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 1844-1900)는 초인(超人)을 설파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초인은 독일어로 Übermensch, 영어로는 Overman, Superman으로 번역되면서 접두사 Über의 뜻을 살려 자기 극복을 통해 더 높은 인간이 된다는 뜻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초인은 지금의 인간을 극복한 더 나은 인간의 존재 유형으로 여겨졌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 이념에 니체의 초인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했고 최근 인공지능(AI) 전문가들은 초인을 앞으로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 내야 할 이상적인 미래인류의 원형으로 삼기도 한다. 초인을 죽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 완벽한 인간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정의하면서 ‘하천’을 극복해 ‘바다’가 되어라고 충고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초인이 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더러운 강물’과 같다고 비판한다. 냄새나는 작은 하수구, 오염된 하천과 같은 인간은 속이 좁고 이기적이며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인은 이러한 수많은 오수(汚水)를 품는 넓은 바다와 같다. 초인은 다른 사람을 배척하거나 경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더러움을 피해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초인은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 존재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바이러스 사이에 살아도 병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깨끗한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도 잘 지낸다. 초인은 더러운 강물이 없다면 바다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다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강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차별적인 포용력을 뜻한다. 덧붙여 차라투스트라는 더러운 물로도 자신을 씻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깨끗한 사람이라는 역설을 펼친다.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그 어떠한 잔으로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깨끗함을 잃지 않으려면 더러운 물로 자신을 씻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남이 더럽다고 멀리하는 사람은 더러운 것에 민감한 결벽증 환자일 뿐이다. 냄새나는 사람, 결함이 있는 사람, 불완전한 사람을 품되, 자신은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초인이 의미하는 바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 남을 편 가르는 도덕적인 기준이 없어야 된다. 남을 악하고 불결하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초인은 현실을 떠나 높은 산에서 혼자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사는 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바다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을 거부하는 자는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은 역설적으로 늘 더러움과 함께 살아가는 자다. 깨끗함과 더러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 자체가 없어야 자정작용을 하는 바다와 같은 큰 사랑이 가능해진다. 바다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낮아야 된다. 바다가 높으면 강물이 유입되지 않는다. 니체의 바다는 남보다 자신을 더 낮추어 타인을 품을 수 있는 넓은 관용과 겸손의 정신을 뜻한다. 초인은 어원적으로는 높은 인간이지만 그 의미를 따져 보면 가장 낮은 인간이 된다. 타인을 품기 위해선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어 마음을 넓혀야 된다. 바다처럼 넓게 살기 위해서는 남과 사소한 일로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늘 자신에게 모난 부분이 없는지 살펴봐야 된다.
✺ 니체(Nietzsch)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책에서 읽을 만한 글귀
✵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서문 4절
✵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까지나 제자인 채로 머무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대로 된 보답이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부 22.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살을 하며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 中
✵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의 길' 中
✵ 그대들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아침에는 긍지에 가득차 있다가 밤이면 체념하고 마는가?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노새가 아니던가?
한방울의 이슬에도 몸을 떠는 장미 한송이와 우리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삶에 친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데 친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아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닷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출처: 동아일보 2024년 07월 09일(화)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