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續六
■ 윤유근尹惟謹의 묘갈명(墓碣銘) - 권상하(權尙夏)
인조(仁祖)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에 태학에서 율곡(栗谷) 선생과 우계(牛溪)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당시에 재의(齋議)를 주창한 자들은 모두 당대에 높은 명망이 있는 분들이었는바, 파평 윤공(坡平尹公) 휘 유근(惟謹)도 바로 그중에 한 분이다.
당시 당인(黨人)들은 정인홍(鄭仁弘)의 옛 의논을 답습하여 온갖 방법으로 이를 저지하였으므로, 비록 사류(士類)라고 칭하는 자들도 두려워하여 후퇴하는 자가 많았으나, 공은 홀로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이론을 배척하였으며,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대궐에 하소연하여 여러 번 요청하고 그치지 않으니, 공의 명성이 일세(一世)에 떨쳤으며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의 자(字)는 이신(而愼)이니, 만력(萬曆) 기해년(己亥年, 1599, 선조 32) 4월 22일에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3세에 부친을 잃었으며, 차츰 장성하자 자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스스로 부지런히 학문에 힘썼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다시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으며, 다시 공릉 참봉이 되고,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금오랑(金吾郞),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과 형조와 호조의 좌랑ㆍ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의성 현감(義城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기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였다.
당시 암행어사였던 이연년(李延年)은 적신(賊臣)인 허적(許積)의 사주를 받고 기어이 공을 중상(中傷)하려 하였으나 흠잡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을 만들었다.”고 허위로 아뢰었다. 대질 심문을 하게 되자, 허적은 공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많은 선비를 쫓아낼 때는 어쩌면 그리도 담담하더니 지금은 마침내 이처럼 곤궁하니 이는 어째서인가?” 하였다.
공을 논죄하여 영평현(永平縣)으로 유배하였는데, 뒤에 의성(義城) 백성들은 공의 은덕을 추모하고 상소하여 공의 억울함을 아뢰었다. 이에 임금은 크게 깨닫고 허적 등의 관직을 모두 파면하였으며, 특별히 사면하도록 명령하였다.
뒤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있다가 병환으로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원년) 10월 보름날 별세하니, 향년 62세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의 보장산(寶藏山)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종손인 윤명채(尹明采)가 양주(楊洲)의 선영 곁에 있는 술좌(戌坐)의 원(原)에 이장하였다.
공은 천성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지조가 곧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관청에 있을 때에는 한 마음으로 봉직(奉職)하였다. 사람들과 교류할 때에는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언론과 풍지(風旨)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문장이 풍부하고 화려하였으며 필법이 신묘하였으므로, 선배들은 공을 몹시 칭찬하고 소중히 여겼다. 간혹 청한직(淸閑職)에 등용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공은 이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진선(進善) 정양(鄭瀁), 지사(知事) 박석(朴晳)과 막역한 교분이 있어 매양 산수 좋은 곳에서 한가히 노니,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고려 때 벽상 공신(壁上功臣)인 휘 신달(莘達)을 상조(上祖)로 삼으니, 문호가 매우 성대하여 동방(東方)의 갑족(甲族)이 되었다. 왕고(王考) 휘 인함(仁涵)은 참판을 지냈으며, 우암 선생(尤菴先生)이 지은 행장이 있는 바, 세계(世系)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선고(先考) 휘 홍의(弘毅)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으며, 선비(先妣)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충의위(忠義衛) 안상충(安尙忠)의 딸이다.
공의 초배(初配)는 지평에 추증된 최유함(崔有涵)의 딸인데, 일찍부터 가정 교훈을 받들어 부인의 예법을 잘 따랐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기경(尹起卿)이며, 딸은 이서(李緖)에게 출가하였다. 후배(後配)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도사(都事) 권필중(權必中)의 딸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권협(權悏)의 손녀인데, 지어미가 되었을 때와 어머니가 되었을 때에 모두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선조를 제사함에 정성을 다하였고 무당과 점쟁이의 요망한 말을 믿지 않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 출생하여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10월 3일에 별세하였는데, 공과 무덤을 함께 하였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시경(尹時卿)ㆍ윤제경(尹濟卿)ㆍ윤치경(尹致卿)ㆍ윤오경(尹五卿)이며, 딸은 현감 서문재(徐文在)와 안처기(安處基)ㆍ이성민(李聖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둘째 집 아들은 윤명계(尹明啓)이며, 사위는 김성부(金聖溥)ㆍ홍진표(洪震杓)이다. 셋째 집의 장남 윤명채(尹明采)는 큰집에 양자로 갔으며, 다음은 윤명대(尹明大)이다. 넷째 집의 아들은 윤명교(尹明敎)ㆍ윤명회(尹明會)이며, 사위는 박수득(朴壽得)이다. 다섯째 집의 아들은 어리며, 사위는 이진원(李震遠)ㆍ이소(李熽)이다. 외손은 이천재(李天在)ㆍ이천원(李天遠)이며 외손녀 사위는 안수(安脩)이다. 증손과 현손이 남녀 약간 명이다.
아! 공의 인망과 지벌과 재능으로 마땅히 명성을 크게 떨쳤어야 했는데 한 급제에 그치고 지위는 낭관(郎官)에 머물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에 율곡과 우계를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훌륭한 의논은 사문(斯文)에 빛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금상(今上) 때에 이르러 요청한 것을 윤허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이 처음 일을 시작한 결과였다. 이것은 역사책에 전하여 훌륭한 명성이 무궁하게 전할 것이니, 당시에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이름이 없어지고 일컬어지지 않는 자와 더불어 드러나고 침체함이 어떠하다 하겠는가?
나의 선조인 부사공(府使公) 역시 진사에 급제하여 공과 함께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에 성균관(成均館)의 임무를 맡았으므로 세상에 칭송하는 자들은 아울러 찬미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께서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은혜를 입고 외람되이 칭찬을 받았는데, 지금 공의 드높은 풍도를 우러러 생각해보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지금 윤명채(尹明采)군이 선대인(先大人)의 명으로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요구하니, 내 어찌 감히 문장을 못한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마침내 행장을 가지고 이리저리 엮어서 서(序)를 짓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여러 사람들은 줏대없이 처신하였으나 공은 홀로 떳떳이 나가니
정론이 이에 힘입어 사악한 자들 자취를 감추었네.
큰 예(禮)를 끝내 거행하였으니 이름이 더욱 빛나누나.
내 여기에 그 대요를 적으니 나머지는 생략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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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尹惟謹 墓碣銘[權尙夏]
仁祖乙亥, 太學發栗、牛兩先生從祀之論, 主齋議者皆一時極望, 而坡平尹公諱惟謹卽其一也。 時黨人襲仁弘餘論, 百般沮敗, 雖號爲士類者, 亦多恇撓却步, 而公獨毅然不動, 斥出異論, 率多士叫閤, 累請不已, 聲名振一世, 人莫不嘖嘖歎服焉。
公字而愼。 以萬曆己亥四月廿二日生。 自幼明秀聰穎, 三歲而孤, 稍長, 奉承慈敎, 自勤勵爲學。 丁卯, 中進士, 拜孝陵參奉, 不仕。 又爲恭陵齋郞, 歷平市奉事、金吾郞、軍資判官、刑・戶曹佐郞・正郞。 出宰義城縣, 爲政廉平。
時繡衣李延年受賊積之唆, 必欲中傷, 而無釁可指, 乃以壓良爲賤誣啓。 及置對, 積曰: “嚮時驅逐多士, 何其壯也? 今卒困此何如也?” 論配永平縣。 後義民思公德惠, 上言白公之冤。 於是上大悟, 盡罷積等職, 特命宥敍。 後爲戶曹正郞。 以疾考終于庚子十月望日, 壽六十二。 初葬永平寶藏山, 後宗孫明采遷于楊州先塋側負戌原。
公賦性淸介, 志操貞剛。 事親竭其誠孝, 居官一心奉公, 與人交不苟合, 言論風旨多有聳動人處。 文辭贍麗, 筆法神健, 先進之推許甚重。 間有通淸之議, 而公則不屑。 與鄭進善瀁、李知事晳爲莫逆交, 每倘徉於水石之間, 人皆艶之。
坡平之尹, 以麗朝壁上功臣莘達爲上祖, 門戶盛大, 爲東方甲乙族。 王考諱仁涵, 參判, 有尤菴先生所撰行狀, 世系詳在。 考諱弘毅, 文正郞。 妣順興安氏, 忠義衛尙忠女。
公初配贈持平崔有涵之女, 早承庭訓, 克遵女範。 有一男起卿, 女適李緖。 後配安東權氏, 都事必中之女, 贈領議政悏之孫。 爲婦爲母, 俱有儀則, 追遠盡其誠, 且不信巫卜妖說。 生於癸丑, 歿於己巳十月三日, 與公同塋。 生四男: 時卿, 濟卿, 致卿, 五卿。 三女: 適縣監徐文在、安處基、李聖民。 二房男明啓, 女金聖溥、洪震杓。 三房男明采, 爲長房后: 次明大。 四房男明敎、明會, 女朴壽得。 五房男幼, 女李震遠、李熽。 外孫李天栽、天遠、安脩。 曾玄男女摠若干。
嗚呼! 以公之人地才望, 宜若大振厥聲, 而崎於一第, 位止潛郞, 豈非命也? 然乙亥大論, 有光斯文, 至今上朝, 終允所請, 皆公始事之力也。 傳之簡策, 令名無疆, 其與一時金紫名湮滅而不稱者, 顯晦何如也?
余先祖府使公亦名進士, 與公同爲乙亥齋任, 世之稱誦者, 蓋幷美焉。 余自髫齔蒙公撫頂之恩, 猥荷佳奬, 至今想仰風範, 有如昨日事。 今明采甫以其先大人命來乞墓銘, 何敢以不文辭? 遂就其狀檃括而爲序。 銘曰:
衆方骫骳, 獨揭揭兮。 正論是賴, 邪逬跡兮。 大禮卒擧, 名益烈兮。 我最其大, 餘可略兮。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