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전에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나는 출가위인가?’ 마음은 출가위인 것 같은데 실지로는 출가위가 아직 아닌 것 같고요.
오늘 출가위를 제대로 알려주면 ‘아이고 마음공부 못 해먹겠다, 포기해야겠다’ 하려나 싶네요. (웃음) 오늘 공부방 오신분들 중에는 보통급이 있고, 특신급 올라간 사람 몇 있고, 항마위가 조금 있지요.
출가위는 어떤 사람들인가 역사적으로 보면 인도의 간디, 이순신 장군이 출가위입니다. 불교에서 성철스님이 출가위입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구인선진님들이 전부다 출가위에 오르셨습니다.
재가교도로서 출가위는 삼삼회에 5명 있었습니다. 삼삼회 식구들이 옛날에 대산종사님을 뵙고, “저희들이 열심히 해서 항마위가 되겠습니다” 보고를 했어요,. 그러니까 당시 종법사이신 대산종사님께서 “무슨 항마위만 하겠습니까? 전부 항마위 이상 도인이 되십시오. 전부다 대호법이 되십시오.” 부촉을 해주신 사례가 있습니다.
출가위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죠. 어떻게 하면 출가위가 될까요? 열심히 하면 될까요?
우리 교당에 감산장학회에서 장학금을 주는데, 감산 고문국 종사가 출가위이십니다. 주식회사를 운영하세요. 제가 그 회사에 가봤더니 대종사님 법대로 회사를 운영하시더라고요. 수익을 회사 구성원들을 위해서 씁니다. 또한 세금을 속이지 않고 정확하게 납부하고 있고, 수익금의 일부를 사회에 장학금으로 희사하는 등 국가나 사회에 도움을 주는 데 사용합니다.
출가위는 만나보면 다릅니다. 지금 휘경여고 이사장님이신 요진산업의 건산님도 출가위이십니다. 제가 원남교당에 있을 때, 출가위가 여러명이셨습니다. 국회부의장 하셨던 백산 정도진님의 부인 양타원님이 출가위였고, 삼성 이건희 회장 장모이신 신타원님이 출가위이시고요.
그런 분들은 돈 많아서 출가위 된 거라고 시비가 있을 법도 한데, 양타원님과 신타원님을 만나보면 그런 시비가 있을 일이 없어요. 출가위 어른들을 만나보면 참 기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달라요 마음이 달라요.
사람이 한 생에 태어나서 출가위 이상 어른들을 많이 만나고 인연 짓는 사람은 참 복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 보고 부러워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도인 가까이에서 인연 짓고, 법문도 듣고, 지도도 받고, 기운을 받으면서 목표를 삼아 다가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내가 저번주에 그랬죠. “내가 이 생에 이 정도 가야겠다” 목표를 잡으면, 그 정도까지 가든 가 바로 밑에 단계로 가든가 할 거에요. 허무맹랑한 목표가 아니라 간절히 목표를 잡으면 그 목표대로 이뤄질 거에요
그러나 어떤 것이든 갑자기 되지는 않죠. 기초 터 잡기 부터 잘해야합니다. 출가위라는 것은 범부의 세계가 아니라 성자의 세계지요. 일반사회에서는 만나기가 쉬운 분이 아니에요 일반사회에서는 거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보통급은 입문한 것이라 했습니다. 불지출발입니다. 특신급은 심신이 귀의했다고 했습니다.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 진리, 법, 스승님 믿고, 이 회상에서 나를 놓고 진짜 참 나를 위해서 영생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과감하게 낸 거에요. 마음을 적당히 낸 게 아니구요. 젊은 사람은 출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특신급이 아니에요. 나이 먹은 사람은 “내가 왜 일찍 못 만나서 출가를 못하는고” 생각이 들어야지 정식특신급인 것입니다. 현재 출가를 하든, 안하든,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해요. “나는 출가를 절대 안 해” 생각한다면, 정식특신급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특신급은 우선순위가 딱 바뀐 거에요. 우선순위가 내가 아니고, 이 법입니다. 이 스승이고요. 그리고 삶의 방향이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삶으로 바뀐 것이 특신급입니다. 정식특신급으로 못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진치(재색명리)를 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신급에 가지 못해요. 자기라는 것을 넘지 못하는 것이지요.
특신급의 마음을 실행하는 사람이 출가위입니다. 특신급 때는 마음은 바뀌었지만, 욕심 습관도 남아 있고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출가위의 마음과 특신급의 마음이 같은 것입니다. 출가위는 특신급의 마음을 실행하고요. 그래서 출가위를 심신출가라고 하지요. 나를 벗어버리고 내 집을 벗어버리고, 내 울타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정식특신급은 “세상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냅니다. “나 혼자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면서 가끔 기부나 하겠다” 생각한다면 정식특신급이 아니에요.
법마상전급에 가면 수양력을 얻으려하고 연구력을 밝히려하고 습관을 고치고 취사력을 갖추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수많은 습관 업력 욕심이 나를 움켜잡고 계속 유혹합니다. 육신이 편하게 쉬라고 하고, 주변 인연들이 뭐하러 고생하느냐 유혹하지요. 특신급 때 세운 서원을 놓지 않고 정진하는 때가 법마상전급입니다.
그렇지만 특신급 때 서원의 국한이 작거나 신심의 뿌리가 약하면 법마상전급 때 중근병에 걸려서 거의 포기합니다. 스승을 자로 재고, 소선소지에 만족하게 되지요. 경계가 힘들면 “원불교가 나 죽이네” 할 때가 법마상전급이에요
이때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게 서원이고 신심입니다. 서원과 신심에는 학벌, 인불, 남녀, 노소 상관없어요.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서원과 신이 약하면 중간에 다 사라지고 병에 듭니다. 특신급 때 서원을 세웠다 하더라고, 스승의 타력과 경전의 타력이 지속적으로 도움주어야 해요. 그래야 서원과 신심이 약해지지 않아요.
경계는 어디서나 옵니다. 재색명리의 경계가 오거나, 건강의 문제, 인연의 문제, 이사 결혼 생사문제 등 여러 가지 경계가 오지요. 정식특신급 서원을 세웠어도 대부분이 그때 무너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안 무너지고, 타협하고 합리화해요. 그러다가 서서히 약해져요. 결국에는 회상을 떠나고 원불교를 한 때의 추억으로 남기지요.
법마상전급 때 서원을 계속 반조하는 것이 중요하고, 법에 대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마상전급 때 귀신도 모르게 적공해야 합니다.
법마상전급은 심신교전이거든요. 심신이 법과 마로 싸울 때예요. 싸우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잖아요. 이길 때는 그렇게 좋아요. 그렇지만 질 때는 그렇게 자기가 밉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포기하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들 때 이겨내야해요. 상전급 때 마음의 국한이 작거나 믿음의 깊이가 작으면 중근병에 걸립니다. 과거에는 중근병에 걸리면 빠져나오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 법, 이 회상 만나서 중근병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당에도 열심히 다니다가 중근병이 들어서, 딴 곳 쳐다보고 불신하고 불평불만 많아지고, 비교심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상전급 때는 내 안으로 귀신도 모르게 적공해야하는데, 중근병에 들면 비교심, 상대심에 빠져서,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거지요.
법마상전급 때 실질적으로 공부에 들어가야해요. 성격이 관계형인 사람들은 법마상전급에서 위로 잘 못 올라가요. 주위만 맴돌기 쉽거든요
법마상전급때 수양을 하면 진경에 들어가야하고, 연구를 하면 확실히해야 하고, 취사를 할 때는 습관을 떼도록 유무념 공부를 확실히 해야해요. 관계형들은 그저 형식만 떼우는 식으로 공부하기 쉽습니다. 수양할 때도 형식으로만 하다보니 막상 진경에 들어가지 못하고요. 연구할 때도 안다 싶으면서도 물어보면 자신이 없어하고요. 법마상전급 때 제대로 공부가 툭 터져버리면, “어떤 질문이든 하세요” 라는 식으로 자신감이 붙어요. 법강항마위는 견성해서, 의두를 다 풀어버릴 수 있어요.
출가위 때는 대각입니다. 타종교를 봐도, 핵심이 무엇인지 본의가 무엇인지 다알아요. “우리가 하려던 것을 저 사람들은 저렇게 했구나” 알지요.
어떤 할머니가 스님에게 물었답니다. “제가 기도를 하는데도 기도가 안 들어요. 우리 손자가 교회를 나가기 때문에 부처님이 기도 안 들어줄 것 같습니다.” 스님이 답했답니다. “부처님은 그런 거 안 가려요. 할머니께서 가리고 있지요. 부처님은 교회 다니는 거 상관안해요.” 출가위만 되어도, 국한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런 할머니는 출가위가 되기 어렵죠.
항마위는 원리에서는 국한이 터졌는데, 실제 생활에서 국한이 있어요. 바자회 때 여자 교도님들이 자기 교당 물건만 팔려 해요. 막상 바자회 수입으로는 전체 교구 교단 지원하는 거거든요. 그런데도 바자회 할 때는 내 교당 것만 팔려는 거지요. 국한이 터지지 않아서 크게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출가위 되면 내 교당, 내 나라, 내 종교도 넘어섭니다.
항마위에 올라가면 심신조복입니다. 신심을 조복 받았습니다. 내가 한 마음 챙기면 계문도 다 지켜낼 수 있고, 한 마음 챙기면 경계에서도 다 이겨낼 수 있어요. 상전급 때는 경계에 속지는 않아도, 질 때는 있어요. 그렇지만 항마위 때는 거의 이깁니다. 항마위는 1만 명 중에 1명 나올까말까 하지요.
항마위가 되기도 참 어렵습니다. 귀신도 모르게 적공을 하다보면, 견성도 하고, 진경에 합일하기도 하는 식으로 진짜 공부가 되는 거에요. 항마위부터 진짜 공부입니다. 법마상전급 때까지는 자기가 자기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데 속은지도 모르면서 속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마음공부하고 안 볼 때는 안하고는 합니다. 형식으로만 공부하다보니, 시간이나 돈을 회상에 어느 정도 투자했는지 따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법강항마위가 되면 일동일정에서 깨어있습니다. 마음에 자유가 있다보니 이것을 할지 말지 자신이 정할 수 있습니다. 항마위는 어떤 일을 성공시켜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일이던지 마음먹으면 할수 있는게 항마위에요.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출가위에 올라가 버리면 이제 완전히 달라져요. 항마위 때도 병이 있어요. 항마위 때는 계문이 없지요. 심계만 있을 뿐이고요. 항마위 때 병은 집입니다. ‘이것이 법이다’하는 집이 법집입니다. ‘아이고, 내 코가 석자인데 어디 거기까지 쳐다봐?’ 그러면서 자기 국한에 딱 묶여요 그걸 소국집이라 그래요. 해외사업 한다고 하면 ‘왜 안에다 안하고 밖에다가 투자 하냐?’ 하지요. 반면에 출가위가 되면 기도를 더 하게 되어있어요 이를테면, 지금 IS가 싸우고 있어요. 내가 가서 직접 도울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기도라도 해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는 마음이 출가위에요.
그리고 출가위는 이 세상을 위해서 타자녀 교육을 아니할 수 없구나 생각이 들어요. “왕성이 출현하여 내학을 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성인이 다시 와서 후진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출가위 중에 장학사업을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것이 세상을 도와주느냐 고민하지요. 기도로써 도와주고, 현실적으로 장학금을 내서 학교라도 짓거나 학사라도 지어서 도와주려 합니다.
항마위는 법집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법에 집착하고 법에 묶입니다. 법대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처음에 정으로 시작하죠. 그래서 법으로 가야해요. 이 법이 도입니다. 도의 법이 다시 정으로 나타나야하는데, 이 때의 정이 법입니다. 처음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마음은 정이지요. 그 정이 반드시 법으로 승화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 법이 법으로 끝나면 안 되고, 덕으로 나와야 합니다.
정(情)→법(法)→정(情)
도 덕
출가위는 법이 덕으로 나옵니다. 출가위에게는 심화(心和), 기화(氣和), 인화(人和)라는 표현이 있는데, 법이 덕으로 나온다는 표현입니다. 항마위는 자기는 이겨요. 그렇지만 법에 묶이기도 하고 [법집], 나에 묶이고 [아집], 능에도 묶여요 [능집]. 항마위가 되면 어디서든 잘하고,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소리 듣거든요. 그러다보면, 나라는 것에 묶이고, 능한 것에 묶이고, 법에 묶이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소국집까지 갑니다. 4가지 집을 넘지 못해서 출가위 못올라가는 것입니다.
4가지 집을 넘지 못하면, 자기가 하는 거 밖에 모르고 다른 일에 관심이 없지요. 그런데 출가위는 안 그래요. 출가위는 교육사업을 해도, 자선 사업 하는 데 관심이 있고, 국내교화를 해도 해외교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내 사업만 보는 사람은 출가위가 아닙니다. 총부에서 교육부 일을 하는 후배 교무님이 교육부 부장이 수위단회 떨어졌다고 하니까 그렇게 서글퍼하더라고요. 교육부 일만 보이는 거지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 관계 된 것만 보는 것이지요. 법강항마위까지는 소속된 교당 교무님이 추천(상신)을 해요. 그러면 교구와 총부 검토를 거쳐 그 사람이 성위에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을 받습니다. 하지만 출가위는 조실(종법사실)에서 내려옵니다. 종법사님이 아시거든요. 국한이 벌써 거기까지 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삼삼회는 세계 사업을 하고 원창회는 총부유지 사업을 하는데 서로 관심을 갖고 사업을 합니다. “어디 도와줄데 없나 어디 무슨 일 없나” 관심 가져야 출가위지요.
출가위는 국을 넘어섭니다. 출가위는 시방일가(十方一家)이고 사생일신(四生一身)입니다. 원래 처음에 정식특신급이 될 때 서원이 시방일가 사생일신이에요. 나를 놓고 이 세상 일체생령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직 깨치지는 못했어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정식특신급이고, 실행하는 게 출가위인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예로 들겠습니다. 일종의 해군참모총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해고해서 마부를 시켰어요. 해군참모총장 하던 사람을 건설노동자로 보낸 식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떡하겠어요? 반란 일으키든가, 이민가든가, 산속에 숨어버리든가, 인터넷에 올려서 대항하는 식의 방법을 쓰겠지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뭐했지요? 말을 키우면서, 너희들도 나라의 곡식을 먹으니까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이순신 장군님은 백의종군을 두 번했어요. 상관이 자기 아들 인사청탁 했는데 안 들어줬거든요. 그래서 좌천당한 적 있어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그 자리에서 일했었거든요. 출가위는 그런 어른이에요
인도의 간디도 영국이 그렇게 압박을 해도 상대하지 않았잖아요. 대종사님은 일본의 경찰이 이 회상을 없애보려고 그렇게 무래하게 굴어도, 대종사님 당대 제자들이 일본 경찰들한테 화낼 때도, 대종사님은 “그러지말아라” 말리면서 배알 없는 사람마냥 일본 경찰들한테 더 잘해주셨잖아요. 어떤 심경으로 그러셨을까요? 대종사님은 일본 경찰도 당신가족 당신자녀처럼 똑같이 보았던 것이지요. 타종교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출가위가 되면 타종교인을 따로 보지 않고 우리 가족으로 봅니다. 시리아 난민들에게 무관심하면 출가위가 아닙니다. “내가 도와줄건 없나? 나는 기도라도 해야겠네“ 생각하는 사람이 출가위입니다. 출가위가 되면 그래서 기도를 아니 할 수 없는거지요. 보여주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수시기도입니다. 수시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가위가 되면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지요. 범부들이 출가위 볼 때, “무엇하러 저렇게 고생할까” 해요. 출가위는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도 기쁘고요. 그리고 항마위는 “돈 같은거 필요없어” 하지요, 그런데 출가위는 돈을 더 필요로 해요. 욕심이 납니다. 항마위때는 돈이 필요없는 공자리에 들어가지만, 출가위가 되니까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돈이 필요한 것을 알아요. 법마상전급 때 돈이 필요한 것이랑 다릅니다. 출가위 사람은 공(公)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거에요
한 조목씩 보겠습니다.
5. 출가위는 법강항마위 승급 조항을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 출가위에 승급하여,
법강항마위 때는 심계가 있습니다. 소승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한다든가 스승에게 맥을 대는 식의 심계가 있는 것입니다. 항마위 때 넘어설 것이 있는데 4가지 집입니다. 첫째가 법집입니다. 법이 덕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덕이 정의입니다. 근데 항마위는 법을 정의로 오해합니다. 출가위는 보은이 덕이고 정의인 것을 알지요. 둘째는 아집입니다. 항마위는 자기 편안한 거 찾고, 자기 마음관리하고 어느 정도 대접 받으며 존경받으면서 살지요. 이러면 아집입니다. 셋째는 능집입니다. 자기 능한 데 집착하는 것입니다. 출가위는 능집이 아니라 절장보단을 합니다. 항마위는 자기 인연관리를 잘한다면, 출가위는 국이 툭 터져서 미워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요? 출가위는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출가위는 불원천(不怨天) 불우인(不尤人)입니다. 하늘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출가위는 자기가 책임을 집니다. 항마위까지는 책임을 안져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이미지 관리하느라 발 빼버릴 수 있거든요. 출가위는 아무 상관없어요. 출가위는 목숨에도 관심 없고 자기 이미지에도 관심 없습니다. 오직 일체생령을 위하는 마음뿐입니다. 항마위는 공심이라 하지만, 더 나가서 출가위는 순공심, 대공심이라 합니다. 결정적일 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출가위가 아니에요. 출가위는 피해를 회피하지 않고 자기가 받습니다.
자식이 문제를 저질러서 경찰서에 갔다고 쳐요. 부모가 경찰서 가서 뭐라 하겠어요? “얘가 문제예요” 말하겠어요? “제 잘못입니다” 말하겠지요? 출가위는 이처럼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항마위는 주인 같다가도 때로는 책임 안지거든요 항마위는 스스로 죄업은 안 짓지만 다른 사람이 죄 지을 때 발 빼는 경우도 있어요. 출가위는 안 그럽니다. 진짜 주인은 출가위부터입니다.
남자들은 항마위 때 출가위가 못되는 것이 명예심, 욕심 때문이기 쉽습니다. 여자들은 국한을 트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 쉽습니다. 여자들은 내 자식 우리 집안 신경 쓰느라 출가위 못 가기 쉬운 거지요. 남자들은 명예 쫓느라 출가위 못 올라가기 쉽고요.
다음 부분입니다.
대소 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 이해를 건설하며,
이것은 취사력이라 그래요,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한다는 말은 ‘진공으로 체를 삼아서 묘유로 용을 삼는다’와 같은 소리입니다. 출가위는 진공이 체가 됩니다. 출가위는 그래서 생활이 성리생활입니다. 우리 교법으로 말하면 사은사요와 삼학팔조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사은사요와 삼학팔조가 그대로 대소유무 시비이해거든요. 그대로 성리를 풀어놓은 것이에요. 내 생활에 우리 교법을 적용하지요. 아침에는 수양시간을 갖고 대자리에 합일합니다. 낮에는 열심히 사은에 보은합니다. 저녁에는 일기대조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과 혜가 쌓이는거죠. 진짜 잘사는 것은 사은사요 삼학팔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를 확실하게 알고 실현하는 때가 출가위입니다. 교리가 단순히 교리로써가 아니라 나를 복과 혜의 길로 안내해준다는 것을 압니다.
출가위는 법을 짤 수 있습니다. 시대를 따라서 낡은 법은 고쳐버리고 없애기도 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합니다. 출가위는 제법주라 그래요. 음식 잘하는 사람은 재료만 있으면 요리 잘 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대종사님이 법을 짜실 때 과거의 법을 그대로 갖다 쓰기도 하고, 때로는 창조하기도 하셨다 하신 거예요. 삼학팔조가 혜족족의 길이고, 사은사요가 복족족의 길입니다. 이것이 정법의 길입니다. 하루 일과가 우리 교법의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가 출가위입니다. 일과 이치, 즉 성리를 가지고 모든 일과에 대입해 사는 삶입니다.
출가위는 그러니까 불퇴전이라 그러는거죠.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퇴전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육도세계를 임의로 내왕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가 출가위입니다. “다음생에 내가 좀 쉬어야 겠다” 싶으면 개로 태어나서 좀 쉬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출가위는 가능합니다. 우리회상에 출가위 도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와있어요. 초기교단인지라 출가위 도인들이 엄청 바쁘지요.
항마위는 진짜 도인이 아니에요 지금은 출가위가 진짜 도인입니다. 출가위는 실적이 있어야 해요. 실적이 없으면 못 올라가요. 여러분 실적이 뭐가 있는가? 시키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다 찾아서 합니다. 왜냐하면 시방일가이기 때문에 관심이 안갈 수가 없거든요. 어떤 사람은 시켜도 못하고, 어떤 사람은 시키면 하지요. 출가위는 안 시켜도 찾아서 일합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
종교라는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제생의세의 목적입니다. 모든 성자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살려주고 이 세상의 병을 치료해주겠다는 목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서가모니 부처님은 서가모니 부처님대로, 공자님은 공자님대로 각각 제생의세 일을 하셨지요. 성자들은 하나의 세계를 봤습니다. 깨친 내용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다 깨친 사람들이에요.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법을 내놓았을 뿐이지요.
불교는 평등의 자비이고, 노자는 해탈의 자연, 예수는 희생의 박애, 공자는 실천의 중도입니다. 대종사님은 원만의 일원주의 세계주의입니다. 불교는 대각주의라 합니다. 노자는 무위주의입니다. 불교 교리가 노자 장자의 무위와 같지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불교 교리를 받아들이기 쉬웠어요. 무위의 반대는 유위이지요, 조작이고요. 무위가 자연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본래자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본래자리에 무슨 생사 구별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노자가 마누라 죽은 날 장례식 할 때 북을 치며 춤을 췄다고 하잖아요. 생사가 무위임을 아니까 그랬어요. 부처님도 생사가 없다는 말을 똑같이 하셨고요. 언어도단의 입정처 자리를 아신 거지요 노자와 불교 교리가 같습니다. 성자의 뜻은 같습니다. 출가위는 이걸 알아요. 출가위는 기독교 목사님을 봐도 우리 식구처럼 느낍니다. 세상의 이치를 대신 설명하니 설교하는 것을 보고 고맙다 생각하지요. ‘내 종교만이 최고다 우리 대종사님만 최고다’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 종교간 배타적인 생각이 출가위에는 없습니다. 다 우리 식구예요.
대산종사님이 법문을 하면 주로 대 자를 많이 써요. 정산종사님은 동원도리 동기연계 동척사업이잖아요. 한글로 풀면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이지요. 대산종사님은 ‘세계도 하나 인류도 하나 진리도 하나’ 하시잖아요. 우주만류가 다 하나임을 아셔서 그렇습니다. 하나이면서 둘임을 아는거에요.
그러나 범부들은 그게 부왕부왕하다고 들려요. 사람이 시간과 공간과 경제력이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다가 쓰느냐가 법위예요. 법부들은 자기 국한에다 쓰는 거지요. 출가위는 시간과 돈, 에너지를 하나에 쓰는 거지요.
출가위는 타 종교의 서적을 탐독하지 않아도 사은사요(신앙문)와 삼학팔조(수행문)의 원리를 제대로 알면 다른 경전들의 원리(대소유무 시비이해, 즉 성리)를 다 아는 것이에요. 삼학팔조 사은사요의 원리를 알면 다른 종교의 교리도 정통하게 됩니다. 제불제성의 본의를 아는 거지요.
모든 종교의 근원이 하나로 같고, 제불제성의 본래의도(본의)가 같다. 모든 종교의 목표가 동척사업으로 제생의세입니다. 타 종교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런 방편을 쓰는구나 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타 종교를 미워하지 않지요. 타종교 교리를 보면 “아하 저거구나” 막힘이 없습니다. 예수의 독생자라는 것을 들으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세멸도 상독로’와 같은 내용이구나라고 그냥 알게 되어 있어요. 출가위가 되면 성리를 깨뚫어서 하나의 원리를 득하면 다 알게 되어 있거든요.
대종사님이 한문공부를 해서 한문을 아시겠어요? 역사적으로 최고인 사람은 대학을 제대로 안 나왔어요. 종교인, 예술인, 문학인들 중에 최고인 사람은 대학을 제대로 안 나왔어요. 여러분 이생에 처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쉽게 말해서 전생에 무언가 했을꺼에요. 수요공부방 오듯 공부 했을거예요. 전생에 공부해왔던 것을 이생에도 활용하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전생공부를 제외하고 이생에만 공부하지 마시고요. 그러면 수양을 많이 해야합니다. 쌓는 공부만 하지 말고 비우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전생에 닦은 것을 갖다 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보겠습니다.
원근 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서 일체 생령을 위하여 천신 만고와 함지 사지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사람의 위요,
정식특신급이 되면 이런 마음이 나와요. 그러면 출가하는 겁니다. 우리 안암교당에서도 10년간 22명 출가했어요. 원근친소와 자타의 국한을 벗어난다는 것은 대공심(大空心)입니다. 원근친소로 보자면 멀면 가까이 다가가고, 가까우면 살짝 멀리하고요. 너무 친하면 살짝 어렵게 하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은 다시 친하게 돌리지요. 대공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방일가 사생일신이라서 내 내 가족이기에 안 챙길 수가 없어요.
“일체생령을 위하여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다하여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대공심(大公心)입니다. 일체생령을 위하여 타자녀 교육을 안할 수 없고 공도자 숭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이 미치지 못 하는 곳, 공간적 한계가 있는 것은 기도라도 합니다.
일체생령을 위한다는 것이 불공의 극치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생령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생령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길임을 압니다. 일체생령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지사지는 죽을 위험에 처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인 선진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출가위 된 것입니다. 출가위는 사무여한입니다. 자기생명에 여한이 없습니다. 조금 일 하다보면 여한이 있기 쉽지요. 배신감도 느끼지요. 하지만 출가위는 여한이 없어요.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일 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부모의 심정으로 사는 것이 출가위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내버리겠어요? 원망하겠어요? 안 그러잖아요.
이 부분은 수양에 대한 부분입니다. 시방일가 사생일신이잖아요. 원근 친소도 상관없고, 함지사지를 당해도 상관이 없지요. 출가위가 되려면 대호법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출가위에 올라가요. 즉, 함지사지를 당해도 여한이 없어야 합니다. 여한이 없으니까, 정신 육신 물질로 다 바쳐야 합니다. 공부 잘하고 수행 잘해봤자 항마위 밖에 못되어요. 실적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실적이 있다는 것이 정신 육신 물질로 투자한 것이지요. 지금처럼 보은헌공해서는 절대 못 올라가요.
출가위는 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는 거에요. 그리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에요 내 기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원불교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가위의 심법입니다.
정이 일어났을 때, 법으로 승화시켜 덕으로 나오는 그 이치가 놀랍습니다..국한을 뛰어넘는 정이 나와도 바른 법으로 승화시키지 못 하면 바른 정을 나누지 못 하겠네요..바른 마음을 제대로 옳게 쓰는 방법 역시도 신심있는 수양, 연구 3박자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성권 교우님 타이핑 감사합니다~!!
정이 일어났을 때, 법으로 승화시켜 덕으로 나오는 그 이치가 놀랍습니다..국한을 뛰어넘는 정이 나와도 바른 법으로 승화시키지 못 하면 바른 정을 나누지 못 하겠네요..바른 마음을 제대로 옳게 쓰는 방법 역시도 신심있는 수양, 연구 3박자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