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진화 [김은경]
꽃 속으로는 고운 사람의 발길만 오가는 게 아니어서
꽃 속으로는 꽃 소식만 오가는 게 아니어서
화염처럼 터지기도 하고
황하를 건넌 모래바람에 짓눌려
꽃씨들은 미처 부화하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친 편지를 다 읽기 전에 해는 시들고
물새들이 강을 건너오기 전에
강물은 바짝 말라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도 전에
내 기다림은 지루함과 고독으로 병들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빛나는 날이면 나는
한 포기의 꽃나무를 심고
바람에 부스스 잠이 깬 열매들을 거두어
술을 담글 겁니다
항아리는 옹기쟁이의 체온으로 아직 따뜻하고
신의 입김으로 인해 우물물은 아직 썩지 않았습니다
사과 속엔 벌레가 지나간 무수한 길들이 있고
단내 나는 그 길에는
발효의 시간을 기다리는 당신과 내가 있습니다
오랜 침묵이 빚어내는 풍화의 쓴맛,
우리도 곧 보게 되겠지요
별빛 쏟아지는 취향의 그 길 위에
언젠가 우리가 함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문을 열어주세요 당신
일몰이 서역을 넘기 전에 손을 잡아주세요
피와 살 한데 섞어 우리
사과향 짙어가는 그곳으로 함께 가요
퍼붓는 총알을 멈추고
겨자씨만한 한 생명도 흙 속에 품어낼 사람
아주 먼 사막이라도
온밤을 걸어 나와 함께 갈 사람,
사랑은 그렇게 천천히 어둠을 거두는 것
향기는 그늘도 모르게 익어가고 있어요
다시 태어나는 법을 나는 모르므로
어둠이 뿌린 빗살 계단을 밟고 오세요 당신,
기꺼이 손을 잡아드릴테니
금간 당신 뼛속에 내 입김을
불어넣어 드릴테니
- 불량 젤리, 삶창, 2013
첫댓글 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