세계는 냉담했고 침묵했다.
결국 `프라하의 봄`은 침략자 군화발에 짓밟혀 파국을 맞았고 소련에 연행된 두브체크는 자신의 행동이 반동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했다. 1969년 4월에 당 제1서기에서 해임되고 잠시 터키 대사로 전출됐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고향에서의 산림노동자였다./조선
[1962년] 1940~50년대 대표 가수 남인수씨 사망
←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많은 곡들로 서민들의 힘이 되어 주었던 남인수씨.
1940~5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최고 스타로 각광받았던 남인수(본명ㆍ강문수)씨가 1962년 6월26일 오후 3시 오랫동안 앓아왔던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가요계에 발을 디딘 후 ‘눈물의 해협’에서 ‘무너진 사랑탑’에 이르기까지 무려 1천여 곡 내외의 서정가요를 부른 ‘가요황제’였다. 한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미성이었다는 그는 민족의 수난과 격동기마다 서민들에게 삶의 고개를 넘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추억의 환기, 사랑과 청춘의 격정과 이별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졌다. 특히 그의 노래는 애절함이 두드러지는 곳, 감정의 기복이 교체되는 대목에서 묘미를 발휘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바로 그렇다.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와 짝이 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친 ‘애수의 소야곡’ 과 ‘가거라 38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명곡들이다. 그가 자신의 생명과 바꾸면서까지 녹음한 ‘무너진 사령탑’ 또한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라 크게 히트했다.
이렇듯 27년의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던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45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열여덟에 떠나온 고향 진주를 못 잊어했다고 한다. 현재 전북 김제 출신의 가수이자 그의 제자였던 신해성씨가 ‘남인수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1991년부터 매년 ‘남인수 가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조선
[1949년] 백범 김구 암살
← 1949년 6월 26일, 그의 거처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목숨을 잃은 백범 김구 선생
1949년 6월 26일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경교장 집무실에서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김구는 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으며, 8·15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암살될 당시 김구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에 반대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했다. 하지만 1948년 남북한이 각기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수립을 선포하면서 김구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암살되기 한 달 전까지도 김구는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이승만과의 합작을 거부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브리태니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30분, 서울 경교장(현재의 강북 삼성의료원)에 갑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쏜 총소리였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손에 권총을 쥔 채로 “선생은 내가 죽였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며 검거에 순순히 응했다. 범인이 확보되고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음도 밝혀져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사건은 지금까지도 배후설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을 감방에 가두기는커녕 의무실에 보호조치한 점, 임정계열인 헌병사령관을 이튿날 춘천지구로 전격 발령한 점 등이 의문이었다. 특무대로 넘겨진 안씨에게 김창룡이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담배 등을 제공한 사실은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6·25 발발과 함께 특사조치로 석방돼 육군 중령으로 복귀한 점 역시 배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 배후에 대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구구한 채 55년의 세월이 흘렀다./조선
[1948년] 소련의 육로 봉쇄로 베를린 공수 시작
1948년 오늘, 서베를린 지역에 대한 생필품 공수가 시작됐다.
소련이 이틀 전인 6월 24일부터 시작한 서베를린 봉쇄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였다.
서베를린은 소련이 관리하는 동독 영역 깊숙이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이 소련의 점령지를 제외한 독일 땅을 통합해 전후 유럽 경제 재건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반발해 서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베를린 봉쇄에 이어 7월 중순 소련이 동베를린 주둔 병력을 증강하고 이에 대해 미군 폭격기들이 파견되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맞는다.
이 사태는 이듬해 5월 초 소련이 봉쇄를 해제하면서 해결된다. /YTN
[1945년] 국제연합헌장 조인
← 레슬리 비플 미국 대표(가운데 앉은 이)가 1945년 유엔헌장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서 국제연합헌장이 조인되었다. 국제연합(UN)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와 안전의 유지, 국제우호관계의 증진,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문제에 관한 국제협력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기구이다. UN은 1920년에 설립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국제연맹을 계승하고 있다. UN에 대한 구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41년의 대서양헌장에서였다. 1944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 대표들이 워싱턴 D.C.의 덤바턴 오크스에서 '일반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을 발표한 이래 몇 가지 난제에 부딪혔지만, 1945년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모인 얄타 회담에서 이런 난제들이 해결되어 국제연합헌장이 탄생했다. 국제연합헌장에 조인한 국가는 당시 모두 51개국에 이르러, 헌장이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유럽국가들이 중심이 된 종전과 달리 세계 전지역의 대표성이 확보된 명실상부한 국제회의임을 입증했다. 국제연합헌장은 1945년 10월 24일 발효되었다./브리태니커
[1943년]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Landsteiner, Karl) 사망
← 란트슈타이너
1868. 6. 14 오스트리아 빈 ~ 1943. 6. 26 미국 뉴욕 뉴욕시티
1868년 6월 14일 빈에서 출생하였다. 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취리히·뷔르츠부르크·뮌헨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 1896년 빈대학교의 조교가 되었다. 다시 병리생태학을 전공하여 1911년 병리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22∼1939년 미국 록펠러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를 지냈다.
인간의 혈액에는, 적혈구의 원형질막에 붙어 있으며 항원으로 알려진 당분 함유물의 종류에 따라, 적어도 3가지의 주요혈액형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고(1901), 이를 A형, B형, O형이라고 불렀다. A항원과 B항원을 모두 갖고 있으며, AB 항체는 갖고 있지 않은 4번째 혈액형(AB형)은 다음해에 발견되었다. 그 뒤 M과 N식(1927) 혈액형, 그리고 리서스(Rh) 인자도 발견했는데(1940), Rh 인자란 그것이 발견된 원숭이종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Rh 인자는 산모와 태아의 혈액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산·유산 또는 신생아에게 위험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그의 연구는 친자확인소송이나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며 법의학 발달에도 큰 몫을 했다. 혈액형이 특정한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실은 인류유전학과 인류학 연구에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다. 빈 대학교(1909~19)와 뉴욕에 있는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로 재직했으며(1922~43), 면역학을 확립시키는 데 기여한 〈혈청반응의 특성 The Specificity of Serological Reactions〉(1936)을 저술했다.
1930년 혈액형에 관한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20년] 철학자·교육자. 안병욱(安秉煜) 출생
1920. 6. 26 평남 용강~.
194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85년 인하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사상계〉 주간, 1959~85년 숭실대학교 교수, 1975년 동 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 1982년 동 인문과학연구소장, 1983년 흥사단공의회장 등을 지냈다. 1985년 경기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1985~90년 숭실대학교 명예교수, 1987년 흥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인간교육을 위한 강연을 많이 해왔다. 1992년 현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 도산 아카데미 연구원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현대사상〉·〈파스칼 사상〉·〈사색인의 향연〉·〈너와 나의 만남〉 등이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 유일한상(2009.1.15)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914년] 미국의 만능 운동선수 제어라이어스[Zaharias, Babe Didrikson, 디드릭슨] 출생
본명은 Mildred Ella Zaharias. 결혼 전 성은 Didrikson.
1914. 6. 26 미국 텍사스 포트아서~1956. 9. 27 갤버스턴.
특히 육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농구와 육상경기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고, 나중에는 골프 선수로도 명성을 얻었다. 1930, 1931년에는 전미 여성농구대표 팀의 멤버였으며, 1930~32년에는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8종목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고, 1종목에서 공동우승했다. 그녀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의 80m 허들 경기와 투창경기에서 금메달을 땄고, 높이뛰기에서도 1위의 성적을 올렸으나 당시 비정통이었던 웨스턴 회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3번째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또한 야구·소프트볼·수영·피겨스케이팅·당구, 심지어는 미식축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1932년에 우연히 골프를 시작해 1934년부터 골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프로 레슬러인 조지 제어라이어스와 결혼했다. 프로 선수생활을 몇 년 하다가 아마추어로 복귀한 그녀는 1946년에 미국 여자 아마추어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했다. 다음 해에 그녀는 미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영국 여자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골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연속 17번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48년에 다시 프로로 복귀해서 1948, 1950년에 미국 여자 오픈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암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인 1954년에도 우승했다. 그녀는 1948~51년 여성 골프 선수 가운데 가장 돈을 많이 번 선수였다. 1955년에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이 인생 This Life I've Led〉이 출간되었다.
[1909년] 폴 에를리히(Ehrlich, Paul), 매독 치료약 개발
← 매독
독일의 세균학자 폴 에를리히가 매독의 병원체인 스피로헤타에 대한 치료약을 개발했다. 이 약은 근대의학에 화학요법을 접목시킨 최초의 성공사례였다. 치료약이 개발당시, 매독은 파리에서만 연 3천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이 병을 불치의 병으로 생각했다.
폴 에를리히는 매독에 감염된 토끼에 여러종류의 합성 유기화합물을 수차례 주사해 성공을 거두자 자신감을 갖고 사람에게도 실험했다. 1910년 이 ‘마법의 약’은 1만명의 매독환자를 치료했고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를리히는 이 약을 ‘살바르산(Salvarsan)’으로 명명했다.
엘리히는 명예와 많은 상을 수상했고 한 대중지는 그를 가리켜 ‘과학계의 왕자’라 했다. 살바르산은 1940년대 중반까지 매독의 초기치료에 이용되었지만 이후 페니실린이 주요 치료제가 되었다./조선
[1892년] 벅(Pearl Buck) 출생
1892년 6월 26일 태어남 / 1973년 3월 6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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