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네 번째)
(옥천→신탄진, 2016. 8. 27∼8. 28)
瓦也 정유순
한 달 이상 지속되어온 폭염과 열대야로 하얀 밤 지새우며 뒤척이다가 에어컨 등 냉방시설로 도움을 받으며 겨우 토막 잠 같은 잠으로 시늉만 하다가 눈을 뜨니 폭탄전기요금이 없는 살림을 덤으로 고생하게 한다. 그렇게 위세를 떨치던 찜통더위가 밤새 내린 비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안면을 싹 바꾼다. 살갗에 찬바람이 닿을 때마다 순간순간 햇볕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방정맞은 심사인가. 참으로 사람 인심이 조석변이(朝夕變移)로다.
<청주시청소년수련원 앞산>
동이면 금강으로 가기 전에 옥천이 낳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 5∼1950. 9)의 생가로 간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시인 정지용은 해금되었다.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쓴 주옥같은 글들은 북한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금서로 묶여 어느 누구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최근에는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직은 확인된바 없다.
<정지용 동상>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이 땅의 시인으로써 우리 민족의 모습을 문학적이고 아름다운 글로 표현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정지용문학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나 문학관 내부의 긴 의자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오랫동안 묶여 있던 아픔 때문인지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표정이 여리고 굳어 있는 것만 같았다.<정유순의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에서>
<정지용 밀납인형>
옥천 구읍에 자리한 생가는 초가삼간 겹집 같다. 안채는 보수 중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고, 옆에 있는 문학관에 들러 시인의 엷은 채취를 짙게 맡아본다. 그리고 성악을 하는 도반의 ‘향수(김희갑 작곡)’ 노래를 들어 본다. 목이 잠기는 아침나절인데도 목소리는 청아하게 ‘비인 밭에 말을 달리듯∼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을 타고 길게 흐르고, 초라한 초가에는 조롱박이 대롱대롱 매달려 지난 혹서(酷暑)를 기억한다.
<향수 시비>
<조롱박>
정지용생가에서 가까운 옥천읍 상계리에는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라는 충북유형문화재(제157호)가 있어 둘러본다. 옥주는 옥천의 옛 이름이다. 사마소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방마다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친목과 학문, 정치, 지방행정의 자문 등을 논하던 곳이다. 그러나 점차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폐단이 커져 1603년(선조36년)에 없앴으나 지방에 따라 그 폐단이 지속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옥주사마소 안내>
옥주사마소는 1654년(효종5년) 의창(義倉)을 뜯어다가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창은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비상시에 가난한 백성에게 대여해 주는 기관’으로 이를 뜯어다 지었다는 의미는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에는 오른쪽으로 마루, 왼쪽으로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뒤란으로 돌아가니 좁은 남새밭에는 가지고추 등 여러 종의 작물들이 주인의 손에 따라 튼실하게 자란다.
<옥주사마소 가는 길의 목각>
오늘 금강 걷기 출발한 곳(옥천군 동이면)은 ‘금강하구둑으로부터 226㎞’ 지점이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경부선고속도로다리 위로는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자동차들이 바삐 달린다.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결은 물비늘이 되어 가을로 넘어가는 여름의 문턱을 더 환하게 하는 것 같다. 분명 우리는 하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데,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여 상류로 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어선은 아직 출어할 시간이 안 되어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과 한가로이 유희(遊戱)를 한다.
<금강하구둑으로부터 226km>
<금강의 아침-물비늘>
<금강의 망중한>
살랑거리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하류 쪽으로 나아가니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톨게이트가 나온다. 이곳은 휴게소이면서 금강유원지나 강변도로를 따라 드나드는 길목으로 휴일이면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초기 고속도로 공사 중 가장 난공사가 많아 희생자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상행선 쪽 휴게소 인근에는 당시 희생되신 77분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휴게소 입구의 무궁화도 활짝 피어 산업의 동맥을 건설하시다 희생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것 같다.
<금강휴게소 톨게이트>
<금강휴게소 무궁화>
<금강유원지의 산과 구름>
금강휴게소와 금강유원지 사이에는 자동차와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보(洑)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설은 물고기가 왕래할 수 있는 어도(魚道)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알아보니 전력을 생산하는 ‘금강소수력발전소’라고 한다. 전력 생산량이 얼마이고 산업에 기여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환경파괴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속의 생명들도 자유롭게 물길을 따라 소통할 수 있는 시설이 하루 빨리 설치되었으면 한다.
<금강소수력발전소-끝에 3개의 발전기가 있다>
한 낯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아스팔트 복사열도 뜨거워지지만 엊그제 불볕더위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다. 강물은 어느 때는 큰 여울을 만들며 급하게 휘돌아 가고, 어느 때는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으로 아주 편안하게 다가온다. 산과 산사이의 협곡을 지나는 금강은 물길이 닿는 곳 마다 비단 수(繡)를 만들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보청천이 합류하는 원당교에서 오전을 마무리 한다.
<금강의 여울>
<보청천 합류지점>
오후에는 밑으로 지나쳤던 고현(高峴)마을로 올라간다. 지도상에는 옥천군 청성면 고당리 ‘높은벌마을’ 또는 ‘높은벼루마을’로 표시되는데, 이는 고현마을의 토종이름 같다. 천상에서 하강하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언저리에 정착한 마을 ‘높은 벌∼’ 10여 가구가 층층계단을 이루어 금강의 역사를 굽어보는 ‘높은 벼루∼’ 마을 주변에는 옻나무와 호두나무가 많고 순을 나물로 먹는 참죽나무가 많이 있다.
<고현(높은벌 또는 높은벼루)마을>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피난을 와서 함지박을 만들면서 마을을 일궜다는 설이 있다. 워낙 고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논도 없어 손바닥마한 밭에 산도(山稻)를 심어 가끔 쌀 구경을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산 넘어 전답을 사서 “이른 새벽에 고개를 넘어 갔다가 어둠이 짙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 왔기” 때문에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어 지금도 “아이들 얼굴 잘 몰라”라는 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신정일의 ‘금강역사 문화탐사 중에서>
<옻나무>
<호두나무>
이곳에서 생산되는 콩과 보리 등 잡곡류는 영동군 심천장터에 꽤나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현마을 사람들이 장에 나가지 않으면 장이 서질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을 둘러보고 원당교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대추와 밤 그리고 감 등 제사상에 필히 올라가는 조율시(棗栗枾) 3실과(實果)가 살을 찌우며 제법 모양새를 갖춰 가고 있다.
<석류>
대추(棗)는 꽃이 핀 자리에는 틀림없이 열매가 맺힌다 하여 후손의 번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상에 제일앞자리에 올려놓는다고 한다. 밤(栗)은 씨 밤이 싹이 나면 그 나무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뿌리에 붙어 운명을 같이하여 ‘후손을 지극히 사랑’하는 조상을 의미하고 또한 사당의 위패도 밤나무로 만들며, 감(柿)은 어떤 씨를 심어도 싹이 나면 고욤이 되기 때문에, 좋은 감이 되려면 필히 접을 붙여야함으로 후손으로 태어났으면 감과 같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대추>
<밤>
<감>
<고욤>
도로변으로 나와 합금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옛 기록이 없어 왜 합금마을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1929년 행정구역 개편 시 청성면에 소속되면서 합금리가 되었고, 원래 “윗쇠대”와 “아랫쇠대” 불리었는데 “쇠”자를 한자로 쇠금(金)자를 쓰면서 상금과 하금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를 합쳐 합금리가 된 것 같다. 길 옹벽에는 아름다운 조형물로 장식을 예쁘게 하여 보기 좋았고, 길옆 경관 좋은 곳에는 팬션과 민박 등 가족단위로 와서 쉬어 갈 수 있는 시설들이 있다.
<山자 모양의 산과 금강>
<합금마을의 가로변>
<고개숙인 해바라기>
<합금리(상금)마을 표지석>
합금리에서 청마교를 건너 청마리 마티마을로 간다. 이 마을에는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인 제신당(祭神堂)이 있다. 이 제신당은 마한(馬韓)시대부터 마을 경계 표시의 수문신(守門神)으로서 풍수상의 액막이 구실을 하였다. 바닥지름 5m, 높이 5m의 원추형돌탑 모양의 제신탑(祭神塔)과 솟대, 장승, 산신당 등 4가지의 복합적인 문화형태를 띄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비는 신앙성표(信仰聖標)로 믿고 있다.
<제신탑>
솟대는 높이 약5m의 장대 끝에 새 모양을 만들어 올려놓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간(神竿)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장승은 통나무에 사람의 모습을 먹으로 그려 놓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산신당(山神堂)은 뒷산 소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모신 자연신(自然神)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초에 택일을 하여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제주(祭主)를 뽑아 산신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솟대와 장승은 4년마다 윤달이 드는 해에 새로 세우는데, 이때 신을 보내고 맞아들이는 굿으로 농악을 올린다.
<장승>
청마리 폐교운동장에는 늙은 플라타너스나무가 터를 지키고, 옛 교실에는 ‘옥천 옻 문화단지 옻 배움터’가 자리를 대신한다. 청마리 마티마을에서 ‘양저∼지수 간 도로 확포장공사’ 구간까지 빠져 나온다. 강 건너 솔밭에는 학(백로)들이 둥지를 틀고, 힘차게 달려오다 잠시 숨을 고르며 조용해진 금강을 굽어보는 주택의 아치형 터널 위에 으름덩굴이 지붕을 이루고, 으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가덕교 앞에 도착하니 해의 기울기가 길어진다.
<으름 터널>
<으름>
동춘당은 조선조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송시열의 친척인 송준길(1606년∼1672년)이 38세가 되던 해(1643년)에 지은 별당(別堂)으로 보물(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이집은 굴뚝을 높이 세워 달지 않았다고 한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사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였다.
<동춘당>
특히 대청의 앞면, 옆면, 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외부 공간이 차별 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이하다. 현재 걸려 있는 ‘同春堂’ 현판은 송시열이 썼다고 하며 별당 옆 고택에서는 후손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동춘당과 소나무>
동춘당에서 바쁘게 나와 대전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안에 있는 ‘남간정사(南澗精舍)’로 간다. 송시열(1607∼1689)은 1607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의 외가에서 태어난 후로 화양동 등 여러 곳으로 주거를 옮겼으나 그가 주로 살았던 곳은 옛 대전의 근교였다. 초년에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살았는데, 근교의 비래촌과 흥농촌이라는 곳에 비래암과 능인암이라는 서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 1683년(숙종 9년) 말년에 능인암 아래에 규모가 큰 서당을 새로 세웠는데 이것이 남간정사이다. 1989년 3월 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남간정사>
송시열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의 학문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남간정사는 계곡에 있는 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건물의 대청 밑을 지나서 연못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이는 한국 정원 조경사에 새로운 조경방법이라고 한다. 남간정사 오른쪽에 있는 기국정(杞菊亭)은 소제동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에 옮겨온 것이라고 하며,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은 목판으로 만들어져 남간정사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남간정사-우측이 기국정>
다시 옥천의 안남면에 있는 독락정(獨樂亭)으로 이동한다. 독락정(獨樂亭)은 1607년(선조 40년)에 절충장군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副使)를 지낸 주몽득이라는 사람이 세운 정자로 지었지만, 서당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후에 유생(儒生)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발전하여 서원(書院)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을 굽어보며 조망하던 눈앞에는 농어촌공사에서 지은 펌프장이 가로 막혀 금강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는 무슨 심사인가?
<독락정>
<펌프장>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과 마루가 각1칸씩 있으며, 금강의 풍광을 내려다보며 층암절벽 바위산 등주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이곳은 현재 초계주씨독락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독락정 뒤의 산에 오르면 둔주봉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한반도모형이 거꾸로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락정 후면>
<독락정 뒷산 둔주봉 전망대에서 본 한반도 지형-7월촬영>
오전은 먼 곳을 이동하다가 후딱 지나간다. 옥천군 안내면으로 와서 점심을 하고 인근의 ‘안내양조장’에 가서 옛날식 술도가 등을 구경한다. 전성기 때에는 술도가를 20여 독을 발효(醱酵) 했으나 지금은 1개를 채우기가 힘들다고 한다. 안채 마당에는 울타리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탱자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채 정원수처럼 서있다.
<술도가>
<탱자나무>
<탱자>
다시 금강으로 돌아와 어제 걷기 마지막 지점이었던 가덕교를 건넌다. 강 아래로 내려가 잠수교 같은 길을 거닐면 물속에서는 월척 같은 큰물고기부터 어린 치어까지 한가롭게 때를 지어 노닌다. 이런 틈을 타고 낚시꾼들은 여러 대의 낚시를 설치하여 손맛을 느끼기에 바쁘고, 간간히 고기 잡는 어항을 설치하여 물고기들을 유혹한다. 물이 좋아 물고기의 종류도 많다고 하는데 비교적 큰 물고기는 누치가 가장 많다고 한다.
<낚시>
<어항설치>
대청호에는 ‘김옥균과 명월이의 애틋한 사랑의 열기가 남아 있는 청풍정’과 ‘호수 위에 떠 있는 병풍바위인 부소담악’ 등 몇 군데 가볼만한 곳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대청댐으로 이동하여 대청호공원으로 올라간다.
<대청호 부소담악-5월 촬영>
대청호는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 청주시∙옥천군∙보은군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남)과 충북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북) 사이의 좁은 협곡에 높이 72m, 공도교길이 495m의 필댐(filldam)이 남과 북으로 건설됨으로써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었다.
<대청댐>
필댐은 흙과 돌을 기울기가 완만하게 쌓아올려 담수되는 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형식의 댐으로 기초가 약해도 쌓기가 가능하여 자유롭게 설계가 가능하며, 일반적으로 댐 건설에 적용이 많이 되는 경제적 방식이라고는 하나 홍수 시에 월류(越流)에 저항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대청댐 공도교>
대청호는 1980년 완공되어 저수면적 72.8㎢, 호수길이 80km, 저수량 15억t으로 한국에서 3번째 큰 규모의 호수이다. 대전광역시∙청주시의 식수와 생활용수∙공업용수 등 다목적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호수 주변으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져 사람에게 친근한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1998년에 개관한 물 홍보관 마당 앞에서 바라보면 밑으로 주변 경관이 한눈에 내려 보인다.
<대청댐 물전시관>
빗길에 다시 계단으로 내려와 대청댐 아래에서 데크로 곱게 단장된 길을 따라 신탄진 쪽으로 걸어간다. 건너편 호안에는 백로들이 때를 지어 비를 피하고 있고, 내려가는 길목에는 산딸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간다. 조정지댐 지나 충북 청주시 남이면 복숭아밭에서는 수밀도(水蜜桃)가 은근히 유혹한다. 나무를 용처럼 목각하여 건물 환기구로 활용한 가게는 상호가 “뿌리가 나무에게∼”이다.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에서는 동편 하늘 쪽으로 뜬 무지개가 다음 길을 연결해 준다.
<건너편 호안의 백로>
<산딸나무 열매>
<조정지 댐>
<무지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