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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이한림 건설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 부부,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왼쪽부터). photo 연합 |
큰 뜻을 품고
올라온 서울. 그러나 학력도 기술도 내세울 것 없기에 공사판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안암골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 정주영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 머리보다 큰 돌덩이들을 한가득 등짐을 져 날랐다.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고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그는 이를 꽉
악물고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어느 날 인부 한 사람이 돌을 내려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땅에 쿵 떨어진 돌은 훌렁 뒤집히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정주영의 발뒤꿈치를 호되게 쳤다. 순간 찌르르 전기 흐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정주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뒤꿈치에 피가
흐르고 퉁퉁 부어올라 며칠 꼼짝없이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사고를 당하고도 정주영은 공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동생들이 공부할 터전을 자기
손으로 짓는다는 생각이 그를 고려대학교 공사판에 묶어 둔 것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끼겠지. 두고 봐, 비록 나는 그리 못하겠지만, 열심히 돈 벌어 내 동생들만큼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할
테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코흘리개 나이인 열 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정주영은 열다섯 살 때
송전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게 마땅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중학교에 가면 그
학비를 대느라, 동생들이 보통학교도 못 다니게 될까 걱정했다. 동생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처럼 보통학교는 나오게 해주고 싶었다. 정주영은 학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부지런히 밭을 갈고,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왔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이 늘 먹먹하기만 했다. ‘농사꾼으로 살다
죽을 거라면, 뭐 하러 학교에 다닌 걸까? 부모님이 집집마다 고개 숙이며 학비를 빌려 나를 학교에 보낸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밑거름을
마련하라는 뜻이었을 텐데….’
18살 되던 해 정주영은 소 판 돈 70원을 움켜쥐고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간다.
2년여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복흥상회’란 쌀가게의 배달원으로 취직한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회계업무를 맡는 등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23세 되던 해인 1938년 마침내 쌀가게 ‘경일상회(京日商會)’를 연다. 1940년 정주영은 서울 최대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이던
이을학에게서 아현동의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 인수를 권유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아도서비스 경영은 뒷날 정주영이 현대자동차라는 세계적 기업을
만드는 모태가 된다. 일제강점기 열악한 경제상황과 제한된 기업 활동에서도 정주영은 직접 자동차 수리에 매달렸다. 1943년부터 잠시 운수업을
벌였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여 다시 자동차 정비업을 해 나갔다. 어느 날 정주영은 관청에서 건설업자들이
거액의 공사비를 수금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건설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47년 5월 25일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 간판을
올린다. 이어 6·25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 숙소를 지으며 큰돈을 모았다.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숙소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현대토건은 완벽한 시공으로 미군으로부터 “현다이 넘버 원!”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한겨울에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미군의 요청에, 정주영은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는가?”라며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미8군의 공사는 몽땅 정주영의 일이 되다시피 했다.
1957년 9월 현대는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 내어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1962년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한다. 현대건설은 마침내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로 진출한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에서 준설공사 경험을 쌓아 중동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하며 소양강댐을
완공해낸다.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 중반, 고속도로 건설은 한국으로서는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그 무렵
한국 경제 수준으로 볼 때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국내외에서 부정적 의견과 반대가 극심했다. 야당 대표인 김대중, 김영삼은 결사반대에
나서서 양재 공사판에 이불 깔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민의 피땀 어린 열정과 노력을 결집, 실로 눈물겨운 역경을 극복하고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해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감독, 정주영 회장이 현장소장이었다. 정주영은 공사판에서 밤낮을 보내는 열정을 쏟았다. 공사 도중 지반의 수맥이
갑자기 뚫려 자갈과 진흙이 엄청난 압력으로 터져 나와 인부들이 몇 미터씩 떠밀려 매몰되는 현장에서도 그는 위험을 마다않고 앞장섰다.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 집무실과 침실 머리맡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상황 지도를 걸어 놓고 진척 상황을 챙겼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새벽 3시에도 예고 없이
불쑥 현장에 나타나 장화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정주영을 찾아가 격려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한
세계기록을 세웠다. 1968년 2월 착공,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역작이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여건, 비슷한 거리인 400㎞ 구간의 일본 도메이고속도로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에 비해 무려 여덟 배의 건설비가
들어간 것도 실로 극적인 대조다.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는 인프라 건설과 기간산업 발전을 가속화해 주었고, 한국 국민
자신감의 상징이 되었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육당 최남선의 이 말을 늘 마음에 품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 으뜸가는 조선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자체적으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박정희는 영국·미국에서 한국인 최초 선박검사관으로 활동하던 신동식을 불러들였다. 신동식은 1951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6·25전쟁 피란길에 부산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 뱃짐을 점검하는 일을 했다. 산더미만 한 배를 날마다 바라보며 ‘바다를 정복하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임을 굳게 다짐했다. 서울대학교의 교육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여 교수도, 번듯한 교재도 없었다. 그는 졸업한 뒤 머나먼 스웨덴으로 건너가 현지
조선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기능공 양성소에서 밤낮없이 꼬박 5개월간 혹독한 교육을 받은 뒤 설계도 보는 법,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법 등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마침내 신동식은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미국선급협회 등 국제기구로부터 한국 최초의 검사관으로 선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동식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해사(海事) 부문을 담당하게 된 그는 ‘한국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대형 선박을 만들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계획은 비아냥을 받았다.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피어나지 않는다’란 냉소적인 외신까지 나올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조선업을 개척할 인물로 현대건설 정주영을 점찍었다. 정주영 또한 건설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처음에는 배를 만드는 것도 공장 짓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자신감을 가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차관 도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정주영은 일본과 미국을 뛰어다니며 돈을 빌리려 했지만 ‘코리아 같은 작은 나라가 어떻게 배를 만들 수 있겠느냐’며 모조리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태완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앞세우고 청와대로 찾아가 박정희에게 호소했다.
“각하,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일본 여기저기를 돌며 교섭해봤으나, 저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모두 ‘아직 초보기술
단계에 있는 너희 한국이 무슨 몇십만 톤 조선을 하느냐’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선업에 나라의 미래가 걸렸소”
정주영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일국의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적극 지원하는데도 역부족이라며 포기하겠다니,
내가 정 회장 그릇을 잘못 본 거요? 막중한 국책사업을 맡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완수해내야지, 겨우 한 번 시도해보고 어렵다며 반납하겠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건설계 거인이라는 사나이의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오금이 저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정주영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박정희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 회장, 조선업은 정 회장 개인 사업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오. 일본·미국에 다녀왔다니, 이제 유럽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이오.”
마음을 다잡은 정주영은 1971년 9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발이 닳도록 투자자를 찾아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정주영은 선박 컨설팅 회사인 A&P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 이야기를 들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 은행으로부터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장 롱바텀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롱바텀 또한 현대의 자금력과
기술력에 의문을 나타냈다.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갑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이 거북선이란 것입니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지요.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선박 강국의 잠재력은 아직도 한국에 살아
있습니다.”
지폐 속 거북선을 살펴보던 롱바텀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한동안 말 없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정주영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당신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정주영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롱바텀의 추천서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수출신용보증국은 현대조선소의 배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야만 차관
제공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직 짓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정주영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게딱지 같은 초가집 몇 채 서 있는’ 초라한 백사장이 담긴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세계 곳곳으로 배를 팔러 다녔다. 마침내 정주영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자 세계해운업계 거물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급 배 2척을
주문받는 데 성공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들을 내걸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시련 끝에 울산시 미포만 일대에 거대한 ‘현대조선소’ 건설을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조선소 도크를 파고 동시에 한편에서는 선체의 부분들을 재단·용접하기 시작했다. 조선소는 1972년 3월 착공해 2년3개월이 지난 1974년 6월
준공되었다. 최단 시일 내에 조선소를 완공함과 동시에, 26만t급 유조선 2척을 건조, 바다에 띄우는 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세웠다. 배를
인수하러 온 거물 리바노스는 “내가 이제껏 봐 온 배들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졌다”며 극찬했다. 이 일은 지금도 세계 조선사에 남아있는 유명한
일화다. 사진 한 장만을 갖고 이뤄낸 정주영만의 특별한 신화였다. 그 뒤 현대조선은 1975년 확장공사를 통해 최대 선박 건조능력 100만t,
드라이도크 3기 240만t 시설을 갖춘 세계 최대 조선소가 되었다.
선박 건조 계약 중에 중요한 요소는 완성 선박의 인도
시기이며, 수주자 입장에서는 인도 일자에 맞추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보통 선주들은 실제 필요할 때보다 가급적 아주 촉박한 선박 인도
기일을 정하는 경향이 있다. 선박 건조대금을 깎을 때까지 깎다가 안 되면 그 대신 선박 수주 날짜를 확 당겨 제시하는 것이다. 선박 건조 계약은
인도 기일을 어길 경우 그 날짜만큼 손해배상 형태로 배 값을 깎아나가는 조건을 다는 게 관례이다. 날짜를 지켜 주면 예상보다 빨리 배를 움직일
수 있어 좋고, 날짜를 못 지키면 그만큼 배 값을 깎을 수 있으니 선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조선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초기에
중동에서 선박 제조 의뢰가 들어왔다. 최종 계약 자리에서 서명 직전에 선주는 갑자기 인도 날짜를 턱없이 앞당길 것을 요구했다. 실무자들은 난감해
했다. 그 날짜에 맞춰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정주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봐,
해봤어?”
“회장님,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선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주해 온 것들보다 아주 큰 배라서,
엔진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것을 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엔진을 들어 배에 올릴 만한 크레인이 없습니다. 스웨덴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당장
주문하더라도 이들이 요구하는 날짜까지 크레인이 도착할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누가 봐도 타당한 말이었으나, 정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봐, 해봤어?”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태연한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선주 측은 함박웃음을 짓고, 현대조선소 실무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 기일을 맞추기 위해 정주영의 불같은
독려로 피를 말릴 일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선주들이 돌아가자, 정주영은 조선소 책임자들을 불러 말했다.
“해봐.
되는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돼. 내가 해봤더니 그렇게 되더라고.”
그 뒤 완성된 배는 계약 날짜에 정확히
맞추어서 인도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물동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로
정주영은 자동차 생산을 결심한다. 그 무렵 한국 자동차산업은 삼륜차 정도가 제조되고, 승용차는 반제품 조립생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천하의
정주영이라도 한국에서 감히 어떻게 자동차를 독자 개발한단 말인가?” 이것은 미국·일본 등 세계 자동차공업 종주국 업계 전문가들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한국 내의 비웃음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말했다. “무모한 짓 벌여서 건설업으로 번 돈 몽땅 날리지 마시오. 그렇게 자동차 사업을 하고
싶으면, 미국 자동차회사 하청생산이나 하는 게 좋을 거요.”
정주영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업계를 대신하여,
정주영의 자동차산업 진출 의지를 꺾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하는 미국 대사에게 정주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내가 번 돈을 다 털어댄다 해도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 세대에 성공을 못한다 해도 후대들에게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정주영은 먼저 해외 기술제휴선을 찾았다.
미국·유럽·일본 여러 업체를 수소문한 끝에, 타 업체와 달리 경영권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지 않은 포드로 정했다. 포드 쪽에서도 여러 한국 기업을
평가한 뒤, 신용도와 자본력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현대와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의 적극적 지원으로 자동차 제조 허가를 받은 뒤 정주영은
울산시 양정동에 1968년 10월 1만3000여㎡ 규모의 현대자동차를 세웠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 조립차종으로 ‘코티나’와 ‘D-750’
트럭을 생산했다. 그 뒤 ‘포니’가 생산될 때까지 현대자동차는 승승장구했다. 포니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강조한 ‘국산기술 자동차’로 손색이
없는 데다, 국내 도로사정에 적합해 한국 최초 소형차 시대를 열었다. 포니는 90%의 국산화율로 만든 ‘토종 차’로, 현대자동차는 당시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모델을 가진 자동차회사로 이름을 드높인다.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포니는 세계
자동차업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우수한 스타일링과 한국 최초의 자동차’라는 점이 현지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3대
일간지인 이탈리아의 ‘라 스템파’는 ‘한국이 이제 자동차공업국의 대열에 올랐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는 정부로부터 차관도입 허가를
받아 종합 자동차산업을 위한 제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발목을 잡고 나섰다. 미국 자동차업계는 한국을 장차 유력한
잠재시장으로 보고 있었으며, 더불어 우수한 한국인 숙련공들을 활용하여 일본 자동차업계를 누르고 아시아시장을 제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까지 현대·기아·GMK·아시아 등 한국 자동차회사들은 해외모델 조립·생산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현대가 독자 모델을 개발하여
호평을 받은 것이다.
<다음 호에 중편
계속>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첫댓글 영국의 선박 컨설팅회사 롱바텀 회장에게 정주영씨가 한국의 500원 지폐를
보여주면서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설명에 ‘당신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면서 추천서를 받아내는
임기응변의 빛을 발휘하는 순간, 오늘의 현대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주영회장의 굳건한 의지와 기지가 돋보이는 일화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