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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27
#.1 씬. 한강변.(밤)
강석의 차 안, 나란히 앉아있는 강석과 단아, 손에 캔커피 들고.
강석 : 해 뜨는 거 본 적 있습니까?
단아 : 네, 몇 번.
강석 : 언제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단아 : (생각하다가) 아마 수학여행 가서였던 거 같아요. 경주 토함산에서 봤어요.
붉은 해가 세상을 전부 덮을 것처럼 떠오르는데 가슴이 툭하고 내려앉을 만큼 놀랐어요.
그 순간, 산다는 건 참 경이로운 거구나, 그랬어요.
그땐 그랬는데, 오랫동안 잊고 살았네요. 산다는 게 경이로운 거란 거.
강석 : 나도 경주로 수학여행 가긴 했었는데.
단아 : 그때 못 봤어요? 해 떠오르는 거? 다들 새벽에 일출 보러 가잖아요?
강석 : 그 전날 밤에 여관 앞 공터에서 또 한판 붙었거든요. 같은 반 놈들하고.
우리 아버지가 선생님들한테 밥사러 내려오셨었어요.
3학년 때 학생회장 시키겠다는 원대한 야심을 품으시고.
단아 : 그래서 학생회장 됐어요?
강석 : 학생회장 선거 전날 또 쌈질해서 정학 먹을 뻔 했어요. 그 덕에 자퇴 했구요.
단아 : 대체 얼마나 싸우면서 산거예요?
강석 : (쓰게 웃으며) 맘만 먹었으면 주먹 쪽으로도 제대로 풀렸을 겁니다.
나 조폭들한테 스카우트 제의 받은 적도 있어요.
단아 : 집이 부자인 게 다행이었네요. 잘못 했으면 지금 조폭 두목하고 있을 뻔 했는데.
강석 : 그쪽 조폭 두목이 애인 삼고 싶을 만큼 섹시하지 않거든요.
단아 : 모르잖아요. 댄서의 순정 부르며 물음표 날렸으면.
강석 : (큰 소리로 웃는) 내가 사람 많이 버려놨군.
단아 : (미소 짓는데)
강석 : (그런 단아를 보고) 집이 부자라서 조폭이 안된 건 아닙니다.
단아 : (보는)
강석 : 넝마로 돈 모아 졸부 소리 들으면서 사시는 아버지한테
조폭 아들놈 뒀다는 말 듣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지.
단아 : .....
강석 : (앞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에 젖어) 그래서 미치게 답답한 적도 있어요.
아버지한테 부끄러운 아들놈이 되면 안 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없다는 답답함.
단아 :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싸운 건가요?
강석 : (보고,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패는 것보다 맞는 걸 즐겼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어떤 놈도 날 이렇게 두들겨 패지는 못할 거란 걸 알았거든요.
맞을 수 있을 때 실컷 맞아보자.
단아 : 왜.....
강석 : (보면)
단아 : (시선을 앞으로만 준 채) 왜 그렇게 자신한테 잔인해요?
강석 : 처음이군.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나더러 잔인한 놈이라고 하는데. 왜 자신한테 그렇게 잔인하냐.....
단아 : 나한테 그랬죠?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라구.
그쪽도 그래 봐요. 그럼 조금은 덜 답답해하면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강석 : (차에서 내리는)
단아 : .....
강석 : (강 쪽으로 조금 걸어가는)
단아 : (그런 강석을 깊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강석 : (강을 바라보면서)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이 멍청한 여자야.
(눈물이 고인 눈을 감는)
단아 : (강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2 씬. 한강변. (아침)
여명. 단아 강 앞에 서있고. 강석, 차 안에서 잠이 들어있는.
강석 : (눈을 뜨고 서있는 단아를 보고 내리는) 치사하게 뭡니까? 해 뜨는 거 혼자 보려고 한 겁니까?
단아 : 조금 더 있어야 뜰 거 같아서 좀 더 자게 뒀어요.
강석 : 나 몇 시쯤에 잠 든 겁니까?
단아 : 세 시 좀 넘어서요.
강석 : 그냥 그대로 샜어요?
단아 : 네.
강석 : 하여간 독한 건 알아줘야 해. 이상한 방법으로 자존심 긁는 데는 아주 도가 텄어요.
단아 : 해 뜨네요.
강석, 단아 강을 바라보는.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강석 : (단아의 손을 잡는)
단아 : (멈칫하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는)
강석 : 이 말도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하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뜨는 걸 본 날, 같이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한테 준 이런 기억들, 나한테는 내 인생에서는 아주 짧은 축제 같은 걸 겁니다.
단아 : (마음의 소리) 고마워요. 나한테도 내 인생에서도 당신이 준 이 기억들은 축제 같은 거였어요.
시간이 흐른 다음엔 슬픔이 되겠지만, 그래도 기억하게 될 거예요.
해를 바라보면 나란히 손을 잡고 서있는 두 사람.
#.3 씬. 해장국 집 정도의 장소.(아침)
강석, 단아 해장국을 먹고 있는.
강석 : (고개 숙이고 먹으면서) 아침에 이런 거 여자랑 단 둘이 먹고 그러려면
전날 다른 일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단아 : (보면)
강석 : 호텔 같은 데서 나와서 먹는다던지. 그래야 리얼하잖아요?
단아 : 알아요?
강석 : (보면)
단아 : 뭔가 무안한 느낌이면 꼭 엉뚱한 소리 한다는 거?
강석 : 나도 보통 사내놈이다 알려주려는 건데, 엉뚱한 소리로 모는 겁니까?
단아 : 강석씨,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나한테 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한테도 대하면 예쁜 사랑 하면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강석 : .....
단아 : 곧 우리가 같이 서있었던 무대를 내려가야 하는 사람으로,
잠시 강석씨의 연극 파트너였던 동지애로 말하는 거예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지금처럼 외롭게 살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강석 : 처음인 거 압니까? 내 이름 부른 거?
단아 : (고개 숙인 채) 알아요. 그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길에서 큰 소리로 강석씨, 사랑해요, 라고 외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이름은 한번쯤 불러보고 싶었어요.
강석 : (그런 단아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4 씬. 학교 교정.(아침)
강석, 차 와서 멈추고, 단아, 강석 차에서 내리는.
그 모습 멀리서 보고 있는 현규.
강석 : 피곤할 텐데 집으로 가지 않고 왜 학교는 와요?
단아 : 무안해서요. 식구들 얼굴 보는 게.
강석 : 남자랑 밤새고 들어왔다는 거, 아무도 모를 텐데, 참 별나십니다.
단아 : 제 발이 저린 거죠. 가세요. (돌아서서 걸어가는)
강석 : 과외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요.
#.5 씬. 남교수 사무실.(아침)
단아, 들어와 앉는데, 들어오는 현규.
현규 : 9시도 안된 시간에 어떻게 그 인간 차에서 내려요?
단아 :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책상 위에 올려놓는)
현규 : (그 책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이젠 학교로 데리러 오는 걸론 부족해서,
아침마다 태우러 가는 가는 거예요?
단아 : 다들 그렇게 연애 하는 거 아니니?
현규 : (굳어지는)
단아 : 가서 공부해, 도서관 가려고 일찍 나온 거 아냐?
현규 : 나 피 말려 죽이자고 작정한거죠?
단아 : 말했잖아? 네 생각할 여유 없다구.
현규 : 왜 솔직하지 못해요? 너 아니었으면, 그 인간하고 이렇게 되지 않았다구.
단아 : 너 아니었어도, 그 사람이었어야 할 거야.
현규 : 나 그렇게 머리 나쁜 놈 아니거든요. 나 아니었으면, 당신 상대하기도 싫은 그런 인간하고 엮이지 않았어.
그래, 어쩌면 그 인간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
나 때문에 당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래, 죽은 사람처럼 아무 짓도 안하고 사는 것보단 훨씬 나을지도 몰라.
단아 : 정말 언제까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거니? 난 너 남자로 안 봐. 봐지질 않아.
현규 : 그래서 말했잖아, 기다리겠다구. 난 당신이 벼락 맞은 것처럼 보던 그 순간부터 남자였어.
힘이 모자라서 당신을 못 안는 게 아니야. 당신이 여자로 나한테 안겨올 때를 기다리는 거지.
단아 : 그런 날은 없을 거야.
현규 : (단아 어깨 잡으며) 아무 것도 확신하지 마. 같은 사내로 그 인간한테서 느껴지는 게 있어.
그 인간, 여자한테 전부 걸 놈이 아니야. 하지만, 난 당신한테 전부 거는 놈이지.
그러니까 언제나 당신 뒤에 서있을 놈은 나인 거구. (어깨 놓아주고 돌아서서 나가는)
단아 : (답답한 심정으로 앉는)
#.6 씬. 강석의 집 거실.(아침)
강석, 들어오면, 영자, 기다리고 있는.
영자 : 어떻게 된 거야? 생전 외박이란 건 할 줄 모르던 애가?
강석 : 친구 놈들하고 술 좀 마시고, 아무데서나 엎어져 잤어요.
영자 : 네가 아무데서나 잘 수 있는 애야?
강석 : 저도 나이 먹나 봐요. 아무데서나 자 지더라구요.
천갑, 하품하면서 방에서 나오는.
천갑 : 출근 하냐?
영자 : 출근은, 지금 들어오는 길인데.
천갑 : 너 외박 했냐?
강석 : 네. 했어요. 저 옷 갈아입고 출근해야 해요. (올라가는)
영자 : (천갑 앞으로 오면서) 요즘 애가 좀 달라진 거 같아.
생전 안하던 외박을 다 하지 않나. 얼굴은 점점 핼쑥해지고.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천갑 : 빨리 밥 먹고 다시 붙자.
영자 : 또 고스톱 하자구?
천갑 : 승부는 봐야 할 거 아니냐.
#.7 씬. 강석의 집 2층 거실.(아침)
강석, 핸드폰 하면서 방에서 나오는.
강석 : 네, 알았습니다, 내려가죠. (전화 끊고, 혜주 방 노크 하는)
혜주 : (문 여는)
강석 : 내려가자, 차 가져왔단다.
혜주 : 벌써?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강석 : (웃으면서) 오빠 성격 급하잖냐?
#.8 씬. 강석의 집 앞.(아침)
남자 혜주의 차 옆에 서있고,
강석, 남자가 내민 서류에 사인하고. 남자에게서 차키 받는.
강석 : 수고하셨습니다.
남자 : 네. 그럼. (인사하고 돌아서서 내려가고)
강석 : (혜주에게 차키 주는)
혜주 : 고마워, 오빠.
강석 : 오빠가 운전 연수 시켜줘야 하는데, 요즘 좀 바쁘다.
그 자식, 운전 좀 하는 거 같던데, 연수 좀 시켜달라고 해. (어깨 툭 치고 자기 차로 가서 올라타는)
#.9 씬. 회사 전경.(낮)
#.10 씬. 회사 복도.(낮)
석호, 영인 걸어오는.
영인 : (윽하고 입 틀어막는)
석호 : 왜 점심 먹은 거 안 좋아?
영인 : 며칠 잠잠 하더니 또 이러네. 안되겠다, 바람이라도 쐬야지.
석호 : 같이 나갈래? 나 은행장 만나러 가야하는데.
영인 : 안돼,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부서 회의 있어. 옥상에 올라가서 잠깐 찬바람 좀 마시고 내려올래.
#.11 씬. 회사 옥상.(낮)
수영, 진아, 커피 마시며 서있는.
수영 : 아직 목도리 다 못 떴어요?
진아 : 다시 풀었어요.
수영 : 올 겨울 안에 받을 수나 있는 거예요?
진아 : 내년 겨울도 장담 못하겠는데요.
수영 : 목도리 하나 받기 너무 힘들다.
진아 : 차라리 산에 가서 토끼 한 마리 잡는 게 어떨까 궁리 중이예요.
수영 : 참 터프한 궁리도 하네요. (마주 보며 웃는데. 뒤에 서있는 영인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굳어지는)
진아 : (영인을 발견하고, 어쩔 줄 모르는 느낌으로) 그럼 실장님, 커피 드시고 내려가세요.
(인사하고 얼른 영인의 곁을 스쳐서 지나가는)
수영 : .....
영인 : (다가오는)
수영 : 여긴 어떻게?
영인 : 속이 거북해서 바람 좀 쐬러 올라왔어요.
수영 : 네. 그럼 전 내려가 보겠습니다.
영인 : 하실장?
수영 : 네.
영인 : 저번에도 저 아가씨랑 같이 있는 거 본 적 있는데....
수영 : .....
영인 : 저 아가씨 화장실로 울며 뛰어 들어오는 것도 본 적 있구.
수영 : .....
영인 : 아들 앞에서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나 그 방면으론 감이 좀 빠른 사람이에요.
난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좀 묘한 게 있다는 느낌인데?
수영 : .....
영인 : 잘못 본 건가요?
수영 : .....
영인 : 모른 척 해줘요?
수영 : 죄송합니다. 나이 든 놈이 어린 아가씨와 그런 모습 보여드려서.
영인 : 그게 죄송한 일은 아니죠.
수영 : 회사에서 행동에 주의 하겠습니다. (돌아서려는데)
영인 : 행동에 주의해야 할 일이 있긴 있는 거예요?
수영 : 모른 척 해주십쇼. (걸어가는)
영인 : (그런 수영을 보고 있는)
#.12 씬. 회사 복도.(낮)
수영, 걸어오면, 진아, 청소를 하고 있다가.
진아 : 안 좋은 말씀 들으셨죠? 어머님이시잖아요?
수영 :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안 좋은 소리 들은 거 없으니까 일 해요. (걸어가는)
진아 : (불안한 느낌으로 보는)
#.13 씬. 회사 태영 사무실.(낮)
태영, 일하고 있는데, 울리는 핸드폰.
태영 : (번호 보고 받는) 왜?
말순E : 오늘은 몇 시에 일수 받으러 올 거냐구?
#.14 씬. 경찰서 앞.(낮)
말순 : (핸드폰) 매일 일수 받으러 오겠다면서?
태영E : 매일 일수 받으러 다니는 거 귀찮아서 안 되겠다. 그냥 처음 정한대로 월수로 하자.
말순 : 왜? 일수보다 밥값, 술값이 더 나가는 거 억울해서 그래?
태영E : 그래, 억울하기도 하고.
말순 : 그래도 오늘은 와. 나 월급 탔단 말이야, 15만원 갚을 테니까 받으러 와.
#.15 씬. 회사 태영 사무실.(낮)
태영 : (핸드폰) 그것도 나중에 받을게.
말순E : 왜 그래? 정말? 주겠다는데 왜 빼고 난리야? 오늘은 내가 이자 대신 짜장면 사줄 테니까 와.
태영 : 나중에 하자니까.
말순E : 난 죽어도 오늘 주겠다니까. 퇴근하고 무조건 와.
#.16 씬. 강석의 비서실.(낮)
천갑, 걸어오면, 진호 일어나서 인사하는.
천갑 : 안에 있나?
진호 : 회의 들어가셨습니다.
#.17 씬. 강석의 사무실.(낮)
천갑, 차를 마시고 있고, 그 옆에 서있는 진호.
천갑 : 진호야?
진호 : 네, 회장님?
천갑 : 이실장, 주주들하고 접촉하고 있는 건 어떻게 되가는 거 같으냐?
진호 : 실장님께 직접 물어보시죠.
천갑 : 물어도 접촉 중이라고만 하고 말을 안 해줘서 답답해서 그런다.
진척은 좀 있는 거냐? 문제가 있으면 내가 알아야 같이 해결을 할 거 아니냐?
진호 : 제가 알기론, 이미 확보한 주식이 꽤 되는 걸로 압니다.
강석, 들어오는.
강석 : 오셨어요?
천갑 : (진호에게) 나가봐라.
진호 : (인사하고 나가는)
강석 : (천갑 앞에 와서 앉는) 오늘도 승부 보시느라 바쁘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천갑 : 전상길이 만나고 오는 길이다. 다 넘겨받기로 했다.
강석 : .....
천갑 : 그리고 너 왜 말 안했어? 이미 확보한 주식이 꽤 된다면서? 어느 정도까지 확보한 거냐?
강석 : 아직 안정수는 못 되요.
천갑 : 전상길이한테 넘겨받을 것까지 치면 하회장하고 하사장이 가진 것보단 많을 텐데?
강석 : 윤삼월이라는 주주가 가진 지분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천갑 : 그 가정부 할머니 말이냐?
강석 : 네.
천갑 : 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거야?
강석 : 4.8프로예요.
천갑 : 아니, 뭐가 그렇게 많아?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이군.
가정부 할머니한테 그만한 지분을 넘겼다는 게 말이 되냐?
네 엄마 말대로 하회장하고 그 할머니 내연의 관계 같은 거 아닐까?
강석 : 그건 아닐 거예요.
천갑 : 그럼 어떡한다. 그래, 내가 만나보는 게 낫겠다.
젊은 네가 만나는 것보단 내가 만나서 잘 구슬러 보는 게.
강석 : 그 할머니 지분은 안 될 거예요.
천갑 : 돈으로 밀어붙이는데 안 되긴 왜 안돼.
강석 : 평생 그 집안에서 일한 공으로 그 큰 지분을 넘긴 거 같은데. 그걸 돈 좀 더 준다고 내놓겠어요?
그 할머니는 포기하세요.
천갑 : 임마, 이러다 말 새면 저 인간들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 텐데.
강석 :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버지.
천갑 : (일어서며) 시간 끌지마. 이런 일일수록 시간 질질 끌어봐야 득 될 거 하나도 없다. (나가는)
강석 : (답답한 심정으로 서있는)
#.18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주정 앉아있는.
주정 : 주세요, 오빠, 땅 문서.
만기 : 주정아?
주정 : 제 거잖아요. 오빠가 못 파시겠으면 제가 처리하겠다니까요.
만기 : 왜 그러는지 이유나 좀 알자꾸나.
주정 : 제가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
만기 : 그러니까 대체 어디다 쓸 거냐구?
주정 : 그냥 좀 주세요, 오빠.
삼월E : 회장님? (문 열고) 평촌 어르신 댁에서 전화 왔는데, 갑자기 더 나빠지셔서 입원 하셨다네요.
만기 : 그래요. (일어서며) 가 봐야겠구만.
주정 : 오빠?
만기 :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19 씬. 마루.(낮)
만기, 나가는데, 주정, 삼월, 서있는.
주정 : 오빠.
만기 : (나가는)
삼월 : (주정을 잡으며) 왜 그래?
주정 : 할멈은 알 거 없어.
삼월 : 돈이 정 급하면....
주정 : (보면)
삼월 : 내 주식 좀 팔아 써. 절대 그 땅엔 손대지 말구.
주정 : 내가 왜 할멈 거에 손을 대?
삼월 : 가지고 있어봐야 내가 쓸데나 있는 사람이야.
맡겨주신 회장님 마음이 고마워서 가지고는 있지만, 필요하면 팔아서 써.
주정 : 됐어. (나가는)
#.20 씬. 방송국 사무실.(낮)
주정, 핸드폰 중. 옆에 자료 보면서 앉아있는 병도.
주정 : 살 사람이 있나 좀 알아봐주세요. 부탁드려요. (끊는데)
병도 : 선배, 땅도 있어?
주정 : (핸드폰 울리는) 응? 오늘? 내가 나갈게 기다려, 경섭씨. (핸드폰 끊으면서 일어서는)
병도 : 오늘 봐야 할 자료 많잖아?
주정 : (무시하고 나가는)
#.21 씬. 커피숍.(낮)
경섭, 주정 앉아있는.
경섭 : 너 다시 보고 가면 힘들 거 같아서 그냥 떠나려고 했는데....
주정 : 급하게 가봐야 하는 일 있는 거야?
경섭 : 그런 건 아니지만, 더 있어봐야 너만 불편하게 할 거 같고.
주정 : 기다려.
경섭 : (보면)
주정 : 조금만 기다려 보라구.
경섭 : 왜 그래? 주정아?
주정 : 나 때문에 인생 망친 사람이잖아, 경섭씨. 그래도 경섭씨 보다는 내가 형편이 나을 텐데,
힘들게 사는 거 뻔히 알면서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경섭 :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정 : 그냥 좀 기다려 달라구. 알았지?
#.22 씬. 학교 교정. (낮)
강석, 차 옆에 서있으면, 걸어오는 단아.
강석 : 눈 좀 붙였어요?
단아 : 네, 사무실에서 조금 잤어요. 그러는 그쪽은요?
강석 : 회의하고 사람들도 좀 만나느라 눈 붙일 시간이 없었어요.
단아 : 그런데 뭐하러 데리러 와요?
강석 : 그쪽이나 이쪽이나 피곤하긴 마찬가진데 사내놈이 더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강석, 차 문 열어주면, 단아 올라타고, 강석 운전석에 오르고.
단아 : 저 독한 거 알잖아요? 전철 타고 가면 됐을 텐데.
강석 : 전철 타고 가다 졸아서 종착역까지 가면요?
단아 : 그렇게 무디진 않아요.
강석 : 정말요?
단아 : (보면)
강석 : 정말 무디지 않냐구요?
단아 : .....
강석 : 이봐. 이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무디지 않기는..... (차 출발 시키는)
#.23 씬. 강석의 집 앞.(낮)
강석, 차를 세우면, 단아 잠이 들어있다.
강석 : (물끄러미 잠든 단아를 바라보다가 이마의 머리를 올려주려고 손을 뻗는데)
단아 : (몸을 약간 움직이면서 눈을 뜨는)
강석 : (손을 내리고)
단아 : 다 왔는지도 모르고 잔 거 보니 무디긴 무디네요.
강석 : 그렇다고 했잖아요, 그쪽. (차에서 내리는, 단아도 내리고) 우리 오늘도 땡땡이칠래요?
단아 : 습관 되서 안돼요. 이젠 더 해볼 것도 없는 거 같은데.
강석 : 다 해본 거 같습니까?
단아 : (보면)
강석 :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할 수 있는 거 다해본 거 같냐구요?
단아 : 또 엉뚱한 소리 하고 싶은 거예요?
강석 : 빈정 상해서요. 난 아무 것도 제대로 해본 거 같지 않은데,
해볼 거 다 해봤다고 하니까 속이 확 뒤집어지네요. (앞서 걸어가는)
단아 : (따라 걸어가고)
#.24 씬. 길.(낮)
현규, 친구들 걸어오는.
성민 : 친구, 원룸으로 이사 가면 우리 아지트 생기는 거네.
강하 : 학교에서 하교수님 동네까진 너무 멀지 않겠나?
성민 : 지구 끝이라도 이 분께서 멀다고 하시겠나.
현규 : 피씨방 간다며?
성민 : (시계 보면서) 앗, 공성전 시간이다. 우린 그럼 전쟁 치르러 가네, 친구. (친구들 뛰어가면)
현규 : (걸어가는데, 길가에 천천히 차를 세우는 혜주를 보고)
혜주 : (한숨을 쉬면서 차에서 내리는)
현규 : 차 뽑았어요?
혜주 : 네.
현규 : (무심하게) 차 이쁘네요. 그런데 땀을 왜 그렇게 흘려요? 히터 너무 튼 거 아니에요?
혜주 : 식은땀이 나서요. 운전이 서툴러서.
현규 : 집에서 오는 거예요?
혜주 : 네.
현규 : 집이 어딘데요?
혜주 : 성북동이요.
현규 : 얼마나 걸렸어요?
혜주 : 다섯 시간이요.
현규 : (기가 막히고) 서울에서 부산 갈 시간이네요.
운전도 아직 서툰데 집 근처에서나 타고 다니지 왜 알바하는 데까지 몰고 왔어요?
혜주 : 그냥요.
현규 : 괜히 사고 내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요. (걸어가는)
혜주 : (따라 걷고)
#.25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영자, 단아 공부하고 있는.
단아 : 전통 혼례에서 기러기가 갖는 나머지 의미는 상하의 질서를 지키라는 뜻이 있어요.
앞에 가는 기러기가 울면 뒤따라가는 기러기도 화답을 하거든요.
그걸 예를 갖추는 걸로 해석하는 거구요.
강석, 2층에서 내려오는.
강석 : (식당을 향해) 아주머니, 저 물 좀 주세요.
아줌마E : 네.
단아 : 또 다른 하나는 기러기는 왔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이 있는데
전통 혼례에선 그걸 본받아 아름다운 삶을 살라고 해석하는 거죠.
그 사이 강석, 아줌마가 건네주는 물마시며 다가오는.
영자 : 저기요, 하교수님?
단아 : 네?
영자 : 혼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그 댁에 오빠분들 말이에요.
단아 : .....
영자 : 아버님 혼인 하시던 날 보니까 올케 분들이 안 계신 거 같던데?
그런 중요한 날, 며느님들이 빠져도 되는 거예요?
단아 : (난감하고) .....
영자 : 증조 할아버님 장례식 때는 며느님들이 다 계셨다면서요?
왜요?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단아 : 두 분 다 얼마 전에 이혼을 하셨어요.
강석 : (단아를 보고)
영자 : (입 벌어지고) 아니, 그런 명문 종가에서 이혼이 무슨 일이래?
강석 : 공부 끝날 시간 지났는데요.
영자 : 어머,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강석 : 가시죠. 저도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단아 : 네. (일어서는)
#.26 씬. 천갑의 방.(낮)
천갑, 자고 있는.
영자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영자 : 여보, 여보?
천갑 : (놀라서 일어나며) 왜 불났냐?
영자 : 불 얘긴 왜 해? 내가 질색 팔색 하는 거 알면서?
천갑 : 그런데 왜 호들갑이야?
영자 : 하교수집 말이야. 오빠들이 얼마 전에 다 이혼을 했대.
천갑 : 뭐?
영자 : 명색만 명문 종가지, 자식들 팔자가 하나 같이 기구한 거 같지?
천갑 : 이혼 했대?
영자 : 그렇다니까. 막내딸은 생과부에다가, 오빠들은 이혼남. 무슨 자식들 팔자가 그래.
#.27 씬. 강석의 집 앞.(낮)
걸어 내려오는 강석과 단아.
강석 : 그런 말을 왜 곧이곧대로 해요?
단아 : (보면)
강석 : 대충 둘러대지?
단아 : 어른께 거짓말 할 수는 없잖아요.
강석 : 평생 거짓말 안 해봤어요?
단아 : 그렇지는 않겠죠. 근데 되도록이면 하지 말고 살자 그래요.
강석 : 난 내 말 한마디도 믿지 말라고 하는 놈이고, 그 쪽은 되도록이면 거짓말 하지 말고 살자는 주의고,
정식으로 만났으면 골 좀 때렸겠네요.
단아 : 정식으로 만나는 사람한테는 그런 말 안할 거잖아요? 내 말 한마디도 믿지 말라는 말.
강석 : 그런데 그거 압니까?
단아 : (보면)
강석 : 내 말 한마디도 믿지 말라는 말, 믿어버린 거?
단아 : .....
강석 : 그건 처음부터 내 말을 믿고 시작했다는 뜻인 거죠.
단아 : .....
#.28 씬. 회사 화장실.(낮)
영인, 손을 씻고 있는데, 진아, 청소 하러 들어오는.
진아 : (화장실 안에서 청소하다가 나오면서 인사하고 얼른 나가려고 하는데)
영인 : 저기요.
진아 : 네?
영인 : 이름이?
진아 : 오진아예요.
영인 : 오진아씨? 시간 좀 있어요?
진아 : .....
#.29 씬. 영인의 사무실.(낮)
영인, 진아, 앉아서 찻잔 앞에 놓고.
영인 : 마셔요.
진아 : 네, 고맙습니다. (찻잔을 집어 드는데)
영인 : 내가 하수영 실장, 새 어머닌 거 알아요?
진아 : (찻잔 내려놓으면서) 네, 같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한테 들었어요.
영인 : 새어머니라곤 하지만, 아들은 아들인 거잖아요.
아들이 어떤 아가씨와 좀 특별한 관계인 거처럼 보이는데.
그냥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시간 좀 내달라고 했어요.
진아 : 아, 아니에요. 저랑 하실장님 특별한 관계 같은 거 아니에요.
영인 : .....
진아 : 그냥 하실장님께서 워낙 좋으신 분이라, 청소하는 사람들까지 잘 챙겨주셔서.
영인 : 저번에, 화장실에 울며 들어온 적 있죠?
진아 : (당황해서 보는)
영인 : 그땐, 무심하게 봤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보니까
회사에서 울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올 일이 뭐가 있을까 싶네요.
진아 : 그, 그건.....
영인 : 내가 두 사람 사이 방해 할까봐 그래요?
진아 :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영인 : 난 그냥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싶은 거 뿐인데, 너무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더 이상한 생각이 드네요.
정말 아니라서 아니라고 하는 건지, 아니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
하실장이 오진아씨보다는 나이도 많고, 두 사람이 회사 내에서 가까이 지내는 거 보면
사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정확히 알고 싶은 건데, 나는.
진아 : 저, 그만 둘게요, 그럴게요. 그러니까 하실장님 오해하고 그러지 말아주세요.
영인 : 오진아씨?
진아 : 네.
영인 :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하실장이 오해 받는 게 싫어서 그만두겠다는 건가요? 지금?
진아 : (울먹이면서) 죄송합니다. 나가볼게요. (얼른 일어나서 급하게 나가는)
영인 : .....
#.30 씬. 동네 길.(밤)
태영, 말순 서있는.
태영 : (손 내밀고) 빨리 주라. 15만원.
말순 : (빤히 보면서) 그냥 돈만 받아 갈 거야?
태영 : 아니면?
말순 : 오늘은 내가 짜장면 사준다고 했잖아, 이자 대신으로.
태영 : 됐다. 먹은 걸로 칠 테니까.
말순 : 왜 그래? 정말? 나한테 뭐 삐친 거 있어?
태영 : 그런 게 어디 있냐? 돈 좀 꿔주고 매일 일수 받으러 다니는 게 쪼잔한 거 같아서
그만하려고 하는 거 뿐이야.
말순 : 삐친 거 아니면 가. 짜장면 사줄 테니까.
#.31 씬. 중국집 룸.(밤)
태영, 말순 짜장면 앞에 놓고 앉아있는.
태영 : 먹은 걸로 친다니까 너도 참 어지간히 말 안 듣는다.
말순 : 짜장면 불어, 어서 먹어.
태영 : 어쨌든 사준다니 잘 먹을게.
시간 경과,
짜장면 다 먹고 입 닦는데.
말순 : (입 닦으면서 무심한 척) 아들 귀엽드라.
태영 : (순간 멈칫하고) 고맙다.
말순 : 너 많이 닮았드라.
태영 : 그 말 우리 아들놈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 자식 인생 목표는 아마 아빠처럼 살지 말자 일 걸.
어제도 봤잖냐? 아빠 바람 펴? 하는 거?
말순 : 어떻게 애한테까지 들키고 사냐?
태영 : 내가 말했잖냐? 발정난 개처럼 살았다구.
요즘 애들 7살이면 사춘기고, 알 거 모를 거 다 눈치로 때려잡는다는데
한 집에 살면서 지 아빠가 어떤 물건인지 모르겠냐.
말순 : 왜, 엄마가 안 키워?
태영 : .....
말순 :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태영 : .....
말순 : 엄마하곤 자주 만나?
태영 : 여기요.
종업원, 문 열면.
종업원 : 네.
태영 : 여기 빼갈 한 병 주세요.
#.32 씬. 수영의 사무실.(밤)
수영, 일어서며, 핸드폰 누르는.
진아E : 네.
수영 : 집이예요?
진아E : 네.
수영 : 나 지금 퇴근 하는 길인데, 붕어빵 먹을래요?
진아E : 아니요. 그냥 집에 들어가세요, 끊을게요. (전화 끊기고)
수영 : .....
#.33 씬. 석호의 방.(밤)
영인, 헤어밴드하고 얼굴에 로션 바르고 있는.
석호, 수건으로 얼굴 닦으며 들어온다.
영인 : 여보, 이리 와.
석호 : 왜?
영인 : 화장품 발라줄게.
석호 : 됐어. 화장품은 무슨.
영인 : 겨울이라 너무 건조하단 말야. 이제 곧 아빠 될 텐데 우리 애한테 할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당신?
석호 : 음, 그럴 수야 없지. 자~ (얼굴 들이대는)
영인 : (화장품 발라주며) 이게 해양심층수로 만든 건데 미네랄이 풍부해서 피부에 좋대.
어때, 끈적이지 않고 촉촉하지?
석호 : 그래. 우리 사랑하는 여보가 발라주니까 순식간에 회춘한 거 같다.
영인 : (볼 탁탁 두들겨 주며) 아유, 이쁘다. 우리 신랑.
석호 : (볼 두드려 주며) 아유, 이쁘다. 우리 각시.
영인 : (웃다가) 근데 있잖아.
석호 : 응.
영인 : 하실장하고 하과장, 왜 이혼 한 거야?
석호 : 성격 차인 거 같다고 했잖아.
영인 : 좀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왜 나한테는 말하기 싫은 거야? 아들들 흉이라서?
석호 : 그게 아니고, 태영인 이유가 분명한데 수영인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영인 : 석연치 않은 구석이라니?
석호 : 헤어진 아이랑 둘 다 워낙 조용한 애들이라서 무슨 큰 문제가 있었던 거 같진 않은데,
결국 그렇게 헤어진 거 보면 우리가 모르는 지들만의 문제가 있었던 거 같아.
그 녀석, 날 너무 많이 닮은 놈이거든. 내가 애들 엄마랑 늘 서먹하고 어려웠던 것처럼
수영이도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은 하는데, 부부 사이의 일을 부모라고 속속들이 알 수 있겠어.
영인 : 그럼? 하과장 분명한 이혼 이유는 뭐야?
석호 : .....
영인 : 말하기 싫은 거야?
석호 : 그 녀석, 간통을 했어.
영인 : (놀라면서) 간통?
#.34 씬. 중국집 룸.(밤)
태영, 말순 앉아있는.
태영 : (술을 따라 마시면서) 그 자식, 애 엄마가 낳은 놈이 아니야.
말순 : (굳어져서 보는)
태영 : 나란 놈, 참 여자들한테 못할 짓 많이 하면서 살았지.
말순 : ....
태영 : 군대 가서 부대 앞 싸롱 여자애랑 잠깐 연애를 했어.
군대 생활이라는 게 무료하기도 했고, 워낙 껄떡대며 산 전력도 있어서,
그냥 군대 있는 동안 심심풀이 삼아 만나보자 그랬는데, 어느 날 임신을 했다고 그러드라.
말순 : .....
태영 : 나 그 여자한테 참 못되게 굴었다. 내 앤지 어떻게 아냐고 쌍소리까지 하고.
정말 개지랄이란 개지랄은 다 떨었다.
사람 같지 않았는지, 넌 정말 나쁜 놈이야, 그러고 가버리드라. 싸롱도 관두고 그냥 없어졌어.
어디 가서 애 지우고 잘 살겠거니 했는데, 몇 달 지난 뒤에 갑자기 연락이 왔드라. 병원이라구.
병원으로 달려가 봤더니, 애를 낳는 중이더라구. 근데.....
말순 : .....
태영 : 애 낳고 과다 출혈로.....
말순 : (마음이 아프고)
태영 : 죽어가면서, 그 여자 그러드라. 네 애 맞아, 이 나쁜 놈아. 나 그렇게 산 놈이다. (술을 쭉 마시는)
#.35 씬. 길.(밤)
술에 취해 걸어오는 태영, 말순 나란히 걸어오는.
태영 : 나 간다.
말순 : 내일 일수 언제 받으러 올 거야?
태영 : 귀찮아서 안한다니까. 월수 받는 것도 귀찮으니까, 돈 모아지면 한꺼번에 갚아라. 그때 연락해.
말순 : 나 일수 찍을 거야.
태영 : (보면) 귀찮다니까.
말순 : 나한테도 나쁜 놈 되고 싶어?
태영 : (멍하니 보는)
말순 : 천 원이든 백 원이든 매일 갚을게. 그러니까 귀찮다고 하지 마.
태영 :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이 멍청아.
말순 : 그거 모를 정도로 나 멍청하지 않아, 이 멍청아.
태영 : (시선 피하며) 나 너 신경 쓰여.
말순 : .....
태영 : 신경 쓰여서 쪽 팔린 게 너무 많아. 쪽 팔려 하는 내가 더 쪽 팔리구.
말순 : 우리....친구 그만하자, 하태영.
태영 : (보면)
말순 : 나 너랑 친구 못할 거 같아.
태영 : .....
말순 : 뭐하고 싶냐고 왜 안 물어? 친구 말고 뭐 하고 싶은 거냐구?
태영 : 말하지마, 너. 말했잖아, 나 나쁜 놈이라구. 나, 간다. 들어가라. (돌아서서 걸어가는)
말순 : (울먹한 심정으로 태영의 등을 향해 외치는) 왜 안 물어보고 그냥 가? 이 나쁜 놈아?
뭐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라니까.
태영 :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걸어가는)
#.36 씬. 길.(밤)
강석, 운전하고, 그 옆에 앉아있는 단아.
단아 : (핸드폰 울리고 받는) 네, 교수님? 학교 사무실 컴퓨터에 있는데, 네, 네.
아니에요. 교수님 나오시지 마세요. 저 지금 있는 데가 학교에서 가까우니까
제가 가서 메일 보낼게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 끊는)
강석 : 학교로 다시 가야 하는 겁니까?
단아 : 네. 학장님이 중국에 세미나 가셨는데, 자료 빠뜨리신 게 있대요. 가서 메일 보내야 해요.
강석 : 교수님이 나와서 찾아 보내겠다고 하시는 거 같은데 그러라고 하고 집에 가서 쉬지 그랬어요?
잠도 못자고 또 학교로 가는 거 너무 강행군 아닌가?
단아 : 강행군 하는 거 좋아해요. 잠이 잘 오잖아요.
강석 : (보면)
단아 : .....
강석 : 몸을 혹사해야 잠이 올만큼 불면증 있어요?
단아 : .....
강석 :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자요?
단아 : 잘만큼은 자요.
강석 : 내가 끌고 다니는 동안 잠은 잘 왔겠어요?
단아 : 네.
강석 : 근데 난 왜 요즘 난데없이 불면증이 생긴 거지. 끌고 다니느라 나도 고단했는데.
단아 : 이 연극 끝나고 나면 없어지겠죠, 불면증.
강석 : 알긴 압니까? 이 연극 때문에 불면증 생긴 거?
단아 : .....
#.37 씬. 남교수 사무실.(밤)
단아,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고 있고,
강석,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커피를 타서 단아 앞에 놓아주는.
강석 : 이젠 자판기 커피 뽑아다주는 걸로도 부족해서 손수 타다 바치네.
단아 : 고마워요.
강석 : 당연히 고마워야죠. 내가 타준 커피 얻어 마시는 여잔, 댁이 첨인데.
단아 : (커피 마시면서 마우스로 자료 찾는)
강석 : 정말 고마우면 일 끝내고 뽀뽀나 합시다.
단아 : (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 던지는)
강석 : 지금 쌩 까십니까?
단아 : 그 정도로 고맙지는 않아서요.
강석 : 삼 세 번이라는데 한번 하죠.
남녀가 이 야심한 시각에 둘만 있는 공간에서 그런 것도 안하면 서운하잖아요?
단아 : 많이 심심하시면 잠깐 눈 좀 붙이세요. 자료 정리해서 보내려면 시간 좀 걸릴 거예요.
강석 : 나 자는 모습 맘에 드나 봐요? 자꾸 재우려는 거 보니.
단아 : 조용히 일 좀 하고 싶어서 재우려는 거거든요.
강석 : 입 닥치고 잠이나 쳐 자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 끼며) 이강석, 언제부터 이렇게 밸 없는 인간이 됐는지.
여자한테 이런 대접 받고서도 분한 줄도 몰라요. (눈을 감는)
단아 : (그런 강석을 슬쩍 보고 미소 짓고 다시 모니터 보는)
#.38 씬. 상가 내.(밤)
현규가 일하는 커피숍이 있는 상가 내.
현규, 혜주 걸어오는.
현규 : 차 몰고 집에 가려면 또 다섯 시간 걸리겠네요?
혜주 : 집에 들어갈 거예요?
현규 : 왜요? 데려다 주려구요?
혜주 : 오래 걸리겠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면 그럴게요.
현규 : 됐어요. 하루라도 술 없이 못사는 폐인 모드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맨정신으론 집에 못 들어가요.
난 생맥주 한잔 하고 들어갈 테니까 가요.
혜주 : 같이....가면 안돼요?
현규 : 술도 못 마시잖아요?
혜주 : 또 길에서 잠들면 안 되잖아요?
현규 : .....
혜주 : 술 깰 때까지 제 차에서 자다가 깨면.....
현규 : 나 때문에 차 산 거예요? 술 먹고 길에서 잠들까봐, 차에서 재우려구?
혜주 : 꼭 그런 건 아니구.
현규 : 정말 왜 그래요? 환상을 깨고 싶어서 알바도 같이 하는 거라면서,
왜 나같은 놈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요? 그래서 환상이 깨지겠냐구요.
하는데, 윗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마네킹을 옮기는 여자1,2 여자 마네킹과 어린 여자 아이 마네킹을 옮기면서, 시끌벅적하다.
여자1 : 조심해. 떨어뜨리겠다.
하는데, 여자2, 여자 아이 마네킹을 놓치고.
여자 아이 마네킹이 떨어져 내리는. 마치 어린 아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현규 :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다가 떨어져 내리는 마네킹을 피해 옆으로 비켜서는데)
깜짝 놀랐네, 진짜 아인 줄 알구....
하는데, 혜주 정신을 잃고 푹 쓰러지는.
현규 : (놀라서 쓰러진 혜주를 잡으며) 이봐요, 이봐요.
#.39 씬. 남교수 사무실.(밤)
강석, 눈 감고 의자에 앉아있고,
단아, 컴퓨터를 끄고 가방 챙겨서 일어서는.
단아 : (강석 앞으로 다가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강석 : .....
단아 : (부르려다가 좀 더 재우고 싶어서 가만히 서있는데)
강석 : (눈 감은 채) 정말 마음에 드나 봐요? 나 자는 얼굴?
단아 : 일 다 끝났어요.
강석 : (눈 뜨고) 이건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괜찮네요.
애인이 두드리는 자판 소리 들으면서 잠이 들 듯 말 듯 하는 느낌도.
(일어서면서) 가죠. (하는데 울리는 핸드폰) 어, 혜주야?
#.40 씬. 응급실.(밤)
강석, 단아,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현규, 잠들어 있는 혜주 옆에 서있는.
강석 : 왜 또 이런 거냐?
현규 : 호흡 곤란은 아니랍니다. 의식만 잃고 있는 거래요.
단아 : 어쩌다 이런 거야?
#.41 씬. 병실.(밤)
혜주, 의식 없이 누워있고. 강석, 단아, 현규 서있는.
현규 : 어린 여자 아이한테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 같아요.
강석, 단아, 현규를 보는.
현규 : 어린 여자 아이 마네킹이 떨어지는 거 보고 쓰러진 것도 그렇지만.
두 번 이상한 걸 본 적이 있거든요.
강석 : ....
단아 : ....
현규 : 한번은 상가에서 여자 아이가 놀다가 유리창을 깬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주저앉아선 정신이 나간 것처럼 꼼짝도 못했어요.
또 한번은 우리 가게에 온 아이가 응석을 부리면서 심하게 운 적이 있는데 그때도 넋이 나가드라구요.
강석 : ......(혜주의 손을 잡는) 이 자식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42 씬. 병원 복도.(밤)
현규, 단아 서있는.
단아 :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현규 : 왜 이 시간에 그 인간하고 같이 있었어요?
단아 : ....
현규 : 금방 달려온 거 보니, 학교에 있었던 거 같은데, 이 시간까지 왜 학교에 같이 있었냐구요?
단아 : 지금 그런 게 묻고 싶니?
현규 : 나란 놈 한 여자한테 미쳐있는 놈이잖아요.
혜주 쟤가 쓰러져서 놀란 것보다, 오빠만 올 줄 알았는데
같이 달려온 당신 때문에 더 열 받는 놈이라구요, 난.
단아 : 지금은 혜주만 생각하자. (병실로 걸어가는데)
현규 : 내 머리 속엔 쟤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구요.
단아 : (병실로 들어가면)
현규 : (주먹으로 벽을 치는)
#.43 씬. 병실.(밤)
혜주, 여전히 의식 없고, 그 옆에 서있는 강석.
단아, 들어오는.
강석 : 갔습니까? 그 아이?
단아 : 안 갈 거예요.
강석 : (혜주를 보면서) 이 녀석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여기 있어서겠지.
어쩌면 우리 연극 두 아이한테는 아무 도움이 못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만 혼란에 빠졌지.
단아 : .....
강석 : 그 아이 데리고 가요. 저번처럼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같이 있어줄 거 없어요.
단아 : 있을게요.
강석 : (보면)
단아 : 아직은 우리 연인이잖아요?
강석 : .....
#.44 씬. 병원 복도.(밤)
서있는 현규, 병실에서 나와 걸어오는 강석.
강석 : 고맙다. 너한테는 혜주 저 녀석 때문에 자꾸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는구나.
현규 :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건, 그쪽 동생 때문이 아니라, 저 안에 있는 여자 때문입니다.
강석 : 안다.
현규 : 4년 동안 계속 할 자신 있습니까?
강석 : .....
현규 : 왜 대답을 못합니까?
강석 : (쓸쓸한 표정으로, 현규의 한쪽 어깨를 잡고) 싸움은 말이다. 질긴 쪽이 이기게 돼 있는 법이다.
(현규의 어깨를 놓고 걸어가는)
현규 : 무슨 뜻입니까? 쇼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강석 : (걸어가는)
#.45 씬. 병원 화장실.(밤)
강석,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
강석 : 그만하자, 이강석. 그냥 네 천성대로 살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봐야, 끝은 이미 정해져있는 거잖냐?
#.46 씬. 병실.(밤)
혜주, 의식 없이 누워있고, 강석, 단아, 의사 서있는.
의사 : 어린 여자 아이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 같군요.
가족 중에 어린 시절에 사고를 당한 여자 아이가 있나요?
강석 : 없습니다.
의사 : 지난번에 입원했을 때 심리 검사 결과론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는 뭔가가 반복적으로 의식을 잃게 하는 거 같은데.
강석 :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치료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의사 : 내일 최면 치료를 받아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석 : (보면)
의사 : 무의식 속에 있는 공포의 단초를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난데.
#.47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영자, 전화 중. 천갑, 연속극 보고 있는.
영자 : 강릉? 어제도 외박 했으면서 피곤하지도 않니? 알았어, 조심해서들 다녀와.
(전화 끊고) 강석이 혜주 데리고 강릉 갔다 온다네.
천갑 : 웬 강릉?
영자 : 웬일이래? 연속극 보면서 말을 다 알아듣고?
천갑 : 저거 네 번 본 거야.
영자 : 혜주 운전 연습도 시킬 겸 강릉 갔다 온대.
천갑 : 참, 강석이 그 놈도 바쁘다, 바뻐. 일하랴 오빠 노릇하랴.
영자 : 그것만 해? 딴 짓하는 아버지 바람막이도 하지.
#.48 씬. 마루.(밤)
조만, 전화 중.
조만 : 너 어제도 못 들어오고, 힘들어서 어쩌니? 잠은 자가면서 일해.
#.49 씬. 태영의 방.(밤)
동동이 잠들어 있고, 태영 동동 이불 여며주면.
삼월, 자리끼 놓아주면서.
삼월 : 오랜만에 아들 데리고 자네.
태영 : 할아버지 안 계신 덕에 아들 끼고 자겠네요.
삼월 : 평촌 어르신이 얼른 쾌차하셔야 할 텐데, 회장님 병원에서 많이 힘드실 텐데.
조만, 문 앞에 서서.
조만 : 할머니? 단아 오늘도 못 들어온대요.
삼월 : 아니, 오늘도 또. 무슨 일을 이틀이나 날을 새가면서 하누.
조만, 돌아서서 가고.
태영 : (동동이 머리 쓰다듬으면서) 단아 걔 다른 사람 일까지 도맡아서 할 거예요.
사는 낙이 없으니, 일에 공부에 빠져 사는 거 아니겠어요.
삼월 : 그거 알어? 하과장?
태영 : 할머니는. 제가 히히거리고 사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놈 같으세요?
삼월 : 자. (일어나 나가면)
태영 : (동동 어루만지면서) 아빠도 그럴 거다. 딴 생각 아무 것도 안하고 너만 보면서 살 거야.
#.50 씬. 병원 전경.(아침)
#.51 씬. 병실.(아침)
혜주, 앉아있고, 강석 서있는.
혜주 : 싫어, 오빠, 안할래, 그냥 집에 갈래.
강석 : 혜주야. 네가 왜 이러는지 원인은 알아야 할 거 아냐?
혜주 : 싫다니까.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오빠.
#.52 씬. 병원 복도.(아침)
단아, 현규 서있는.
단아 : 도와줘. 혜주 네 말은 듣잖니?
현규 : (답답한 심정으로 보는)
#.53 씬. 병실.(아침)
혜주, 강석 실랑이 하고 있는.
혜주 : 싫다구, 싫어.
강석 : 혜주야.
현규, 단아 들어오는.
혜주 : (현규를 보는)
현규 : (다가서는) 치료 받아요. 계속 이렇게 픽픽 쓰러지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나, 어제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계속 나 놀래키고 싶어요?
#.54 씬. 치료실.(낮)
소파가 놓여져 있고, 안락한 느낌으로 꾸며져 있는 실내. 한쪽 벽이 유리로 되어 있는.
혜주, 소파에 누워있고, 그 옆에 앉아있는 여의사.
#.55 씬. 치료실 앞.(낮)
강석, 단아, 현규, 서있고,
간호사 : 가족분만 들어가세요.
강석 : 다 가족입니다.
현규 : (그런 강석을 보는)
#.56 씬.l 치료실 안.(낮)
유리 이쪽 방, 유리를 통해서 혜주가 있는 방이 보이는.
강석, 단아, 현규 서있는.
의사 : 네, 아주 잘했어요. 그럼 우리 조금 더 전으로 가볼까요? 가장 무서웠던 기억이 있는 그때로.
혜주 : (최면 상태로, 얼굴을 찡그리는)
의사 : 무서워 할 거 없어요,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고,
언제든지 깨어나고 싶으면 깨어날 수 있으니까 안심해요.
자, 지금 몇 살이죠?
혜주 : .....다섯 살이요.
의사 : 다섯 살이군요. 뭐가 보이는지 말해줄래요?
혜주 : 우리 집이요.
의사 : 혜주는 지금 뭘 하고 있죠?
혜주 : 오빠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오빠가 학교에서 올 시간이에요.
강석 : .....
의사 : 오빠가 왔나요?
혜주 : 아니요. (두려움에 떠는 표정으로)
의사 : 뭐가 보이죠?
혜주 : 어른이 있어요, 여자 어른이.... (울먹이면서) 아이를 안고 있어요. 나만한 여자 아이를.....
강석 : .....
혜주 : (감정에 복받쳐서) 막 소리쳐요. 내 새끼...내 새끼 살려내라구.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아. 내 새끼 살려내라구.
강석 : (눈을 감는)
단아 : ....
현규 : ....
혜주 : (울면서) 팔이....아이의 팔이.....툭 떨어져요. (공포에 떨면서) 아이가....아이가....죽었나 봐요.
강석 : (괴로운 심정으로 눈을 뜨고 혜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57 씬. 혜주의 방.(밤)
혜주, 침대에 누워있는, 강석 그 옆에 앉아있는.
강석 : (다독이며) 약 먹었으니까 그냥 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푹 자.
혜주 : .....
#.58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술을 마시고 있는. 영자, 울고 있는,
강석 괴로운 심정으로 앉아있고.
천갑 : 그, 그 일을 저 놈이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지?
강석 : 아니요, 기억을 하고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예요.
너무 두려워서 기억조차 안하려고 무의식 속에 밀어 넣고 있었던 게 더 큰 문제였던 거예요.
영자 : 말해줘야 해, 여보. 웬수를 웬수로 갚은 거 뿐이라고.
천갑 : 가만 있어라.
영자 : 그 일 때문에 혜주 저게 반편이가 됐다는 거잖아.
강석 : 어머니.
천갑 : 너 기억 나냐?
강석 : 제가 집에 없을 때 일어난 일이잖아요.
천갑 : 그게 아니라, 네 형 말이다.
강석 : .....(아픈 기억이라 차마 말을 못하는)
천갑 : 너보다 다섯 살 위였다. 네가 네 살 때 죽은 네 형, 기억 나냐?
강석 : 네.
천갑 : 참 똑똑하고 잘 생긴 놈이었는데.
영자 : (입을 틀어막으며 우는)
천갑 : 네 엄마랑 허리끈 졸라매고 악착 같이 돈을 벌어서 처음으로 고물상 같은 고물상을 시작했었다.
커다란 창고에, 정말 세상 부러울 거 없드라. 잘난 아들놈들에, 내 가게에. 살만 했지.
그런데 나 잘되는 꼴을 하늘이 시기를 했는지 어쩐지 그 잘되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홀랑 타버렸다.
그때 네 형이 온몸에 화상을 입었구.
강석 : .....
영자 : (더 복받쳐 울고)
천갑 : 화상 치료라는 게 돈이 참 억수로 들어가는 거드라.
그래서 시장에서 일수놀이를 하는 그 인간을 찾아가 애원을 했다. 내 아들 좀 살려 달라구.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테니까,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내가 무릎까지 꿇고 애원을 했다.
헌데, 담보가 없어서 안 되겠다고 하드라. 내 자식 목숨이 걸려있는데, 담보가 없어서 안 되겠대.
결국 네 형 돈이 없어서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야했다.
네 형 보내면서 내가 이를 악물었어. 이 웬수는 죽어도 내가 갚는다.
그리고 작정하고 그 인간 알거지로 만드는데, 내가 가진 머리 다 썼다.
업보는 업보로 되갚는 건지, 하필이면 그 인간 막내딸이 불치병에 걸렸던 거다.
그날, 혜주 저 놈이 기억한다는 그날, 지 놈 망하게 해서 지 딸이 그렇게 죽었다고,
죽은 아이를 안고 와서 우리 집 앞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울부짖더라.
영자 : 도대체 왜? 혜주 저게 왜, 그 날을 기억하는 거냔 말이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구. 웬수를 웬수로 갚은 거 뿐인데. 내 자식이 왜 그걸 끌어안고 사냐구?
천갑 : 혜주 저게 그일 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해도, 나 그 인간한테 그런거 절대 후회 안한다.
나도 내 자식을 그렇게 보낸 인간이야.
세상 사람들 다 돈 귀신이라고 나한테 돌 던지라고 해. 나 그렇게 살아온 거 절대 후회 안하니까.
강석 : ......
#.59 씬. 길.(밤)
운전하는 강석. 분노와 고통이 뒤섞인 표정으로. 요란한 브레이크 음을 내면서 멈춰서는.
강석 : (핸들을 손으로 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는)
#.60 씬. 술집.(밤)
강석, 술을 마시면서 괴로워하는.
#.61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책상 앞에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치료실에서 혜주를 보며 괴로워하던 강석의 얼굴이 떠오르고.
울리는 핸드폰.
단아 : (이강석이란 이름 확인하고 받는) 네.
강석 : 집 앞입니다.
#.62 씬. 종가 앞.(밤)
단아, 나오면, 벽에 기대 서있는 강석.
단아 : (강석 앞으로 다가서는) 술 마셨어요?
강석 : .....
단아 :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는데)
강석 : (단아를 끌어안는)
단아 : .....
강석 : 나 좀....말려봐. 뭘 하려는 건지 모르지만, 하지 말라고 해. 제발 하지 말라구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