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이 되십시오
20: 4-6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서구적인 형태의 인류 최초의 대학, 유럽 최초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국립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대학은 본래 1088년 교회법과 로마법을 가르쳐 교회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법과대학으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로 불리워져 오늘의 University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대학의 하루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믿었고 교육은 결코 지식의 전수만이 아닌 태도와 인격의 형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와 인격의 형성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볼로냐 대학에 남아있는 문헌에 의하면 이 대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학교 생활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부모와 학생들의 서약을 받고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육 정신의 기원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십계명의 교훈은 학교 생활의 중심이었고, 가정 생활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1 계명이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유일하신 신 하나님을 강조한 것이라면 제 2계명은 예배의 올바른 방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 1계명이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할 것인가를 가르쳤다면 제 2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1 계명이 거짓된 신을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면, 제 2계명은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처럼 근원을 달리하는 여러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충돌하고 흔들리는 영적인 전쟁의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 2계명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한 두가지 경고와 두가지 축복의 조건을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A. 먼저 두가지 경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상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일단 본문에 우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형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교육적인 목적이나 예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활동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모세 시대에 예배의 처소로서 성막이나 성전이 만들어 질 때 주님은 브사렐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재능을 주셔서 여러 예술 작품을 만들게 하신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될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제2 계명은 그런 예배의 목적으로서의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이런 우상이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골3:5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상을 우리 마음속에서도 만들어 낼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존재를 사로잡아 참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앗아가고 오직 우리로 그것만을 탐하게 하는 일체의 탐욕이 모두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우상 공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 2계명은 이런 우상까지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2. 우상을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다시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것들(가시적 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얼마나 하나님이 단적으로 우상예배를 싫어하시는 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세계 모든 고급 종교들가운데 유독 유대교와 기독교(특히 개신교)전통이 신(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 배경이 되어 온 것입니다.
성상을 옹호하는 정교회나 오늘의 카톨릭 전통은 이 런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모든 시간마다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신 주님-그 주님을 내가 직접 뵙고 경험할수 있는데 꼭 예배의 대상으로서 성상이 필요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배후 저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본당 후면 복도에 서있는 제게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저 뒤에 서있는 저를 지나쳐 제 사무실로 들어가 오피스 구석에 있는 제 사진앞에 가서 절하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 일을 만일 계속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그 사진을 폐기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때 그 사진은 더 이상 사진이 아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의미의 신앙의 상징까지도 우리는 우상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방문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십자가 표시가 없다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해 전 지방 어떤 교회에 집회갔다가 새벽기도회 시간에 그 교회 십자가 앞에서 절하는 성도분을 실제로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성도에게는 심지어 십자가도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경배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에 딸들에게 값비싼 십자가 목걸이는 사주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살아계신 주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자가 되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신앙교육은 실패한 것입니다.
B. 이제 두가지 축복의 조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2 계명은 경계의 메시지만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난 시간 저는 1계명을 강해하면서 십계명은 결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법칙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체험한 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칙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가르쳐 성민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법칙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약속됩니다.
본문 6절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 경고를 압도하는 은혜의 약속을 보십시오. 불순종의 영향은 삼 사대이지만 순종의 은혜는 천대인 것입니다. 가계의 저주를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제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드리고 순종하는 순간 이미 저주는 십자가에서 깨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그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저주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은혜입니다. 이제부터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축복의 경험의 통로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순간마다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축복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이 축복에는 두가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최고의 사랑을 드릴수 있을까요? 예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예배합니다. 지식을 사랑하는 자는 지식을 예배합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권력을 예배합니다. 쾌락을 예배하는 자는 괘락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돈이, 지식이, 권력이, 쾌락이 여러분과 저의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허락하시는 선물의 한 부분들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 선물의 주인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전도서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장에 보면 인간의 지혜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2장에 보면 인생이 추구하는 일체의 즐거움, 쾌락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3장에 보면 인간의 모든 기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4장에 보면 권력과 성취의 헛됨을 말합니다.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꿈의 허무를 말합니다.
6장에 보면 재물의 헛됨, 욕망의 헛됨을 말합니다.--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전12:13에 “일의 결국(결론)은--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외(존경)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들의 사랑의 고백을 위한 엎드림-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가 청년의 때부터 그렇게 할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녀에게 예배를 가르친 부모는 이미 자녀 교육의 절반을 성공하신 것입니다.
스펄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있을 진져, 가정 제단이 없는 가정들이여. 복이 있으라. 가정 제단이 있는 가정들이여!”
2.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명을 따르는 것은 저주스런 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명을 따르는 것은 신명나는 일입니다.
요일5:3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라면 사랑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내 온 몸의 세포 마디 마디가 사랑을 갈구하는 목마름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마침내 그 사랑으로 내 존재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전율을 경험해 본일이 있으십니까?
마이크 메이슨(Mike Mason)은 예배의 감격이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못할 일이 없는 순종의 각오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 이런 예배를 드려 보셨습니까? 이런 예배가 갈망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물으셔야 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은밀한 신을 예배하는 분은 아니신지요?
지금 교회당에 나와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러분과 나를 지금 지배하는 가장 큰 관심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전히 돈의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못하시는 이유일수 있습니다. 혹시 이 순간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우리의 출세나 인기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출세를 예배하고 인기를 예배하는 예배자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격에 빠지지 못하시는 이유일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 순간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우리의 명예의 보존이나 자존심의 회복은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명목상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자일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리대신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나님의 예배자라고 할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기 배우자와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자신의 마음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버렸다면 그가 어떻게 부부의 진정한 사랑의 감격에 빠질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른 어떤 일의 성공보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른 어떤 유산을 남기기 보다 더 예배의 영광을 물려주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이땅의 성도들의 모든 가정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 땅과 이 역사를 고치시고 치유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으로 우리의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을 우선순위로 아는 가정을 만드십시오. 이런 가정들이 우리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