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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獄)이란 것은 그 죄를 징계하는 것이요, 본래 사람을 죽게 하는 곳이 아니다. 옥을 관장하는 관원이 살피는 일을 태만히 하여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질병에 걸리거나 동상으로 인해 간혹 죽는 죄수가 있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는 감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질병을 치료해주며, 보호할 가족이 없는 자는 관에서 옷과 양식을 지급해야 한다. 만약 태만히 하여 짐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는 관원은 엄벌에 처할 것이다.
1735년에 국왕 영조는 당시 감옥에 갇힌 죄수들 가운데 무더위나 추위 혹은 굶주림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죽는 일이 일어나자 위와 같이 지시했다. 수감된 죄수들에 대한 구호에 신경 쓸 것을 해당 관리들에게 당부하는 이러한 수교(受敎)는 조선 초기부터 선대 국왕들이 자주 강조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미천한 죄수들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포용하려 했던 국왕의 성덕(聖德)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옥내 죄수들에 대한 처우나 감옥 환경이 썩 좋지는 못했음을 말해준다.
오늘날 죄수 수감시설을 통칭해 흔히 감옥(監獄)이라 부르지만, 이 용어는 근대 이후에 들어온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엄밀히 말하면 ‘옥(獄)’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죄인에 대한 형벌은 태·장으로 볼기를 치거나, 일정 기간 노역에 처하거나, 종신 유배형을 내리거나, 심하면 사형에 처했지 오늘날처럼 감옥에 가두는 징역형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옥은 형벌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 수감되던 곳이었다.
죄를 짓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죄수들 입장에서 감옥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끔찍한 공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잠시라도 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옥을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옥을 ‘양계(陽界)의 귀부(鬼府)’, 즉 이승에 존재하는 지옥이라고 표현했으며, 한말 한양의 포도청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프랑스인 리델 주교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포도청 감옥을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의 형상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곳이라고 적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 감옥제도는 세종 때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다. 먼저 언급할 것은 세종은 전국 모든 고을에 감옥을 설치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고려왕조는 지방관이 파견된 큰 고을에만 감옥을 두었던 까닭에 일부 작은 고을에서는 이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 이에 세종은 감옥이 설치되지 않은 고을의 죄수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고을 감옥에 수감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전국 각 군현 단위에 감옥을 둘 것을 지시했다.
표준적인 감옥 설계도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것도 이때다. 세종은 1426년에 처음 감옥 설비의 지침을 담은 옥도(獄圖)를 반포하고, 이에 의거해 옥을 짓거나 개수하도록 했다. 이후 옥도는 1439년에 한 차례 수정되었는데, 죄수들이 무더위와 강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감옥 안에 여름용 냉옥(冷獄)과 겨울용 온옥(溫獄)을 따로 짓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남자용과 여자용, 중죄수용과 경죄수용 옥사(獄舍)를 구분하도록 했으며, 모든 옥사는 평지보다 높게 짓되 옥사의 문벽(門壁)은 두꺼운 판자로 막고, 옥사 바깥벽에는 창문을 내어 통풍이 잘되게 했다. 아울러 감방 안에는 판자를 덮고, 사방 처마에는 모두 차양을 달아 죄수들이 낮에는 처마 밑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편 세종은 표준적인 감옥 건축 지침서인 옥도 반포에서 그치지 않고 옥내 죄수들의 수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448년 8월 각 지방에 하달된 옥중 위생 관리 규칙에 이러한 세종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는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냉수를 옥 안에 수시로 넣어주어 죄수들이 마실 수 있게 할 것, 5월부터 7월까지는 원하는 죄수에게 열흘에 한 번 목욕할 수 있게 할 것, 원하면 한 달에 한 차례 머리를 감을 수 있게 할 것, 10월부터 1월까지는 옥 안에 볏짚을 두껍게 깔아줄 것, 목욕할 때는 관리와 옥졸이 잘 감시해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 등의 항목이 실려 있다. 이처럼 세종 때에는 감옥시설 정비뿐 아니라 수감 죄수들에 대한 최소한의 처우 개선 노력이 이뤄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에서 설치·운영했던 감옥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대표적인 것으로 형조 소속의 구금 전담 기관인 전옥서(典獄署)를 들 수 있다. 한양에서는 이외에도 의금부, 포도청 등 수사 및 재판 업무를 맡은 관청에서 옥사를 설치·운영했으며, 지방에서도 감영과 지방 군현마다 옥을 하나씩 두었다.
이것이 감옥의 전부였을까? 그렇지 않다. 수도 한양에는 죄인을 직접 잡아서 구속할 권한을 가진 관청이 더 있었는데, 이를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고 했다. 직수아문은 병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비변사 등 다양했고, 이들 관청에서도 별도로 구류 시설을 두어 운영했다.
먼저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있던 전옥서는 관직자나 국사범을 다스리는 의금부와 달리 형조에서 처벌하는 일반 죄수들을 수감했던 곳인데,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전옥서 내 감옥은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나 건물이 타버리기도 했고, 세종 때에는 전옥서와 형조의 거리가 멀어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형조 청사 뒤편으로 옮기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전옥서는 죄인 구금을 전담하는 관청이었던 만큼 죄수 관리를 맡은 소속 관리나 아전이 적지 않았다. 『육전조례(六典條例)』 기록에 따르면 관리로는 제조(提調) 2명, 주부(主簿) 1명, 참봉(參奉) 2명이 배치되었는데, 제조는 겸직으로서 형조 참판과 승정원의 형방승지가 겸했다. 따라서 종6품 벼슬의 주부가 전옥서의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그 밑의 참봉 2명은 중죄인을 안치시키거나 감옥에 비치해두는 형구를 관장했다. 옥내의 제반 실무는 이서(吏胥) 7명이 맡았으며, 이외에 형벌 집행, 시신 검시, 경계 및 감시 등을 위해 사령(使令) 10명, 오작(仵作) 1명, 군사(軍士) 10명, 행형쇄장(行刑鎖匠) 1명을 두었다.
전옥서에서 죄수를 가두던 옥사는 광해군 때에는 모두 9칸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후 남옥(男獄, 남자용 옥사) 9칸, 여옥(女獄, 여자용 옥사) 5칸 해서 모두 14칸으로 늘어났다. 구체적으로 남옥은 동쪽 3칸, 서쪽 3칸, 북쪽 3칸이며, 여옥은 남쪽 2칸, 서쪽 3칸이 배치되었다고 『추관지(秋官志)』에 전한다. 또한 세종대의 규정대로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을 쌓고 분리했으며, 옥사 바닥에는 판자를 깔아두었다. 전옥서에는 옥사 외에도 관리 집무실, 사령청(使令廳), 군사 수직방(守直房) 등 각종 청사를 두었다.
다음으로 관리나 국사범, 정치범을 심문·조사했던 의금부는 지금의 종각 맞은편 스탠다드차타드(SC) 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는데, 의금부 청사 내에는 죄인을 심문하는 호두각(虎頭閣)과 함께 서쪽과 남쪽에 감옥을 두었으며, 그 가운데 남간옥(南間獄)은 특히 사형수를 가두던 옥사였다고 한다. 광해군대인 1618년 6월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의금부 감옥의 전체 규모는 32칸이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건물과 배치 상황은 알 수 없다.
중종대 무렵 도둑을 잡기 위해 설치한 포도청은 관할 구역에 따라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의 두 개 청사가 있었다. 좌포도청은 지금의 종로 3가역 옛 단성사 자리에, 우포도청은 종로 1가 동아일보사 앞에 위치했는데, 각각 청사 내에 옥사를 설치해 죄수들을 가두어 심문하곤 했다. 한말의 기록에 따르면 좌포도청 감옥은 옥사 약 5칸과 함께 교수형을 집행하는 공간 2칸 정도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방에 설치된 감옥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전하지 않아 옥사의 규모나 시설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충청도 공주에 있었던 감옥을 통해 대강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공주 감옥 건물은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어 조선총독부 사진첩에 전경이 전하며, 1990년대에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공주 감옥은 약 3미터에 달하는 원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내부에는 100~165제곱미터 면적의 두 개의 옥사가 동서로 배치되어 있었다. 원형담 안에는 옥사 외에도 변소와 초소를 두었으며, 전체 면적은 660제곱미터를 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원형담에는 담장 안팎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었는데, 출입문 밖에는 옥졸들이 근무하던 건물도 하나 있었다.
물론 군현에 따라 감옥의 크기나 배치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렇더라도 고종 때 그려진 지방지도를 볼 때 위에서 살펴본 경주 감옥의 사례에서처럼 군현의 감옥은 전체적으로 원형의 형태를 띠었으며, 죄수 이송 및 관리의 편의를 위해 관아 근처나 성내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원형 담장을 설치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중국 주대(周代)에 감옥의 담장을 흙으로 쌓아 둥근 형태로 만든 것을 본떴기 때문이다. 감옥을 ‘환토(圜土)’라고 부른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편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여러 관청이나 권력 기관이 정해진 감옥이 아닌 별도의 구금시설을 갖추고 백성을 마음대로 수감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들 시설은 공식적인 감옥이 아니라고 해서 사옥(私獄), 별옥(別獄) 혹은 구류간(拘留間)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국왕이 혁파하라는 명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권력 남용 행위가 쉽게 근절되지 못하듯이, 권력 기관에 의한 사적인 구금 행위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옥내 시설과 죄수들이 처한 전반적인 상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무리 좋아도 감옥은 감옥’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금을 막론하고 감옥은 누구든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며, 감옥살이의 고통은 비할 데 없이 크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하여 당시 감옥에서 죄수들이 겪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충을 다섯 가지로 열거했는데, 바로 춥고 배고픈 고통, 질병의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 형틀의 고통, 토색질당하는 고통이다.
첫째, 춥고 배고픈 고통이다. 조선시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끼니를 하루에 몇 차례 얼마만큼의 양으로 제공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관에서 지급하는 음식은 죄수들이 간신히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에 그쳤음이 분명하다. 그나마 춘궁기나 흉년이 들면 사정은 더 나빠져서, ‘양옥(養獄)’이라 하여 옥바라지를 해주는 가족이 없는 한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광해군 때인 1614년 의금부 옥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하루 두 끼 식사를 지급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지만, 이는 의금부 수감자들이 현직 관리들이라 특별 대우한 사례일 것이다.
배고픔과 함께 무더위와 추위 또한 옥내 죄수들의 적이었다. 세종대에 감옥시설의 정비를 지시하면서 겨울용과 여름용 옥사를 따로 짓도록 했지만, 모든 군현에서 이 규정을 따르기는 어려웠다. 설사 규정대로 옥사가 마련되었더라도 겨울철에 지급할 땔감이 부족하거나 한파가 찾아들면 옥사하는 죄수들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중종 때인 1519년 11월에는 전옥서에서 30명이 넘는 죄수가 죽는 일도 일어났다.
둘째, 질병의 고통이다. 옥의 수리와 위생 관리는 역대 국왕들이 수시로 강조했지만, 현실에서 근본적인 개선을 이루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한양의 의금부나 전옥서는 지세가 낮아 여름철에 비가 새기도 했고,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죄수들은 쉬 병에 걸렸다.
옥내 수용 인원이 과밀하거나, 남녀를 별도로 수용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전옥서는 수용 인원이 40명에서 100명 선이었던 듯한데, 300명이 넘는 죄수가 수감되어 북새통을 이루는 일도 곧잘 있었다. 죄수가 과밀해지면 당연히 환경은 열악해졌고, 세종이 강조한 남녀 죄수의 분리 수용 원칙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437년(세종 19)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서 남편을 살해한 여인 막장(莫莊)이 고을 감옥 안에서 옥졸 및 다른 죄수들과 간음하여 임신한 사건, 1518년(중종 13) 의금부와 전옥서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가둬 옥내에서 아기를 낳은 사건은 당시 옥내 환경이 어떠했는가를 알려준다.
천주교 선교활동을 위해 조선에 왔다가 1878년 좌포도청에서 몇 달간 수감생활을 했던 리델 주교의 기록은 더 구체적이다. 그는 한말의 열악한 좌포도청 옥내 상황을 고발했는데, 옥사 내부는 환기가 안 될뿐더러 좁아서 몸을 가눌 수도 없고, 헐벗은 채로 더위와 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감옥 중앙의 웅덩이에 물이 있지만 그것으로 몸을 닦았다가는 피부병을 얻기 십상이고, 두 개의 나무판자를 놓은 것이 전부인 화장실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셋째,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조선의 감옥은 오늘날과 달리 미결수들이 확정된 형을 받기 전까지 수감되는 곳이다. 따라서 수감생활이 길어야 몇 개월에 그치리라 짐작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오해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정으로 체옥(滯獄), 즉 옥사 판결이 지체되기 일쑤였다.
조선의 법 제도상 특히 살인 등의 중죄수는 지방관의 수사를 토대로 최종적으로 국왕의 심리를 거쳐 판결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더 긴 시간이 요구되었다. 『심리록』을 분석해보면 정조 때 발생한 살인사건은 형이 확정되기까지 평균 3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난다. 더 극단적인 사례로 1863년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도내 죄수 24명 중 8명이 30년 이상 미결 상태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단 감옥에 한번 갇히면 형이 확정될 때까지 꼼짝없이 수감된 채 온갖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니, 장기 수감자들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넷째, 형틀의 고통이다. 주지하듯이 일단 감옥에 갇히면 죄수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칼과 쇠사슬, 수갑 등의 형구(刑具)를 착용해야 했고, 중죄수라면 정기적으로 심문을 받으며 형장(刑杖)을 피할 수 없었다. 고문이 금지된 오늘날과 달리 중죄수에 대한 고문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 또한 때로 심각했다.
다섯째, 토색질당하는 고통이다. 이는 죄수들이 옥졸과 고참 죄수들로부터 겪는 경제적 압박을 말한다. 옥졸과 고참 죄수들은 감옥에 들어오는 신참 죄수들의 돈을 뜯는 데 혈안이 되곤 했는데, 감옥 내에서의 신고식 또한 그중 하나였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은 신고식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던 당시 신참 죄수에 대한 가혹 행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옥졸들은 스스로를 ‘신장(神將)’이라 하며 뽐냈고, ‘마왕(魔王)’이라 부르는 고참 죄수들은 자기 수하에 영좌(領座), 공원(公員), 장무(掌務) 등 갖가지 직책을 가진 부하 죄수들을 두고 다른 죄수들을 괴롭혔다. 또한 신참 죄수에게 가해지는 신고식은 신참이 옥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유문례(踰門禮), 지면례(知面禮), 환골례(幻骨禮), 면신례(免新禮) 등 이름도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실상은 모두 신참 죄수에게 가혹 행위를 가해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
정조 때인 1783년 황해도 해주 감옥에서 발생한 신참 죄수 박해득(朴海得) 사망사건은 당시 지방 감옥에서 자행되던 토색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해주감옥의 옥졸 최악재(崔惡才)란 자는 신참 죄수에게 늘 해오듯이 박해득에게서도 돈 50냥을 뜯으려 했다. 박해득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고참 죄수 이종봉(李從奉)을 시켜 박해득을 손보라고 지시했다. 옥졸 최악재의 사주를 받은 이종봉이 박해득의 목에 칼을 채우고는 두 다리를 칼끝에 새끼줄로 묶어 세워놓았다. 결국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박해득이 넘어지면서 담벼락에 부딪혀 목뼈가 부러져 죽고 말았다. 이처럼 감옥에서 자행되던 토색질의 고통은 때로 극단적인 파국을 초래하기도 했다.
죄수들이 옥중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형틀의 고통이었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형구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형구는 크게 신체형을 가할 때 사용하는 형장(刑杖), 죄인을 고문할 때 사용하는 고문 도구, 죄인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칼과 수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옥내 죄수들에게 사용하는 형구의 종류와 크기, 착용 대상이나 방법 등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일률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다만 정조 때 형구의 규격과 사용 방법을 명시한 책자인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통해 태(笞)·장(杖), 신장(訊杖), 가(枷), 추(杻), 철색(鐵索, 쇠사슬), 곤장(棍杖) 등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형구 가운데 중국 명청대의 것들과 형태상 차이가 있거나, 쓰임새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枷)는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을 말한다. 명청 시대의 칼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지만, 조선에서는 한쪽이 긴 직사각형 형태를 했다. 또한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칼의 무게도 각각 달랐다.
우리는 흔히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시 칼은 대개 중죄수에게만 채웠다. 더욱이 부녀자라면 설사 사형수라도 원칙적으로 칼을 채우지 않도록 『경국대전』에 명시해두었으며, 이 규정은 『육전조례』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다음으로 추(杻)는 죄인의 손에 채우는 일종의 수갑으로서 가와 마찬가지로 살인 등 큰 죄를 지은 자들에게만 사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조선의 추는 명청대 수갑인 수뉴(手紐)와 모양이나 착용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수뉴가 지금의 수갑처럼 양손을 채우는 방식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칼을 찬 죄수의 오른손을 칼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추를 채워 고정시켰으며, 왼손에는 추를 채우지 않았다.
가와 추에 관한 내용은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이런 규정이 종종 무시되곤 했다. 예를 들어 영조 때인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된 자들을 체포하여 추국한 일이 있었다. 이때 담당 관리가 이들의 목에 칼을 씌우고 양손에 모두 추를 채워놓았다가 훗날 영조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은 일도 있다.
덧붙여 조선에서 사용한 형구 중 곤장은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형장이다. 곤장은 배의 노처럼 길고 끝이 넓적하게 생겨서 회초리 모양의 태·장과 차이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선조대 무렵에 와서야 생겨났다. 곤장은 군법을 집행하거나 포도청·토포영 등에서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했는데, 볼기 부분을 때리는 태·장과 달리 볼기와 넓적다리를 나누어 치도록 했다.
태·장, 곤장과 별도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치는 매는 신장(訊杖)이라 했으며, 지방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관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신장으로 종아리나 정강이 부위를 쳤는데, 한 번에 30대 이상 치지 못하게 했다. 태, 장, 곤장, 신장 등의 형구는 대개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이제 한양의 대표적인 감옥인 전옥서에서 사형 집행을 전담했던 사형집행인에 대해 살펴보자. 영조 때의 관리 구수훈(具樹勳)이 쓴 『이순록(二旬錄)』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사형집행인을 ‘막난희광(莫蘭希光)’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법전에 명시된 전옥서 소속 사형집행인의 정확한 명칭은 ‘행형쇄장(行刑鎖匠)’이다.
특히 군대에서 사형 집행을 맡아보는 병사는 ‘회자수(劊子手)’라 불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당시 운영되던 군영(軍營)의 병력 규모와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훈련도감(訓鍊都監), 용호영(龍虎營)에 회자수가 각각 6명, 4명 배치되었다. 회자수의 복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 붉은색 문양의 명주를 푸른색 명주에 붙인 귀신 모양의 두건을 쓰는데, 두건 뒤쪽은 발꿈치에까지 이를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다. 또한 귀신 모양의 붉은색 무명옷을 입으며, 평상시에 협도(挾刀)를 들고 대장이 타는 말 머리에 마주서게 되어 있었다.
군대의 회자수와 달리 행형쇄장은 전옥서에 1명이 소속되어 있어서 이들이 죄인 가운데 사형이 확정된 자들의 목을 베는 일을 전담했다. 조선 전기에는 행형쇄장 일을 누가 수행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법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서 보듯이 숙종 때부터는 사형수 중에서 선발했다. 사형수 가운데 행형쇄장에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형조의 보고를 거쳐 국왕이 최종적으로 승인했는데, 행형쇄장 일을 하면서 그들 자신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이들 행형쇄장에 관한 기사가 모두 16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이름, 선발과 교체 등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이들의 면면을 대강 알 수 있다. 행형쇄장에 뽑힌 자들을 보면 숙종 때 마적(馬賊) 출신의 의종(義宗), 영조 때 강도살인을 저지른 오험복(吳險福), 헌종 때의 살인범 김관흥(金寬興) 등 사형수들이었으며, 고종 때에는 전옥서에 중죄수가 없을 경우 이순길(李順吉), 김학봉(金學奉), 이막동(李莫同) 등 포도청에서 이감되어온 죄수들을 행형쇄장에 차출하기도 했다. 전임자가 사망하면 행형쇄장을 교체했는데, 이로써 행형쇄장은 한 번 임명되면 죽을 때까지 그 역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1835년(헌종 1) 3월의 『승정원일기』 기사에는 순조 장례식 때 장지(葬地) 선정 등의 일을 맡았던 양덕현감 이시복(李時復)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금부 도사(都事)와 전옥서 관원 입회 하에 전옥서 행형쇄장이 그를 처형했는데, 참수형에 처하라는 판결 대신 죄인의 몸을 조각내는 능지처사형으로 집행해서 문제가 불거졌다. 사형수의 범죄와 판결 사항을 적은 표찰(標札)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기사를 통해 당시 전옥서 행형쇄장이 의금부에 잡혀온 관리들의 처형도 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감옥살이는 누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일단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면 옥살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나마 죽을죄를 저지르지 않은 죄인들은 행형쇄장을 만나지 않고 풀려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