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사
한천사는 신라시대인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구전되는 내용이나 혹은 1875년(고종 12)에 기록된 「한대사연화기(寒大寺緣化記)」에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지을 때 기둥이 자꾸 넘어져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 소백산맥 남쪽 주마산의 지세가 달리는 말의 머리 형국인지라,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주마산에 한천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 여래좌상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조성하였고, 삼층석탑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유물 자료를 통하여 번성했던 역사의 일단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1803년(순조 3) 근천(謹天) 스님이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이것은 1803년에 작성된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寒大寺法堂新創上樑文)」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서 1808년 불량계(佛糧契)의 도움을 받아서 선당(禪堂)을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한대사연화기」를 남겼다. 그런데 「한대사법당신창상량문」이나 「한대사연화기」 등에는 모두 '한대사'로 나오고 있어 한때 '한대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천사 입구
한천사 요사
한천사 요사
한천사 삼층석탑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5호
전체 높이는 360㎝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으며, 이중기단에는 위·아래층에 우주(隅柱) 및 탱주(泂柱)를 새겼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고, 각 옥신석에는 양쪽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양각하였다. 옥개받침은 4단이나 옥개석의 추녀는 반전되었고 네 우주 전각의 반전도 강하여 탑신이 가볍고 경쾌하다. 탑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고, 옥개석 추녀 끝이 약간 들려 있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을 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대략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천사 경내
한천사 대적광전
한천사 철조 약사여래좌상
보물 제667호
높이 147㎝인 이 불상은 어깨가 벌어지고 허리가 길며 체구가 장대한데 비해 머리 부분은 작은 편이다. 처음 철불(鐵佛)임을 발견할 당시에는 전신에 백포(白布)로 도장(塗裝)되어 있었고 훼손된 채로 전하여 왔다고 한다. 그 뒤 1979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는 나지막하다. 얼굴은 원만하고 큼직하며 반달형의 긴 눈과 눈썹, 코와 꽉 다문 입 등은 작지만 자비롭고 근엄한 표정이 엿보인다. 이마에는 큼직한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고 두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팽창되었으나 군살이 붙지 않은 형상이다.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고 당당한 어깨를 지녔다. 불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옷주름은 굵은 선으로 왼손을 거쳐서 밑으로 내려와 결가부좌한 다리에 이르러 반타원형을 이루어 생동감을 주고 있는데 유려한 편이다. 풍만한 가슴의 일부는 손상되었으나 배를 약간 내밀고 있어 다소 형식적인 표현이 보인다. 두 손은 보수한 것이다. 오른손은 어깨 부근에서 들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이고, 왼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약합(藥盒)을 든 약사여래로 표현되어 있다.
한천사 약사전
한천사 약사전내 약사여래불
한천사 전경
한천사 삼성각 오르는 길
한천사 삼성각
한천사 삼성각내
한천사 전경
한천사 찾아가는 길
예천 I.C에서 예천읍으로 들어가기 전 직진하면 삼거리를 만난다. 이 삼거리에서 예천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우회전해서 문경 방면의 2차선 도로를 따라 가다가 「한천사」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면 감천지(甘泉池)란 저수지를 지난다. 저수지를 지나 500m쯤 가면 주마산 기슭에 절이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