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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2주)
낮은 자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렘2:4~13; 히13:1~8, 15~16; 눅14:1, 7~11
지난 한 주간도 몹시 더웠지요. 처서도 지났고 내일이면 9월로 들어가는데,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예년의 여름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무래도 한두 주는 더 견뎌야 할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 잘 추스르면서 잘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공동기도문에서 함께 기도한 대로, 언뜻언뜻 계절이 바뀌는 조짐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제 본 파란 하늘은, 뜨거운 무더위가 무색하게, 가을빛이 얼핏 생각날 정도로 푸르고 높았습니다. 호수공원의 벚나무들도 벌써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더운데도 햇볕을 피해 그늘 아래 서면 바람이 달라졌습니다. 분명 계절이 곧 바뀔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보았던 말씀 가운데, “땅과 하늘의 변화는 알아볼 줄 알면서, 어떻게 해서 너희는 지금 이때가 어떤 때인지는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지금 이때가 어떤 때인가?” 아마도 이 질문은 우리가 허덕허덕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갈 때는 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끔 선물처럼 다가오는 “영혼의 시간”이 있습니다. 숨 가쁘던 삶에 너무 지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아니면, 피상적인 삶 한복판에서도 언뜻언뜻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 “지금 이때가 어떤 때인가?” 다시금 묻게 됩니다.
사실, 분명하게 이런 질문으로 올라오지 않을 수도 있지요. 공허함 혹은 탈진으로 올 수도 있고, 뭔지 모를 뒤숭숭함, 꼭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지루함, 산만함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내 영혼의 소리를 잘 듣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현명한 태도입니다. 토마스 무어가 <영혼의 돌봄>에서 삶의 표면적인 욕구들보다 영혼에 주목하라고 했던 말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효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방치되고 있다면,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징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징후들을 잘 알아차리는 것, 이것은 내적 삶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늘 말씀을 준비해야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 또 영성서적을 달고 살고, 영적 묵상을 해야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피상적인 삶이나 영혼의 목마름이 없을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큰 씨름이 제 안에 있습니다. 메마르고, 갈증이 있고, 어둡습니다. 나의 삶이 피상적이고 표피적이라는 느낌이 종종 몰려옵니다. 어떨 땐,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좋은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런 징후들은 영혼을 만들어가고 세워가는 좋은 원자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혼의 돌봄”, “영혼의 시간”을 너무 무겁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때가 어떤 때인가?”가 항상 무거운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 무거움을 떨쳐내는 것이 영혼을 돌보는 일 가운데 하나이고 “지금 이때”를 분별하는 일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요즘 호수공원을 산책을 할 때,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기들에게 자주 인사하고 말을 걸어봅니다. 또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에게도 다가가서 인사합니다. 처음엔 우리 다안이가 생각나서 다가갔는데, 이렇게 아기들에게 잠깐이라도 말을 걸고 인사하게 되면, 내 마음이 달라지더라구요. 환해지고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 안의 영혼을 깨우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아기들, 참으로 경이롭지요.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 말까지 건네면, 마음이 마술처럼 달라집니다.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아기의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순간적으로 초월하는 경험을 합니다. 초월이 별것이 아니지요.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 나의 환경, 나의 의식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비록 일시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경험도 자주하면 조금 더 내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거우면 넘어서지 못합니다. 가벼워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에서 보이는 매우 뚜렷한 특징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초월”을 향해 눈을 뜨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 Achsenzeit)라고 명명했지요.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인류가 정신적 발전에서 위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던 시기입니다. 인류가 불을 다루는 기술을 발견한 다음으로 인류에게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하지요.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내면의 불”을 발견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놀랍게도 세계의 여러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폭력적인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던 세계,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였던 세계에, 갑자기 인간의 내면의 등불을 밝히는 위대한 영적, 철학적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사상적 영적 수원지로 삼는 모든 것들이 이 시대에 등장했지요. 사상적, 영적 수원지란 한 마디로, 인간 내면으로 돌아가기, 인간의 본디 선한 본성을 깨닫기,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연민을 향해 나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이성이 시작되었고,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 맹자의 유교ㆍ도교 사상이 나왔으며,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신비가들과 붓다가 나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에서 주전 8세기 이후 예언자들의 등장은 고대 중동의 축의 시대를 알리고 있습니다. 아모스를 필두로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입니다. (구약의 저자로 이름을 올린 이는 모두 15명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기만과 부정과 거짓을 폭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돌이키라고 외쳤습니다. 이 “돌이키라”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하는데, 예언자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슈브(돌아서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을 “슈브의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의 슈브는 겉으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돌이킴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실제 내용은 “내면의 돌이킴”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란 피상적인 것, 허망한 것, 실제로 도움이 못되는 것, 과도한 형식주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 이사야의 글을 볼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지요.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기 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이것은 내면적인 돌이킴이 없는 외형적 종교 행위에 신물이 난 하나님의 신음소리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그 내면에 켜진 등불을 발견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 거센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참된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사람답게”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황금율, 연민, 사랑, 환대가 인류의 가슴 속에 숨어 있던 본성임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렘2:13) 이 말씀은 몇 주 전에 본 요하네스 타울러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수가 솟아나야 할 내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이 메말라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에서 아무 것도 샘솟지 않고, 모든 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저수통, 들어온 대로 다시 빠지는 물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샘물을 길고 있습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의 생명의 동력은 무엇이며, 우리의 행복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진정 우리의 생수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지는 않았습니까? 외부에서 들어온 저수통, 들어온 대로 다시 빠지는 저수통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의 모든 힘의 원천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돈이고 인정이고 세상적 영향력이라면, 우리는 들어온 대로 다시 빠지는 저수통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돈이 필요 없고, 인정이 필요 없고, 세상의 영향력이 쓸데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주 요긴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증명하거나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엔가 쫓기는 듯 가쁜 숨만 몰아쉬지 말고, 숨을 돌리고,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진정 우리의 “나”(I AM)가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똑똑히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예레미야가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았다고 탄식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내면으로 겸손히 돌아가는 것이 나라가 망하는가 아닌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고, 아니, 나라가 망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각자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진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 “절망”이라는 진실이어도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레미야의 예언, “너희가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리고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으로 샘을 삼았다”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대로 유효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뭘 하시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의 더 직접적인 의미는 엿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때 예수님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초청받은 사람들의 태도, 모습, 행동거지였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율법교사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결혼잔치 풍습에, 결혼잔치에 초대되어 가면, 남자손님들은 각자의 자리에 비스듬히 앉게 되는데, 중앙의 자리에 부와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앉는 명예스러운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와 권력과 지위에 따라 앉는 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때도 식사초대를 받은 이들이 서로 높은 자리(중앙의 자리)에 앉으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 그야말로 집단 역동을 벌어지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간파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은 비유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선뜻 높은 자리(중앙의 자리)에 앉았다가 변두리로 쫓겨나는 망신을 당하지 말아라. 오히려 맨 끝 자리(변두리의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사람이 너를 높은 자리로 올릴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잠언에 자주 나오는 교만하지 말라는 금언이나 권고 같습니다. 가령 잠언 같은 데 보면 이런 권고가 많이 나오지요.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너의 눈 앞에 있는 높은 관리들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잠언 25:6~7)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가 구태여 이것을 “비유”라고 말하면서, “혼인잔치”를 언급한 것은 이 말씀이 단지 교만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권고를 넘어 우리에게 어떤 다른 핵심을 전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어떤 모습 혹은 본질을 전해주시려는 것이지요. “혼인잔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 많이 사용되던 소재였지요. 여기서 하나님 나라(하늘나라)는, 여러 가지 의미를 띠겠지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과의 일치(온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이 비유는 실제로 어떤 잔치나 모임에 가서 괜히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끝자리로 내려앉는 창피를 당하지 말아라, 너희가 짐짓 맨 끝 자리에 앉아 있으면(곧 닥칠 역전이나 보상을 바라면서, 이 위선을 한번 잘 보십시오) 누군가가 너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할 것이라는 처세술을 말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이다,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온전성을 전해주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본다면, 초대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람들이 초대되어 간 곳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혼인잔치입니다. 결혼 잔치는 종말론적인 기쁨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 잔치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은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은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자주 등장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전복, 역전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생수의 근원을 제대로 발견하고, 비록 조금씩 스미어 나오는 샘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삶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지요. 반대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사람은 물이 전혀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스스로 파고 그것을 자신의 샘으로 삼은 사람이겠지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든 저수통의 크기만이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늘 끊임없이 자신의 저수통을 남들 것과 비교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잔치를 열고 초대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식사자리를 마련한다면, 네 친구나 형제들이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아라. 그러면 그들도 너를 초대할 것이고, 그러면서 너희는 서로 공덕을 주고받아 아무 것도 남은 것은 없게 된다. 오히려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초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네가 베푼 대접은 네 중심에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비로운 초대가 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나라가 아니며, 잘난 사람, 부자들이 자신들의 성공과 기쁨에 서로 취하는 가진 자만의 잔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 못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약한 사람이 초대되는 자리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열릴까요? 우리의 온전함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후광을 입고 보란 듯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잘난 것들, 우리의 자랑거리들, 우리의 성취,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가장 연약함, 장애들, 결핍, 가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이 주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비유나 뒤의 이야기가 모두 한 가지로 수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이 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난과 약함을 초대하여 함께 해야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겸손(humilitas)이란, 우리가 흙(humus)에서 온 존재임을, 우리가 낮은 땅에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낮은 땅에서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어두운 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 깊이 사랑하고 계심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 자신이 흙에서 온 육체라는 것, 자신의 인간성,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일, 초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을 그대로 숨겨두고 억압한 채, 밖에서는 그것을 가리고 포장하기 위해 거짓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와 어둠, 부끄러움, 자신의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그대로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왠지 인간의 결점과 실패에 끌리는데, 그곳이 우리의 가장 가난하고 궁핍한 자리이기 때문이다.”(마틴 레어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치는, 바로 자신의 가난함과 부족함과 약함을 편안하게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깊이 사랑하신다는, 참된 겸손에 이른 사람을 위해 준비된 잔치입니다. 그런 겸손의 사람은 자기비난이나 부끄러움, 분노, 낙심으로 휩싸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확신을 갖는 것, 이 두 가지가 자신 안에서 균형 있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입니다.
이제 무더웠던 여름도 끝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과 투명한 햇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여름 내내 지니고 왔던 여러 가지 무거움을 내려놓고 좀 더 가볍고 투명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조금 더 온화하게, 자비롭게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