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다. -
☆ 2014년 가해 3월31일 (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수원] 믿음의 시험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이사 65, 17 - 21
† 복음 : 요한 4, 43 - 54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새로운 창조를 전한다. 이제 예루살렘은 주님의
즐거움이 되고, 백성은 그분의 기쁨이 된다. 이제 울부짖는 소리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로 가셨을 때 왕실 관리 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예수님께 심하게 앓아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아들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나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관리는 그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아들이 나은 것을 보고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지난해의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재작년인 2012년
한 해 동안 이 『매일미사』에 주옥같은 묵상 글을 써 주셨던 의정부교구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짧은 투병 생활 끝에 선종하셨습니다. 고인이
생시에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던 프랑스의 예수회 신학자 샤르댕 신부님처럼
부활 대축일에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친형 같고 스승 같았던 신부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부님의 선종 과정에서 주님께서 선사하신 은총의 표징들은 신부님의 때
이른 죽음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여 있는지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슬펐던 장례 미사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스러움이 아니라
감동과 감사와 평화가 충만하였습니다.
임종 바로 이틀 전인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고인을 만나 대화한 내용을 전해
주신 서울대교구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2011년 『매일미사』 묵상 글의
필자)이 쓰신 글 한 편을 읽으면서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떠나신 빈자리는 메울 수 없이 크지만, 그 떠난 자리는 여전히
따뜻합니다.
사실 부족하지만 제가 이 『매일미사』에 글을 쓰기로 수락한 것도 전숭규
신부님의 격려와 권유 때문입니다. 이번 달 마지막 날의 묵상 글을 써 놓고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제가 환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로 생각만 하던 것을 전숭규 신부님은
삶의 자리에서 그대로 실천한 사제였습니다. 시골 본당의 사목자로서 초대와
환대의 삶을 살 수 있던 것을, 특히 본당의 할머니들이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따뜻한 국수를 대접하며 격려한 것을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긴
분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셨더군요.
"본인의 의향과 상관없이 낯설고 각박한 곳에서 분단의 통증을 겪고 있는
병사들은 분명 이 시대의 나그네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나그네들에게
후하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는
우리 할머님들이 저는 늘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며 신부님의 격려와 질책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천국에서 굽어보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분과 함께했던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구원을 부른 고통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4주간 월요일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 4,43-54
구원을 부른 고통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 기도란? 1. 하느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포복이다.
2. 세상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욕망의 불을 끄는 소방서이다.
3. 기도가 없을 때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천상의 것으로 충만하다.
4. 세상에서 가장 줄을 잘 서는 방법이다.
5.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따르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6.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 있지만 기도에는 기도하는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께 매어다는 용수철이 달려 있다.
7.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일하신다.
8.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9. 기도가 없는 곳은 마귀의 잔치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마귀의 초상집이다.
10.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은 삶으로 하느님께 응답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 4,43-54
저는 지금 시력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시력 검사표에서 맨 위에 쓰여 있는
글자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난시도 있고, 또 몇 년 전부터는 노환까지 생겨서 지금 현재 ‘다초점
렌즈’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어렸을 때부터 눈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지요.
사실 어렸을 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은 안경 쓴 사람이었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학구적으로 보이고도 하고, 또한 귀한 집 아이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저의 시력이 너무 좋아서 안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중학생 때까지 양쪽 시력이 1.5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이 나빠지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2~3분씩 눈을 부릅뜨고 책상 위의 스탠드 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시력이 나빠졌고, 그렇게 원했던 안경을 착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제 얼굴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았지요. 지적이고 또 부유한 집
자식으로 보였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안경을 쓴 지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역시 안경
쓰고 있는 것을 행복해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어렸을 때 그런 멍청한
행동을 했을까 하면서 후회하고 있지요.
지금의 행복이 참 행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먼 훗날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행복의 시간이 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점을 봤을 때, 내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가끔 기도 응답이 늦어지고, 일이 실패로 끝나고, 마음의 상처가 크면
주님께 대한 마음을 접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단, 그 응답의 시간은 내가 아닌 주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직접 가서 고쳐주시지 않지요. 그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 순간 왕실관리는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자기 정도의 지위라면 집에 함께 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가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살아날 것이라고만 말하니까요. 그런데
왕실관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억지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아들 고치는 것을 포기했기에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간직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는 순간 주님의 사랑도 체험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늘 포기했던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 삶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출발점이다
(앨리스 콜러).
인천 옥련동 성당에서 성소후원회 모집 미사를 했습니다.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주자가 말한 삶의 열 가지 큰 후회(朱子十悔訓)
1.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2. 가족에게 친절히 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3.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4.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5. 재산이 풍족할 때 아껴 쓰지 않으면 가난해진 뒤에 뉘우친다.
6.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뉘우친다.
7. 담장을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뒤에 뉘우친다.
8. 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뒤에 뉘우친다.
9.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면 술 깬 뒤에 뉘우친다.
10.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
몇 가지의 후회를 만들고 계신지요? 내 삶의 이런 후회들을 없애나갈 때,
큰 만족과 기쁨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새 하늘과 새 땅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사65,17-21 요한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 4,43-54
새 하늘과 새 땅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선물입니다.
이에 대한 저절로의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선물이 놀랍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눈을 활짝 뜨고 창조의 현실을 관조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영원한 오늘의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창조하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겐 그대로 위로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하느님의 즐거움이요 우리의 기쁨은 그대로 하느님의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이 함께 계신 예루살렘이니
울음도 울부짖음도, 절망도 슬픔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사라집니다.
그대로 하느님 말씀을 통한 치유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입니다.
장충동 수도원에서 잠시 휴가를 지내면서 하루의 단순한 일과중 뚜렷이
부각되는 것이 기도시간이요 밥시간입니다.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제 때의 기도시간이요 밥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영혼의 밥'입니다. 밥없이도 못 살지만 기도와 말씀 없이도
못 삽니다. 육신이 살기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영혼이 살기위해 말씀으로
바치는 성무일도는 필수입니다.
이래야 허무와 무의미,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적인 것이 '영혼의 밥'인 기도와 말씀입니다.
하여 일과표의 배치도 시간경의 기도시간 후에 밥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을 통한 치유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왕실 관리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 내려오셨다는 말을 듣고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 간청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기도는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에 아들은
살아났고 왕실관리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합니다.
'기도-말씀의 치유-믿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대로 우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은총을 보여줍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칠 때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로,
치유하시고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옳은 것이라면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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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한 아버지가 앓아 누워있는 아들을 치유해달라는 청을 예수님께
했고, 예수님의 말을 믿는 순간 아들의 병이 나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역시 희망에는 믿음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희망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희망이란 옳은 희망과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모든 희망을 포함합니다.
삶 속에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품었던 희망들 중에 얼마나 실현되었고, 품고 있는 지금의 희망이
얼마나 성취될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가 품었던 희망들과 지금 품고 있는
희망들 중에 옳은 희망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간단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옳은 것에 대한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성취는
옳은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성숙과 비성숙의 차이 중 하나는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된 것들을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헛된 꿈은 결코 세상과 삶의 참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세상과 삶의 참된 아름다움을 보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희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뒤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의 시험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복음 : 요한 4,43-54
< 믿음의 시험 >
초등학교 6학년인 지영이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에게 맡겨졌습니다.
아버지는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낮에는 온 산을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고,
밤새 그것을 다듬어, 어스름 새벽이 되면 산길을 내려가 시장에다 내다
팔았습니다.
그러나 지영이는 할머니 없는 빈 집이 싫었고 할머니가 나물 캐 오는 것도
싫었습니다. 숙제를 하고 나면 으레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도록 나물을
다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손톱 밑의 까만 물은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잘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담임선생님이
토요일까지 중학교 진학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시고 갈 사람이라곤 할머니뿐인데, 허름한 옷, 구부정한
허리, 특히 손톱 밑의 까만 땟국... 지영이는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지영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습니다.
“저, 할머니... 선생님이 내일 학교에 오시래요.”
하는 수 없이 내뱉긴 했지만 할머니가 정말 학교에 오시면 어쩌나 싶어
저녁도 굶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오후였습니다.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교무실에 갔다가 지영이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계셨습니다.
“지영아, 할머니께 효도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지영이는 선생님의 이 말을 듣고 와락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눈시울을 붉히며 잡아드린 할머니의 손은 퉁퉁 불어 새빨간 생채기로
가득했습니다. 할머니는 손녀딸이 초라한 할머니를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아침 내내 표백제에 손을 담그고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아내셨던 것입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손등에서 피가 나도록
말입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1, 할머니의 손]
오늘 복음은 믿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들을 살리려는 왕실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예수님을 가파르나움까지 모셔가려고 합니다.
그분이 가셔서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하신 것처럼, 두 번째 기적도 자신의
집에서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첫 기적을 그 가정에서 하셨으니 그렇게
믿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망스러운 대답을 하십니다.
아니 그렇게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와 주셔서 기적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냥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 왕실 관리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자신이 원했던 것을 지금 해
주시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안
좋은 것을 줄 리가 없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계란을 달라는 아들에게
전갈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하며 지금은 매우 실망스러울 지라도
그것조차 은총임을 믿는 것입니다.
지영이는 할머니를 부끄러워했습니다. 할머니가 주시는 것은 온통 사랑인데도
지영이는 짐짓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도 이렇게 좋은 것만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 우리에게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시험에 자주 지고
맙니다.
어떤 분이 사업을 시작해서 성당에서 사업장 축복도 하고 봉헌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망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기도와
희생과 봉헌을 많이 했는데도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거나, 유일한 아들이
갑작스런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거나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해주신 이런
모든 것이니 다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원망을 하겠습니까?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이
온 가족, 온 주위 사람들에게 퍼져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 것을
포기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계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도 당장
청했던 것을 안 들어주셨다고 실망하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심을 굳게 믿으며 항상
감사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3월31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 4,43-54
어느덧 3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눈을 들어 산과 들을 바라보면 꽃들이
탐스럽게 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겨울 동안 땅 속에 있던 꽃들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매화, 제비꽃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꽃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피어나고 있습니다. 꽃들은 배우지
않았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들이 일을 묵묵히 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렇게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삭막한
이 사회에, 거짓과 불의가 넘쳐나는 이 사회에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람에 꺾이지 않고, 뜨거운 햇살에 시들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만일 그런 꽃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 꽃일 것입니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어린아이가 있었답니다.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 아이는 자신의 소망을 말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샌드위치를 먹게 하고
싶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소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샌드위치 재료를 구했고, 맛있게 만들어서 3,500명이 넘는
노숙자들이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을 본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짓의 꽃, 탐욕의 꽃, 분노의 꽃, 미움의 꽃을 피우려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기보다는 악취가 넘쳐나는 삶의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봄에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의도의 윤중로에는 벚꽃이 필 것입니다. 남산에도
진달래 개나리가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피우는 것은 예수님만의 몫이 아닙니다. 성인과 성녀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의 소중한 사명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것은 키레네 사람 시몬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것은 베로니카의 일만도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가 함께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그
십자가의 길에는 화사한 신앙의 꽃들이 필 것입니다. 우리가 닦아 드리는
이웃의 얼굴에도 기쁨과 희망의 꽃이 필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서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2014년 가해 3월31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 4,43-54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믿을만한 사람이 되고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는 건 다행이며 행복입니다.
보증할만한 신용할만한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이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임할만한 사람일 때 사랑 감정도 피어나고 함께 살기를 희망하잖아요. 신
용사회를 만들자는 사람들은 많은데 신용할 사람들이 적으니 한심하지요.
믿을만한 사람은 하늘을 믿고 하느님과 그 나라까지 믿을 겁니다. 하
느님을 믿는 참 신앙인으로 세상을 산다면 모두가 그를 따르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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