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장도(마지막회)

[니코스]

니고유문(泥庫遺文)

그날 밤도 또 성진이와 질탕한 술자리가 계속 되었다.

“내 오늘은 너를 위해 특별한 여인을 하나 불렀다. 내 너의 취향
을 알지. 자 들어 오거라.” 성진이가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문이 열리고 기생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들어 왔다. 술김에 언뜻 보아 채옥 낭자의 모습과 중첩되어 잠깐
취기가 가시며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어때 깜작 놀랐지? 채옥 낭자랑 많이 닮았지. 자 너도 이제는
채옥 낭자일랑 그만 잊어버리고 오늘 밤 금월이랑 하루 밤 즐기
라구. 과거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이제 우리 옛날처럼 풍류나 즐
기며 살자구. 이런 난세에는 그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
리 하고 사는 게 상책일세. 안 그러냐? 금월아. 어서 숙진 도련님
께 한 잔 따르거라.”

“어머 아직 총각이시나 봐요. 소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처럼 준수하게 생긴 도련님을 모시게 되어…..제 술 한 잔 받으십
사와요.”

내가 과거장에서 부린 난동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번 과거는 공정
하게 치루졌다. 이이첨이가 개망신을 당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
매우 고소해 한다. 종각이랑 채옥 낭자랑 혼인식에 이이첨이 만조
백관을 다 초대하여 자신의 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기회로 삼
는다는 등 성진은 계속 지껄어 댔고 나는 계속 마셔만 댔다.

잠깐 잠이 들었던 걸까. 희미한 등잔 불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잇는
채옥 낭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채옥 낭자!” 하고
불렀다.

“정신이 드시옵니까?” 하고 여인이 돌아 보는 데 금월이였다.

“다들 어디 간 게요? 그리고 지금 몇 시각이나 되었소?”

“모두들 먼저 귀가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축시쯤 된 듯 하
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로서 정신을 차리고 이 여인을 살펴 보
았다. 절색은 아니나 그리 밉지 않은 얼굴에 참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많이 취했나 보구려. 금월이라 했나요? 한데 당신은 무엇
으로 사시오?”

“무엇으로 살자함은 무슨 뜻이옵니까?

“인생을 무슨 희망으로 사냐? 함이오.”

“소첩의 꿈이야 이 나이에 모든 계집이 그러하듯이 명문대갓집
자제 앞에서 족두리와 원삼 한번 입어 보는 것이지요. 하오나 미
천한 계집이 언감생심 가능하기나 한 얘기입니까? 저 같은 기생
이야 도련님 같은 양반님네 만나 소실 자리라도 얻어 팔자 고치
는 것이 희망이지요. 왜 소첩의 희망을 들어 주실람니까?”

“아니 세상이 하답답하여 한 번 물어 본 것뿐이오.”

그때 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칠복이였다.
나는 칠복이가 담양에 내려 갔다 상경한 것을 알았으나 왠지 이
순간 만나기가 싫었다.

“내일 아침 오거라. 지금 너를 만나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구나”

“지금 뭣을 하고 계신당가요? 어머님의 말씀이 아니라 채옥 아씨
의 유서를 갖고 왔구만요.”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아니 채옥 낭자의 유서라니? 그럼 채옥 낭자가 자진을?” 나는
눈앞이 깜깜해 지는 것을 느꼈다.

“자진 일보직전에 낌새를 눈치 챈 옥분이에 의해 겨우 목숨은 건
지셨답니다. 한 데 도련님은 지금 너무 합니다. 지금 이처럼 팔자
좋게….채옥 아씨는 옥분이 말에 의하면 홀 몸도 아니라고 합니
다.”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동야사)

나주목사 부부와 나주 임씨문중, 채옥의 꽃가마 등 긴 행렬이 한
양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나 상대가 이이첨
대감의 아들이라 하니 소문을 들은 지방의 각 지방관들이 나와
영접하며 눈인사 하기에 바빴고 이이첨 대감께 전해달라 하는 축
의금이 쇄도 하였다고 전한다.
열 나흘에 동안 계속된 이 여정에는 아무런 불상사가 없었는 데
다만 한양으로 들어가는 이보현 고개에 이르러 대낮부터 술에 만
취한 한 시골 선비 하나가 길가에 대자로 누워 있는 바람에 가마
꾼 들이 모두 가마를 내리고 이 주정뱅이를 쫓아 내느라 애를 먹
였다는 그 정도의 얘기만 전한다.

이이첨의 사저가 있는 효자방(지금의 효자동)은 아침부터 한양뿐
아니라 팔도에서 올라온 축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드디어 신부 일행이 도착하자 군중들은 웅성거렸다.
임목사 부부가 먼저 가마에서 나와 이이첨 부부와 상견레를 하였
다.
명에서 수입한 최신 유행의 비단으로 사모관대를 꾸민 이종각도
이 날만은 꽤 긴장한 듯 보였다.

이윽고 신부가 탄 가마가 도착하고 가마문이 열리고 신부가 나왔다.
군중들이 환호하였다. 그런데 그런 환호 가운데 갑자기 임목사의
부인 김씨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김씨 부인은 “저건 채옥이가 아냐.” 하고 맥없이 중얼거린 후 졸
도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마에서 족두리에 원삼을
걸치고 신부로 나온 여인은 채옥이 아니라 금월이였던 것이다.


6년의 세월이 흘렀다.
1623년 3월 12일 자시(子時 밤 11시-오전 1시).
창덕궁에서는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신분의 한 귀인 하나가 불
과 십 여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초초하게 창의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드디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 귀인의 머리에는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다고 생각되었다.
칼을 빼 들었다. 귀인은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듯 중얼거렸다.

“저들이 진압군이라면 이 칼로 자진하겠지만 저들이 반정군이라
면 이 칼로 광해의 치하에서 수 많은 목숨을 앗아간 대북파 일당
의 목을 치리라.”

“전하. 문을 여시옵소서. 강계부사 김류이옵니다.”

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강계부사 김류
를 비롯한 평산부사 이귀, 함경도병마사 이괄 등이 귀인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전하! 거사에 성공한 듯 하옵니다. 속히 즉위할 태세를 갖추시
고 어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수고들 하시었소. 이괄 장군은 속히 폭군인 광해를 체포하도록
하고 강계부사와 평산부사는 나를 따라 서궁으로 가 유폐된 인목
대비마마를 구합시다.”

이 귀인이 바로 1615년 신경희의 옥사로 죽은 능창군의 형이자
조선 16대 왕(인조)으로 오르신 능양군이었다.
반정군이 궁궐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황급히 궁궐
을 빠져 나가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숨어 있다 이틀 후 체포되었다.

이날 새벽에 거사 소식을 들은 이이첨은 서둘러 짐을 꾸려 세
아들과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가 광주로 도망치다 이보현 고개에
이르러 그를 알아본 유생들에 의해 붙잡혀 일가족 모두 참수 당
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지리산 자락의 초가만 몇 보이는 한적한 마을.
한 농부가 신나게 농부가를 부르며 김을 메고 있었다.

둘러내자 둘러내자 길찬 골 들러내자
바랭이 여뀌를 골골마다 둘러내자.
쉬 짙은 긴 사래는 마주 잡아 둘러내자.(주1)

사내는 잠시 허리를 펴고 이마에 땀을 닦았다. 강숙진이었다.
“아버지” 하고 들리는 소리에 사내가 돌아보니 계집아이 둘이 숙
진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그 뒤로 한 여인네가 등에 갓난 아
이를 업고 머리에는 점심 찬을 담은 소쿠리를 이고 걸어 오고 있
었다. 채옥이였다. 숙진은 한 걸음에 달려가 두 아이를 양 팔에
번쩍 앉아 끼고 채옥에게 다가갔다.

“내가 점심은 집에 가서 먹는다고 나오지 말라 했거늘 당신 고생
스럽게….. “

채옥이 살며시 웃으며 말한다.

“애들이 하도 당신 일하는 데 가자 하여서….”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별 들이 하나 둘씩 밤하늘에 불을 켜며 행복한 옛날 이야기를 들
으려고 모여 들었다. 밭두렁을 따라 반딧불들이 반짝거리며 숙진
가족을 에워 싸며 춤을 추기 시작 했다. 개울가의 맹꽁이들은 숙
진 가족이 다가오자 조금씩 짝을 향한 구애의 소리를 낮추기 시
작했다.
휘영청 밤하늘에 오른 달님은 길을 환히 밝히며 귀를 쫑긋 세우
고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엿들으려 하였다. 숙진이 말 하였다.

“내 예전에 당신의 사랑을 구하려고 나주로 오던 길에 우연히 허
균 선생을 만났는 데 허균 선생이 내 관상을 보고 그럽디다. 평생
치마폭에 싸여 살 팔자라고. 내 당신과 작은 치마 셋을 보니 이제
야 그 뜻을 알겠구려.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크게 상심하였으나
이제 보니 이대로 치마 폭에 싸여 천년 만년 살고 싶구려.”

채옥이 답하였다.

“당신을 위해 앞으로 내 더 큰 치마를 입으려고 하니 저의 배에
살이오름을 너무 탓하지 마오.”

“아니 여보 그건 아니 되오.” 숙진의 정색에 채옥은 깔깔대며 웃
고 무슨 뜻인지 모르나 부모가 웃자 얘들 또한 따라 웃는다.
밤 하늘을 타고 퍼져 간 웃음소리는 달님도 빙그레 미소 짓게 하
였고 정성껏 이 들 가족이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밝
혀 주셨다.


야사에 의하면 6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난 윤선도가 수소문 끝에
숙진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숙진에게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왔으
니 자신과 함께 출사하자고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숙진은 이 곳
이 내 지상낙원인데 내 어찌 흙탕물 속으로 다시 들어 가겠는가?
하고 고사하였다고 한다. 윤선도는 이 같은 숙진의 삶이 부러워
그가 훗날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에 내려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어부사시가가 이 곳에서 완성 되었다.

한편 숙진과 채옥의 그 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전해져 내
려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일부 수집가들에 의해 보존되어 내려오는
니고유문과 화선당 일기만이 전할 뿐이다.

그간 어줍잖은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주1)존재 위백규(存齋 魏伯圭1727-1798)의 농가(農哥)에서 따옴

참고 서적

*유배지에서 부르는 노래, 박준규 지음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돌베게사, 박
무영, 김경미, 조혜란 공저)
*옛 시정을 더듬어 , 손종섭 편저
*조선문인 기행, 허시명 지음
*소대헌 호연제 부부의 한평생, 허경진 지음.
*고집불통 송강평전, 박영주 지음.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박영규 지음
*옛시와 더불어 살아가다. 김풍기 지음
*옛 노래 속의 낭만 여인, 이 민홍 편역
*꽃들의 웃음판, 정민 지음
*은둔의 노래 실존의 미학, 김신중 지음
*선비의 배반, 박성순 지음.

[내사랑오리]

은장도 앞전에 얼핏 지나가면서 읽었는데... 기억이. 죄송해여... 다시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고운날 되시구요.. 자주 창작글방을 이용해주세요...

[줄리리]

은장도 잘읽었습니다.....좋은날 이루시길,,

[거암 염종선]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꽃나라]

며칠 동안 바빠서 은장도를 못 읽어 봤네요 오늘은 잘 읽고 갑니다. 긴글 쓰시느라 너무 수고 하셨습니다 늘 건안, 건필 하십시요

[니코스]

좀 더 잘 쓰고 싶었는 데 제가 무슨 직업적인 작가도 아니고 먹고 살아야 하는 관계로 너무 힘 이 들어서 장문의글 읽어 주신 좋은 글방 회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논두렁깡패]

니코스님 넘 넘 잘보았네요 좋은글 많이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