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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벌써 아침인가?” 새벽까지 뒤척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든 진우청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창밖을 응시했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창문 밖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딱 맞군…….” 진우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어제 저녁, 아니, 어제 한 밤중의 일들이 떠올랐다. 신들린 듯 춤을 추다 정신을 차린 후, 난감한 기분과 함께 석고대죄라도 할 양으로 두 노인 앞으로 다가갔지만 해천 노인은 ‘그만 들어가서 주무시게’ 라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백운 노인과 함께 등을 돌렸다. 숙소로 들어온 진우청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떨어져야할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는데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까짓 거! 때리면 맞고, 구르라면 구르고… 몸으로 때우면 될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자 불안감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사라진 자리를 이여옥에 대한 생각이 빠르게 메워왔기 때문이었다. 일어섰다가 넘어지고, 그러면서도 기를 쓰며 일어서서 춤을 추어보려고 하던 여인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쩌다 그런 몹쓸 병에 걸렸을까?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약속을 하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와서 한 번 더 춤을 추게 해 줄 수 있을까? 자신이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출을 결심하며 잠시 스쳐 가는 곳이기에 다시 들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거지꼴로 돌아다니다가 중원 십팔만리 곳곳에 퍼져있는 가솔들 눈에라도 띄고, 할아버지 손에 잡혀서 집안에 가두어진다면 어림없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저런 생각들 때문에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진우청은 심호흡을 하며 상념들을 지웠다. 앞날이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머리 복잡하게 벌써부터 과도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공자님 할아버지께서 부르세요.” 좀 더 날이 밝자 인기척과 함께 조수아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진우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셨습니까?” 노인들의 숙소로 안내되어 온 진우청은 두 노인 앞에 서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앉게나.” 해천 노인이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어제의 그 꽃잎으로 만든 차가 놓여져 있었고, 두 노인의 잔은 이미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코로 음미하며 최대한 천천히 마시는 두 노인의 습관으로 보아 제법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진우청이 자리에 앉자 백운 노인이 진우청의 찻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라도 좋다고 했던가?’ 진우청은 찻잔을 코앞으로 갖다 댔다. 탁자에 놓여져 있을 때는 아무런 향기를 맡을 수 없었지만 코앞으로 찻잔을 가져오자 은은한 꽃향기가 온 사방에서 밀려오는 듯했다. 진우청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다향을 음미했다. 잠시 후면 두 노인에게서 어떤 호통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이 순간만큼은 깨끗이 사라지고 꽃향기만이 온 뇌리에 가득한 채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게 했다. 어제 저녁에 맡은 향기와는 뭔가 또 다른 것 같았다. 진우청은 얼핏 그런 느낌을 받으며 다시 한 번 다향을 음미했다. 찻잔 속에서는 어제처럼 수백 가지의 꽃향기가 한꺼번에 풍겨 나왔지만 뭔지 모르게 어제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제보다 향기가 훨씬 깊은 듯도 했고, 종류가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했다. 딱히 말로 표현하거나 집어 낼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 차는 우리 여옥이가 자네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라네.” 생각에 잠긴 진우청의 귓전으로 해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우청은 문득 다향 속에 파묻힌 의식을 일깨우며 해천 노인을 쳐다보았다. 해천 노인의 눈빛에는 진우청이 우려해 마지않고 있는 노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고맙네!” 진우청의 느낌대로 해천 노인은 노갈 대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무슨……?”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진우청은 해천 노인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 아이를 맡아 기르며 이제껏 한 번도 해주지 못한 일을 어제 저녁 자네가 해주었네.” 감사의 말과 함께 다시 입을 연 해천 노인은 이여옥의 기구한 운명과 그로 인해 자신이 이여옥을 맡아 기른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짤막한 얘기였지만 그 얘기 속에 담긴 기구한 사연에 진우청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고 듣고만 있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 지방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기이한 체질 때문에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여인의 신세는 그야말로 새장에 갇힌 새 신세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젯밤 그렇게 춤을 추고 싶어 했던 것인가?’ 진우청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금소리에 맞춰 몇 번을 거듭해서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춤을 추려던 이여옥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심 혀를 찼다. “한 순간이나마 내 손녀에게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자네에게 보답의 뜻으로 선물을 한 가지 하고 싶네.” 해천 노인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진우청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몸을 움직여 옆에 놓아두었던 작은 상자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지 않으셔도…….” 몽둥이찜질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 진우청은 뒤늦게 사양했지만 해천 노인은 손을 들어 진우청의 말을 막았다. “그냥 내 약소한 성의이니 거절하지 말게.” 해천 노인은 진우청이 더 이상 사양할 수 없게 한 다음, 가장자리 부분에는 아직도 먼지가 자욱이 쌓인 상자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아마도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아 다 털어내지 못한 가장자리에는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는 것 같았다. 탁! 해천 노인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거무튀튀한 색깔의 몽둥이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두 개의 몽둥이를 본 진우청은 흠칫 놀라며 해천 노인과 백운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몽둥이찜질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 공교롭게도 몽둥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 노인이 선물이란 그럴듯한 말과 함께 정말 몽둥이찜질을 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으로 진우청이 잠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이, 진우청 만큼이나 갈피를 못 잡는 표정을 하고 있던 백운 노인이 입술을 움직였다. “자네 정말……?” 짧게 내뱉은 백운 노인은 쉽게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해천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건 용호곤(龍虎棍)이라고 불리는 물건일세.” 백운 노인의 표정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은 해천 노인은 두 개의 몽둥이를 들어 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놈이 용, 그리고 이놈은 호랑이, 그래서 용호곤일세!” 해천 노인은 두 개의 똑같이 생긴 몽둥이를 각각 들어 올려 이름을 가르쳐 주며 옷소매로 몽둥이의 표면을 쓰윽 닦았다. 나무 상자의 틈사이로 스며들었는지 두 개의 몽둥이에도 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해천 노인의 옷소매가 한 번 스쳐지나가자 검은 색 몽둥이는 범상치 않은 묵광을 드러냈다. 두 개의 몽둥이는 똑같이 생긴 듯 했지만 자세히 보면 한 쪽 끝부분이 약간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끝부분에는 톱니 같은 이빨이 새겨져 있었는데 용이라 불린 몽둥이의 이빨이 조금 컸고, 호라 불린 몽둥이의 이빨이 좀 작았다. 진우청은 그 끝부분의 그 이빨 모양은 상대를 공격할 때 훨씬 강한 타격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해천 노인의 손이 움직이며 두 개의 이빨을 맞물리게 하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느꼈다. 쨍! 해천 노인이 용곤과 호곤의 이빨을 맞추자 머릿속까지 상쾌하게 울리는 금속성과 함께 두 개의 몽둥이는 하나의 긴 몽둥이로 합쳐졌다. 하나로 합쳐지고도 여운이 남아있는 그 금속성을 이루어 보아 몽둥이의 재질은 나무가 아니라 쇠임을 알 수 있었다. 두 개의 이빨을 맞물린 해천 노인은 몽둥이를 잡은 손에 내력을 불어 넣었다.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용호곤이 진동했고, 두 개의 맞물린 이빨이 빙글 돌아가며 완벽히 하나로 결합됐다. 두 개의 몽둥이는 그렇게 하나의 곤이 되기도 하고 분리하면 두 개의 단곤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분리되어있으면 용곤과 호곤의 단곤이 되지만 이렇게 합치면 용호곤이라는 하나의 제미곤(薺眉棍)이 된다네.” 설명과 함께 노인은 용호곤을 세웠다. 한 개로 이어진 용호곤은 보통사람의 눈썹어림에 닿을 길이로 제미곤이란 일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강호인이셨습니까?” 제미곤으로 변한 용호곤을 아무렇게나 들었지만 그런 해천 노인의 자세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모습에 진우청은 해천 노인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네. 그때 강호와 인연을 끊으며 이놈 역시 깊은 강물 속에 버려야 했으나 한 가닥 미련 때문에 가지고 있었는데 자넬 보니 문득 선물로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네.” 해천 노인은 천천히 용호곤을 진우청에게 내밀었다. 진우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로 내밀어지는 용호곤을 바라보았다. 산을 내려오며 애타게 배우고 싶었던 것이 몽둥이후리기 기술이 아니었던가? 최소한 그거라도 하나 배워가야 조부님 손에 맞아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몽둥이가 전혀 뜻하지 않은 노인에게서 자신에게로 건네졌다. ‘몽둥이라…….’ 진우청은 용호곤을 잡은 손에게 전해지고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며 쓴 웃음을 삼켰다. 전생에서부터 자신과 몽둥이는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뜻하지 않는 곳에서까지 몽둥이를 선물 받을 수 있겠는가? 진우청은 한 손으로 용호곤을 빙글 돌려 보았다. 자신의 눈썹에 도달하기에는 좀 짧고, 무게 역시 약간 가벼운 기분이 들었지만 한 번 휘두르면 바위라도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한 번 분리시켜보게.” 용호곤을 건넨 해천 노인은 진중한 눈빛으로 진우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진우청은 두 손으로 용호곤의 양쪽 중간부분을 잡고 힘을 불어넣었다. 해천 노인인 했을 때처럼 우웅하는 소리가 들리며 용호곤의 중간 부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천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용호곤을 분리하는 진우청을 쳐다보고 있었다. 쨍- 예의 그 금속성과 함께 용호곤이 용곤과 호곤으로 분리되었다. “가지고 다닐 땐 그렇게 분리하면 편할 걸세. 나에겐 그렇게 분리해도 컸지만 자네 등에 꽃아 넣으면 가지고 다니는 지도 모르겠구만…….” 해천 노인은 진우청의 상체를 쳐다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는 이젠 완전히 강호와 인연을 끊은 노고수의 탈속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휘익- 휙- 진우청은 두 개의 단곤으로 변한 용호곤을 양손으로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하나로 합쳐 제미곤으로도 훌륭한 무기가 된 것 같았지만 이렇게 두 개의 쌍곤으로도 휘둘러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젠 이 용호곤에 어울리는 절기 몇 가지만 배우면 조부님 앞에서도 최소한의 할 말은 있을 것 같았다. 진우청은 조수아에게서 손해 본 마흔 냥을 모두 탕감해 주어도 오히려 이익일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해천 노인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용호곤을 선물한 해천 노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진우청을 쳐다보다가 아침 준비가 되었으니 식당으로 가자는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노인장 잠시만…….” 진우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천 노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해천 노인은 진우청의 목소리에 일으키던 신형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더 주실 것은 없으신지요? 설마 이것만 선물하신다는 말씀은……?” 진우청은 용호곤이 들어 있던 상자안과 해천 노인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런 범상치 않은 무기를 선물했다면 당연히 그 사용법도 같이 넘겨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다시 말해, 곤술이나 봉술… 그런 것도 같이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해천 노인은 용호곤 두 개만 달랑 넘겨주고 일어나려 한 것이다. “선물이 너무 약소한가?” 해천 노인은 잠시 진우청을 쳐다보다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과분한 선물입이다.” 진우청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과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물을 주셨으면 이것을 사용하는 법도 가르쳐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우청은 사용하는 법이란 말이 단순히 이것을 조립하고 분리하는 법이 아니라 곤술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용호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해천 노인 역시 그 뜻을 알아들은 모양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비급 같은 것은 없다네. 그리고 이미 훌륭하신 사부를 모신 자네에겐 내 잔재주가 필요치도 않을 것이네. 단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세상 모든 무기의 근본은 바로 이 곤일세. 검이나 도를 만들기 이전에 인간은 제일 먼저 몽둥이를 무기로 삼았을 테니까 말일세. 언젠가 그걸 버리지 않고 사용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걸 자네 팔이라고 생각하게. 이젠 자네가 주인이니 버린다고 해도 나로서는 무방한 일이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네.” 진우청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해천 노인은 입을 굳게 닫은 후 그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진우청은 어이없는 심정이 되어 할 말을 잃고 해천 노인을 한참 쳐다보았다. 사부를 모시긴 했지만 배운 건 춤밖에 없었다. 그러니 곤술 몇 가지 정도를 해천 노인에게서 전수 받는다 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 역시 사부처럼 어이없는 기분만 잔뜩 들게 하고는 추방을 하려하고 있었다. ‘어째 난 이런 노인들하고만 꼬이는 것인가?’ 진우청은 백운 노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같이 하룻밤을 지내며 무슨 곡절을 알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백운 노인 역시 지기인 해천 노인의 행동이 수긍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운 노인은 해천 노인이 처음 용호곤을 내어놓을 때부터 그런 표정이었고 지금까지 그러고 있었다. 진우청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해천 노인의 굳게 다문 입술이나 백운 노인의 표정에서 더 이상 뭘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쇠몽둥이 하나를, 아니, 두갠가…? 그걸 선물 받은 것으로 만족할 일이었다. 그러나 뭔가 어이없는 기분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쓰는 법도 익히지 못한 몽둥이 두 개로 뭘 하란 말인가? 차라리 검이라면 모양이라도 좀 더 날게 아닌가? ‘내 팔자에 선물이라고 별게 있을까.’ 마침내 진우청은 모든 미련을 버렸다. 이젠 해천 노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버려도 무방하다 했으니 정 귀찮으면 팔아서 노잣돈에 보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진우청은 방문을 나섰다. “자넬 이해 할 수가 없구만!” 아침을 먹고 난 후 둘만 있게 되자 백운 노인이 해천 노인을 보고 말했다. “언젠가는 끊어내야 할 인연이었으나 기회가 없었지. 그런데 그 기회가 온 것일 뿐이라네. 저런 아이에게 넘겼으니 지하에 계신 사부께서도 서운해 하시지 만은 않을 것이네.” 해천 노인은 마당에서 꽃을 구경하는 진우청을 창문 너머로 쳐다보며 한 점 미련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닐세.” 백운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해천 노인은 백운 노인의 궁금증을 이해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용호곤만 물려주고 용호십육곤술(龍虎十六棍術)은 정말 물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백운 노인은 속에 있던 궁금증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질문했다. “허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인가?” 해천 노인의 공허한 웃음에 백운 노인은 입맛을 다셨다. “나라고 왜 욕심이 없겠나, 강호에 대한 미련을 끊었다고 했지만 용호곤을 아직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게 아니라는 반증이겠지. 인연이 닿는다면 누군가에게 불완전한 내 절기일망정 모두 물려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하곤 했지. 하지만 이젠 정말 미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네.” 해천 노인의 알 듯 말 듯한 말에 백운 노인은 마침내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 지기로 누구보다 해천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어제 밤, 저 아이의 움직임을 보지 않았나? 혼자서는 세 발짝도 제대로 못 걷는 여옥이를 손끝 하나만으로도 가볍게 일으켜 세우고, 발끝 하나만으로도 선녀처럼 춤을 추게 하는 모습을…….” 해천 노인은 어젯밤을 회상하는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자신의 몸이 아닌, 남의 몸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한 순간이나마 완벽히 읽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게 본다면 온몸 전체로 허물어지려는 여옥이의 모든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어 제 몸처럼 통제한다는 것은 상상이 안 가는 일이지. 더더구나 저 아이는 모든 움직임의 중심이 되는 한 점을 정확히 찾아내고 그 한 점을 가볍게 찍어 온몸 곳곳으로 흐트러지는 여옥이의 몸을 바로 세워 놓았지.” “솔직히 그런 점에서는 깜짝 놀랐다네.” 백운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 같은 건 배운 적 없고 이상한 춤만 배웠다고 했지만 저 아이의 무공에 대한 신체적응력은 극한에 도달해 있는 상태인 것 같네. 어떤 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아이의 사부가 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은 초식뿐이었을 것이네.” 해천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은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건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일세. 뻗는 대로 초식이 되고, 내지르는 대로 개산장(開山掌)이 되는 힘을 물려준 이상, 초식이니 검식이니 하는 것들은 사족이나 마찬가지겠지. 저 아이는 결국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옷이 아닌, 자기 몸에 가장 잘 맞은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듯이 그렇게 초식을 익힐 것이야. 그리고 그 옷이 작아지면 자연스럽게 벗어버리고 다시 자기 몸에 맞는 옷으로 바꿔 입게 되겠지.” “그래서 자네 역시 초식을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군?” 백운 노인은 이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는 눈빛으로 해천 노인을 바라보았다. “용호곤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무서운 초식과 힘으로 휘두르게 될 걸세. 내 능력이 모자라 결국 다 깨우치지 못한 불완전한 초식을 고집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나은 일이지. 사부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야. 절기는 사라졌지만 애병은 남아서 이름을 떨칠 테니까…….” 해천 노인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마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해천 노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해천 노인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방 옆면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는가, 해천?” 대화가 끝나갈 무렵, 그 답지 않게 서두르며 급히 책장에 있는 책들을 찾아보는 해천 노인의 행동에 백운 노인은 의아한 눈길로 해천 노인을 쳐다보았다. 해천 노인은 한참동안 넓은 책장 이곳저곳을 뒤지며 뭔가를 찾았지만 자신이 찾는 것이 없는지 결국은 머리를 저으며 책장 앞에서 물러났다. “예전엔 이 구석 어디엔가 꽂혀 있었는데 책장을 정리 하면서 버렸나 보구만.” “뭔데 그러는가?” 백운 노인은 해천 노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기담록(奇談錄)이라는 책일세.” “기담록?” “그렇다네. 오래전에 우연히 손에 넣은 책인데 그냥 이곳저곳 떠도는 도깨비 얘기나 귀신 얘기,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 등, 허황된 전설 등을 적어 놓은 책이었는데 심심풀이로 한 번쯤 읽어 볼만한 가치 밖에 없는 것이라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가 버린 모양일세.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원.” 해천 노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런 책을 지금 왜 그렇게 찾으려 하는가?” “저 청년이 자신이 배운 춤에 대해 어제 해준 얘기가 떠오르며 그것과 함께 그 기담록이란 책 속에 있던 어떤 내용이 생각나네. 어제 저 청년이 자신의 춤을 뱀 춤이라 한 말 기억하는가?” “뱀 춤? 글쎄… 용무라 하지 않았나?” 백운 노인은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건 자기 사부가 명명한 것이고… 저 아이는 뱀 춤이라 했네. 그 말을 생각하니 불현듯 아주 오래전에 읽은 내용이 떠올랐네.” 해천 노인은 오랜 기억을 떠올리는 모양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내용인데 그러는가?” “아주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자네 혹시 하북성에 있었다면 호양문(互暘門)이란 검파를 기억하는가?” “호양문? 글쎄 기억이 안 나는구만.” 백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걸세. 이미 수백 년도 더 된 얘기니까. 그 책 어느 구석엔가 있던 얘기인데 다른 내용들과 다르게 호양문이란 문파의 이름도 나오고, 조금은 더 사실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네.” 해천 노인은 호양문을 알고 있는 듯 설명을 해 나갔다. “그러니까 그 얘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해동(海東)이라는 작은 나라에 있는 장백산이라네.” “장백산이라면… 장백파가 있다는 그곳 말인가?” “그렇다네, 바로 그곳일세. 당시 호양문의 문주 상천행(上天幸)은 장백파의 문주 을지선민(乙支宣旼)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고 했네. 그래서 그는 을지선민의 회갑을 맞아 호양문의 여러 호법들과 고수들을 데리고 장백파로 갔다네. 장백산에 도달했을 때의 계절이 장마철이었던지라 그들은 많은 고생을 하며 험한 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야영을 하던 중 큰 산사태를 만났다고 했네. 잠을 자던 도중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라 고수들인 그들도 어쩔 도리 없이 모두 매몰되고 말았지.” 해천 노인은 마치 자신의 얘기인 듯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매몰되어 황천길로 갈 뻔했던 그들은 어느 낯선 계곡에서 정신을 차렸다네. 그 큰 산사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처음에는 그곳이 저승이라 생각했다고 했네. 하지만 곧 그들은 그곳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조되어진 것을 알았지.” “그곳 계곡 사람들이라면 해동국 사람들 말인가?” “그렇겠지. 우리가 부르기로는 동이족(東夷族)이라고도 하고 해동인들 이라고도 하지. 그리고 그 산을 그들은 불함산(佛咸山))이라 불렀지.” 해천 노인도 기담록의 내용을 계속 설명했다. “그 책에 적힌 내용으로는 그들은 흰옷을 즐겨 입고 예(禮)와 도(道)를 숭상하며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했네. 그들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험로에 지치고 산사태로 다친 육신을 다스렸지. 그들이 주는 음식과 탕약은 웬만한 영약보다 효력이 좋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몸을 추스를 수가 있었고 오히려 처음 출발할 때보다 더 기력이 충만함을 느꼈다고 했네.” “허허! 점점 흥미로운 얘기가 되어가는 구만.” 백운 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며칠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호양문의 문주 상천행은 그들을 구한 계곡 마을 사람들이 동이 트는 새벽이면 모두 일어나 태양을 바라보며 춤을 춘다는 걸 알았지. 호기심이 인 상천행은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남녀노소 모두 모여 추는 그 춤은 무척이나 이상하게 보였다고 적혀 있었네. 시작할 때는 어깨부터 먼저 들썩거리며 추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 중원 사람들이 행하는 도인술(導引術)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전혀 다른 춤 같기도 했는데, 무슨 연체동물이나 뱀처럼 유연하게 온 몸을 움직여서 고수인 상천행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었다고 했네.” “뱀이나 연체동물의 움직임 같은 춤이라……. 이거 점점 재미있어 지는구만.” 해천 노인은 그 춤이 어떤 것인지 쉽게 짐작이 안 간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 춤을 따라 추던 상천행은 피식 웃고 그 자리를 떴다고 했네. 그렇게 끝났으면 죽을 뻔한 목숨을 건진 것으로 그에게는 더없이 다행한 일이었을 것인데…….” “왜 무슨 다른 일이 일어났는가?” 백운 노인은 꿀꺽 침을 삼켰다. “호기심이 강한 상천행은 떠나기 전날 그 계곡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계곡의 깊은 곳에서 노인들이 새벽에 본 그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목격했지. 처음에는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이 태양을 바라보며 추는 춤과 똑같았는데 그 노인들의 춤은 서서히 새벽에 본 그 춤과 달라져 갔다네.” “어떻게 말인가?” 백운 노인은 이젠 완전히 해천 노인의 얘기 속으로 빨려 들었다. "처음에는 연체동물의 춤처럼 이상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연기가 하늘로 퍼져가듯, 구름이 허공에 떠가듯 그런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더군. 상천행은 문득 그 춤에서 그동안 자신을 지독히 괴롭히던 무리(武理)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네. 그래서 완전히 그 노인들의 춤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지. 노인들의 춤이 끝나고 상천행은 그 춤만 제대로 배운다면 자신의 무공이 한 단계 높아짐은 물론이고 호양문이 중원제일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과 함께 그 이상한 춤이 혹시 무공이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지. 당시 하북팽가와 치열하게 패권다툼을 하던 호양문의 문주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겠지. 상천행은 장백파로 출발할 날짜를 하루 늦추며 그들의 춤을 살폈다네. 그들은 자신들의 춤을 신선무(神仙舞)라 부르며 속세의 삶 동안 그 춤으로 육신의 무게를 떨쳐내고 신선이 되고자 추는 춤이라고 했다네. 그리고 그 춤으로 그들은 육체적 능력은 물론이고 영적인 능력까지 높인다고 했다더군.” “육체는 물론, 영적인 능력까지 키우는 신선무라? 세상에 그런 춤이 실제로 있는 모양이구만. 허허!” “그건 모르지. 허구일 수도 있으니까……. 호양문 문주 상천행 역시 신선이 되는 춤이란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욕망으로 인해 콩깍지가 끼인 그의 눈에는 그 춤이 점점 무공으로 보였지. 어느듯 그 춤을 무공으로 확신까지 하게 된 그는 급기야는 그 춤을 가르쳐주기를 간청하였다네. 그런 것일수록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원칙이 엄격하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이건만 욕심이 그의 의식을 마비시킨 것이지. 그렇게 욕심에 눈이 먼 상천행은 계속해서 가르쳐 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 계곡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춤은 말 그대로 대대로 내려오는 신선무일 뿐, 절대로 무공이 아니며, 모두 배우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는 설명과 함께 상천행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했지. 비극은 그때부터였다네.” 해천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계속하게 이 사람아…….” 출처도 의심스런 전설 같은 이야기였지만 이미 그 속에 푹 빠진 백운 노인은 잠시 동안의 끊김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채근했다. “욕심이란 마귀에 완전히 정복당한 상천행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그들 마을 아이 하나를 잡아 핍박하며 비급을 내어 놓으라 다그쳤지. 외인들의 욕심이 생각보다 크고, 그 때문에 아이가 희생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몰려나와 애를 풀어 달라고 애원했지만 상천행은 더더욱 아이를 핍박했고, 어느 순간 그 아이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네.” “허허! 인간의 욕심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야. 쯧쯧!” 백운 노인은 혀를 찼다. “그때부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네. 하나같이 검을 소지한 호양문 고수들에게 두려운 눈빛과 함께 순한 양처럼 애원만 하던 그들은 아이가 죽자 모두 일어서 온몸으로 부딪쳐 왔다네. 하지만 맨몸인 그 마을 사람들이 검으로 무장한 호양문 고수들을 당할 수 없어 밀렸지. 처음에는 그랬지…….” “처음에는……?” “그렇다네. 처음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도 하고 밀렸지. 하지만 그건 단 반 시진 뿐이었다고 하네.” “그다음은?” “반 시진 정도 후부터 계곡 깊은 곳에 있던 노인들까지 가세하여 부딪쳐오자 서서히 호양문 고수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다고 하더군.” “역시 그들은 무공을 익히 고수들이었단 말이지?” 백운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닐세.” 해천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백운 노인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그들의 동작은 극히 단순하고 일반적인 움직임이었다네. 무공 초식에서 볼 수 있는 허초나 변초도 없었고, 급소를 골라 공격하는 살초도 없었다네. 그런데 그 단순한 동작이 그들이 추는 신선무속에 녹아들자 호양문의 어떤 초식보다 무서운 위력을 띠게 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상천행은 물론, 호양문의 여러 호법들과 고수들이 급급히 밀리기 시작했다네.” “허허! 무공도 아닌 동작이 절세 초식을 누르다니, 그게 가능한가?” “그야 모르지. 하지만 호랑이도 무공은 안 배웠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앞에서 호랑이가 후려치는 앞발을 막을 수 있는 고수가 얼마나 될까?” 해천 노인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시간이 갈수로 점점 더 밀리게 된 호양문 고수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지. 무공이라 볼 수 없는 이상한 춤, 그러나 그 춤과 어우러진 단순한 동작은 어떤 무공보다 위력적이었으니까 말일세. 결국 호양문의 고수들은 두 시진이 채 지나기 전에 그 신선무를 추는 사람들에게 모두 제압당하고 말았지.” “믿을 수 없는 기담이로구만.” 백운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해동이란 나라는 그런 곳이지. 땅은 중원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지만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기운은 그곳이 신선들의 고향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모두 죽었다면 이런 기담이 전해지지도 않았을 테고… 몇 명 살아남은 모양이군.” “그들에게 제압당한 호양문 사람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네.” “그럴 수가?” 백운 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준엄한 목소리로 호양문 사람들을 꾸짖고, 어떤 수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무공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내쫓았다고 하더군.” “바보들 아닌가?” “내 생각도 그렇다네. 우리 같으면 단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을 텐데 말일세. 그렇게 추방당한 호양문 사람들은 그 뒤 어떤 노력으로도 무공을 회복하지 못하고 호양문은 패망의 길을 걸었지. 훗날 그때의 잘못을 뉘우친 상천행 문주 이하, 그 자식들이 참회하는 심정으로 신선무를 추는 사람들을 찾아 몇 달을 헤매었지만 그 계곡은 거짓말같이 찾을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기담은 끝을 맺었다네.” 긴 얘기를 끝낸 해천 노인은 차를 몇 모금 마셨다. 백운 노인은 나비를 잡아 손등에 올려놓고 장난을 치고 있는 진우청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 생각으로는 저 아이의 사부가 그 계곡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저 아이의 사부가 어떤 인연으로 그 신선무를 익히게 되어 저 아이에게까지 전해졌을 수도 있겠지. 저 아이가 자신의 춤을 뱀 춤 같다고 한 것과, 그들의 춤 역시 뱀이나 연체동물의 움직임처럼 유연했다는 말도 그렇고, 또 무공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춤 속에 녹아든 동작은 어떤 무공보다 위력적인 점등을 보면 그 기담록 속의 얘기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네. 수련과정을 설명했던 저 아이의 얘기를 미루어보면 중원의 무학이 어느 정도 스며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일세.” “정말 기담이로구만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게 느껴지는…….” 백운 노인이 긴 한숨을 토했다. “나 역시 어느 것 하나 확신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네. 그 책에는 모두 허황된 얘기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 아이는 비록 초식 같은 건 전혀 몰라도 무공에 대한 신체 적응능력은 극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네.” 해천 노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 아이는 그걸 얼마나 알고 있는 것 같은가?” “글쎄. 저 아이 말을 들어보아서는 자신의 사부가 춤의 근원이나 능력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은 것 같구만. 그러나 그건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언제까지 모를 것도 아니지.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깨달아 나가겠지.” “저 아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점점 더 궁금증이 이는구만. 설령 저 아이가 배운 춤이 동이족의 신선무라 하더라도 그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신선무속에 녹아든 평범한 동작들이 깨알같이 많은 중원의 고수들 사이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일세.” 백운 노인의 말에 해천 노인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과 함께 진우청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무공초식이라고는 반 푼도 모르는 이상한 고수 한 명이 탄생 한 것은 확실하구만. 허허허!” 백운 노인의 웃음소리가 실내를 감돌았다. |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ㄳ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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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