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휴가기행 제10부) 동굴법당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의령 일붕사(2/2)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의령일붕사는 일붕법왕종의 본사라고 한다. <연합불교방송신문> 기사에 의하면 일붕법왕종은 1988년 10월 23일 도의국사를 종조(宗祖)로 하여 일붕 서경보 큰스님을 초대 법왕으로 추대하여 설립되었다. 종지(宗旨)는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 원만한 교리를 봉제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로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삼으며 석가모니불 이외의 불상을 모신 사찰은 그 관례에 의존한다고 되어 있다. 별도 규정 없이 사찰 임의대로 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소의 경전은 금강경과 전법 법어 및 기타 경전연구와 교리해설, 염불 등으로 한다. 의령 일붕사는 대웅전에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석가모니와 노사나불을 모시고 있다. 또다른 기사에 의하면 1984년 일붕선종회 개설에 이어 1988년 대한불교일붕선교종이 창종되었고 1991년 재)대한불교일붕선교종으로 통합되었다는 기사도 있는데 일붕사에 대한 명시된 자료가 없어 일붕법왕종과 일붕선교종과의 관계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아미타대물을 지나 500m 정도 올라가면 서담암이 나온다. 서담암이란 연못 위에 극락보전이 있다. 서담암(瑞潭庵)이란 상서러운, 경사로운 연못위의 정자라는 뜻이다. @일붕사의 백미로 일컫는 극락보전은 서담암(瑞潭庵)으로 불리는 연못위에 조성되어 있다. 관음전에서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협시불로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셨다.
연못을 가로질러 극락보전으로 가는 다리는 아직 다리명이 보이지 않는다. 극락보전으로 가는 전각 앞에 다리를 두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은 대부분이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산지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들의 구조는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에 입각해 일정한 법칙성을 지닌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섬부주에서 수미산 위 삼계(三界) 고해(苦海)를 지나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향수해를 지나야 한다. 그래서 전통 사찰에 이르기 전에 통상 냇물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일붕사는 연못을 조성하고 다리를 놓았다. 이런 다리를 피안교(彼岸橋)라 한다. 피안교는 해탈교, 극락교, 열반교라고도 불리며 일붕사의 다리는 수평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반월(半月)아치형으로 만들어져있다. 이는 바다를 건너 수미산으로 들어감을 상징하기 위해서다. 극락보전 문살이 화려하다. 극락보전 대법당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셨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불린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살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역사상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은 그가 현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 상징하는 자세는 선정인, 타고 다니는 것은 공작, 배우자는 판다라, 성은 라가, 상징하는 요소는 물, 상징하는 방향은 서쪽, 상징하는 감각은 미각, 상징하는 감각기관은 혀, 인체에서 머무는 장소는 입이다.
@아미타불은 장수하게 해주는 존재로서 '무량수불'(Amit?yus:산스크리트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린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아미타불'과 '무량수불'이라는 2가지 이름이 같은 뜻으로 상호교환되며 사용하기도 하지만, 티베트에서는 명확히 구분하고 있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티베트의 특별한 라마 의식에서는 무량수불을 숭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무량수불은 여러 가지 장식에 왕관을 쓰고 영원한 생명의 보석들이 나온다는 신비스러운 항아리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인터넷에 회자하는 의령 일붕사 창건유래를 살펴보면 이렇다. 일붕사가 위치한 이곳은 약 1330년 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최고의 격전지였다고 한다. 당시 왕군이 봉황대 영역 안에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의 삼왕자가 거처한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성덕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베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조 성종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고 사찰을 파괴함으로서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사찰을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옮겨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48년 전)에 장사곡 출신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승을 축출하고 암자를 파괴할 때 쇠망치로 수없이 내려쳐도 미륵불상 한불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주승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 하였는데 지금의 연호사 불상 중 일부분이 성덕사 불상이라고 전해온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암자로 있다가 1934년 8월 26일 당시의 면장이 산주와 더불어 봉황대의 덕경을 도우기 위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관세음보살상과 여래불상을 모셨으나 소실되어 다시 이야용 스님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다. 그러나 1984년 10월 24일 누전으로 인하여 또다시 성덕사법당이 완전 소실되었으나 1986년 7월 26일 사단법인일붕선종회 (지금의 재단법인 일붕선교종) 창종주 일붕 서경보 종정 큰스님이 혜운 주지스님을 부임케하여 이 산 이름이 봉황산이라 산의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한다고 하여 주지스님이 불사를 행하고 사찰 명을 일붕사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극락보전주련>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제하방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 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아미타불이 어디에 있는가? 불심의 지혜작용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염불한다는 의식조차도 없을 때, 육문에서 자색의 광명이 비추리라. 극락보전 뒤편 전각은 용왕각이다. 전각문은 닫혀져 있고 옆에 용왕이 서 있다. 산신각 극락보전을 내려오면서 언덕에서 본 사찰전경 @일붕사 안내서에서는 칠성각이 북극전으로 기술되어 있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장수·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다. 칠성각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다. 칠성각에는 칠 여래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데 일봉사는 탱화를 두지 않았다. 칠성각 안에는 금륜보전을 지물로 들고 있는 치성광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협시불로 일광, 월광보살을 두었다.
<칠성각주련> 靈通廣大慧鑑明(영통광대혜감명) 住在空中映無方(주재공중영무방) 羅列碧天臨刹土(나열벽천임찰토) 周天人世壽算長(주천인세수산장)
신령스러운 신통력과 광대한 지혜로 밝게 살피시어 허공중에 머물면서 비추지 않는 곳 전혀 없네. 푸른 하늘에 나열하여 곳곳마다 내리시어 하늘과 인간세상 두루두루 수와 복 길게 하시네. 마애 나반존자와 산신각 석굴법당 대웅전에 미련이 남아 다시 한번 둘러본다. 경내를 돌아 나오면서 바라 본 범종루 ~제11부에서 사량도 가는 길 삼천포 바다풍경이 이어진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