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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유화성과 탈명철검 조탁의 비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의 비무 광경을 구경한 진우청은 지금은 비무대회장의 일부가 되어, 며칠 전까지는 이곳이 잡초가 무성한 강변이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강변 한 쪽 구석에 자라고 있는 풀잎을 뜯어 손바닥으로 비볐다. 쓰윽- 쓱- 순식간에 풀잎은 미세한 찌꺼기로 변해 사라지고 손바닥 안에는 풀잎에서 흘러나온 푸르스름한 액체가 헝건하게 고였다. 진우청은 불에 덴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손바닥에 그 액체를 골고루 발랐다. 아릿하면서도 시원한 감촉이 손바닥에서 전해졌다. 비발을 맨손바닥으로 상대하며 날 부분은 피하고 철저하게 둥그스름한 등 부분을 쳐냈지만 작은 가시처럼 돋은 돌기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비발은 진우청의 손바닥을 발갛게 물들였다. 바위라도 두 쪽 내는 비발을 상대하며 그 정도의 상처만 입은 것을 무흔살수가 알았다면 다시 한 번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었지만 진우청은 연신 궁시렁거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풀잎에서 나온 액체가 손바닥 전체에 스며들자 화끈거리는 감촉이 좀 덜해졌다. 한 번 더 손바닥을 쓱쓱 비빈 진우청은 한쪽 구석에 주저앉았다. “갈수록 놀래게 하는 사람이군!” 진우청은 좀 전에 끝난 유화성의 비무 장면을 떠올리며 감탄처럼 말했다. 똑 같은 초식을 연달아 사용하여 탈명철검 조탁을 이기는 유화성의 무공은 놀랄만 했다. 네 번 모두 같은 초식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변화는 펼칠 때마다 전혀 달랐다. 그러기에 조탁은 똑 같게 보이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전혀 다르게 다가드는 공격에 완벽히 대처하지 못했다. 진우청은 검을 들었을 때의 유화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술기운에 찌든 모습이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어떤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술병을 앞에 놓고 취해 있을 때는 그 어떤 사람보다 피폐하고 흐트러져 보였다. 그러나 막대기 하나를 들고 괴한들을 상대할 때나 비무대 위에서 조탁을 상대할 때는 형체가 없는 바람 같았다. 그리고 술기운이 온 몸을 감싸지 않은 오늘의 유화성에게서 진우청은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맑은 호흡의 색깔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아무도 그를 보고 구제불능의 주정뱅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갑자기 비무대회에 출전했을까?” 진우청은 문득 그 사실이 궁금했다.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술독에 빠져있던 것 같은 사내가 왜 이런 곳에 불쑥 나타나 멱살까지 잡고 만류하는 동생도 뿌리치고 비무대 위에 올랐을까? 그냥 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구경나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비무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진우청은 눈을 치켜떴다. 그 계집애 같은 놈이 그 사람에게도 무슨 술수를 부려 자신처럼 억지로 출전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렇게 음흉스런 놈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꾸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이 있건 간에 그 사람이 비무대회에 출전한 이상 자신과 마주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이곳 사람들의 환호성을 그렇게 많이 터져 나오게 만들던 조탁을 꺾은 사람이니 쉽사리 패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우청은 불끈 호승심이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서로 적이 되어 생사를 건 대결이라면 그 사람과는 도저히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지만 비무라면 달랐다. 이제껏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호흡의 색깔이 맑은 사람! 그 사람과 비무를 벌여본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호흡이 어떤 색깔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우청은 가슴이 진탕되는 기분을 느꼈다. “후읍-” 긴 호흡을 내뱉은 진우청은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시퍼런 풀물이 들어 불에 덴 듯한 붉은 색은 사라졌다. 그러나 통증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용호곤을 사용하는 게 나았나?”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진우청은 등 뒤에 꽂힌 용호곤을 생각했다. 용호곤으로 상대했더라면 이런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만큼 정확히 움직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입맛을 다신 진우청은 등 뒤에서 용호곤을 빼내 앞으로 가져왔다. 거무튀튀한 쇠막대기가 밝은 봄 햇살을 받아 묵광을 발했다. 해천 노인의 집 실내에서와는 또 다른 광채였다. 진우청은 두 개의 쇠막대기를 각각 한 손에 잡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파공음이 듣기 좋았다. 두 개의 쇠막대기는 거의 똑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느껴보면 약간의 무게차이가 있었다. 진우청은 두 개를 바꿔 들어보았다. 역시 용곤이 약간 무거웠다. 아마도 오른손과 왼손의 힘 차이를 감안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개로 합쳤을 때 앞뒤의 무게가 똑 같은 것보다 한쪽이 약간 무거운 것이 나름대로의 효용이 있을 것 같았다. 쨍- 진우청은 두 개의 곤을 하나로 합쳤다. 해천노인에게는 제미곤이었겠지만 진우청에게는 턱 아래에 걸치는 길이였다. 앞으로도 아까와 같은 이상한 무기를 든 상대와 마주친다면 이것을 휘두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휘두른다는 조건 하에서……. “손으로 생각하라고?” 진우청은 해천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달랑 그 말 한 마디! 그보다 더 심오한 말이 없을 것 같지만 그건 아무 말 안 해 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무기를 쓰는 사람치고 그걸 자기 손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사용법이라도 가르쳐 주었어야 할 게 아닌가? 그걸 가르쳐 주지 않고 용호곤만 달랑 선물한 해천 노인을 원망하며 진우청은 화풀이라도 하듯 용호곤으로 땅을 두드렸다. 퍽! 퍽! 용호곤이 땅바닥에 부딪치며 떡치는 소리가 울리자 놀란 개구리 한 마리가 풀밭 속에서 튀어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용케 밟혀 죽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한 채 아직 풀밭 속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죽은 목숨이다, 이놈아!” 진우청은 용호곤 끝을 움직였다. 기절초풍할 듯 뛰어가던 개구리가 용호곤 끝에 올려졌다. 아니, 개구리가 착지할 지점에 용호곤 끝이 정확히 놓여져 있었다. 개구리는 다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개구리의 뒷다리가 용호곤 끝을 박차는 순간 정확히 그만큼 용호곤이 뒤로 물러났다. 개구리는 다시 뒤뚱거리며 용호곤 끝을 박차고 도약을 시도했다. 용호곤 끝이 똑같이 흔들리며 개구리의 몸은 여전히 용호곤 끝에 올려져 있었다. 휘익- 진우청의 손목이 슬쩍 움직이자 용호곤 끝에 올려져 있던 개구리는 사람들 머리위로 쾌속하게 날아갔다. 까마득히 날아간 개구리는 저 멀리 강물 표면을 스치듯이 미끄러지다가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개구리 한 마리를 방생한 진우청은 또 다른 개구리가 있는 지 용호곤으로 풀밭을 헤집었다. 다른 개구리는 없었다. 일찌감치 도망을 갔거나, 아니면 수많은 관중들의 발에 밟혀 죽었을 것이다. 그놈 한 마리만 너무 게을렀든지, 아니면 너무 영리해 아직 그곳에 남아 있은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개구리 몰이를 할 줄은 몰랐네요. 깔깔깔깔!”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용호곤으로 풀밭을 헤집던 진우청은 고개를 돌렸다. 백운 노인과 노인의 손녀 조수아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명의 젊은이들도 보였다. 아마도 백운 노인의 도장에서 나온 무사들 같았다. “차라리 은자 열 냥에 그것도 나한테 파는 게 어때요? 깔깔깔.” 조수아는 용호곤을 지팡이처럼 짚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진우청을 보고는 배를 잡았다. 제법 굵고 긴 제미곤이었지만 진우청의 다리 옆에 나란히 서 있으니 너무 안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해천노인에게는 무척이나 사연이 깊은 무기라 들었는데 진우청의 손에서는 개구리 몰이나 하는 막대기로 전락해 있는 모습이 조수아의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만 하거라! 다 큰 녀석이…….” 백운 노인도 한 줄기 웃음을 떨치지 못한 얼굴로 손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점심이나 같이 하세.” 백운 노인은 웃음기를 지우고 청년들에게 손짓을 했다. 청년들이 깔 것을 펼친 후, 들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진우청은 이 노인이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물 스물 짜증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 왔지만 깔 것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고는 입안에 고인 침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앉게나.” 백운 노인은 먼저 자리에 앉으며 진우청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진우청도 용호곤을 옆에 놓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음식은 많으니 사양 말고 들게.” 백운 노인은 진우청에게 음식을 전하고는 자신도 젓가락을 들었다. “계속 신세를 지는군요.” 진우청은 인사치레의 말을 남기고는 백운 노인이 권하는 닭다리 하나를 집었다. 어제는 도종대일행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부실하게나마 점심을 때웠지만 오늘은 그들도 없었고, 강변 곳곳에 설치된 간이음식점에는 발 디딜 틈도 없어 꼼짝없이 굶겠구나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성찬을 마주한 진우청은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천천히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진우청의 먹성을 알고 있는 백운 노인과 조수아는 진우청 쪽으로 되도록 많은 음식들을 밀어주었다. “자네… 손은 왜 그런가?” 부지런히 음식을 집는 진우청의 손을 지켜보던 백운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아까 비무에서 그 사람의 접시에 스치며 손바닥이 좀 까졌나 봅시다. 그래서 풀을 뜯어 그 즙을 발랐습니다.” 진우청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부지런히 음식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손바닥 말고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는가?” 백운 노인은 진우청의 손을 좀 더 주시하다가 진우청의 전신을 훑으며 물었다. 다 뻗지 못하고 중도에 막히긴 했지만 두 개의 비발이 교차하며 사각(死角)에서 튀어 나오던 움직임은 절로 아찔한 느낌이 들게 했다. 특히 마지막 순간 접시 같은 비발이 종횡으로 움직이며 호접표(蝴蝶飄) 처럼 날아오던 모습은 손바닥에만 상처를 남겼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없습니다.” 진우청은 백운 노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답했다. “다행이구만.” 은근히 걱정스런 빛으로 진우청의 전신을 훑던 백운 노인은 마침내 시선을 돌렸다. 백운 노인은 진우청이 비무를 마친 후 유화성 일행과 인사를 나누다 서둘러 관중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고 설령 외상은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지 않았나, 걱정이 되던 터였다. 외상은 눈으로 확인 했으니 됐고, 내상은 어떨지 몰라 계속 말을 시켜 보았지만 전혀 이상 없어 보였다. 설사 곰이라 할지라도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저렇게 식욕이 동할 리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백운 노인은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았다. 잠시 후, 진우청도 배를 채웠는지 뒤로 물러나 앉았다. 조수아와 젊은 사내들도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들을 치웠다. 배가 부르고 나니 모두들 이여옥이 만들어 주는 꽃잎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다들 맹물 한 잔으로 입가심을 하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계속할 작정인가?” 곰방대에 불을 붙여 문 백운 노인은 다시 진우청에게 눈길을 주었다. 진우청은 백운 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거렸다. “비무대회에 계속 출전할 것이냔 말일세.” 그제야 진우청은 백운 노인의 말뜻을 알아듣고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도종대 일행이 잡혀있어 그 계기로 참가한 비무대회였지만 그 전에 어느 정도 호기심이 일던 중이었다. 물론 상금도 탐이 났고……. 그러나 앞으로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랐다. 그 계집애 같은 놈이 다른 수작을 벌릴지도 몰랐고……. “이왕 참가했으니 몇 판 더 붙어보고…….” 진우청은 잠시 머뭇거리다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세상에 무슨 그런 대답이 다 있어요. 사내대장부가 뜻을 세우고 출전을 했으면 당당히 우승하고 은자 일만 냥을 상금으로 받아야죠. 질 때 지더라도 그렇게 답해야죠.” 진우청의 어설픈 대답에 조수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비가 모자란다면 내가 좀 보태줄 테니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어떻겠나?” 백운 노인은 오전까지만 해도 진우청이 비무대회에 참가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을 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어제 출전한 거력패도 염호광, 그리고 그를 곰방대 하나로 물리친 이름 없는 노인. 거기까지는 큰 의구심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 탈명철검 조탁까지 보고나자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제가 뭐 거진 줄 아십니까.” 진우청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사람 참! 그런 뜻이 아닐세.” 백운 노인은 자신의 말이 자칫 그렇게도 들릴 수 있겠다 싶어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용호곤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수십 년을 먼지 쌓인 벽장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묵광과 자태는 예전과 한 치도 변함이 없었다. ‘쯧쯧!’ 백운 노인은 내심 혀를 찼다. 한때는 절강성 일대를 주름잡던 기병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의기가 꺾이며 벽장 속에서 수 십 년을 잠들어 있다가 이제 새 주인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새 주인은 내내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용호곤은 누가 슬쩍 집어가도 모를 정도로 방치 되어 있었다. ‘허허! 세월 무상이로고.’ 내심 중얼거린 백운 노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스슥- 진우청도 백운 노인의 그런 심정을 눈치 챘는지 저만치 뒹굴고 있던 용호곤을 슬며시 끌어 당겨 자신의 다리 옆에 놓았다. 새 주인의 다리와 무기는 여전히 안 어울려 보였다. “그놈을 비무대 위에서 사용할 심산인가?”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비상하다는 생각으로 쓴 웃음을 삼킨 백운 노인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등 뒤에 꽃아 넣고 있던 것을 끄집어내어 하나로 조립까지 한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손바닥이 다 까져서 맨손으로 아까 같은 무기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꺼내 보았는데…….” 진우청은 말끝을 흐렸다. 꺼내긴 했지만 사용법은 물론, 제대로 쥐는 법도 몰랐다. 그건 백운 노인도 잘 알 테니 더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끝까지 말했다간 스스로 역정만 날 뿐이었다. “이쪽으로 와 보게.” 진우청과 용호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운 노인은 자갈밭 한 쪽, 모래가 깔려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진우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놈도 들고 오게!” 용호곤은 그 자리에 두고 몸만 덜렁 일으키는 진우청을 보고 백운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진우청은 얼른 등을 돌려 용호곤을 집어 들고 백운 노인을 따랐다. 백운 노인은 자갈밭 옆으로 돌아 휘어진 제방 뒤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제방이 막혀 비무대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비무에서 이미 한 판을 이긴 진우청은 대부분 알아볼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곤에 대해 초보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이상한 광경으로 비춰질 소지가 있었기에 백운노인은 이곳으로 진우청을 데려온 것이다. “여기로 온건 자네에게 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만이라도 가르쳐주고자 함일세. 그래야 어디 갖다 버리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일세.” 백운 노인은 진우청의 손에서 용호곤을 받아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우선 곤의 부위별 명칭부터 설명하고 장단점을 간략히 설명해 주겠네. 곤의 머리 부분을 곤초(棍梢)라 하고 그 반대쪽은 곤파(棍把)라 하네. 그럼 끝부분은 자연히 초정(梢頂), 파정(把頂)이 되겠지.” 백운노인은 용호곤의 끝을 잡았던 손을 중간 부분으로 가져갔다. “또 전체를 삼등분하여 앞쪽 부분은 초단(梢段)이라 부르고 그 뒤로 중단(中段), 파단(杷段)으로 나눈다네. 곤이란 자체가 가장 단순한 무기이니 그 명칭 또한 이것이 전부일세.” “복잡하지도 않은 것이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간단한 몇 마디로 모든 명칭의 설명이 끝났다는 백운 노인의 말에 진우청은 반색을 했다. 백운노인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설명을 이었다. “그럼 이젠 곤의 특징과 장단점을 설명해 주겠네. 자네 취향에 맞춰 최대한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네.” “경청하겠습니다.” 진우청은 얼른 답했다. “아침에 해천이 말했듯이 곤은 모든 무기의 근본일세. 그건 납득이 가겠지?” “물론입니다. 저라도 들판에 내버려진다면 제일 먼저 몽둥이부터 하나 챙길 테니까요.” “그렇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신체나 동작에 가장 친숙하고 잘 어울리는 것도 곤일세. 곤에서 창이라는 무기가 파생되어 나오고, 쇠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도나 검이 만들어졌지. 날카롭게 날이 선 창이나 도검이 훨씬 무서운 무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 가면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네. 아무리 훌륭한 보검을 들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 그건 들지 않은 것만도 못하니까 말일세. 그건 지극히 원초적인 얘기고…… 다시 곤으로 돌아오면, 곤은 날이나 뾰족한 끝이 없기에 베거나 찌르거나 하는 데는 다른 병기보다 불리하지. 그러나 그건 하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다네. 가장 비슷한 창과 비교하면 살상력 면에 있어서는 날이 시퍼렇게 선 창이 우수하지. 하지만 창날이 사람의 몸에 박히면 그걸 빼어 내는 데는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동작의 끊김이 있을 수 있지만 곤은 오히려 반대라네. 곤은 상대를 가격하면 즉시 반탄력이 생기고,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반대방향으로 더 빠르게 찌르거나 휘두를 수가 있다네. 그게 곤의 가장 큰 장점일세. 곤을 휘두르려면 그것에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네.” 한 가지 설명을 끝낸 백운 노인은 진우청의 표정을 살폈다. 진우청은 경청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 표정에는 이론은 어서 끝내고 시범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빛이 역력했다. “한 가지만 더 설명하고 기본적인 동작을 가르쳐 주겠네.” 백운노인은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고는 용호곤을 쳐다보았다. “용호곤은 장창이나 장봉에 비하면 짧지만 도나 검에 비하면 긴 편이지. 그래서 접근전의 경우에는 조금 불리한 면도 있다네. 그러나 자네의 용호곤은 두개로 분리가 되는 것이니 그런 단점은 없다네. 그런 면에서 보면 용호곤은 정말 멋진 무기이지. 그리고 곤오철(昆吾鐵)과 묵강철(墨鋼鐵)을 섞어 만든 것이라 가볍지만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이라네.” 다시 용호곤을 쳐다보는 백운 노인의 눈에서 해천 노인을 쳐다볼 때와 똑같은 빛이 흘러 나왔다. “그렇군요. 분리하면 단곤 두 개가 되니 바짝 붙어 싸우는 데도 유리하겠군요.” 진우청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관심을 표했다. 해천 노인으로부터 넘겨받을 때 하나로 휘둘러도 좋을 것 같고, 두개로 분리해 휘둘러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해천 노인의 설명에도 나오니 관심이 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초식이라고 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들을 가르쳐 주겠네. 해천도 가르쳐 주지 않은 초식을 내가 가르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곤을 독문병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와 잡는 법, 그리고 그 자세들을 취하는 단순한 동작만 가르쳐 주겠네. 그야말로 돌 지난 아이의 걸음걸이 수준의 동작이지만 아이도 그렇게 걷고 뛰고 하는 것이지.” 백운 노인은 곁에 있는 청년 하나를 불러 용호곤을 건네주었다. “입거곤(立擧棍) 자세를 취해보아라.” 백운 노인의 지시에 따라 청년은 온몸을 똑바로 한 채, 몸 옆에 용호곤을 세웠다. 백운 노인은 그 다음으로 배후배곤((背后背棍), 운곤(云棍), 가곤(架棍), 배곤(排棍), 료곤(?棍)…… 등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청년에게 취하게 했다. 곤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과 자세였기에 검을 익힌 청년이었지만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자세를 취했다. 한 번의 시범을 보여준 백운노인은 진우청에게도 똑같은 자세를 익히게 하고 틀린 곳들을 교정해주었다. “다 됐네.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할 수 있고, 무공을 익힌 사람은 누구나 아는 동작일세 하지만 모든 곤술이 그런 동작에서 파생된 것이지.” 곤의 각부 명칭과 기본자세와 그 자세를 취하기 위한 동작, 쥐는 법 정도만 알려준 백운 노인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용호곤을 들고 몇 가지 자세를 취해본 진우청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점심시간의 끝을 이용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지만 너무 미진한 감은 털어 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모양이구만?” 연기를 한 모금 내뿜은 백운 노인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곤의 각부 명칭도 몰랐던 것보다야 낫지만 사실 좀 그렇군요.” 진우청은 솔직히 시인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배운 자세들을 잊지 않겠다는 듯 한 번씩 더 취해보았다. 백운 노인은 그런 진우청의 동작을 찬찬히 살피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안광을 빛냈다. 담배연기 한 모금을 길게 내뱉은 백운 노인은 젊은이 하나를 시켜 갈대 줄기 하나를 꺾어오게 했다. 잠시 의아한 눈빛을 하던 젊은이는 즉시 강변 쪽으로 달려가 갈대 줄기를 꺾어왔다. 젊은이가 꺾어온 갈대줄기에서 잎을 추려내고 가느다란 막대기처럼 만든 백운 노인은 모래판을 반듯하게 고른 뒤 그 위에 무언가를 그렸다. 진우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갈대 줄기 끝을 응시했다. 조수아와 몇 명의 젊은이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모래판을 응시했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백운 노인이 모래바닥에 쓴 것은 글자가 아니고 몇 가지 종류의 선들이었다. 몇 개는 직선이었고 다른 몇 개는 이리저리 휘어져 있었다. 잔뜩 기대감에 물든 눈빛으로 모래바닥을 응시하다 별다른 것이 없자 진우청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백운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배운 동작을 응용하여 그 용호곤으로 이 선들을 한 개도 남기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이어보게.” 진우청은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진우청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대신 옆에 있던 조수아의 눈빛만 반짝거렸다. 조수아는 조부의 의도를 깨닫고 기대감어린 눈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백운 노인이 모래바닥에 그린 막대기와 곡선, 그리고 어지럽게 꼬인 나선들은 천강검초(穿鋼檢招)란 단 한 개의 초식이었다. 그것은 백운 노인 가문의 독문절기인 폭류검법(瀑流劍法)을 배우기 전에 검을 쥔 손에 힘을 기르고, 폭류검초를 펼치는데 필요한 다른 근육들의 힘을 기르기 위한 준비운동격의 단순한 초식이었다. 그것을 일년 정도 수없이 휘두르고 나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초식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단순한 동작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창술이나 곤술로도 얼마든지 접목 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무공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끊어져 있는 선들 사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백운 노인의 지시에 진우청은 묵묵히 모래바닥에 그려진 선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직선과 곡선, 그리고 이상하게 뒤틀린 선들은 서로 쉽게 연결될 수 있을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꼬여있었다. 잠시 더 쳐다보던 진우청은 고개를 저었다. “그려주시려거든 다 이어서 그려주셔야지 이렇게 끊어서 그려 놓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야 할지 어떻게 압니까?” 진우청은 볼멘소리를 질렀다. 지극히 상식적인 진우청의 말에 뭔가 잔뜩 기대를 걸었던 백운 노인과 조수아등은 적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극히 평범해!’ 조수아는 내심 읊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늘까지 할아버지께서 필요이상으로 관심을 가지고 해천 노인의 집에까지 동행한 사람이라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 조수아였기에 실망감이 조금 더 컸다. “그런가? 그럼 여기 이곳은 이렇게 잇고, 이 점은 찌르기라고 하면 할 수 있겠나?” 잠시 진우청을 쳐다보던 백운 노인은 선 몇 개를 더 이은 후 다시 질문했다. “그래도 이곳과 이곳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진우청은 여전히 뚱한 목소리로 완성된 초식을 요구했다. 미미하게 고개를 한 번 흔든 해천노인은 결국 완전한 검로를 그려 주었다. 진우청은 그제야 모래바닥 위의 선들을 살펴보더니 용호곤을 들어올렸다. 위잉- 진우청은 용호곤을 한 바퀴 돌렸다. 조금 전에 백운 노인이 가르쳐 준 운곤의 동작을 가볍게 펼친 것이었다. 방금 배운 것을 펼치는 그 자세는 제법 그럴듯해서 조수아는 다시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나 뒤이어진 진우청의 움직임은 한층 더 실망을 안겨 주었다. 진우청은 그냥 뻣뻣하게 서서 곤 끈으로 초식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엉터리!’ 조수아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렇게 뻣뻣하게 서서 바닥에 그려진 그림을 몇 번씩이나 보며 따라 그리는 것이야 네 살 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설사 네 살 먹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자주 쳐다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대감이 왕창 무너진 조수아의 이마가 자연스레 찡그려졌다. 아무래도 해천 할아버지가 선물한 저 용호곤은 결국 지팡이로 쓰이거나 고물상에 팔릴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보죠.” 조수아에 이어 백운 노인마저 실망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진우청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라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겠나?” 백운 노인은 진우청이 토해낸 ‘본격적으로’ 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전 그런 면으로는 소질이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도 그렇게는 가르쳐 주시지 않았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말에 대해 해서 설명해 보란 질문에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는 진우청을 보고 백운 노인은 일순 머리가 혼란해짐을 느꼈다. 지기인 해천 노인 집에서 추측한 진우청의 내력이 궁금해 간단한 시험 겸, 더 나아가 검식을 응용한 가장 기본적인 동작 한 가지를 더 가르쳐 주려 했는데 전혀 엉뚱한 대답을 들은 것이다. “그냥 춤… 아니, 동작으로 해 보겠습니다. 전 그게 편합니다. 사부님 앞에서도 항상 그랬고…….” 진우청은 용호곤을 들고는 자리를 조금 물리게 했다. 백운 노인과 조수아 그리고 몇 명의 젊은 사내들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우선 이렇게 하면…….” 그 말과 함께 진우청은 한손으로 용호곤을 잡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모래판에 그어진 선을 따라 용호곤 끝이 움직이고 있었다. 휘이익- 천천히 한번 움직이던 곤이 조금 빠르게 움직이며 한 손으로 용호곤을 잡고 있던 진우청은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잡으며 이상한 각도로 보법까지 밟으며 움직였다. 다시 한 번 기대를 가지고 진우청을 쳐다보던 조수아는 고개를 저었다. 용호곤 끝이 모래판의 선들을 모두 긋고 지나가기는 했지만 가문의 검초와는 너무 달랐고, 자세도 이상했다. 어차피 선만 그어놓은 것이고, 검이 아니라 곤으로 펼치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똑같으면 그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어느 정도 같아야 하는데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흡-” 용호곤을 휘두르던 진우청은 거센 호흡을 토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이렇게 하다간 호흡의 낭비가 심해 사부께서 보셨다면 두 끼는 굶기겠군!” 다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진우청은 이번에는 다른 자세를 잡았다. 휘익- 휘익- 용호곤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 역시 몸을 따라 움직이며 용호곤 끝이 모래판의 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어정쩡하게 움직이던 처음의 몸짓에 비하며 두 손으로 곤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후흡!” 다시 진우청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의 낭비는 줄였지만 중간에 두 번 끊길 뻔 했습니다. 이것도 꼼짝없이 한 끼는 굶어야…….” 진우청은 아까처럼 중얼거리고는 허리에 곤을 둘렀다. ‘이놈 봐라?’ 조수아와 비슷한 실망을 느끼고 있던 백운 노인은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두 번의 반복과 함께 허리어림으로 한 바퀴 용호곤을 돌리며 선 자세가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점점 정교해지고 있었다. 휘이익- 진우청의 신형이 한 바퀴 회전하며 용호곤이 허공을 선회했다. 이번에는 먼저의 두 번처럼 천천히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빠르게 휘둘렀다. 용호곤 끝이 쾌속하게 선들을 따라갔다. 모래판 위에 그려진 선들 속으로 빨려들던 진우청의 의식이 어느덧 황산의 이름 모를 봉우리 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 속에서 진우청은 모래판 위의 선들을 밟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제껏 좀 둔해 보이던 모습은 간곳없고, 삼매(三昧)에 빠진 고승처럼 모든 의식을 용호곤 끝에 집중하고 있는 진우청을 보고 백운 노인의 눈은 기광을 발했다. 조수아 역시 숨을 죽이고 침만 삼키고 있었다. 우우웅- 모래판 위의 선이 용호곤 끝에 의해 모두 지워지는 순간, 용호곤 끝에서 이상한 진동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백운 노인과 조수아, 그리고 몇 명의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스읍-’ 움직임을 멈춘 진우청은 길고 낮은 숨을 토했다. 미세하게 어깨는 움직였지만 처음 두 번처럼 거친 숨결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좀 미진한 구석이 있지만 이게 제일 낫군요. 숨쉬기도 제일 편하고…….” 진우청은 만족한 듯 씨익 웃으며 용호곤을 내렸다. 백운 노인은 조금 창백해진 안색으로 진우청을 쳐다보다가 모래판 앞으로 다가가며 손짓을 했다. 진우청은 그 손짓을 따라 다가왔다. “이 선과 이 선을 연결할 때 이런 자세로 하면 어떻겠나?” 백운 노인은 갈대 줄기로 모래판에 그려진 두 개의 선을 가리켜며 자세를 취했다. 그 자세는 천강검초 동작과 진우청의 동작이 제일 많은 차이가 있는 곳이었다. 다른 부분은 거의 비슷했지만 유독 그 부분에 있어서 진우청의 동작과 자세는 많이 달랐다. 진우청은 백운노인이 취하는 자세를 따라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건 미세하지만 어딘지 가슴이 답답하군요. 노인장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이 방법이 제일 좋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천룡의 숨결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라 하시던 사부님의 가르침과도 부합되고…….” 진우청은 자신의 방법대로 몸을 움직이며 확신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가?” 백운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젠가 저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맞춰 입듯이 초식을 익힐 것' 이라던 해천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누구도 더 이상 말이 없자 진우청은 장난스레 허리쯤에서 용호곤을 돌렸다. 휘리릭- 용호곤이 진우청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 어깨에 걸쳐졌다. 조수아는 그런 진우청의 모습에서 이젠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눈을 깜박거린 조수아는 다시 한 번 용호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용호곤은 어느새 두 개로 분리되어 진우청의 등 뒤로 꽂히고 있었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거추장스런 막대기 같기만 하던 용호곤이 조금 손에 달라붙는 기분입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진우청은 백운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비무대 근처로 시선을 돌렸다. 점심을 먹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고 있었다. “찾아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둘러보겠습니다.” 진우청은 포권을 쥐었다. “그러게나. 그리고 나중에라도 자리가 없으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게. 자리 몇 개는 항상 여분이 있다네.” 백운 노인의 말에 진우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져갔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순간에 천강음(穿鋼音)을 낼 수가 있죠?” 진우청이 사라지고 난 후 놀란 눈을 한 조수아가 백운 노인을 보며 말했다. 천강음은 가문의 절기인 폭류검법을 익히기 위해 천강검초를 일 년 가까이 펼치다 보면 검첨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울려 나오면 검으로 한 치 두께의 강철을 뚫을 수 있어 천강음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천강음을 발출한 후에야 비로소 가문의 절기인 폭류검법의 수련이 가능했다. “글쎄다…….” 백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동작도 너무 비슷해요. 단 세 번 만에…….” 곤으로 펼쳤기에 자신이 검으로 천강검초을 펼치는 것과 꼭 같지는 않았지만 단 세 번의 반복으로 거의 비슷한 자세를 펼치는 진우청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슷하게 보이더냐?” 백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요. 휘두르는 동작도 비슷했지만…… 그건 선을 따라 곤을 휘두르다보면 그렇게 된다 치더라도 보법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너무 비슷했어요. 비록 단순한 초식이긴 하지만 깜짝 놀랐어요.” 조수아는 빠르게 말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하지 않더냐? 똑같이 두 팔, 두 다리로 서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자세에는 그런 보법이 자연스러울 것 아니겠느냐. 저 청년은 자신의 호흡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인 것이고…….”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며 천강음을 발출한 것이 놀라울 뿐이지, 허허!” 백운 노인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고수인가 봐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조수아는 백운 노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다. 아직은 고수라 부르기 보다는…….” 백운 노인은 적당한 단어를 찾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해천이 그러더구나. 어떤 고인인지 저 청년의 사부는 저 청년에게 초식 같은 건 가르치지 않았지만 무공에 대한 인체적응능력은 극한까지 끌어올려 놓았다고…….” “그런… 무공도 있나요?” 조수아는 재차 질문을 했다. “저 청년은 그걸 무공이 아니라 춤이라고 하더구나.” “춤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걸 열심히 추면 제 몸 하나는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며 배웠다더구나. 허허!” 백운 노인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울렸다. “해천이 저 청년을 평가한 말이 이젠 조금 더 수긍이 가는구나.” 백운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형을 움직였다. “우리도 그만 자리로 돌아가자꾸나. 이번 비무대회가 평소와 달리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게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백운 노인은 만면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비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ㄳ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성장해 가네요 !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