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9월 10일에 미얀마 난민학교에서 있었던 "평화 백일장"에 참여한 교사의 글입니다.
난민으로 사는 것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오래 살고자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써서 더 잘사는 나라로 이주하며 최고의 병원과 진료소에 가서 그 분야에서 최고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습니다.
저 또한 개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하여 미얀마 친주에서 미조람으로 가족들과 함께 건너와서 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난민이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각자 직업과 사업체가 있어서 걱정 근심 없이 순탄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난민이 된 저희들은 거주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국가가 보장해주는 집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전쟁으로 고난과 시련, 절망과 무력감을 날마다 맛보며 사는 수난 속에 있습니다.
2021년 2월 군부가 부당하게 미얀마의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소수부족민들은 지옥의 수렁으로 빠졌고 불복종하는 시민들의 삶은 더욱 암울해졌습니다. 군부쿠데타는 우리의 소박한 일상과 평화를 순식간에 짓밟았습니다.
저는 친족 출신이며 미얀마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교육 공무원입니다. 16세에 교육대학교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을 한 후에 넓은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 말레시아에 베이비 씨터로 일하러 갔습니다. 저는 진취적인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저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였고 아버지는 날 품팔이꾼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가난을 이기려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였고 마침내 교육대학교 시험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경사가 났다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학교를 휴학하고 말레시아로 일하러 갔고 기회가 왔을 때 싱가포르로 건너가서 이주 노동자로서 악착스럽게 일하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후, 저는 컴퓨터 학교와 성경 대학의 신학사 과정을 동시에 이수하였고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저의 앞날은 전도가 양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군사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참여하게 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수시로 우리 집을 덮쳐왔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죽임을 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집과 재산, 우리의 직업과 사업을 다 포기하고 미조람으로 피신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민불복종운동(CDM) 활동가의 삶은 늘 불안하였습니다. 우리는 감시를 당하였으며 매일 “민 아웅 훌라잉”의 군인들의 눈에 뜨지 않도록 피해 다녀야 했고, 신고 당하지 않기 위해 외출을 삼가고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삼갔습니다. 고향과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생명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탈출을 택하였고 생필품만 간신히 챙겨서 밤길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남편이 매설된 지뢰와 중화기로 말미암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시민방위군(PDF)에게 구출되어 미조람에 있는 시아하지역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현재에 머물고 있는 라키 난민캠프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임시 캠프에서 지냈습니다. 대나무로 지은 캠프의 바닥은 흙바닥이고 지붕은 시파울린 천으로 덮여 있고 비가 오면 비가 줄줄이 새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들어와서 바닥의 흙먼지를 날렸습니다. 게다가 원룸 시스템이고 너무 비좁아서 온 가족이 다닥다닥 붙어 자야하였습니다. 우기에는 줄기차게 내리는 비로 바닥이 다 젖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자다가 깨어 마른 곳을 찾아 앉은 채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물이나, 화장실, 전기, 취사 등의 불편함은 말로 표현할 수 가 없으나 우리는 난민이기 때문에 불편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지역 출신이 아닌 우리를 사람들은 “난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산에 가서 나물을 채취하는 것도,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원주민들의 허락 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닭을 키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닭을 키울 수 있지만 달걀이나 닭을 원주민들에게 팔수 없습니다. 아직도 양이나 염소, 돼지를 키우는 것은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적 차원이든, 유엔의 차원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땔감 부족으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원주민들이 허용해주는 범위 안에서만 장작을 채집할 수 있는데 대부분 그런 곳은 걸어서 3~4시간을 가야하기 때문에 오며가며 시간을 다 쓰고 빈 손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채소나 조와 수수를 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허락이 되는 곳은 산비탈로 토양이 척박하고 물이 부족한 지역이어서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요!
하루 두 끼로 버티고 살면서 두고 온 고향의 논밭과 편하고 안전한 집을 생각하며 가끔 한숨을 쉬며 웁니다.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터뜨리다가도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 있음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난민으로 받아준 인도 미조람정부와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26년 9월 10일
난민캠프 교사 아에 쥴리 쓰고
10월 26일 월요일 자시에
우담초라하니 정리하여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