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여, 고개를 들기 바랍니다
심강우
1922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디너파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와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가 한 테이블에 동석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세계적 문호로 각광받고 있던 두 사람을 주시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파할 때까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외면했다지요. 호사가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왜 그랬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고려 말의 김부식과 정지상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정지상이 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역사서 <고려사>엔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가지런하였는데, 불만을 쌓아두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묘청과 내응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지상,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있지요? 네, 다들 잘 아시는 송인(送人)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7언절구 한시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이별의 정한을 도치법과 과장법을 써서 표현한 이 작품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서정성을 극대화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자 중국 문인들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이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전 청년시절에 지었다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 가는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임을 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의 물은 언제 다 마르려는가?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네 (別淚年年添綠波)
- 정지상 송인(送人)
이 작품 말고도 정지상의 재기(才氣)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는데 그가 다섯 살 무렵, 대동강의 오리를 보고 “누가 흰 붓을 들어 강물 위에 을(乙)자를 써놓았을까?”라는 시를 지었다는 얘기가 야사에 나옵니다.
위의 두 사례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벌써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두 사례의 축을 이루는 건 ‘질투심’입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경우 그들이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의 거장임을 생각한다면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눈에도 좀스럽게 보일 법한 행태인데 둘 중 누구 하나 해소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경우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경우와 달리 극단적 파국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서경천도와 관련한 역모 진압은 구실에 불과할 뿐, 반란에 동참했다는 증거도 없는 정지상을 김부식이 죽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글재주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질투심 때문입니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도 이와 관련한 야사가 실려 있을 정도이니 이 사건의 반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와 김부식에게 필요했던 건 ‘틀림’과 ‘다름’에 대한 분별력이라 여겨집니다. 맞고 틀리고의 이분법적 시각은 항용 극단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사물의 의미는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논법에 따르면 김부식이 칼을 쥔 순간 정지상의 실체적 의미는 망상광(妄想狂))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질투심과 색깔이 비슷하지만 고갱이의 성질이 전혀 다른 게 부러움입니다. 질투심에는 가시가 촘촘히, 부러움에는 물방울이 방울방울 달려 있습니다. 한껏 부풀어오른 질투심이 터지면 가시들이 튀어나갑니다. 상대는 물론 자신마저도 피해를 입기 마련이지요. 반면에 임계점을 초과한 부러움의 경우 물방울들이 터지면서 공회전하고 있던 조바심을 식힙니다. 질투심은 필경 미움을 수반하게 되고 마침내 상대가 틀렸다는 인식에 이릅니다. 그러한 인식의 불쏘시개로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가 동원됩니다. 반면에 부러움은 그것을 품은 자를 자기갱신과 혁신으로 인도합니다. 부러움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다름을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질투심은 과거를, 부러움은 미래를 지향하는 심리적 기제입니다.
시인은 누구나 그 나름의 고유한 영토를 지닌 영주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기치(旗幟)를 내걸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기름진 영토를 보유한 이도 있을 테고 한창 개간 중인 이도 있을 것입니다. 영토의 크기와 연혁에 따라 산출량도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외형적 자산이 영주의 품격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문단(文壇)으로 일컬어지는 이 세계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적 커뮤니티의 얼개에 해당되는 ‘발표 매체’ 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절대 지존은 아닙니다. 굳이 그러한 위상에 값하는 걸 들라면 ‘울림’을 수신하는 수많은 시혼(詩魂)일 것입니다. 시(詩)가 촉발한 울림은 감응의 전도체를 통해 무형의 시혼에 유형의 외피를 입힙니다. 더러는 일군의 외피가 유행을 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영주들 간의 동맹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동맹이 갖는 의미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의를 다지기보다 헤게모니를 잡는 일에 진력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입니다. 독자노선을 포기하고 동맹에 가입하는 영주들은 이 점을 숙고하여 동맹단체의 참뜻을 구현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가끔 영주들의 모임 자리에서 제가 이런 자리에 껴도 될는지 모르겠다며 한껏 자세를 낮추는 이를 봅니다. 문제는 그이의 언행이 단순한 겸양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의기소침한 채 시종여일 변방의 영주임을 자처하는 그이도 딱하지만 마치 수하를 거느린 권력가인 듯 영주의 처세술에 대해, 심지어 영토를 관리하고 운용하는 비법에 대해 훈시하듯 이르는 이를 대하면 곤혹, 그 자체입니다. 실은 이 말을 하려고 눌변을 늘여 왔습니다.
시인은 그 자체로 응분의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시인을 줄 세우거나 작품을 서열화하는 행위는 온당치 않습니다. 사람에게 분복(分福)이 있다면 시작품에는 시운(詩運)이 있습니다. 평단에서 버림받은 시 한 구절이 어느 외진 화장실 벽 낙서로 연명하다 절망감에 빠진 이의 가슴에 군불로 옮겨가는 일이 절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월과 백석 혹은 김수영의 시가 좋기야 하지만 모든 서점의 시집 코너에 그들의 시집만 뻬곡하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루 세 끼를 김치 하나로 때우는 것과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효용론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시는 그 나름의 쓸모가 있습니다. 프랙털이란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수학 개념에서 발원한 말로 사전을 찾아 보면 <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유사성과 순환성을 기하학적으로 푼 것으로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강물이나 구름 나뭇가지 등등 자연계의 현상은 물론 주식값의 그래프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문학 작품 또한 프랙털 현상의 범주에 속할 터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말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학에 관한 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적실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학작품을 관류하는 본질은 대동소이하되 기교랄까 표현법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우열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 외적인 요소, 이를테면 등단 배경이나 소속단체의 지명도 따위가 본질을 흐리게 해선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문단의 병폐라 할 수 있는 알력이나 분쟁의 기저에 모종의 ‘질투심’이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으로 매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목도한 크고 작은 사건의 추이를 보면 그러한 심증을 거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학토론회에서 다루어도 쉬 결론나지 않을 문제를 짧은 시간에, 그것도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논한다는 게 과욕이란 걸 알면서도 발의한 것은 자신이 지닌 영토를 의심하거나 다른 시인의 영토를 보며 의기소침해 있는 시인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에릭 호퍼는 <영혼의 연금술>에서 산을 움직이는 기술이 있다면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산 대신 시를 넣어볼까요? 완벽한 시를 만드는 기술은 없습니다. 이 말은 시인 모두가 자신만의 시를 만드는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화단의 꽃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고개 숙인 시인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인이여, 바람이 불수록 더더욱 나부끼는 기치를 가진 영주시여, 고개를 들고 당신이 세운 시의 표상(表象)에 줄 서기 바랍니다. 당신 뒤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심강우 (시인 · 소설가)
2013년 수주문학상으로 시인 등단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7년 제25회 눈높이아동문학상 동시 당선
2017년 제27회 어린이동산 중편동화 당선
2018년 제29회 성호문학상 수상
시집 『색』 동시집 『쉿!』 『마녀를 공부하는 시간』
장편동화 『시간의 숲』
소설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꽁치가 숨쉬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