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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森羅萬象)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질서 정연하게 펼쳐진 만 가지 사물과 형상이라는 뜻으로, 이는 곧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총칭하는 말로, 동양 철학에서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森 : 빽빽할 삼(木/8)
羅 : 벌일 라(罒/14)
萬 : 일만 만(艹/9)
象 : 본뜰 상(豕/4)
(유의어)
만휘군상(萬彙群象)
우주만물(宇宙萬物)
출전 : 주역(周易) 계사(繫辭)
세상 만물의 모든 현상이라는 뜻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중국의 고전인 주역(周易)의 계사(繫辭)에 나오는 말이다. 계사(繫辭)에서는 '천지간의 모든 현상을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한다'라는 뜻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는 천지, 자연, 인간, 사물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측면은 모든 현상을 말한다. 이는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움직임을 의미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실천한 구체적인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삼라만상을 감상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삼라만상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모든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경우도 삼라만상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할 때 삼라만상의 정신으로 노력한다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삼라만상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삼라만상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다음과 같이 활용될 수 있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이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는 의미이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자.' 이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이치를 깨닫자는 의미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다른 말로는 우주만물(宇宙萬物), 만물(萬物), 천지(天地), 자연(自然) 등이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숲이 그물과 같이 넓게 펼쳐져 있는 듯, 사물들이 빼곡히 퍼져있는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현상을 의미합니다. 즉 자연 세계와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그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불교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불교 경전에서는 우주와 자연 만물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유교나 도교에서도 우주 만물의 조화를 설명하거나 자연의 이치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통해 삼라만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옛날, 깊고 고요한 산속에 우주의 이치를 깨달으며 자연과 생명의 흐름을 관찰하는 한 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조화와 변화를 지켜보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거처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넓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숲은 나무와 풀, 새와 동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마치 모든 생명체의 집과 같은 평화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현인은 제자들에게 다가가 세상이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보길 바랬습니다. 첫번째 제자는 세상이 사람들의 터전이라고 말했고, 두번째 제자는 산과 강, 들판이 어우러진 자연이라 표현했습니다. 세번째 제자는 세상이 날씨처럼 변하는 감정과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어느 대답도 정답이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숲속 깊은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은 거대한 나무들과 피어난 풀, 노래하는 새들, 날아다니는 벌레들,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들이 모두 공존하는 장소였습니다. 바람은 나뭇잎을 스치며 숲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땅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현인은 손을 들어 숲과 강,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모든 생명을 가리키며 세상의 일부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곳이 단지 세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세상은 이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제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현인은 빙그레 웃으며 세상 만물이 서로 엮여 있는 모습을 삼라만상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 끊임없이 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현인은 삼라만상이 자연뿐만 아니라 생각과 관계, 그리고 매 순간의 변화를 포함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모든 것의 조화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날 이후, 제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때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현은 세대를 거치며 세상 만물의 다양성과 조화를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삼라(森羅)와 만상(萬象)은 하나의 법(法)으로 새겨진 것이다. 삼라(森羅)는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듯이 우주에 펼쳐진 온갖 사물이고, 만상(萬象)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이나 형체이다. 따라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고 함은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형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하나의 법으로 새겨진 것이라는 말은 우주의 수억, 수만의 존재와 현상들은 각각이 다르게 존재하지만, 그것이 생성되고 존재하고 멸하는 이법(理法)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이법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누구나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 빌딩, 다리, 자동차와 장비 등 온통 사람들이 만든 것들을 볼 수 있고, 이렇게 보이는 것 말고도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학문, 사회, 법 등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대부분이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세상의 모든 것들, 즉 삼라만상을 분류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형체가 있는것과 없는 것으로 나눌 수도 있고, 육지, 바다, 하늘과 관련된 것으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존재가 있어야 인식된다. 예를 들어 앞에 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만일 돌이 있는 것을 인식할 존재(통상 생명체)가 없다면 마치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박쥐처럼 초음파를 통해서든 인식이 가능할 때 존재를 알게 된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인식하는 대상을 통해 인정을 받게 된다.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인간으로부터 모든 동물과 식물, 혹은 프로그램화 된 로봇이나 장치도 가능할 것이며, 인간이 모르는 어떠한 존재도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 혹은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학문, 연구를 할 수 있는 존재는 현재로는 인간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하고, 또한 이 내용을 읽는 이도 모두 인간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하는 문제는 인간에게 해당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인식해야 만 사물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바로 이러한 인간, 즉 인간의 인식을 기준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삼라만상은 먼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존재는 인식하나 만질 수 없고 형체가 없는 것과 관념상에만 존재하는 것 등 무궁무진 하다.
예를 들어 땅, 바다, 별, 달, 나무, 돌, 집, 컴퓨터, 다리, 새, 가전제품, 기름 등은 그 형체가 있어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다. TV의 영상은 만질 수 없고, 소리는 볼 수 없고, 바람은 잡을 수 없고, 빛은 스스로의 모습은 없지만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만유인력(萬有引力), 자기장(磁氣場), 전파는 늘 곁에 있으면서, 한동안 인식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존재를 누구나 알고 있다. 학문, 제도, 사회, 관계 등은 실체나 현상이 있기 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것을 규정함으로서 존재하며, 그 이후에는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기인한다. 지구와 모든 별이나 우주에 있는 모든 형체가 있는 물체는 최초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만유인력이라는 힘이 있는데, 이러한 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왜 사람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가? 왜 생명체는 죽게 되어 있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명이란 것이 무엇인가? 정신은 무엇인가? 왜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창조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는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해답이 되는 존재는 우리가 인식할 수가 없다. 이런 의문에서 학문은 시작되었고, 이러한 것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자연히 존재하는 것과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히 존재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萬有引力), 핵력(核力), 자기력(磁氣力) 등의 힘과; 빛, 전파, 방사선, 열 등의 에너지와;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 전자(電子), 이들이 결합된 다양한 종류의 원자(原子), 원자들이 결합된 분자(分子), 이들에 의한 물, 불, 돌, 흙 등과 식물, 동물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히 생긴 것이다. 이들 자연물들은 어떤 작용에 의해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게 하고, 풍화(風化)와 침식(浸蝕)을 유발하면서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 또한 매우 다양하다. 채취(採取), 경작(耕作), 수렵(狩獵), 축산(畜産) 등 자연물 스스로의 창조력에 인간의 의지를 반영한 것, 물질 자체의 변화는 없지만 형체를 변화시키거나, 조합시켜 만든 각종 도구(道具), 교량(橋梁), 건물(建物), 전답(田畓), 운하(運河) 등, 상황을 조성하여 언제라도 자연의 힘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전기(電氣), 유무선(有無線) 통신(通信), 전지(電池), 발전(發電) 등, 다양한 조합을 통해 보다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가전(家電), 컴퓨터, 음향(音響) 및 영상(映像) 등, 형체가 아닌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말, 글, 관계, 사회, 법, 학문, 놀이, 즐거움, 희망, 행복 등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분류된 삼라만상을 시간이나 논리의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먼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 자연히 존재하는 것,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 순이 된다. 이들은 한자로 간단히 천(天), 지(地), 인(人)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 분류에 있어 중요한 관점은 바로 인간에 있다.
우리가 늘 관심을 갖고 많이 접하는 것들, 예를 들면 정치, 사회, 경제, 오락, 학문과 행복, 성공과 같은 대부분의 것들이 독립적이고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인간으로 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학문을 나눌 때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으로 나누는 것이나, 고등학교 시절 인문와 자연계로 나눈 것은 바로 이러한 것에 기인한다. 자연현상이 아닌 모든 현상은 바로 인간으로 인한 것, 혹은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의는 바로 이러한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결합을 통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창조한 것들은 인간의 육체로 만든 것인가 정신으로 만든 것인가? 거대한 교량과 고속도로, 대형 빌딩과 유조선, 자동차 등은 인간의 육체로만 만든 것인가? 육체와 정신의 기여도를 매긴다면 각각 얼마의 비중을 둘 수 있을까?
다리는 어떻게 건설되는가? 처음에 개울 등에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여, 무언가 건널 수단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 필요성에 의해 다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의도가 생기고, 다리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하는 구상과 설계 후 실제 건설하는 행위를 통해 건설된다. 이 다리를 만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상황인가, 의지인가, 육체적 힘인가?
상황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대상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적 힘은 그 힘을 발휘할 일이 없으면 소용없다. 힘은 어떤 대상에 가해질 때만 가치를 발휘한다. 이 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이며, 이 의지가 바로 다리를 건설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은 이러한 정신적 사고가 그것을 창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창조한 것 중 말과 글, 문학, 예술,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연구 가능한 학문 분야(인문사회)는 그 근본에 바로 인간의 정신(욕구, 심리, 사상 등)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면 이러한 모든 인문사회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육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을 알면 모든 사회현상과 학문을 본질적으로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세상은 바로 그 의미에 인간과 관련된 모든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상은 천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어 ‘세상을 떠나다’라고 할 때 처럼 인간사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대한 이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알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얼마 전에 발표된 WMAP이라는 위성에서 측정된 자료를 보더라도 우주의 96%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4%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4%마저도 사실은 그다지 잘 알고 있질 못한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짐작해 보려고 할 따름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연 세상의 법칙이나 이론들을 가지고는 사실 자연의 일부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비록 일부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만 일부를 가지고 전부를 추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극히 일부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인 자연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수 있고, 신뢰가 크게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은 자연과학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물질의 생성이나 구성 그리고 소멸에 관한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자연과학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인간이 지닌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세상은 네 가지의 것이 서로 조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빛, 물질(원자들이라고 일반에게 알려진 것), 힘, 시공간의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의 구성요소가 우연과 필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적절하게 배합이 됨으로써 현재와 같은 구조의 우주 형태를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철저하게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것, 철학적인 것, 종교적인 것을 배격한 상태에서 과학적이고 실체적인 관점으로 삼라만상을 살펴보자. 우주의 탄생에 관하여서는, 원래부터가 지금의 상태라는 설과 급격한 팽창으로 이루어졌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이 이론들 중에서 하나의 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이론이 빅뱅(bigbang) 이론이다. 즉 대폭발이론(大爆發理論)이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인 조지 가모프가 맨 처음 주장한 빅뱅이론에 따르면, 현재의 우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온도와 압력을 가진 상태의 점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big bang을 하게 되고 다시 급팽창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고 현재도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팽창을 하는 과정에는,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기상변화나 다양한 현상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비꼬기 위해 지어진 빅뱅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론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많은 반대 이론들이 있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여러 가지 반론들이 빅뱅이론을 뒤집기 위해 발표 되었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우주배경복사탐사선 COBE나 WMAP같은 위성들에 의해 밝혀진 여러 가지 증빙자료들에 의해 빅뱅이 우주 탄생의 거의 확실한 정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심지어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우주 탄생의 공식이론으로 채택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종교들이 빅뱅이론을 자기네들 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바탕 이론으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주탄생의 이론은 이처럼 빅뱅으로 거의 굳혀져가고 있지만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또는 시공간은 무엇인가?’라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안개속을 헤매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왜 빅뱅이 일어났는가라는 문제를 비롯해서 우주는 우리의 우주 하나뿐인가 라는 등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전혀 가닥을 잡지 못하고 여러가지 이론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빅뱅이란 과정을 거쳐서 우주가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이론이 양자론과 끈이론일 것이다. 두 이론 모두 현실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 끈이론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실제적인 증명이 된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학적으로 현재의 우주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이어서 20세기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이론으로까지 불릴 정도이다.
양자이론 또한 그 난해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이론이지만, 현실세계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잘 설명해주는 탓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물리이론이다. 위의 두 이론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를 설명해 주는 이론은, 굳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이론 또는 종교적 철학적 이론들이 많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이론들은 객관화, 사실화, 논리화되지 않은 탓으로 우주탄생의 이론으로 인정을 받기보다는 그냥 주장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초기의 우주는 무한대의 열을 가진 점에서 팽창이 일어나면서 차원과 시간이 시작되어 현재 우주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되고, 이어서 공간이 만들어지고, 공간에서 물질(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과는 다르지만 현재의 물질을 만드는 기반이 되는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탄생을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무게, 길이, 부피, 양, 높낮이 등등의 물리적 크기에 대한 값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애초의 우주에는 크기라는 개념의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식에 근거한 크기라는 개념은 수학적 차원의 개념을 도입해야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나 차원이 없는 곳에서의 크기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으며, 차원이라는 수학적인 개념의 도입이 있은 후에야 크기의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0차원인 점의 상태에서는 길이나 면적 부피라는 것이 없다. 무한대인지 무한소인지 조차도 구분이 없는 것이 바로 0차원인 것이다.
어떤 이유에 기인한지는 몰라도 물리적 크기가 전혀 없는 점으로부터 빅뱅이라는 단계를 너무도 갑자기 시작하면서 크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x,y,z 세 가지의 방향으로 급팽창과 동시에 시간이 만들어져 지금과 같은 시공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의 시공간이란 것이 오늘날의 것과 같은 형태나 성질의 시공간이지는 않았겠지만 현재의 시공간을 만들 수 있는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빛 조차도 그 때 시작이 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현재의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급격히 만든 팽창하는 우주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단계를 거치며 드디어 물질의 근원이 되는 최초의 물질을 만들어 내게 된다. 시공간과 빛의 조화로 인해 만들어진 물질의 근원질은 마침내 양성자를 만들고, 전자를 만들고 중성자를 만들고, 동시에 그들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조합할 수 있는 힘의 근원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는 이 물질들이 하나 둘 모이고 헤어지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만들어져 있던 양성자들은 중력에 의해 하나 둘 모여지게 되고, 이렇게 모여진 수소덩이들이 임계치 이상으로 모이게 되면 스스로의 압력에 못이겨 폭발을 하게 되고, 흩어진 입자들은 중력에 의해 다시 모여지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은하(銀河)도 만들어지고 별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런 과정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더 무거운 원자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뜨거웠던 우주가 팽창과 더불어 서서히 식어가면서 물질들은 안정을 취하게 되고, 동시에 생물의 토대가 되는 유기 원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생물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물질이 탄생하면서 부터 우주에는 4가지의 중요한 힘이 작용하면서 현재 물질의 근간을 이루는 원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양성자는 전자를 얻으면서 수소가 되고 중력이라는 힘에 의해 수소는 모이기 시작했으며, 하나 둘 모인 수소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모인 후에는 중력에 의해 융합이 되어 헬륨이 되고 같은 과정이 반복이 되어 더 큰 원자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자들은 중력이라는 힘에 의해 큰 별을 이루게 되고, 뭉치고 뭉쳐진 별들은 자체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을 하게 되고, 마침내 원자들은 광활한 우주속으로 뿌려지며, 이렇게 뿌려진 원자들은 다시 또 뭉쳐서 별이 되어 초기 단계의 우주를 만들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시간은 수억년이 흐르고, 그 때부터 지금의 형태와 유사한 우주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은하도 만들어지고 항성계(恒星系)도 만들어지고 별도 만들어졌다. 급격한 팽창이 되면서 뜨거웠던 우주는 차츰 식어가고 응집과 폭발을 거듭하며 수십억년이 흐르면서 태양계가 생기게 되고 지구가 만들어졌다.
초기의 지구는, 엄청나게 고온의 불덩어리였지만, 차츰 식어가면서 주위의 입자들을 끌어당기고 여러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는 촉매 역할을 하는 빛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주위의 여건들로 인해, 생물이라는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되는 별로 변했다.
우주에서 날아온 여러 가지 입자들이나, 탄소나 질소같은 유기성 분자들이 지구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지구에는 생명의 단초를 이루는 여건을 지니게 되었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여러 가지 우주선이나 우주 먼지들, 지구 자체가 가지는 고온의 열, 등 너무도 가혹한 지구의 환경들이 생명 탄생의 근간이 된 것이다. 마침내 우주가 탄생하고 100억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불씨가 지펴진 것이다.
작은 규모의 유기분자들이 합성이 되고 다시 그 분자들이 더 크게 합성이 되고 원자나 분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전기적인 작용이 이들 분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커진 유기분자들은 당시의 지구환경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안정한 형태나 활동하기 편한 형태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거나 복제가 되는 메카니즘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은 생명이란 단어를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형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후에 생명의 토대가 되는 유기물들로 구성이 된 존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유기물질에서 가장 작은 단세포생물로 다시 다세포생물로 환경에 대한 적응과 진화 그리고 외부 환경에 의한 멸절과 재구성 등등의 과정을 거치며 수십억년이 흐르고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생물이 출현을 하고 점점 진화와 발전 그리고 돌연변이라는 생물학적인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앞에서 세상의 96%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74%는 뭔지는 모르지만 에너지 쪽인 것 같고 22%는 모르는 물질인 것 같다고 해서 각각 암흑에너지, 암흑물질이라고 부른다.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있기는 있다고 판명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삼라만상은, 이처럼 96%는 전혀 모르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는 4%마저도 수많은 유사과학에 의해 오도되고 있다. 이러한 유사과학은 대부분 종교단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메이저종교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와의 도덕적 합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저질러진 것들도 있다. 말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는 받아 들여지는 재미있는 학설 중의 하나가 지구는 만들어진지 6,000년 되었다는 이론이다.
방사능을 이용한 연대 측정을 하면 보통 지구 표면의 암석이나 토양은 보통 5-10억년 정도의 연대가 나온다. 이것조차도 믿질 않고 성경(聖經)을 자신들의 멋대로 해석을 하여 지구의 나이를 6,000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증거나 자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론에 의심의 눈초리만 보낼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인 배경이나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고 지나치게 모든 것을 창조자의 의지에 기대는 이론은 자신들만의 이론이지 객관화하고 보편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그런 단체의 과학자들 같은 경우,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 인본주의적인 해석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학자로서의 절대적인 금기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현혹 시키는데 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은 앞에서 언급한 4%의 물질과 당시의 시공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단순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해석에 의존해서 이 부분을 이해하려 한다고 하면 오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특별히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사건에 대한 판단을 하기는 더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자신이 취득한 정보의 객관화나 보편화 또는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종교철학이 가지는 기준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아주 심한 경우가 많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종교가 가지는 가치관이나 자기 종교의 창조자와 관련시켜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하게 되고, 기존의 과학적 이론을 자신의 근거에 꿰맞추어 자신의 종교철학을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특히 일상적인 일이라고 생각되어 지지 않는 일이 발생하거나, 기상상태의 변화가 발생할 경우, 또는 일상적인 일이 발생하더라도 자신들의 종교이론을 그럴듯하게 해석해줄 수 있는 사건들이 발생할 경우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이론이나 경전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자신들의 기쁜 일에 무지개가 보였다면 무지개가 나타난 그 일을 자신들의 일에 서기(暑氣)가 비쳤다거나 그 일의 주최자에 대한 축복의 의미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일, 자연현상으로 일어난 용오름 현상같은 경우 그것을 용의 승천이라고 생각하는 일,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다단계 판매하는 업체에 홀딱 빠져서는 새로운 물이 발명되었는데, 물의 분자구조가 일직선으로 되어 인체에 쉽게 흡수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야 자신이 들은대로 전달했을 것이지만 참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왕립화학원에서 연구원이었다는 박사가 물의 구조를 바꾸어서 전 세계에 특허를 내고 특별히 한국에다가 판매를 한다나 참 기가 막히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 왕립화학원이라는 곳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학에 무지한 일반인들을 그런 방식으로 속이는데 자신의 학문을 이용하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진짜로 그런 줄 알고 있는 그분에게 상세히 설명을 했다.
물이란 수소 두개와 산소 한 개가 정사면체를 이루는 것이 기본적인 분자의 구조이고, 산소원자가 가진 비공유 전자쌍이라는 것이 가진 정전기적(靜電氣的)인 반발력 때문에 109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10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물 분자가 이 각도를 벗어나게 되면 물이 아니라서, 인체에 흡수될 경우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또한 이온수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알칼리성을 띈 물이 아무에게나 유효하고 좋은 것이 절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알칼리성을 띈 이온수라고 부르는 물은 특정 위장병 환자들에게만 사용된다. 아무나 이 이온수를 마시게 되면 위장을 다치게 된다. 인간의 위에는 아주 강한 산성의 위액이 분비되어 음식물을 소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위에서는 소화라는 작용을 하기 위하여 이러한 물질대사가 이루어지는데, 여기다 알칼리성을 띄고 있는 물을 마셔서 위액이 중화되면 소화기능을 이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알칼리로 인해 인체의 조직이 파괴될 수도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알칼리수를 마시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약한 알칼리성을 띈 물의 경우 알칼리의 특성상 약간 단 것처럼 또는 아주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약간의 단맛처럼 느껴지는 것 때문에 물맛이 좋다 또는 부드러운 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광고하여 일반인들을 현혹하는 사기술이 시중에 만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음이온을 방출한다는 고무줄을 목이나 팔목 또는 발목에 감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행동들이다. 그냥 장식용으로 걸고 다닌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마는 음이온이 방출되기 때문에 몸에 좋아서 착용을 하고 있다든지 아픈 부위를 낫게 해준다는 믿음으로 착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음이온이란 것은 우리가 사는 공기 중에도 얼마든지 있다. 원자가 전자를 하나 얻으면 음이온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음이온이라는 것이 꼭 몸에 좋다는 보장도 없다. 또한 음이온 상태의 입자는 설령 배출이 되더라도 즉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정한 상태로 바뀌기 때문에 실제 음이온이 자연 상태에서 인체에 도움을 줄 정도로 방출되기는 어렵다.
음이온을 방출한다는 것은, 어떤 입자에 전기적인 에너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지 에너지를 부여한다거나 아니면 자연상태에서 불안정한 물질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극히 미소한 양의 음이온이 방출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방출된 음이온은 즉시 얻은 전자를 버리거나 다른 물질과 반응을 하여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음이온이 인체에 작용을 하여 인체에 좋은 결과를 얻기까지에는 너무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검증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상태의 정보를 검증도 않고 받아들인 결과, 기계나 장치에 사용하는 고무 패킹을 몸에다 착용하고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 것이다. 음이온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정한 물질이란 것이다. 그런 불안정한 물질을 몸에다 착용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몸에 이로울 수 없다.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대부분의 고등학교 과정의 화학시간에 배우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조차도 이런 유사과학 또는 눈속임 과학에 대해서 구분을 못할진대 일반인들이 속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특히 매스컴에서 전달하는 대량의 잘못된 정보는 대중의 매스컴에 대한 일방적인 신뢰로 인해 그 피해가 막심하다.
서기 2000년이 되기 몇년전부터 종말론으로 인해 전 지구가 온통 난리를 친 적이 있다. 심지어 일부 종교들에서는 공중부양 현상까지 일어난다며 특정한 날짜까지 지정을 해서 선전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혹시라도 진짜라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조바심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실제로 뜨지나 않을까하는 약간의 두려움 탓인지 매스컴들조차도 그들에게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난리를 쳤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공중부양이란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잠시 그것도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타인에 비해 탁월한 근력(筋力)으로 공중으로 뛰어 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중부양이라면 지구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부양을 하는 것이 된다. 물론 농구나 배구 선수들 특히 높이뛰기 선수들은 공중부양에 탁월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일부의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반중력이란 것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지만, 이것 또한 아직은 전혀 증명이 된 바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1999년 7월경에 태양계의 행성들이 grand cross라는 배열을 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각 행성들이 가진 중력이 합성이 되어 지구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다는 것이었다. 약 500년 전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자가 암호화된 시를 써서 지구의 미래를 예측했다 해서 화제가 되었던 이슈이다.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은근히 불안해했을 정도였으니 참 대단한 위력을 지닌 예언서였다.
실제로 1982년 9월에는 9개의 행성이 90도 안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1999년 8월과 2000년 5월에도 행성이 십자 형태로 배열되는 grand cross현상이 있었지만 지구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이렇게 행성이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도 실제로는 지구에 영향이 오지 않는다. 그것은 중력이라는 면에서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천체가 태양과 달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태양계 전체 질량의 99% 이상을 차지하는 별이다. 그렇지만 태양이 지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바닷물의 조석현상(潮汐現象) 그리고 자전과 공전하는 궤도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는 정도이다. 태양의 질량은 지구의 33만 배 정도이고,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의 질량은 지구의 200배 정도이다. 그리고 나머지 행성들, 그들이 지닌 위성들을 포함하더라도 전체의 질량은 태양에 비해서는 무시할 정도의 것이다.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물질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 한다. 즉 무게가 무거울수록 크게 작용하고 거리가 멀수록 작게 작용하는 것이다. 목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도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보다 4배정도 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태양계 내부의 모든 행성이 지구에 미치는 인력의 영향이 아무리 커도 태양이 미치는 영향의 만분의 1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정도의 인력은 태양과 달의 인력에 비하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학의 벡터를 이용한 힘의 합성을 바탕으로 한 예측이었지만 엉터리 결론이 되어 버린 것은 중간과정에서 정작 필요한 부분은 생략해 버리고 결론을 도출한 결과를 두고 사실이라고 믿은 꼴이니 곡학아세(曲學阿世)란 단어가 어떤 뜻인지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판의 날이라고 정한 특정한 일자의 경우의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도 사실은 그레고리력으로서 시간의 시점을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정해둔 것이어서, 사실은 표기년도의 숫자가 의미하는 징크스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서양인들이 실어하는 6이나 13 이런 숫자들로 표기되는 해당년도를 조사해 봐도 다른 해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숫자 표기상 한 단위의 끝부분이 되면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뇌에 입력된 편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잘못된 정보를 이용해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999나 1999, 6, 66, 666, 어느 숫자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없다. 단지 이 숫자들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숫자일 따름이다. 1999는 2000이 되고 3000이 되는 과정에 있는 숫자일 따름이다. 과학적인 정확한 근거나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판단해보면 이런 식의 예언이나 이론들이 얼마나 틀리는지 잘 알 수 있다. 혹성이 일열 또는 십자로 늘어선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전혀없다. 사실은 이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떠돌이 행성이 지구의 근처로 오거나 지구와 충돌하는 일일 것이다.
몇년전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의 경우에도 그 지역의 국민들이 입은 피해는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은데 대한 심판이니, 말세의 심판이니,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의 말로 쓰나미에 대한 엉터리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해저(海底)의 지각활동에 이상이 발생하고 그 충격의 여파가 해일(海溢)로 일어난 것이지 결코 어느 집단의 비교 우위를 알리기 위하여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지구는 표면 부위의 지각(地殼)이라고 부르는 고체 부분과 내부의 유동상태를 유지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각으로 쌓여있는 내부의 유동부분은 지구 자체의 회전과 밀도의 차이 그리고 중력의 작용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내부의 움직임 중 어느 한곳으로 에너지가 몰릴 경우 에너지의 분출구가 되는 곳이 화산이 되는 것이고 해저에서는 그 에너지가 다시 바닷물로 전달이 되어 해일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해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정밀한 기기가 없고, 거기다 통보할 수 있는 통신시설이 미비하다 보니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 재해의 대상은 어느 나라이건 상관없이 다 겪을 수 있는 것이다. 특별한 인종이나 특별한 국가를 피해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피해의 다소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특별히 어느 지역을 구분해서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교육 등을 통하여 정보를 얻게 된다. 이러한 후천적으로 취득한 것들과 우리의 DNA속에 각인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정보들을 적절히 조합하고 연결하여 삼라만상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행동을 뒷받침 해주는 얻어진 정보들이 모두가 검증된 상태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부모나 친인척, 대중들, 사회, 국가, 문화, 종교, 언론 등등에 의해 오도된 내용을 전달받은, 검증되지 않고 부정확한 것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확하고 검증되지 못한 것들을 기반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하려니까 당연히 부정확한 해석과 오해 그리고 잘못된 정보를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지는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불교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서양에서 자라면 서양적인 가치관이나 정보를 받게 되고, 동양에서 자라면 동양적인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에 준하는 정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이 가지는 가치관이란 것에 의해 얻어지는 정보의 정확성이나 사실성은 신뢰도면에서 사실 그리 높지가 않다. 이러다 보니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해석이 개인과 개인사이 또는 개인과 대중사이 그리고 대중과 대중사이에 전달되게 되고, 잘못 전달된 정보를 이용하는 대중에 의해 잘못된 가치관이 형성이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현재 시점에서,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삼라만상을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작고 하찮은 것부터 시작해서 우주 공통적인 것까지 거의 대부분의 것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아마 인류라는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도 알 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 만큼이라도, 정확하게 사용을 하고 정확하게 판단을 하여 삼라만상에 대한 해석을 있는 그대로, 이성에 바탕을 둔 사실적 판단으로 정확히 함으로써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한 걸음 더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 森(수풀 삼)은 회의문자로 木(목)이 셋으로 나무가 많이 나 있는 모양에서 무성하다, 으쓱함을 뜻한다. 많이 있는 것은 셋 쓰는 것이 한자(漢字)를 만드는 원리(原理)이다. 그래서 森(삼)은 ①수풀 ②무성(茂盛)한 모양 ③많은 모양 ④빽빽이 들어선 모양 ⑤음산(陰散)한 모양 ⑥축 늘어진 모양 ⑦(나무가)빽빽하다 ⑧무성(茂盛)하다 ⑨늘어서다 ⑩우뚝 솟다 ⑪삼엄(森嚴)하다 ⑫오싹하다 ⑬드리우다(한쪽이 위에 고정된 천이나 줄 따위가 아래로 늘어지다) ⑭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무 목(木), 수풀 림(林), 나무 수(樹)이다. 용례로는 무서우리 만큼 질서가 바르고 엄숙함을 삼엄(森嚴),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 곳을 삼림(森林), 촘촘히 늘어서 있음을 삼렬(森列), 빽빽하게 들어섬을 삼립(森立), 나무나 숲이 우거진 모양 또는 죽 늘어선 모양을 삼연(森然),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함을 삼한(森閑), 숲의 나무처럼 무척 많이 벌려 서 있음을 삼라(森羅), 촘촘하고 빽빽함을 삼속(森束), 여럿 가운데서 특별히 빼어남을 삼수(森秀), 수목이 무성해서 어두움을 음삼(陰森), 가을 바람이 불어서 마음이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움 또는 나무에 가지가 없고 엉성함을 소삼(蕭森), 수목이 무성함으로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짐을 울삼(鬱森), 빽빽하게 벌여있는 온갖 존재라는 뜻으로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이르는 말을 삼라만상(森羅萬象) 등에 쓰인다.
▶️ 羅(벌일 라/나, 그물 라/나)는 ❶회의문자로 罖(라/나)는 통자(通字), 罗(라/나)는 간자(簡字)이다. 그물망머리(罒=网, 罓; 그물)部와 維(유)의 합자(合字)이다. 그물(罒)에 벼릿줄(維)을 꿴다는 데서 새를 잡는 그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羅자는 ‘벌이다’나 ‘늘어서다’, ‘그물 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羅자는 网(그물 망)자와 維(밧줄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維자는 새의 다리에 밧줄이 걸려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羅자의 갑골문을 보면 网자에 새를 뜻하는 隹(새 추)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펼쳐놓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새가 잘 다니는 나무 사이에 그물을 쳐놓아 새를 잡곤 했다. 갑골문에서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져 그물을 늘어놓았다는 의미에서 ‘벌이다’를 뜻했다. 다만 금문에서는 여기에 糸(실 사)자가 더해지면서 마치 다리에 밧줄이 걸린 새가 그물에 잡힌 듯한 모습의 羅자가 되었다. 그래서 羅(라)는 ①벌이다(일을 계획하여 시작하거나 펼쳐 놓다) ②벌이어 놓다 ③늘어서다 ④두르다 ⑤그물치다, 그물질하다 ⑥망라(網羅)하다 ⑦체질하다, 체로 치다 ⑧맞딱뜨리다, 걸려들다 ⑨막다, 차단하다 ⑩포괄하다, 총괄하다 ⑪그물 ⑫비단(緋緞), 깁(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 ⑬체(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 데 쓰는 기구) ⑭징(타악기의 일종) ⑮나선형(螺旋形)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벌일 렬(列)이다. 용례로는 여러 물건들을 평면 위에 죽 벌이어 놓는 것을 나열(羅列), 성 밖으로 겹으로 쌓은 성을 나성(羅城), 엷은 비단과 무늬가 있는 비단 곧 화려한 의복을 나기(羅綺), 얇고 가벼운 비단으로 지은 치마를 나상(羅裳), 감쌈으로 감아서 얽음을 나락(羅絡), 엷은 비단 치마를 나군(羅裙),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날짐승을 잡는 그물이란 뜻에서 모두 휘몰아 넣어 포함 시킴을 망라(網羅), 무늬가 있는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을 능라(綾羅), 가볍고 얇은 비단 또는 그 비단으로 지은 옷을 경라(輕羅), 무늬 있는 집을 문라(文羅), 푸른 비단을 벽라(碧羅), 시끄럽고 수선스러움을 번라(煩羅), 새를 잡는 그물을 작라(爵羅), 숲의 나무처럼 무척 많이 벌려 서 있음을 삼라(森羅), 나부산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는 한바탕의 꿈을 이르는 말을 나부지몽(羅浮之夢),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나작굴서(羅雀堀鼠), 하늘과 땅의 그물이라는 뜻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경계망이나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천라지망(天羅地網), 토끼 그물에 꿩이 걸린다는 뜻으로 소인은 계교로 좌에서 벗어나고 군자가 도리어 화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토라치리(兔羅雉罹), 별같이 벌여 있고 바둑돌처럼 늘어 놓였다는 뜻으로 물건이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음을 성라기포(星羅碁布), 전란이나 그밖의 일로 인하여 큰 혼란 상태에 빠진 곳 또는 그 상태를 아수라장(阿修羅場),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삼라만상(森羅萬象),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뜻하는 말로 권세가 약해지면 방문객들이 끊어진다는 문전작라(門前雀羅) 등에 쓰인다.
▶️ 萬(일만 만)은 ❶상형문자로 万(만)의 본자(本字)이다. 가위나 꼬리를 번쩍 든 전갈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전갈이 알을 많이 낳는다고 하여 일 만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萬자는 ‘일만(一萬)’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萬자는 艹(풀 초)자와 禺(긴꼬리원숭이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萬자의 갑골문을 보면 앞발을 든 전갈이 그려져 있었다. 萬자는 본래 ‘전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후에 숫자 ‘일만’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萬자는 간혹 万(일만 만)자로 쓰일 때가 있는데, 이것은 중국 한나라 때 萬자를 생략해 사용했었기 때문이다. 간체자를 사용하는 중국에서는 万자를 ‘일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萬(만)은 (1)천(千)의 열 곱절. 9천999보다 1이 더 많은 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일 만(一萬) ②성(姓)의 하나 ③사천성에 있는 현(縣)의 이름 ④만무(萬無: 절대로 없음) ⑤대단히 ⑥매우 ⑦매우 많은 ⑧여럿 ⑨절대로 ⑩전혀 ⑪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아주 멀고 오랜 세대를 만대(萬代), 온갖 일을 만사(萬事),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만일(萬一), 만일이나 혹시를 만약(萬若),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나 갖가지 수많은 물건을 만물(萬物), 온갖 물건의 형상을 만상(萬象), 썩 많은 돈을 만금(萬金), 매우 오래 삶을 만수(萬壽), 많은 복을 만복(萬福), 갖출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반(萬般), 온갖 것에 다 능통함을 만능(萬能), 경축하거나 환호하여 외치는 말을 만세(萬歲), 완전하여 조금도 빠진 것이 없는 것 또는 아주 안전한 것을 만전(萬全), 온갖 어려움을 만난(萬難), 썩 많은 돈을 만냥(萬兩), 썩 많은 햇수나 늘 한결같은 상태를 만년(萬年), 세계 각 나라의 국기를 만국기(萬國旗),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잘 됨을 만사여의(萬事如意), 모든 일이 잘 되어서 험난함이 없음을 만사태평(萬事太平),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잘 이루어짐을 만사형통(萬事亨通), 영원히 변하지 아니함을 만세불변(萬世不變), 아주 안전하거나 완전한 계책을 만전지책(萬全之策), 장수하기를 비는 말 만수무강(萬壽無疆) 등에 쓰인다.
▶️ 象(코끼리 상)은 ❶상형문자로 코끼리 모양으로 코와 귀의 특징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象자는 '코끼리'를 그린 글자이다. 象자는 단지 자형에 豕(돼지 시)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豕자 부수에 들어가 있지만 ‘돼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象자는 코가 긴 코끼리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는 황하 유역까지 코끼리가 서식했었다. 그래서 象자는 고대 중국인들이 직접 코끼리를 보고 만든 글자이다. 중국의 많은 역사기록에도 코끼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코끼리를 본뜬 여러 유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을 봐도 코끼리는 고대 중국인들과 매우 가까운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은(殷)나라 이후 기후변화와 함께 농경문화가 확산하면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급감하였고 지금은 동남아시아와 맞닿아 있는 일부 경계지역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끼리가 일찍 사라져서인지 象자는 '코끼리'라는 뜻 외에도 '모습'이나 '형상'이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象(상)은 (1)장기 짝의 하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코끼리 ②상아(象牙) ③꼴, 모양, 형상 ④얼굴 모양, 초상(肖像) ⑤법(法), 법제(法制) ⑥징후(徵候), 조짐(兆朕) ⑦도리(道理) ⑧점괘(占卦: 점을 쳐서 나오는 괘) ⑨통변(通辯) ⑩역법(曆法) ⑪통역관(通譯官) ⑫문궐(門闕: 교령을 게시하는 곳) ⑬무악(舞樂)의 이름, 춤의 이름 ⑭술잔 ⑮천상(天象: 천체가 변화하는 여러 현상) ⑯상징하다 ⑰유추하다 ⑱본뜨다, 그리다 ⑲표현하다 ⑳본받다 ㉑따르다 ㉒같다, 비슷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모양 형(形)이다. 용례로는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 하는 것을 상징(象徵), 사물의 형상을 본뜸을 상형(象形), 코끼리의 어금니를 상아(象牙),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상거(象車), 코끼리의 뼈를 상골(象骨), 용모가 공손함을 상공(象恭), 붓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관(象管),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되는 사물이나 상대가 되는 사람을 대상(對象),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현상(現象), 온갖 물건의 형상을 만상(萬象),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하였을 때 그 대상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느낌을 인상(印象),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는 사물이나 현상을 사상(事象), 코끼리는 상아가 있음으로 해서 죽음을 당한다는 뜻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화를 입음을 이르는 말을 상치분신(象齒焚身), 여러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는다는 뜻으로 즉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사물을 그릇 판단함을 이르는 말을 군맹무상(群盲撫象),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이르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이르는 말을 삼라만상(森羅萬象), 천하가 태평할 때는 이를 지적하여 말할 만한 형상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태평무상(太平無象)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