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 정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 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 한다. 저 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 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 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룩할 한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 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카요 롯 카요 롯 -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 상징학연구소, 2025년 봄호
첫댓글 손가락을 쫙 펴고 엄지와 소지까지 한 뼘이다.
사람마다 한 뻠의 길이도 다르고 한 평생도 그 길이가 다르다.
자벌레는 심지어 눈금이 없으니 한 평생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그래도 측량사에 버금가는 자벌레라는 명예를 안고 살아가니 얼마나 다행인가.
별박이자나방에게는 측량사의 명예가 없어보인다. 별박이가 더 명예롭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