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국인은 고립적 자아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의 자리매김과 사귐에 익숙하다. 협업이 필수적인 농경생활이 그 토양이었다면,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고 “길동무 셋이면 그 중에 내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는 <논어>의 말처럼 벗과의 교유를 통한 인격의 성숙을 강조한 유학은 그 토양에 뿌려진 자양이었다. 선인들이 그러한 취지에서 참여한 갖가지 사회적 모임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다름 아닌 ‘계’이다. 계란 구성원들이 상호부조, 친목 혹은 공동의 경제적 이익 등의 일정한 목적 아래 규약을 만들어 참여한 모임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계 혹은 계회는 비록 부르는 이름이나 형식과 내용에서 예전의 그것과 다소간 변화가 생겼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의 사회적 사귐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부모를 둔 형제자매간 정기적으로 모여 우애를 다지고 언젠가 있을 집안의 큰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평소에 일정한 돈을 공동으로 분담해 적립해 가는 것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회사에 함께 들어간 입사 동기들 간 친목을 위한 모임이나, 같은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 끼리 정기적으로 모여 모교발전을 위한 기금을 출연하는 등, 이러한 사례는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이다. 외국에도 이러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한국인처럼 이른바 1차적 관계에서 2차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혈연, 지역, 학교, 회사, 동호회 등 다양한 연고를 매개로 촘촘한 중첩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는 드물 것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인의 다양한 방식의 관계맺음은 전통문화에 깊이 자리 잡은 계회 문화와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동지역의 우향계(友鄕稧)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모임, 계 조선시대의 다양한 계는 그 목적 및 기능에 따라 일정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농촌공동체의 공동영농을 위한 모임으로 농계(農契)·제언계(堤堰契)․우계(牛契)․농구(農具契) 등이 있고, 지역 공동체의 공공행사 추진 및 공동비용의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으로 동계(洞契)·동제계․이갑계(里甲契) 등이 있었다. 또한 혼인과 장례 그리고 자녀 교육 등 경제적 부담이 큰 행사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상호부조 목적의 모임으로 혼상계(婚喪契)·혼구계(婚具契)․학계(學契) 등이 있었다. 지금도 농어촌과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상포계는 혼상계의 일종이다. 다음으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모임으로, 공동 씨족간에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종중계(宗中契)·종약계(宗約契)·문중계(門中契)․화수계 등이 있고, 동갑이나 같은 고향의 벗 등이 교유하며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한 모임으로 시계(詩契)·문우계(文友契)·동갑계·유산계(遊山契)등이 있다. 그 외에도 영리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사설금융의 기능을 수행한 모임에 식리계(殖利契)·금계(金契)·삼계(蔘契) 등이 있었다. 흔히 우리가 계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 전통의 다양한 계 가운데서도 이러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유형의 계이다. 이러한 사설금융의 전통은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한국의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취약한 사회안전망과 공적 금융체제가 미비한 틈새를 메우며 긍정적인 기여도 했지만, 빈발하는 계의 파탄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이렇듯 다양한 유형의 계는 계속 이어져 1920년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까지 3-400년 지속된 계모임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그에 따른 농촌공동체의 해체는 모듬살이의 아름다운 뜻을 담아 면면히 이어온 수많은 계모임의 단절을 초래 하고 만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계모임의 기록, 계안·계축·계첩·계회도 조선시대 각종의 계회는 계안(契案)으로 불리는 기록으로 남겨졌다. 특히, 사대부들의 공사의 친목 계회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두루마리 형태의 계축이나 책자 형태의 계첩으로 전하고 있다. 앞서 말한 언급한 문우계(文友契)·동갑계·유산계(遊山契) 등이 사적인 영역의 대표적인 친목계였다면, 지금도 ‘총마계회도’, ‘미원계회도’, ‘독서당계회도’ 등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계회는 사헌부, 사간원, 독서당 등 같은 시기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관리들 친목 모임의 흔적들이다. 계회결성 당일의 기록은 흔히 두루마리 형태의 계축으로 남겨지는데, 계회의 명칭을 맨 위에 적고 가운데에 계회광경을 그린 기록화를 배치했으며, 그 아래에 참가자의 직책과 본관 그리고 성명을 적은 명단을 적은 좌목(座目)을 배치하는 삼단 구성이 일반적이다. 간혹 기록화 아래에 행사의 전말에 관한 시문을 추가로 실은 것도 있다. 사족들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할 경우 기존 세력그룹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통과 의례로 흔히 계회를 활용했고, 기존 세력그룹 역시 향촌내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어가기 위한 유력한 방안으로 계회를 선호했다. 따라서 앞서 중앙 관청의 계회와 달리 향촌의 인사들이 친목을 위해 결성한 계회는 계원들 당대에 계속 이어져가는 것은 물론 후손들이 계원의 지위를 승계하면서 이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안동의 우향계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처럼 계회가 이어질 경우 관련 내용을 책자형태의 묶어 지속적으로 보관 관리할 필요에 의해 첩 형식의 계안인 계첩(契帖)이 선호되었다. 계첩은 계회의 목적과 유래 그리고 경과를 적은 취지문인 서(序), 해당 계원들이 지켜야 할 규약을 적은 절목(節目)과 참여자 명단인 좌목(座目)을 기본적인 형식으로 하고 계회 참여자의 시문이나 계회의 재정과 관련된 사항을 적기도 했다. 500여년 이어온 계모임, 우향계 민간소장 기록문화재가 주를 이루는 국학진흥원이 소장자료 중에는 계회의 기록이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향계안(友鄕稧案)>이다. 우향계에서 기탁한 이 자료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유형문화재 제327로호 지정되어 있는데, 1478년(성종 9년)에 시작되어 1903년(광무 7년)까지 400여 년 동안 이어진 우향계의 전승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계모임의 시작은 이증李增 등 안동의 5개 성씨 선비 13명의 모임이었다. 충절의 인물이 많고 뛰어난 산수의 고향에서 벗들이 모여 자연 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서로 도의로써 인격도야를 격려하고 풍속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우향(友鄕)’이란 이름은 “한 고장의 선한 선비라야 그 고장의 선한 선비와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는 <맹자>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 이들은 이날의 계모임을 기리기 위해 계축(契軸) 13부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삼단으로 된 계축의 맨 위에는 우향계축(友鄕契軸)이란 제명을 적었고 그 아래에는, 중간에는 당시 문호로서 명성이 높았던 서거정이 지은 칠언의 축시가 자필 초서로 쓰여 있으며, 그 아래에는 계원 13인의 인적사항이 열거되어 있다. <우향계안> 중 참여자의 명단인 좌목과 서거정의 축시 부분 계축 원본은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 권벌 집안에 전해오고 있는데, <우항계안>은 그 계축의 내용을 첫머리에 옮겨 적은 후 이어 140면에 걸쳐 역대 계모임 관련 계안(契案)과 관련 시문, 참석자 명단 등의 기록을 싣고 있어 420여년에 걸친 우향계의 확대전승 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우향계원들이 세상을 떠난 후 외손을 포함한 후손 15인이 1513년(중종 8년)경 안동 영호루에서 진솔회(眞率會)를 결성해 우향계를 이었다. 그 2백년 후인 1702년(숙종 28년)에는 63인의 후손들이 세호계(世好稧)로 이름을 바꾸어 모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화난상구(禍難相救) 등의 일을 한결같이 여씨향약에 따른다”는 등 총 9개 조항의 규약(節目)을 갖추었다. 계는 1865년(고종 2년)에 다시 수호계(修好稧)로 이름을 바꾼 이래, 거의 1, 2년마다 5개 계회참여 문중의 재실이나 고운사 등 인근의 사찰을 돌아가며 열렸다. 특히 최초의 우향계 모임으로부터 7주갑이 된 1898년(광무 2년)의 계회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에서 1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적고 있다. <우향계안>의 기록은 1903년 광흥사에 모여 문서를 닦은(修稧)사실과 참가자 69인의 명단을 적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향계안> 중 1898년 능동재사에서 열린 우향계 7주갑 모임에 관한 기록 500년을 더 이어갈 우향계 <우향계안>의 기록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우향계안>의 ‘증보본’은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근대 이후 후손들이 우향계라는 당초의 이름을 회복하고 지금까지 계속 모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계회에서는 옛 법도대로 전작(奠爵: 돌아가신 분에게 술을 올리는 禮)과 독약(讀約: 향약 조항의 낭독)을 행한다. 다만 전작 대상이 공자 등 중국의 성현에서 13인의 우향계 창립 선조들로 바뀐 것이 다를 뿐이다. 우향계원들은 선조들이 모이던 영호루에서 멀지않은 안동댐 인근에 계회를 위한 공간인 우향각을 지어 매년 그곳에서 그들 선조들이 남긴 도의를 통한 사귐을 통해 고향의 풍속을 선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잇고 또 다른 5백년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도 안동댐 부근 우향각에서 열리는 우향계회 이 <우향계안>을 보고 있노라면 ‘유구한 문화’라는 말이 비로소 마음에 닿는다. 또한 게회라는 세련된 문화형식을 통해 생물학적 유한성을 넘어서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낸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할 뿐이다.
면면히 이어져 온 계회의 문화적 전통을 물려받은 우리도 이름은 다르지만 실은 한두 가지의 계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계회에서 모임의 회칙이나 회계기록과 같은 건조한 내용만 적을 것이 아니라 <우향계안>의 예를 따라 능력 닿는 대로 한편의 시 혹은 모임의 감회를 글로 짓고 남기며 잘 꾸려갔으면 좋지 않을까.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시작한 이 계회가 우리의 아들 그리고 손자로 이어져 앞으로의 500년을 이어가고, 그리하여 먼 훗날 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될지.
- 박경환, 한국국학진흥원(영남권역센터 책임연구원)
[우향계 관련 영남권역센터 자료]
- 1478년에 작성된 우향계축(友鄕稧軸)
- 이굉(李浤)이 만든 진솔회(眞率會)의 좌목
- 1702년 중수우향계회문(重脩友鄕稧回文)
- 1703년 세호계안(世好稧案)
- 1865년 수호계회문(修好稧回文)
- 우향계를 칭송하는 시첩(詩帖), 수호계록서(修好稧錄敍),경차서상공운(敬次徐相公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