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근대이전까지 중국을 지배한 온갖 민족들의 경쟁력은 말에서 나왔다. 말은 기동력의 상징이며 동시에 말을 탄 궁사들은 한족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농경사회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기동력이었고 속도를 통한 경쟁력이었다. 더욱 말을 탈 때 디디는 철제등자의 등장으로 두발을 지탱할 수 있어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등자는 몸을 뒤로 돌려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 식 활쏘기도 가능하게 하였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1,000년 동안 기병은 군사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던 주요 수단이었다.
중국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의 변증법적 통일과정이었다. 한족이 유지한 시스템이 더 이상 성장엔진으로 기능하지 못할 때 이민족의 중국경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비유하자면 늙은 포도나무에 찔레 순을 접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하여 중국은 젊은 야생의 피를 받아 오랫동안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는 야생의 찔레나무로 비유되는 종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풍요로움을 접하는 순간 그들은 야생성보다 쉬운 삶을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이전의 야생성을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한족은 변방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힘과 그것을 막고자 하는 한족 내부의 힘이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중국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2세기부터 중국은 이민족과 한족이 순차적으로 지배권을 교차해왔다. 1127년 여진족에 의한 금의 성립은 송을 남송으로 축소시켜놓았고 이어 원의 건국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주인을 몽골족으로 바꾸어 버렸다. 1368년 주원장에 의한 명의 건국은 다시 한족정권의 대반격을 의미한다. 그 후 여진족에 의한 후금, 곧 청의 건국은 다시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한 세력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에 와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념적 정체는 한족이 다시 복구된 정권이다.
기미정책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기 위해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했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이 이민족의 여러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했다. 부족장들은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켰다. 1403년 들어 몽골족에게 적용되던 위는 여진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때 최초의 여진족 위소인 건주위가 요동의 동북지방 부족들 사이에 설치되었다.
중국은 만주여진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여진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조선의 여진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동시에 약화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명은 여진족에게 선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번속적 지위(중국의 울타리를 이루는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수락케 하는 협상을 하여 조선의 영향력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했다. 이 모든 전략은 한족이 동북아시아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명의 영락연간부터는 해서, 건주, 동해 여진족장들에게 세력정도에 따라 도독, 되지휘, 지휘, 천백호, 진무 등 위소관의 직함을 주고 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위소를 설치하고 정해진 때에 조공하도록 했다. 위소관에게는 칙서와 인장이 수여되었는데 이를 가진 자는 명과의 교역에서 우대받았다. 칙서는 부의 세습을 보장하는 막대한 이권증명서였다. 명은 이런 경제적 혜택을 통해 여진사회내부를 족쇄 채웠고 야생의 기질을 제거하고자 했다. 여진족을 제도로 울타리 쳐놓으며 작은 경제적 실리로 족쇄에 빠지도록 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기미정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소를 고삐에 묶어두어 소가 고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둘째, 고삐에 묶인 소는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다. 셋째 소를 보고 나타난 범은 소를 노리지 결코 소 주인을 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한족은 언제나 직접적인 해를 피한다. 넷째, 분쟁이 발생했을 시 최소한 소의 위치가 경계지점이 되도록 한다. 다섯째, 향후 소의 위치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 둔다.
당시 여진은 건주(建州)여진, 해서(海西)여진, 동해(東海)여진, 장백여진 등 4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으며 혼하, 소자하, 동가강 일대에 살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송화강의 서쪽, 요하의 동쪽에 살고 있었다. 동해여진은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는데 주로 영고탑의 동쪽에 살고 있었다. 장백여진은 백두산 주위에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은 더욱 혼하부, 완안부, 동고부, 저천부, 소극소호하부의 5부로 나뉘어 있었고 사대주의의 저변화 현상이 붐처럼 일어나 통일은 요원해 보였다.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1559년 여진 부족의 하나인 건주여진의 한 부장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름은 교창가였으며 명이 여진족을 분리,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한 위소라는 군사단위중 건주우위의 추장 왕고의 부하무장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다끄시였고 어머니는 왕고의 딸이었으며 이름은 에메치였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 멧돼지가죽이라는 뜻이다. 누르하치는 천만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1583년 니칸 와이란의 청병으로 명나라 군대가 구러성과 샤지성을 공격했을 때 살해되고 그는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겨 백두산에 숨어들었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강한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병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누르하치에게 13벌의 갑옷밖에 남기지 않았다. 일족 중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도 있었지만 얼마 후 30여 명의 동지들과 1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뜻을 펴고자 일어섰다.
누르하치는 1587년에 퍼알라 지역에 성을 쌓고 주위의 세력권 안에 있는 가샨(촌)과 성을 지배하면서 그가 정한 방식에 따라 통치하고 그들을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지배영역이 확대되면서 점령지역의 공적 노예와 한인을 이주시켜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이때는 건주여진의 부락을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1189년, 건주여진 대부분의 부락을 통합하자 이를 계기로 그는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여,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4개관에서 명나라와 부지런히 통상하여 경제적인 힘을 키워 나갔다.
한편, 해서여진에서는 1591년에 엽혁(예헤)부가 합달(하다)부를 대신하여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명 조정은 엽혁부를 지원하여 누르하치의 신속한 성장을 억제하고 나아가 몽골을 견제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1593년, 엽혁부와 그 주변의 9부연합군 3만 명이 3방향에서 건주여진을 공격해왔다. “적은 벼락치기로 모인 연합군이니 그 잡병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장을 하나 쓰러뜨리면 전군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이 고륵산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승리했으며 장백산 인근의 주셔리부와 너연부에까지 원정하여 그 영토를 모두 합쳤다. 이후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의 호륜4부에 대해 선근후원의 각개격파 전략을 썼으며 1599년에는 합달부를 먼저 병합하였다.
1603년 누르하치는 17년간 거점으로 삼았던 퍼알라를 떠나 허투알라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퍼알라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했고 성 내부의 높낮이가 다르고 경사도 심하여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주해온 다음 강력한 적대세력인 해서여진의 호륜4부를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1607년에는 휘발(후이파)부를, 1613년에는 오랍(우라)부를 정복하였다. 1615년에는 팔기조직을 확대 개편했고, 1616년에는 후금의 성립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1519년에 이르러서는 엽혁부를 병합함으로써 대명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데 배후의 적이던 호륜4부를 완전히 통합함으로써 여진민족의 통일은 완성되었다.
사르후 전투
1618년 누르하치는 대명 정복전쟁의 명분으로 '칠대 한'을 공표하며, 개전을 선언하고 곧 바로 무순(푸순)성을 함락시켰다. 뒤이어 제하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나라는 양호를 요동경략으로 임명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하였다. 누르하치도 자이판 산 일대에 성보를 건설하며 명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619년 명군은 10여만 명의 병력을 4개부대로 나누어 동시에 허투알라를 공격하였다. 두송이 인솔하는 서로군은 무순 쪽에서 사르후 지역을 거쳐 허투알라로, 엽혁부에서 파견된 원군과 함께 진군하는 마림의 북로군은 개원과 철령 쪽에서 상간애를 거쳐 허투알라로, 청하(칭허)보 쪽에서 진군하는 이여백의 남로군은 호란을 거쳐 허투알라로, 관구보 쪽에서 진군하는 유정의 동로군은 조선의 원군과 함께 아포달리강을 거쳐 허투알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보병 15,000명과 기병 400여기를 자이판과 사르후 지역에 파견하여 매복시킨 후 각개격파를 시도하였다. 제일 먼저 사르후와 자이판 지역에 도착한 두송군을 소자하의 물길을 이용하여 둘로 분산시킨 후 팔기의 주력부대를 투입하여 철저히 격파하였다. 뒤를 이어 상간애 지역으로 진격해오는 마림 군을 또다시 격파하였으며, 같은 날 아포달리강 지역으로 진공해오는 유정 군에 대해서는 먼저 매복 병사들과 장애물을 이용해 진격을 방해하며 시간을 벌다가 두송과 마림 군을 격파한 주력부대를 이동시켜 격퇴시켰다. 이렇게 되자 남은 남로의 이여백 군은 되돌아갔다. 이제 공세로 전환한 누르하치는 개원과 철령을 함락시켰으며, 배후의 최대 숙적이었던 엽혁부까지 정벌하였다.
1621년 누르하치는 요동지역 최후의 보루였던 심양과 요양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주변 70여 성보도 점령하였다. “병사가 회군하면 요양은 다시 명조에 의해 고수될 것이며, 얻은 강토를 버리고 돌아가면 다시 번잡하게 정벌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요동과 요남 지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한 누르하치는 1625년 요양에서 심양으로 천도하였다. “심양은 사통팔달한 지역이다. 서쪽으로 명을 정벌하려면 두르비로부터 요하를 건너면 길이 바르고 또한 가깝다. 북으로 몽골을 정벌하려면 2, 3일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고 남으로 조선을 정벌하려면 청하로에서 가히 나아갈 수 있다.” 적의 진 앞까지 다가가 비옥한 영토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한족을 지배할 날을 기다리는 누르하치의 심중에는 약소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야만족에서 대륙의 주인으로 급성장한 만주족에 대한 끝없는 자부심이 흘러넘쳤을 것이다. (이후 여진족 30만은 한족 1억5천만을 지배하게 된다.)
팔기군
여진족은 사냥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부락이나 부족단위로 행동했다. 여진 부락들은 수령 또는 촌장의 지도아래 전투와 수렵을 했는데 10명이 각각 화살을 한 대씩 내놓고 그 가운데 제비를 뽑아 화살 주인을 총령으로 내세웠다. 한번 총령이 정해지면 그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9명은 일사불란하게 사냥을 해야 했다. 이 총령을 니루 어전이라고 부른다. 이는 전쟁에 나아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팔기는 이처럼 수렵의 기본단위인 니루에서 시작되었다. 니루는 남자 300명으로 이루어지고 5니루를 1잘라, 5잘라를 1 구사 즉 1기로 한다.
1601년, 누르하치는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깃발로 구별된 네 개의 기병(旗兵)군단을 편성해, 자신의 친족 네 명을 이들 기병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누르하치가 스스로 후금(後金)의 칸(汗)이라 칭한 1616년, 이들 네 개의 기병 군단을 각각 양분한 다음, 황기, 백기, 남기에는 홍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홍기에는 흰색 선을 둘러, 처음 네 개와 함께 모두 여덟 가지 깃발을 만들어 구별했다.
1635년,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같은 형태로 몽골족의 팔기군을 편성했다. 만주 국경으로부터 감숙성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몽골족을 팔기제도로 흡수 편입하였다. 원래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었고 홍타이지는 12명의 딸들을 몽골 부족장들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동맹 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며 나아가 전 몽골족을 팔기군에 편성시켰던 것이다. 이후 163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동원해 2개의 기병(旗兵)집단을 만들었고, 1639년에는 4개로, 1642년에는 8개로 확장 완성하였다. 이렇게 팔기군 요원들은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의 세습적 계층으로부터 선발되어, 정복과 점령 목적을 위해 군사와 행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P.S. 여진족(고구려)의 야생성은 이성계의 조선(서울)을 낳았으며 누르하치의 청(심양)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