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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유화결과 복이록의 비무가 끝난 후, 장창을 쓰던 복이록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고 내내 생각에 잠겼던 진우청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사부께서 차근차근 풀어 주시는 것을 몸으로 직접 체득해야 제격이지, 이렇게 생각만으로는 애꿎은 머리털만 빠지겠어…….”
비 맞은 중처럼 궁시렁거린 진우청은 다시 목을 길게 빼어 관중들은 둘러보았다. 여전히 도종대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풀려났다면 자신이 그들을 찾는 것보다 그들이 눈에 띄기 쉬운 자신을 먼저 찾고 다가왔을 것이다.
오후 시간도 이젠 제법 지났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계집애 같은 놈이 자신을 내일 비무 시합에까지 참가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진우청은 땅바닥을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집으로 가서 갇히는 게 싫어 가출을 결심했는데 이곳에서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산의 동굴 속에서도 십년 동안 갇혀 있은 것이나 진배없었지만, 그때는 조부님의 눈초리를 피해 한 이십년 세월을 축내자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행한 행동이었다.
이런 타의적인 속박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비무에 참가해, 산 아래 사람들의 허술한 춤과 자신의 춤을 직접적으로 비교해 보고픈 생각도 있었지만 뭔가 거치적거리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모두 때려 엎고 싶을 뿐이다.
진우청은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우두둑-
묵직하게 주먹이 쥐어지며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세차게 쥐었던 주먹을 편 진우청은 백운 노인이 앉은 곳을 쳐다보았다.
백운 노인은 여전히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비록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리 쪽만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지만 내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마침 잘 됐군!’
무언가를 발견한 진우청은 내심 쾌재를 외쳤다.
“형씨!”
진우청은 낮은 목소리로 다가오는 청년을 불렀다. 오전에 진우청에 앞서 비무를 벌렸던 부채를 든 청년이었다.
머리만 소림화상처럼 박박 밀지 않았다면 진우청과 형제라고 해도 될만큼 흡사한 덩치를 한 청년은 진우청이 부르는 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진우청의 아래위를 힐끔거렸다.
그 역시 자신 바로 다음으로 비무대 위에 올라와 비발을 든 중년인과 싸웠던 진우청을 알아보고는 경계심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츰 경계심 어린 표정보다는 자신과 너무 흡사한 진우청의 외모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형씨 외모가 썩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니, 그만 쳐다보시고 잠시 여기 서서 자리 좀 지켜주시오!”
“자리는 왜?”
닮은꼴의 청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 될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 일각만 여기 서서 자리를 좀 지켜 주시오. 마침 바지색깔도 비슷하니 금상첨화구료.”
“바지색깔?”
닮은꼴 청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진우청의 말을 되뇌기만 하고는 다가오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좀 도웁시다.”
진우청은 닮은꼴 청년의 어깨를 와락 당겨 자기가 섰던 자리에 세웠다.
“일각 후에도 안 오면 마음대로 해도 좋소!”
진우청은 빠르게 말한 후 상체를 웅크리고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돌린 백운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통나무만한 다리통 두 개를 확인하고는 계속 비무구경을 했다.
“무섭도록 치밀한 놈들이군.”
텅 빈 석실 안에 선 진우청은 도종대 일행들이 묶여있던 벽 쪽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 놈들이 아직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부하들 몇 명 정도는 이곳에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들에게 통보해 그 계집애 같은 놈을 만날 수 없으면 몇 명을 잡아 족치고, 소란을 피워서라도 그 놈을 다시 만나 확실히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이곳으로 달려와 제일 먼저 건물 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안채의 방문을 열어봐도 집 안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바깥에서 볼 때는 별다른 점 느껴지지 않았지만 건물 안에는 세간이나 집기 등은 물론이고, 여러 개의 방 어느 곳에도 종이쪽지 하나 남겨져 있지 않았다.
진우청은 자신이 뭔가 착각하여 다른 집으로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분명 이 집이 맞았다.
낮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생각이 든 진우청은 석실을 찾아들었다. 석실 안도 마찬가지였다.
도종대 일행이 결박되어 있던 녹슨 철제 의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을 적시던 핏자국마저도 깨끗이 지워져 족히 몇 년 동안은 아무도 들르지 않은 곳처럼 변해 있었다.
스슥-
진우청은 도종대 일행이 묶여있던 자리까지 다가가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들을 발로 쓸었다.
제법 두텁게 깔려 있던 먼지들이 옆으로 쓸려 나가자 도종대 일행이 고문을 당하며 흘린 핏자국이 드러났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다. 정말 신속하고 철저한 놈들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다.
반나절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도 그랬고,
이런 지하 석실 바닥에 있는 핏자국까지 깨끗이 지우고 그것도 모자라 먼지로 덮어놓은 치밀함은 절로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이런 정도로 철저한 놈들이라면 스스로 데려오기 전에는 도종대 일행을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진우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그 놈이 문제야.”
임문정의 모습을 떠올린 진우청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인장호 그 놈의 행동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행동이나, 교묘하게 인질을 위협하는 자세로 자신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던 모습은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놈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슥-
진우청은 잠시 멈추었던 발로 다시 바닥을 쓸었다. 고문의 흔적을 감추고자 덮은 먼지가 벽 구석으로 밀려났다.
엉겨있던 피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 지우지 못한 옅은 핏자국은 벽이 있는 곳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 인장호 그 잔인한 놈이 얼마나 심한 고문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 놈은 자신의 기분에 따란 사람을 파리 죽이듯이 죽일 놈이었다. 어쩌면 모진 고문으로 인해 이미 죽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신의 뒤통수를 칠 인간들이란 짐작이 가고도 남았고,
그래서 자신 역시 되받아 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파락호들이었지만 그새 미운 정 한 가닥이 든 모양이었다.
굳이 정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이 아니더라도 자신 때문에 그들 넷에 더해, 점소이 꼬마까지 죽는다면 평생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도 같았다.
“젠장!”
진우청은 부글부글 끊는 심정에 애꿎은 석실 벽을 걷어찼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리며 두터운 석벽 한 곳이 움푹 기어 들어가며 무너져 내렸다.
“어엇!”
무너진 벽 뒤쪽에서 습한 기운이 후욱 밀려나오자 진우청은 짧은 경호성과 함께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 * * *
은밀하게 움직이던 마차 한 대가 텅 빈 거리에서 천천히 멈추었다. 몇 명의 사내들이 마차에서 내려 마차가 멈춘 집 앞 대문으로 빠르게 다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자 사내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속하게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데려 갈 텐가?”
해천 노인은 마주 앉은 젊은 사내를 보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함께 표정 역시 무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두 눈에 어려 있는 텅 빈 허공 같은 기운은 해천 노인의 현재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옆에 앉은 이여옥 역시 그런 해천 노인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오열을 참고 있었다.
“어딜 가든 인근 백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사내는 이여옥의 천형과도 같은 체질을 들먹이며 답을 대신했다.
사내의 대답대로 이 지방을 백리 이상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여옥의 체질! 그것이 이 순간 최소한의 위안거리라도 되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온실안의 화초 같은 손녀가 독사 굴로 들어가는 상황에 그 독사굴이 백리 안에 있든 천리밖에 있든 그게 뭐가 다르겠는가? 해천 노인의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소!”
사내는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불렀다. 두 명의 다른 사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으켜 세워라!”
사내가 짧게 지시하자 두 명의 부하들이 서둘러 이여옥의 양쪽으로 다가가 팔을 잡았다.
“방금 한 말… 다시 한 번 해 보아라.”
두 사내가 거칠게 이여옥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는 순간 해천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겨우 들릴 수 있는 낮은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기운에 두 사내는 흠칫 움직임을 멈추며 해천 노인과 회의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회의사내 역시 너무 달라진 해천 노인의 기도에 안광을 빛냈다.
지금 이 순간 해천 노인의 모습은 이제껏 조그만 꽃집을 운영하며 아무런 욕심 없이 살아가던 촌로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너무 이질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 분위기를 느꼈음인지 이여옥도 동그랗게 눈을 뜨며 해천노인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 비록 널 보내주지만 짐짝처럼 끌려가는 것을 용납 할 수 없다.”
방안의 공기를 모두 얼릴 듯, 두 눈 가득 한광을 내뿜으며 말한 해천노인이 회의사내를 쳐다보았다.
폐부를 얼릴 듯 다가드는 해천 노인의 눈빛에 회의사내는 불끈 내력을 끌어 올렸다.
“가소로운 놈!”
해천 노인의 입에서 나직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우욱!”
회의사내는 온통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시선을 거둔 회의사내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탁한 호흡 한 가닥이 입 밖으로 빠져나가며 혼백마저 같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사내는 놀란 표정으로 해천 노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비록 인장호의 명령에 따른 일이었지만 그동안 평범한 촌로로 생각하고 온갖 야비한 짓을 다 행하지 않았던가?
꽃의 판매를 방해하기도 했고, 이여옥의 약을 사지 못하게 손을 쓰기도 했다.
그런 행패에도 한결같이 허약한 촌로의 모습이던 노인이 자신으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회의사내, 두채명(豆寨名)은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네놈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경한 자세로 내 손녀를 데려가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기어서 나가게 만들어 놓겠다.”
해천 노인은 여전히 낮지만 항거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검지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해천 노인의 손가락 끝이 회의사내의 미간을 가리켰다.
앙상하고 볼품없는 손가락이었지만 회의사내는 해천 노인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압력에 포박되어 손끝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호흡마저 멈추었다.
“네놈들 따위가 무서워 이제껏 참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가장 따위 때문에 내 손녀를 보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한 해천 노인이 검지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어디, 다시 지시를 내려 보아라.”
해천 노인의 검지 끝에 묶인 듯 회의사내의 신형이 일으켜 세워졌다.
“모, 모셔라.”
잠시 후, 해천 노인의 검지가 거두어지자 겨우 정신을 차린 회의사내가 부하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여옥아…….”
더없이 조심스럽게 부축되어지는 이여옥을 보며 해천 노인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 걱정은 말고 무사히 일마치고 돌아오너라.”
“할아버지…….”
이여옥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이제껏 숨겨왔던 모습까지 보여주며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여옥의 가슴에 사무쳤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체질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아무리 동방회의 위협이 있다 해도 자신을 데리고 이곳을 떠났으리라.
이여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저주스런 운명에 몸서리가 쳐졌다.
“만수무강 하세요, 할아버지! 저도 건강한 모습으로 꼭 돌아올게요.”
눈물을 지우고 억지로 미소를 떠올린 이여옥은 두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모셔왔습니다.”
해천 노인 앞에서 혼쭐이 난 두채명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찬 안에 앉아 있는 인장호를 보며 말했다.
“모셔왔단 말이지?”
인장호는 두채명의 말을 되뇌며 흐릿한 미소와 함께 두채명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아니라… 데리고…….”
해천 노인에게서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흡사 뱀의 그것 같은 인장호의 눈빛을 대한 두채명은 온 몸을 떨었다.
이여옥을 함부로 대하다가 해천 노인에게서 심맥이 파열될 듯한 충격을 받고 얼이 빠진 상태에서 최대한 공경한 자세로 이여옥을 모셔온 행동이 이번에는 인장호의 비위를 건드린 것 같았다.
두채명은 온 얼굴 가득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인장호의 눈치를 살폈다. 마차를 몰고 이곳까지 오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음처럼 앉아 있던 인장호였다.
평소 차갑고 잔인한 성격이긴 했지만 과묵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돌부처라도 된 듯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내내 불안했고 지금 이 순간은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 당연히 모셔와야지. 큭큭!”
인장호는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두채명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마차 밖을 응시했다. 두채명은 죽었다 살아난 기분으로 한숨을 돌렸다.
“안으로 모셔라!”
잠시 더 이여옥을 쳐다보던 인장호는 짧게 지시했다. 두채명과 다른 두 사내들이 이여옥을 조심스럽게 마차에 태웠다.
이여옥이 마차 위로 부축해 올려지고 맞은 편 자리에 앉은 때까지도 인장호는 시선을 마차 밖 한 곳에 고정 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자님!”
한참을 더 그렇게 미동도 앉고 앉아 있는 인장호를 쳐다본 두채명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인장호를 불렀다.
마차 밖으로 향해 있던 인장호의 시선이 천천히 마차 안으로 돌려졌다. 돌려지던 인장호의 시선이 이여옥의 얼굴위로 잠시 스쳤다.
이여옥은 인장호의 눈에서 동공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자신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건 마주친 게 아니었다.
초점이 없는 동공은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조금 전 인장호의 눈은 꼭 그런 모양이었다. 자신을 쳐다본 것 같았지만 결코 쳐다본 것이 아닌 인장호의 눈이었다.
“출발해라.”
마차 밖 한 곳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킨 인장호가 지시를 내리자 두채명의 부하 하나가 말고삐를 흔들었다. 마차가 미끄러지듯 텅 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따각-
따각-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발굽소리가 일각 여를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동안 마차 안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의 시발점은 여전히 인장호였다. 초점이 풀린 것 같은 텅 빈 눈으로 마차 밖을 응시하고 있는 인장호는 일각여의 시간동안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흡사 요괴에게 혼백을 모조리 빨아 먹혀버린 인간 같았다.
심상치 않은 인장호의 모습에 두채명과 그 옆에 앉은 부하는 물론이고, 어자석에서 마차를 모는 다른 부하 한 명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쿡쿡!”
기괴한 웃음소리가 숨 막히는 정적을 깨뜨리며 마차 안의 경직된 공기를 진동시켰다.
“크하하하!”
억눌린 웃음 몇 줄기를 더 토하던 인장호는 마침내 실성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로 인해 얼어붙었던 마차 안의 정적은 사라졌지만 이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왼쪽으로 꺾어라!”
목이 찢어져라 웃던 인장호는 웃음을 뚝 멈추고는 차갑게 내뱉었다.
“공자님! 이 길은……?”
마차를 몰던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목적지로 가려면 왼쪽이 아니라 직선으로 곧장 가야했다.
사내는 잠시 더 갈피를 잡지 못하다 말고삐를 당겨 마차를 정지시켰다.
임문정의 명령과 상충되는 명령을 따르며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 것 보다는 마차를 세우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퍼엉-
폭발음과 함께 마차를 몰던 사내는 등 한 복판에 일장을 맞고 낙엽처럼 전방으로 날려갔다.
히히히힝-
말 잔등 위로 구르며 추락하는 사내로 인해 두필의 말이 깜짝 놀라며 앞발을 들어올렸다.
두필의 말 전방에 팽개쳐진 사내는 의식을 잃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자님 왜, 왜 이러시는지요?”
두채명이 놀란 눈으로 부하와 인장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왼쪽으로 말을 몰아라!”
풀어진 듯한 눈으로 두채명을 쳐다본 인장호가 다시 지시했다.
“그곳은 목적지가……. 크윽!”
마차를 몰던 사내처럼 이의를 제기하던 두채명이 억눌린 비명을 토했다.
어느새 뻗어온 인장호의 손이 두채명의 목을 감아쥐고 공력을 불어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공자… 님!”
두채명은 가래가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네놈들까지 내 말이 우습게 들린단 말이지?”
귀기어린 표정을 한 인장호는 점점 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끄으으-”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입 밖으로 토하며 두채명은 남은 부하 한 명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짓을 했다. 두채명의 부하가 얼른 어자석에 앉아 마차를 왼쪽으로 몰았다.
휘익-
마차가 왼쪽 길로 들어서자 인장호는 두채명의 목을 감아쥐고 있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두채명의 신형이 짚단처럼 마차 밖으로 날아갔다.
‘할아버지…….’
이여옥은 질풍처럼 달려가는 마차 안에서 양손을 겹쳐 필사적으로 입을 막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눌렀다.
얼마쯤 더 그렇게 달린 후 인장호는 마차를 세우게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껏 이여옥을 시체처럼 쳐다보던 인장호의 눈이 처음으로 초점을 맞추어 왔다.
“어떤 인간이 그러더군. 네년이 나보다 최소한 백배는 더 중요한 존재라고…….”
생기를 느낄 수 없는 인장호의 목소리가 마차 바닥으로 내려 깔렸다. 동시에 인장호는 주먹을 뻗었다.
“크윽!”
이여옥과 인장호가 탄 마차를 몰고 왔던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과 함께 사내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인장호의 주먹에 가격당한 명치어림을 부여잡은 사내가 고통과 의문의 가득한 눈으로 인장호를 쳐다보았다.
“네놈이 이쯤에서 죽어줘야 놈들이 내 흔적을 찾는데 혼란을 느끼지.”
인장호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 더 내뱉고는 사내를 마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아악!”
서서히 주검으로 변해가는 사내의 신형이 발 앞에 떨어지자 이여옥은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은 이여옥은 사내의 상세를 살피려 상체를 숙였다.
절명!
사내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이여옥은 인장호의 잔인함에 진저리를 치며 사내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여옥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두 줄기가 흘러 내렸다.
“그런 감상이 얼마나 사치인지 앞으로 처절하게 느낄 것이다.”
마차 안으로 들어온 인장호는 거칠게 이여옥의 어깨를 낚아챘다.
“아악!”
인장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이여옥이 다시 비명을 토했다. 먼저의 비명이 놀람 때문이라면 이번의 비명은 고통 때문이었다.
인장호는 헝겊 인형을 들 듯 이여옥의 신형을 한손으로 들며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하앗!”
이여옥을 마차 밖으로 끌어낸 인장호는 고함소리와 함께 말 잔등을 세게 때렸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울음소리를 토하다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인장호는 이여옥의 신형을 들어올려 허리에 꼈다.
휘익-
세차게 땅을 박찬 인장호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무서워…….’
너무나 창졸지간에 당한 사태에 이여옥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발짝을 움직이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리며 살아온 이여옥으로서는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땅바닥을 도저히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악마 같은 인간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 가는지 그것이라도 알고 싶었지만 눈을 뜨면 온통 내장이 뒤틀리고 정신마저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이여옥은 자신의 신형이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느낌을 받으며 가물가물한 의식을 억지로 일깨웠다.
이여옥은 겨우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망막 속에 맺혀지지 않았다.
어둠!
칠흑 같은 어둠이 이여옥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여옥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몸을 추스르려 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지고 습한 이끼 냄새도 맡아졌다. 동굴처럼 울퉁불퉁 하지 않고 인공의 흔적이 느껴지는 평평한 바닥은 지하 석실 같았다.
파앗-
미세한 소음이 들리며 망막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급격히 밀려났다. 인장호의 손에 들린 화섭자에 붙은 불꽃이 유등에 옮겨지며 사방의 정물이 눈에 들어왔다.
짐작대로 사방이 막힌 석실 안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리던 둔중한 소음들은 석실 문이 열리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런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으니 이곳은 여러 개의 석문을 거쳐 온 지하 깊은 곳의 석실 같았다.
“여, 여기가 어딘가요?”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된 이여옥은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불을 켜고 이여옥을 노려보던 인장호는 여전히 대답을 않고 이여옥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그리고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가요?”
이여옥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기는 내 아버지와 나만 아는 비밀공간이지. 그리고 이곳은 이제부터는 영원한 네 집이 될 것이다.”
인장호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 전에 네년의 비밀을 벗길 실험실이기도 하지.”
인장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비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인장호의 뱀 같은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이여옥은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질문했다.
“나도 그게 궁금해. 다리병신에, 이곳을 백리 이상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계집에게 놈들이 왜 그렇게 광적으로 집착하는지 말이야.”
인장호는 이여옥의 전신을 핥듯이 훑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지!”
끈적끈적 달라붙듯 이여옥의 전신을 훑던 인장호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며 벽 한 곳을 응시했다. 얼음장에서 푸르스름한 귀화가 일렁거리는 듯 했다.
“아주 오래전, 어떤 놈에게 두들겨 맞고 시궁창에 처박힌 후부터 난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놈을 개구리처럼 패대기치고 짓밟는 모습을 수만 번도 더 상상하며 살아왔지. 큭큭!”
벽 한 곳을 응시한 인장호는 억눌린 웃음을 흘렸다.
“그놈은 그렇게 짓밟을 수만 있다면 동방회가 아니라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었지.
후후! 그런데 영원히 상대가 안 되니 비무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그리고 난 단지 그놈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일 뿐이라고? 크하하하하!”
인장호가 목이 터져라 광소를 토하자 벽에 걸려있던 유등불이 출렁거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리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가요.”
멈춰질 것 같지 않은 인장호의 웃음소리를 자르며 이여옥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주 깊은 상관이 있지!”
찢어질 듯한 웃음을 멈춘 인장호가 다시 이여옥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놈이 말하길… 네년은 그들에게 나보다 최소한 백배는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러니 그렇게 중요한 네년을 내가 아예 죽여 버리면 그들의 목적한 일도 수포가 될 확률이 높지.
내 목표를 그들이 휴지조각처럼 짓밟듯 나 역시 그놈들의 목표를 그렇게 짓밟아 줄 생각이지. 이젠 이해가 가겠지? 크큭! 크하하하.”
인장호는 다시 목을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이여옥은 동방회가 왜 자신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장호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인지는 이제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 그리고 그것이 좌절되면 파국의 늪 속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기어 들어가는 인간!
그런 인간이 파멸의 동반자로 자신을 끌고 온 것이다. 이여옥은 온몸에 소름이 끼쳐 옴을 느꼈다. 인장호의 눈길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 느낌은 더 강해졌다.
“우선은 네년의 비밀이 무언지 그것부터 털어놓아라. 그러면 번거로운 일을 덜 수 있을 테니까.”
인장호는 천천히 신형을 움직였다.
“나, 난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들이 일방적으로…….”
이여옥은 몸을 뒤로 빼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번거롭지만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지. 우선 껍질을 벗겨서 그 속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겠군!”
다가온 인장호가 팔을 뻗어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찌르겠어요.”
필사적으로 몸을 빼며 품속에서 소도를 꺼낸 이여옥이 소도로 인장호를 겨누었다.
“귀엽군.”
피식 웃음을 흘린 인장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핑-
인장호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지풍 한 줄기가 이여옥의 손에 들린 소도를 허공으로 튕겨냈다.
“아악!”
소도를 튕겨낸 인장호는 이여옥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네년의 비쩍 마른 몸뚱이 따위에 마음이 동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 네년의 몸 어느 곳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인장호는 이여옥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얼굴은 정말 예쁘군, 하지만 그것이 내 분노와 궁금증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게 유감이야. 이 지독한 궁금증를 해결하려면 우선 껍질부터 벗겨봐야겠지?”
한손으로 이여옥의 머리채를 잡은 인장호가 다른 한손으로 이여옥의 상의를 잡아갔다.
“안, 안돼요! 제발…….”
이여옥이 온 힘을 다해 상체를 감싸 안으며 절규했다. 그러나 사내의 힘을, 그것도 무공을 익힌 사내의 힘을 막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쫘아악-
이여옥의 왼쪽어깨 부분의 옷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져나갔다.
“아악-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들이, 그들이 알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여옥은 더더욱 세차게 상체를 감싸 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 동방회 말인가? 상관없지. 그걸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도 벌이지 않았어. 내 맘대로 못하면 난 더더욱 두려움이 없어지거든…….”
비릿한 미소를 흘린 인장호가 이번에는 이여옥의 오른쪽 어깻죽지 옷을 잡았다.
다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며 이여옥의 오른쪽 소매가 뜯겨져 나갔다. 인장호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
“으윽!”
온 얼굴을 찌푸린 인장호는 답답한 비명을 토했다. 가슴어림으로 다가오는 인장호의 손을 이여옥이 혼신의 힘을 다해 깨문 때문이었다.
“이 망할 계집이!”
고통스럽게 내뱉은 인장호가 이여옥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운 광기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린 인장호의 손에 맞은 이여옥의 신형이 가랑잎처럼 날아 구석에 쳐 박혔다.
울컥!
이여옥의 입으로 선혈이 토해져 나왔다.
“이 죽일 계집!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이제 궁금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냥 죽여 버리겠다.”
자신의 손등에 난 상처를 본 인장호는 공력을 끌어올렸다. 인장호의 손에서 여러 마리의 벌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석실 구석에 처박힌 이여옥은 오히려 편안해지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여인으로 이런 치욕을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속박도 사라졌다. 지척의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통나무처럼 넘어지지 않을까 벌벌 떨던 두려움도…….
그렇게 쓰러진 후 천근같이 느껴지는 육신을 다시 일으키는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이생에서 이만큼 죄 값을 치렀으니 전생의 업도 사라지고 후생에서는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여옥의 머릿속으로 친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만수무강 하세요.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요.’
이여옥은 할아버지의 모습과 하늘같은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절대로 그것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작별을 고한 이여옥의 의식은 어젯밤 추었던 아름다운 춤 속으로 빨려들었다.
교교한 달빛 속에 호금 소리가 울리고, 온 세상을 가득 채운 사내의 존재함을 느끼며 한 점 두려움 없이 춤을 추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철탑 같고 바람같은 사내의 모습이 같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 춤을 추고 싶었는데…….’
어제 밤에는 자신의 주위를 바람처럼 움직이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또렷이 보였다.
휘청 뒤틀리려는 무릎을 발끝으로 툭 걷어 올리며 중심을 잡아주고,
쓰러지는 상체를 가벼운 손동작 하나만으로 깃털처럼 허공으로 띄우던 사내의 얼굴과 움직임이 환하게 그려졌다.
생의 마지막 순간 뇌리를 가득 채운 그 사내의 모습 때문에 저승길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았다. 이여옥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어렸다.
“병신계집! 죽을 각오를 한 모양이구나. 그럼 죽여주마!”
이여옥의 얼굴에 떠오른 무념무욕의 기운을 읽은 인장호는 악귀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쿵!
순간, 벽이 울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일렁하며 쏘아져 나올 듯하던 핏빛 그림자 하나도 급히 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념한 이여옥도, 광기에 사로잡힌 인장호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쿵!
다시 한 번 더 그 소리가 울렸다. 막 장력을 내뻗으려던 인장호는 비로소 그 소음을 의식하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자신과 부친 밖에는 모르는 비밀공간이다. 그리고 몇 개의 문을 지나 들어온 곳이기에 이렇게 가까운 소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착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똑같은 소음이 벽 쪽에서 울렸다.
그렇다면 결코 착각이 아니다. 손바닥 가득 끌어 올렸던 공력을 자신도 모르게 회수한 인장호는 뚫어져라 벽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이곳도 막혔군.”
소음이 울리던 벽 한쪽에서 불만 가득한 음성이 가물가물 들려왔다. 아마 벽 뒤쪽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석벽의 빈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놀란 인장호는 음성이 들린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의 정신을 잃고 있다시피 하던 이여옥도 그 음성에 급격히 의식을 되찾았다.
“이젠 어디가 어딘지 방향조차 구별이 안 되니, 되돌아 갈수가 없고… 뭐 이런 망할 곳이 다 있는거야.”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이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이여옥은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와락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저 목소리가 저곳에서 들리는 지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지만 죽어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공자…!”
이여옥은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진우청의 목소리가 들린 벽 쪽을 향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고함을 지르다가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이여옥은 제발 자신의 목소리가 벽 저쪽까지 들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
무의식적으로 고함은 질렀지만 그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자신의 부하 셋에게 패악을 저지르는 인장호를 똑똑히 보았다.
아무리 철탑 같은 사내지만 무공을 익혀, 한 손으로 부하의 목을 잡고 공깃돌 던지듯 던져 버리는 악마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터져 나온 고함소리를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혼자 죽으려 했었다.
평생 처음으로 삶의 의미와 함께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 주었던 사내!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온종일 어둠이 깃든 동굴 속에서 잠시 스쳐가는 빛을 갈망하는 식물처럼 그리움을 느끼게 만든 사내!
그러나 지금은 제발 그 사내가 자신 앞에 나서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쪽에 누구 있소?”
이여옥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진우청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울렸다.
“망할 계집!”
인장호의 발길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여옥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벽 구석으로 처박혔다.
쾅!
와르르-
다시 탐색하는 듯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던 벽 뒤쪽에서 둔중한 소음이 울리며 벽이 무너졌다.
“아이고 살았다!”
벽이 무너지고 와락 불빛이 쏟아지자 그 불빛을 향해 득달같이 몸을 날린 진우청은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상한 곳에 발을 들였다가 길을 잃고 한참동안 헤맸는데 이곳에 통로가 있을 줄 몰랐소……”
갑자기 밝은 실내로 들어와 아직 적응을 못한 진우청은 인장호를 구원자 쳐다보듯 보며 말했다.
“네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벽을 뚫고 나타난 괴 인영을 멀뚱히 쳐다보던 인장호도 그 괴인영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신음처럼 내뱉었다.
“어라?”
진우청도 그제야 인장호를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진우청도 그제야 인장호를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잠시 갈피를 못 잡던 진우청은 뭔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참동안 칠흑 같은 미로 속을 헤매며 오로지 출구만 생각했기에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결국 이곳의 출발점은 인장호를 만났던 그 지하석실이었다.
도종대 일행의 흔적을 놓치고 홧김에 걷어찬 벽이 무너지며 생긴 공간을 발견하고 이곳까지 왔다.
그러니 그곳에서 사라진 인장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수긍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다음 광경은 전혀 수긍이 가지 않았다.
“소, 소저”
인장호의 존재를 인식한 후 사방을 살피던 진우청은 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이여옥을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 소저 아니시오? 소저께서 어떻게 여기에……?”
진우청은 혹시라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머뭇거리며 이여옥에게로 다가갔다.
“공자님…….”
이여옥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흘러 나왔다.
“이소저가 맞군요. 그런데… 그런데 왜 이곳에……?”
쓰러져 있던 이여옥을 안아 일으키며 그녀의 몰골을 제대로 쳐다보게 된 진우청은 더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여옥의 상체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주르르 무너져 내렸다.
“소, 소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이여옥을 부르던 진우청은 이여옥의 입가에 흐른 선혈자국과 찢어진 상의자락에 와락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리 둔하고 상황판단이 늦은 인간이라도 현재 상황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장호의 성격을 몸소 겪으며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진우청은 잠시 핏발선 눈으로 인장호를 노려보다 이여옥의 상태를 살폈다.
형언하기 힘든 일을 당한 이여옥은 결국 의식을 잃어버렸지만 맥박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이 된 진우청은 사부에게서 배운 대로 이여옥의 목덜미 뒤쪽으로부터 시작해 등줄기 아래까지 차례차례 손끝으로 눌렀다.
황산의 동굴 속에서 외줄위의 용무를 수련하거나, 석순 끝을 밟고 수련할 때 실수를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면 사부께서는 이렇게 혈을 다스려주었다.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언제나 생식만 하셨기에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뼈마디가 드러났지만 그때 혈을 다스리는 사부의 손가락은 연체동물의 그것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사부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전신을 두드리고 누르며,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면 콱 막혔던 숨이 바위가 치워진 듯 시원하게 트였다.
그리고 뒤이어 나른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부였지만 그때만큼은 한 시진 가량의 휴식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것뿐, 한 시진 후에는 다시 호통을 치시며 용무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것은, 다칠 때는 족히 며칠은 자리보전을 해야겠구나 싶었지만 한 시진만 지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용무를 추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꾀병을 부리며 좀 더 누워 있으려 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았다. 사부께서는 제자의 몸 상태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
눈 깜짝할 시간의 백분지 일만큼 어긋나는 호흡까지 간파하시고 호통과 함께 저녁을 굶기는 사람이니 그런 것은 식은 죽 먹기셨으리라.
그렇게 한 시진 가량의 휴식이 끝나고 용무를 출 때마다 진우청은 굵디굵은 자신의 뼈마디를 원망했다.
뼈대가 약해 어디 한 군데 부러졌더라면 아무리 고약한 사부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지만,
지독한 수련동안 피 한 번 토하지 않은 내장과 마찬가지로 뼈마디 역시 단 한 번도 부러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사부의 손가락 기술을 완벽히 이어 받지는 못했지만 흉내정도는 낼 수 있었다. 진우청은 사부의 추나술을 떠올리며 이여옥의 등줄기와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속이지?’
이여옥의 등줄기 혈을 짚던 진우청은 이여옥의 몸속에 흐르는 이해할 수 없는 기운에 어리둥절해 하며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호흡을 불어 넣었다.
강호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기(眞氣)라 부른다고 했지만 그것의 근본을 호흡이라는 말과 함께 사부께서는 언제나 호흡이라고 일컬었다.
그 부드럽고도 깊은 숨결이 진우청의 손가락을 통해 이여옥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사부에게서 배운 공부가 이여옥에게는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인간의 외양은 각양각색이지만 근본을 이루는 장기와 뼈마디의 개수 등은 모두 같다고 했다.
그리고 진기가 움직이는 길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이여옥의 몸은 사부의 가르침이 처음부터 잘못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병을 얻은 것일까?’
날 때부터 다리를 쓰지 못하고, 이 고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병은 이런 체질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진우청의 거듭된 타혈수법에 이여옥은 가느다란 신음을 토했다. 사부께서 자신에게 해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여옥의 상태가 조금은 호전된 것 같아 보이자 진우청은 조심스럽게 이여옥을 눕혀 놓고는 자신의 겉옷 윗도리를 벗어 백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이여옥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그때까지 인장호는 미동도 앉고 진우청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우청은 천천히 일어서서 인장호를 바라보았다.
“후후!”
진우청과 눈이 마주치자 인장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침에는 임문정의 방해로 풀어주었지만 진우청은 애초부터 요절을 내고 싶은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제 발로 우리 속으로 기어들어 왔으니 춤이라도 추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과 함께 인장호는 사냥한 쥐를 저만치 놓아두고 놀리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진우청과 이여옥을 번갈아 쳐다보며 손마디를 꺾었다.
우드득-
손가락 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더없이 기분 좋게 울렸다. 사냥감을 잡아놓고 즐기는 이런 여유는 아무리 길어도 싫증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목을 돌렸다.
우두둑-
손가락마디에서 들려왔던 것 못지않게 기분 좋은 소리가 목과 등줄기로부터 울려왔다.
“그런걸 보고 병신 육갑 떤다고 하지.”
인장호를 보고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진우청은 불쑥 한마디 던졌다. 말재주도 없고, 말로서 누굴 격동시키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었지만 지금 인장호의 모습은 그 표현이 딱 어울려 보였다.
“병신은 네놈 옆에 있는 그 계집이지. 후후!”
사냥감을 가두고 나서부터는 온몸을 감고 휘돌던 광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으로 바뀐 인장호는 진우청의 도발에도 아랑곳 않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만 놓고 본다면 수양이 깊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갖춘 청년고수 같았다.
“사지육신이 멀쩡할 때 마음껏 재롱을 떨어라!”
진우청은 짤막하게 말했다.
살생을 하면 그 영혼이 목에 올라타 그만큼 몸이 무거워지고, 용무를 추는데 방해가 된다고 사부께서 말씀하셨지만 이놈은 말 그대로 죽여 버리고 싶은 인간이었다.
진우청은 슬쩍 소매를 걷어 올렸다.
조부님 역시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의 처신이라 하셨지만 당장 조부께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 말린다고 하여도 지금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서서히 끊어 오르는 분기가 진우청의 몸을 감싸왔다.
‘후우-’
진우청은 날숨 한 줄기를 길게 내뱉으며 몸을 가볍게 했다. 분기가 끊어 오르며 무거워지던 몸이 다시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살얼음판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허허롭게 서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워지게 만든 진우청은 이여옥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이여옥은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석실구석에 구겨지듯 기대어져 있었다. 안쓰러운 모습이지만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구석 쪽에 붙어 있는 게 나았다.
“준비가 되면 말하라구. 난 사흘이라도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인장호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네놈 정도는 언제든지, 그리고 한 쪽 발만으로 이길 수 있다.”
눈을 치켜 뜬 진우청은 석실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무서워 못살겠군.”
피식 웃음을 흘린 인장호도 석실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인장호의 걸음걸이는 진우청을 철저히 무시하는 자세였다.
네깐 놈의 공격은 언제 어떤 자세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가득했다. 그런 인장호의 움직임을 보며 진우청 역시 아무런 자세도 잡지 않고 서 있었다.
딱히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자세 같은 건 배운 적도 없었고 배웠다고 해도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어느 순간!
짜작-
인장호의 볼에서 경쾌한 격타음이 터졌다. 느긋하게 다가오던 인장호의 신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졌다.
인장호의 동공이 최대한 크게 열리며 방금 자신의 양쪽 뺨에서 작력한 소리가 무언지 진우청에게 묻고 있었다.
휘청-
인장호는 자신의 다리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신형을 추스렸다.
이윽고 한 쪽 콧구멍에서 핏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느낀 인장호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우청을 노려보았다.
“너……?”
짜작!
다시 두 가닥의 격타음이 인장호의 양쪽 뺨에서 터졌다. 그리고 나머지 콧구멍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인장호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있었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따귀를 맞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당했다면 이렇게 어이없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의 따귀는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였고, 솥뚜껑만한 손이 뻗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이상하게 속수무책이었다.
호흡의 미세한 빈틈을 파고드는 듯한 움직임! 단순하기 짝이 없는 두 번째의 손놀림에는 그런 이상한 움직임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그런 미세한 틈이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
휘청!
인장호는 자신의 신형이 다시 휘청거려 옴을 느끼며 급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단 두 번의 따귀 세례였지만 공력이 한 바가지는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인장호는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짐승의 포효처럼 고함을 지른 인장호는 진우청을 향해 쏘아졌다. 슬쩍 한 발 뒤로 몸을 움직인 진우청은 앞쪽에 있던 발을 뻗었다.
단순하게 뻗어나간 진우청의 발끝이 어느새 인장호의 무릎을 찍어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이 달려들던 인장호는 벼락처럼 몸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인장호의 정권이 진우청의 면상으로 질풍처럼 날아들었다.
스슥!
허공을 가른 발을 슬쩍 비튼 진우청이 이번에는 인장호의 반대쪽 무릎을 찍어갔다.
‘어엇!’
인장호는 목구멍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팔보다는 다리가 긴 법이다.
특히나 인장호보다 머리 한 개 반은 더 큰 신장인 진우청의 다리는 인장호의 팔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인장호는 주먹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한 대 찔러 넣으려 고집을 부리다 무릎이 박살나면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주먹 쓸 일이 없어질 것이다.
파앗-
주먹을 거두며 다시 바닥을 박찬 인장호는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무릎을 찍어오는 진우청의 발목을 쓸어갔다.
커다란 낫이 억새를 휩쓸 듯 쓸어오는 인장호의 퇴법에는 아름드리 통나무라도 꺾을 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인장호의 발이 진우청의 발목을 쓸었다 싶은 순간 진우청의 발이 슬쩍 위로 들렸다.
‘어헉!’
인장호는 더 큰 신음을 삼켰다. 쾌속하게 쓸어간 퇴법을 피하며 슬쩍 들린 진우청의 발이 이번에는 허공에서 무릎을 밟아오고 있었다.
마치 곰 발바닥처럼 커다랗게 내려 눌러오는 발그림자 그 그림자에 깔리면 자신의 무릎은 얼음조각처럼 으스러질 것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낸 인장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겨우 신형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진우청의 발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환상인 듯 진우청의 두 다리는 석실중앙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내리 눌러오는 발바닥에 스치듯이 다리를 빼냈으니 바닥을 구르는 진각 소리라도 들렸어야 옳을 일이건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곰발만한 발이 솜뭉치가 아닌 이상 찍힌 바닥이 비명을 지르지 않을 리 없었다. 의문 가득한 눈을 부릅뜬 인장호는 일어설 생각도 않은 채 진우청의 다리만 쳐다보았다.
스슥-
통나무 같은 다리가 다시 움직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인장호는 튕기듯 신형을 일으켰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인장호는 신형을 일으킨 후에도 싸울 자세를 잡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하들을 처치하는 수법을 봐서 한 가닥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들었지만 자신의 상대는 될 수 없는 놈이라 여겼는데 따귀 세례에 이어 바닥에 주저앉게까지 만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 유화결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후 이제껏 누구에게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전에 임문정에게 따귀를 맞았고, 오후에 와서는 진우청에게 네 대나 더 맞았다. 그리고 이런 낭패한 모습까지…….
심하게 흔들리던 인자호의 눈이 구멍이 난 벽면을 쳐다보았다. 거의 한 자는 되어 보이는 두께의 석벽이 단번에 무너져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한 자나 되는 두께의 석벽이라면 쇠뫼로 두들겨 부순다 해도 여러 번을 거듭해 두들겨야 저만한 구멍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촌놈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등 뒤에 몽둥이 두개가 꽂혀 있지만 그건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맨손이나 맨 발로 단번에 석벽에 커다란 구멍을 냈단 말이다. 처음에는 너무 뜻밖의 조우에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이건 간단히 흘려버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그런 한 줄기 자각이 오히려 인장호의 투지를 불살랐다.
“정말 뜻밖이야, 후후!”
인장호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점점 짙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차갑기 짝이 없는 기운이 온 얼굴 가득 뿜어져 나왔다. 좀처럼 감정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칠면조 뺨치는 얼굴이군!”
진우청은 인장호의 얼굴을 보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죽여 줄 텐데 아주 악을 쓰는구나. 그 벌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네놈뿐만 아니라, 저 계집까지…….”
한층 더 냉기가 어리는 표정이 된 인장호는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였다. 아까처럼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공격하겠다는 표시였다.
스윽-
인장호의 양팔이 묘한 각도로 교차되며 두 다리는 도약하기 직전의 표범의 뒷다리처럼 구부려졌다. 언뜻 보기에도 사이한 초식을 감춘 기수식이었다.
“지랄!”
그런 것들은 전혀 신경 안 쓴다는 표정의 진우청은 여전히 무방비상태로 선채 내뱉었다.
조금 뒤, 인장호의 뒷발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자세히 본다고 해도 쉽게 잡아내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진우청의 앞발이 약간 방향을 바꾸며 한 치 정도 옆으로 비켜 밟았다.
진우청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돌산 꼭대기에서 몸을 스치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대처하며 용무를 추던 모습과 같았다.
눈 한번 깜박이는 순간을 백 개로 자른 만큼의 불일치를 스스로 느끼며, 용무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후부터는 주변을 흐르는 미세한 기류도 읽어야 했다.
그 기류의 흐름을 역행하면 기류는 두터운 막처럼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젠 의식 이전에 몸이 먼저 알았다. 인장호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기류에 대응하며 진우청의 몸은 스스로 반응했다.
인장호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한 치 정도의 불일치!
그러나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방향으로 비껴난 진우청의 걸음에 인장호는 자신이 노리고 있던 타점이 모조리 흐트러지며 자세마저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부웅-
인장호의 그런 파탄을 정확히 읽은 듯 진우청의 발이 무거운 바람소리와 함께 날아들었다.
‘무릎!’
인장호는 무릎 관절이 시큰한 기분을 느끼며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진우청은 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오로지 한 쪽 발만으로 집요하게 인장호의 무릎을 노리고 들었던 것이다.
선공을 하려다 오히려 몸을 뒤로 빼낸 인장호는 재차 한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선 발로 강하게 땅을 박찬 인장호는 송곳을 찔러 넣듯 진우청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찔러 넣었다.
“이런 죽일!”
인장호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번에도 주먹을 끝까지 뻗게 못하고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진우청의 커다란 발이 여전히 무릎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먹이 명치를 가격하기 전에 촌각이라도 먼저 자신의 무릎을 건드릴 속도와 거리로 다가오는 발끝!
몇 번을 똑같이 무릎을 공격해 오지만 번번이 대처할 바를 찾지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하체로 공격할 때는 상체와 양팔이 몸 전체의 균형이 잡아주는 것이 필수적이듯, 주먹을 내지를 때는 하체의 굳건히 받침이 절대적이다.
그런 조화가 깨어지면 절대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고, 치명적인 반격을 받게 된다. 인장호는 그런 단순한 무리가 새삼 해일처럼 거대하게 뇌리를 덮쳐 옴을 느꼈다.
일권을 내뻗기 위해 버팀목처럼 든든히 버텨주어야 할 하체의 가장 취약하고도 가장 앞쪽으로 나간 무릎의 한점을 노리는 진우청의 수법에 인장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건 결코 정공법이 아니었다.
초식도 없고, 제대로 배운 각법에 의한 공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초식과 자세는 갖춰지지 않았지만 매번 촌각도 어긋나지 않는 순간에 다가오는 발끝은 칼끝보다 더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다가오는 순간 무릎을 시큰하게 만드는 한 가닥 기운은 그 발에 실린 내력의 정도를 절로 짐작케 해 주었다.
단 한 순간에 한 자가 넘은 두께의 석벽을 무너뜨린 힘이 고스란히 그 발끝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는 거야?’
인장호는 머리 꼭대기로 역류하는 혈기를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쓰며 진우청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진우청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인장호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싸우기 전에는 온갖 거만을 다 떨더니 막상 싸울 때는 뒷걸음질만 쳐대는군.”
진우청은 입가에 비웃음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제법 날카롭고 악독한 공격이었지만 이놈은 얼마 전 계집애처럼 손톱을 숨기고 장난을 치던 인간보다 더 너그러운 사부를 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주제에 죽이니 살리니, 준비가 될 때까지 며칠이나 기다려 줄 수 있다느니 하며 거드름을 피웠다는 것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병신춤에다, 그것마저 제대로 못 추는 주제에…….’
진우청은 내심 떠오른 가소로운 기분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며 한 발 더 거리를 좁혔다.
“죽어-”
진우청의 표정과 말에 억누르고 있던 열기를 터뜨린 인장호는 회선보를 밟으며 연속 다섯 번의 발길질을 내뻗었다.
실내 공기가 압축되었다 터져 나가며 석실 벽을 두드리자 석벽이 둔중한 신음을 토했다. 빈틈을 연환공격으로 메우며 연속해서 날아드는 발길질에 진우청은 상체를 흔들었다.
진우청의 상체가 흡사 연체동물처럼 움직였다. 결코 크지 않은 움직임!
인장호의 발길질이 스치듯이 지나갈 정도로만 움직이면서도 그 움직임 사이에는 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언제 어떤 모양으로도 변 할 수 있는 비정형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인장호는 마치 허공을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에 온 내력을 끌어 올리며 두 손을 어지럽게 교차시켰다.
파아앙-
인장호의 손바닥에서 압축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압축된 공기의 파장을 느끼는 순간 진우청은 신속히 신형을 움직였다.
콰앙-
폭음과 함께 석벽 한쪽에서 흙먼지가 튀었다. 이윽고 벽에 손바닥만한 구멍이 뚫렸다.
“천룡후(天龍吼)?”
진우청은 낮게 뇌까리며 인장호의 일장이 작렬한 벽면을 쳐다보았다.
천룡의 고함!
사부께서는 그것을 천룡후라 가르쳐 주셨다.
호흡의 소모가 심하니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내뱉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던 천룡후가 인장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사부의 가르침대로 인장호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해 있었다.
쳔룡후가 아니라 토룡후(土龍吼)라 부르기에도 아까울 정도였지만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이 더 이상 주먹이나 내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진우청은 좀 더 빠르게 인장호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진우청이 의심스럽게 생각하던 일이 벌어졌다. 주먹도 못 뻗으리라 생각했던 인장호가 다시 한 번 일장을 갈겼다.
진우청의 신형이 두 겹, 세 겹의 잔상을 남기며 용의 비늘을 만들어냈다.
퍼억-
진우청의 가슴에 인장호의 장력이 정확히 가격되었다. 그러나 이미 힘이 빠진 지렁이의 몸부림이 용의 비늘을 뚫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운기된 용린탄주의 호체진기가 인장호의 일장을 흩어버렸다. 인장호는 멍하니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전신의 남은 내력을 모두 모아 뿌린 장력을 정확히 맞고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진우청이 이젠 괴물 같아 보였다. 괴물의 손이 갑자기 뻗어 나왔다.
짜악-
뺨에서 격타음이 터져 나오며 인장호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때 진우청의 발끝이 인장호의 발목을 건드렸다.
따귀를 맞고 허공으로 떠올라 벽 쪽으로 날아가려던 인장호의 신형이 거짓말같이 균형을 잡으며 그 자리에 내려섰다.
어떻게 자신이 벽 쪽으로 날아가지 않고 이 자리에 계속 서있는지 갈피를 못 잡은 인장호의 붉은 손자국이 난 얼굴이 점점 백짓장처럼 창백해져갔다.
두 번에 걸친 장력의 발출로 내력의 소모가 심한 탓이기도 했고, 그 장력을 맞고도 꿈쩍도 않는 진우청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든 때문이기도 했다.
“쿨럭!”
인장호는 기침과 함께 선혈을 토했다. 선혈 속에서 이빨 두 개도 같이 토해졌다. 그것도 앞 이빨이었다.
“이, 이…….”
혀끝으로 앞 이빨 두개가 부러져나간 것을 확인한 인장호는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앞 이빨이 부러져 나간 것은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난 만큼이나 외모를 갉아먹는다.
그런 생각에 이성을 상실한 인장호는 동귀어진이라도 하겠다는 자세로 진우청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진우청의 발끝이 인장호의 무릎을 걷어찼다.
우둑!
무릎 관절이 유리조각처럼 깨어지며 인장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인장호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성한 한 쪽 다리로 바닥을 찍으며 달려들었다.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는데…….”
진우청의 발끝이 인장호의 성한 무릎을 더 세게 찍었다.
“아아악-”
마침내 인장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아무리 악종이라도 무릎 두개가 회생불능으로 박살이 나면서까지 달려들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군!”
박살난 무릎 뼈를 감싸 쥐며 발악을 하던 인장호가 하필이면 이여옥의 기대있는 벽 쪽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 진우청은 미끄러지듯 다가가 인장호의 복부를 걷어찼다.
쿵-
인장호의 신형이 반대쪽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벽에 처박히는 충격으로 인장호는 까마득히 의식을 놓았다.
평생 다리를 쓸 수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고통을 느끼지 않아 오히려 다행한 일일 것이다.
진우청은 아직도 분기가 다 풀리지 못한 눈으로 인장호를 쳐다보다가 급히 이여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력을 되찾은 것 같던 이여옥의 호흡이 다시 가늘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
감사 합니다!!!!
ㅈㄷㄳ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