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머리 어디서 했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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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 휴정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위의 시는 조선시대 서산대사(1519~1604)의 시라는 설과
조선후기의 문신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의 시라는 설이 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백범이 되새겼다던 이 시는 사실 서산대사(1520 ~ 160 4)의 「선시(禪詩)」라고 한다. 필자는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지난 1985년 발간한 한시집 2권 328면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이 작품의 제목을 야설(野雪)이라고 적고 있으며 답(踏)자는 천(穿)자로 일(日)자는 조(朝)자로 작(作)자는 위(爲)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 전체의 의미는 차이가 없다. 그 책에서는 지은이를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 1771 ~ 1853)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규장각도서관에 그의 문집 필사본이 3종 소장되어 있는데 확인 결과 이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는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과 장지연이 편찬한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은 누구인가?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자는 진숙(晉叔), 호는 임연(臨淵). 아버지는 정언 의존(義存)이다. 1830년(순조 30) 음보(蔭補)로 선공감첨정에 오른 뒤 도사·호조참판을 거쳐 1852년(철종 3) 동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났는데 시풍이 호매격렬(豪邁激烈)했다. 민요시 〈촌부 村婦〉·〈전가 田歌〉·〈해계고 蟹鷄苦〉 등이 대표적이다. 저서로 〈석담작해 石談酌海〉·〈가례비요 家禮備要〉·〈상제집홀 喪祭輯笏〉이 있다. 이 시(詩)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인용해 더 유명해졌다. 서산대사(西山大師), 자신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는 “선화 너에게 장벽(墻壁)의 뜻을 묻노니, 도(道)와 마음도 아닌 그것이 무엇인가. 모름지기 바르고 치밀하고 상세하게 참구해야 비로소 모든 연(緣)을 쉬고 달마를 만날 것이로다”라는 내용을 담은 ‘장벽송’을 남겨 후학들에게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한 채로 입적했다. 가락에 교리(敎理)를 사설로 붙인 음악이다. 회심곡은 평염불(平念佛) 중 덕담부분을 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따로 떼어 만든 곡이다. 이는 ‘내세(來世)의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충성(忠誠), 효도(孝道)’를 강조하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이 불리고 있다. 남자 죄인 처결(處決)한 후 여자 죄인 잡아 들여 엄형으로 묻는 말씀 너의 죄를 들어보라. 시부모 친부모께 지성효도 하였느냐 동생우애 하였느냐 친척화목 하였느냐… 착한 여자 불러 들여 소원대로 점지할제 선녀 되어 가려느냐 대신 부인 되려느냐… 네 원대로 하여주마… 선심하고 마음 닦아… 수신(修身)하소… 팔뚝같은 쇠사슬로 실낱같은 이 내 목을 한번 잡아 끌어내니 혼비백산 나 죽겠네, 사자님아 내 말 듣소 시장한데 점심 잡수... 신발이나 고쳐 신고 노자돈 가져가세 만단개유 애걸한들 사자가 들을소냐.” 이 작품은 함경북도 화성 출생으로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강원도 예술학원 강좌장과 조선미술가 동맹중앙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민예술가 칭호 받았으며,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긴 “천창원(1935~1998)”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유물 제40호)”입니다. 조선시대 구국(救國)의 선봉장이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입적처(入寂處)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이 빗돌에 새겨진 형태로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로운 점은 이 시의 작자 문제다.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이 시가 순조 때 활동한 시인
이양연(1771 영조 47~1853 철종 4)의 작품으로 나와 있다고 전했다.
이 시에서 '穿雪(천설)'은 '踏雪(답설)'의 잘못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안 교수는 위 문헌들에 '穿雪'로 수록돼 있다고 밝혔다.
서산대사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에는 이 시가 수록돼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이양연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시를 남겼나 하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손이며 상운(商雲)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다는 평이 있었고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을 평생 사모하였고, 수 백수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만년에 후학교육에 힘썼으며, '심경'과 '근사록'으로 스승을 삼아
제자백가는 물론 역대 전장문물(典章文物)·성력술수(星曆術數)·
전제군정(田制軍政)에 널리 통하였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근현대 여류 중국화가 오청하(吳靑霞)의 '청계답설(淸溪踏雪)'
김구 선생은 이 시를 즐겨 읊으며 “내가 38선을 넘는 것은 어리석고 무분별하며 쓸데없는 짓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난 나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안다. 그리고 훗날, 나의 행적을 제대로 평가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옳은 일에 목숨을 걸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백범의 삶에 시공을 초월해 영향을 끼친
그는 조선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승병장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선조의 명을 받고 1500명의 승병을 이끌며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유(儒)·불(佛)·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해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중종 15년(1520)~선조 37년(1604)까지 살았던 인물로서 본관은 완산(完山), 속성은 최(崔), 자가 현응(玄應), 호가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 속명이 여신(汝信), 법명이 휴정(休靜)이다. 그는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아버지 세창(世昌)과 어머니 김 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병승이기 이전에 수행승이었다.
그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 그 뒷면에
당시 나이 85세(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지었다는 불가(佛歌), 회심곡(回心曲)은 불교 포교의 한 방편으로 일반 대중이 잘 아는
“인간 백년 다 살아도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을 못 사나니…
보현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된 한국 5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사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