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의 은총과 윤리
히브 13,1-8; 마르 6,14-29 / 연중 제4주간 금요일; 2023.2.3.;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는 혼인의 윤리를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헤로데 영주를 세례자 요한이 비판했다 하여 참수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독서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히브리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권고를 들려주었는데, 형제애와 혼인의 존엄성과 청빈의 덕목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독서 말씀의 공통 주제는 혼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의 혼인을 성사로 축복합니다. 혼인 서약이 당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하지만, 죽을 때까지 진실하면서도 성실하게 이 노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축복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성사로 거행합니다. 그래서 칠성사 가운데 혼인성사는 사제를 축성하는 성품성사와 같은 품위를 지닙니다. 가정과 교회라는 각기 다른 단위에서이기는 하지만 둘 다 공동체적 일치를 위한 성사이고, 또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 품위가 완성될 수 있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성화된 가정이야말로 원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가정이 새로워지면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모든 남편과 아내들은 또 다른 아담과 하와로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에덴동산의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하는 주역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가치는 사랑과 성과 생명입니다. 사랑으로 축복받은 성이 자녀를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부부간 이루어지는 성의 축복이 아니라 인구 조절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또 성이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쾌락의 도구로 취급된다면 세상의 타락은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부부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그 바탕임을 잊어버리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가정을 성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성과 생명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로 건설됨으로써 이룩될 부부와 가정의 행복이 중요한데, 이는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와 교회의 행복에 직결되어 있는 일입니다. 교회는 이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을 보호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부부와 부모가 그 숭고한 의무를 다하도록 돕기 위해서 성사적 도움과 사목적 배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 당사자들이 인격적인 합의로 교회 안에서 맺은 계약은 하느님의 제도로 승격됩니다. 이 신성한 유대는 함부로 철회되거나 훼손될 수 없습니다.
이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윤리를 말하는데, 흔히 이혼 불가로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만, 사실은 일부일처제로 이루어진 혼인의 단일성이 존엄성으로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따라오는 기본 조건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가톨릭 신자들의 혼인미사에서 봉독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 10장에 나오는 이혼 불가의 말씀인데, 이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남편이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려서는 안됩니까?” 하는 고약한 질문으로 여쭈었기 때문에 나온 방어적 답변일 뿐이었습니다. 혼인에 대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본격적인 행보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신 카나의 혼인 잔치였습니다. 이 기적이야말로 모든 가정에서 일어나야 하는 기적입니다.
즉, 혼인을 서약할 때 신랑과 신부가 진실하고, 성실하며, 자녀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가르칠 의무를 약속한 바는 당사자들의 노력만으로는 온전히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반드시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해서 부부로 맺어졌다 하더라도 살아가면서 부부간에 갈등이 없는 가정이 어디에 있으며, 또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가정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부부가 나이가 들수록 더 절박한 사정입니다.
그래서 혼인성사로 맺어진 부부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이는 마치 지구상의 모든 식물이 햇빛을 받아서 광합성 작용을 함으로써 자신도 필요한 양분을 만들어내지만 모든 동물과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를 배출하는 것처럼, 모든 신자들은 햇빛처럼 무상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성체로 받아서 자신의 가정생활에서 길어 올린 온갖 체험과 합하여 자신도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운을 얻는 한편, 교회와 사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배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비유적으로 말해주는 영적 광합성 작용입니다.
이렇듯 혼인과 가정이 존엄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성화되는 일은 교회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살아있는 비유가 됩니다. 무릇 물질과 생명의 근본적인 차이는 재생 여부에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은 번식을 하지만, 사람은 혼인과 가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 창조 사업을 계승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영혼을 태어나게 하는 일은 선교라고 부릅니다. 또 이 선교활동이 사람들의 집단과 사회에서 행해지는 일은 복음화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생기와 성숙함은 이 선교와 복음화의 활력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선교활동과 복음화 과업이 활기를 띨 수 있기 위해서는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혼인의 윤리를 지켜야하지만 목표로 해야 할 것은 부부들이 혼인성사의 은총을 받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