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2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밝은 낮에 아담살롱으로 쳐들어가 봤자 만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밤늦게 나는 아당살롱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홀을 통과하여 계산대 옆을 지나자 안채와 연결된 복도가 나섰다.
복도 끝에는 작은 문이 있고 그 위에 비상구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방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불쑥 열었다.
"누구요?"
제법 우람한 목소리였다. 잠옷 차림의 마담이 소리 지를 자세를 취했다.
"떠들면 혼나. 가만히 앉아 있어."
내 우람한 주먹이 붉은 등에 반사되어 벌겋게 빛나고 있었다.
"달라는 거 다 줄 테니 해치지 마소."
사내는 조금 대담했다.
"당신이 의사선생인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입으시지그래."
사내는 허겁지겁 바지를 꿰어 입었다.
"마담도 옷을 입으쇼."
두 사람은 운동회에 나간 선수처럼 옷을 입었다.
"묻는 말에 군소리 말고 정확하게 대답하시는 게 만수무강에 좋을 거요.
허튼 짓 했다간 염라대왕 면회하게 되니까."
"누구시오. 대체 누군데 이러시오."
"보면 몰라?"
"그, 글쎄요."
사내는 여유 있는 척하려고 몹시 애쓰고 있었다.
"저승사자란 말 들어 봤소? 더러운 새끼들 씨 말리러 온 저승사자."
"왜 이러시는 거요. 뭘 원하는지 말을 해요. 다 들어 준다고 했잖아요."
"너 돈을 얼마쯤 낼 수 있어. 살려 준다면 말야."
"돈요. 있는 거 다 드리리다."
"얼마나 되는데."
사내는 잠깐 생각하는 시늉을 하고는 마담에게 물었다.
"얼마나 있어?"
마담은 턱을 덜덜거리며 떨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삼백만 원쯤 있을 거예요."
"현금야?"
"예 그래요. 그것밖에 없어요."
"이것들이 누굴 강도로 아나...... . 니들 목숨값이 겨우 삼백밖에 안 돼?
내가 삼백만 원 줄 테니까 죽어줄 수 있겠구만."
그들은 주춤 물러났다.
"수표하고 통장 있어요."
마담이 재빨리 대꾸했다. 나는 마담의 턱 밑에 주먹을 댔다.
"얼마나 돼?"
"5천만 원이 좀 넘어요."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
"땅 판 거요."
사내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왜 땅을 팔았어?"
"...... ."
"왜 팔았냐니까."
주먹이 사내의 목을 겨냥했다. 목의 힘줄기 솟은 사내가 힘없이 대꾸했다.
"그냥...... ."
"어디로 이사가려구 그랬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발길로 사내를 걷어찼다. 이불 위로 발랑 자빠졌다.
마담이 벽에 붙어서 오들오들 떨었다.
"이 살롱 누가 차려 줬어. 어서 말해."
"저, 저분이...... ."
"언제부터 이 짓거리했어?"
"한 1년 됐어요. 그렇죠?"
마담이 사내에게 반문하듯 물었다. 사내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 마누라가 왜 자살했지?"
"피해자 가족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바른대로 얘기 못해!"
"사실입니다. 신문에도 났잖습니까."
"그래, 그럼 유서는 어쨌어."
"집에 있습니다."
"그거 말고 유서 앞부분 말야."
"한 장밖에 없어요."
"이게 혼나고 싶어서."
사내는 그 자리에서 서너 차례 이불 위로 나뒹굴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살집좋은 근육 위로
힘줄이 솟구쳤다. 명치 끝을 얻어맞아 금방 죽는 시늉을 했다.
"마담, 넌 이불 뒤집어쓰고 끽소리 말고 누워 있어."
마담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내가 겨우 숨을 몰아 쉬었다.
"살려 주세요. 하란 대로 다 할 테니."
"한마디라도 허튼 대답을 했다간 다시는 사내 구실 못하게 해 버릴 테니까 알아서 겨라. 알았지?"
사내는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여자 누구야?"
"네, 우리 간호원이었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해치웠어? 솔직히 말해. 두 번씩 경고하진 않겠다."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병신되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사내의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마취제로...... ."
"저 여자가 몇 살 때였지?"
"막 자격증 따 가지고 왔을 때니가...... .
"널 대학 졸업시켜 준 게 누구었어? 등록금 대주고 의사되게 만들어 준 게 누구였어?"
"죽은 와이프였습니다."
"이게 영어 못해서 죽은 씨알받인가."
"죽은 마누라 말입니다."
사내가 재빨리 정정해서 말했다. 제 마누라를 굳이 와이프라고 할 바에야 코 큰 여자를 얻을 일이지.
"그런 마누라보고 이혼하자고 왜 했어. 네 은인이잖아."
"성격이 안 맞아서 그랬습니다."
"그랬겠지. 바람 피우는 거 막는 마누라와 성격 맞을 놈 하나도 없을 테니까. 최근엔 누구누구 건드렸어?"
사내는 작은 소리로 뭐라고 지껄였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졌구나. 그건 또 내가 전문의지. 무료로 고쳐 주지."
발길로 두 번 걷어찼다. 사내는 엉치를 두손으로 받쳐 들고 열번쯤 높이뛰기를 했다.
"이제 좀 나았을 것이다. 아직 그놈의 병이 남았으면 본격적으로 치료해 줄게."
사내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약속할 수 있을까?"
"맹세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묻는 대로 대답하는 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다."
"...... ."
사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마누라가 왜 자살했는지."
"아시겠지만, 잘 아시겠지만, 마누라는 피해자 때문에 못 견뎠습니다. 수사관들이 발표한 대로
피해자 가족이 못살게 굴었던 모양입니다. 견디다 못해서 자살한 모양인데...... . 제가 견딜 수 없어서
이런데 와서 잡니다만...... . 다 해결된 건데,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데,
아마 약한 여자 마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유서에 그렇게 써 있던가?"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사내는 내 얘기에 숨통이 트이는 눈치를 보였다.
"유서가 몇 장였어?"
"한 장입니다."
"한 장이라. 겨우 한 장 써 놓고 죽는다
"정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조사가 끝났잖습니까."
"너 그럼 유서 욀 수 있어?"
"그걸 어떻게...... ."
"첫장부터 끝장까지 죄 읊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바른대로 말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날 선택해."
"사실인 걸 어떻게 합니까. 만들어 낼 수도 없잖습니까."
뻗대볼 심사인 것 같았다. 뻗댈 수밖에 없을 일일 것이다. 그것만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일 테니까.
"너, 나한테 맹세했지? 헛맹세 할 때 어떻게 고치는지 내가 우연히 배운 적이있어."
퍽퍽퍽퍽.
파트너였다. 또 그는 내 정의감과 주먹 솜씨의 샌드백이기도 했다.
"네 마누라가 염라대왕에게 부탁을 했어. 잃어버린 유서를 찾아 달라고. 난 염라대왕한테 청부를 받았지.
그냥 돌아갔다간 염라대왕이 내 목을 쑥 빼다가 야구연습할지 몰라. 난 목이 하나뿐야. 너야 목이 몇 개 되니까.
내가 두어 개쯤 뽑아가도 괜찮지만."
사내는 내 계속적인 주먹질에 견디다 못해 벽을 붙잡고 부지직거렸다.
"너한테 당한 여자들이 얼마나 아팠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지?"
"죽을 짓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넌 맹세에 걸신들려 죽은 조상이 있냐?"
"유서 몇 장였어?"
"네, 솔직히 말하죠. 다섯 장였습니다."
"뭐라고 씌었었어. 그 유서 지금 어디있어?"
"없앴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사내는 체념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살아 남기 어렵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럼 피해자 가족 때문에 자살한 게 분명 아니겠지. 네 눈으로 봤으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네."
"그럼, 슬슬 말을 해 보시지그래. 턱주가리가 철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내가 좀 부수어 버릴 찰나니까."
사내가 벽에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는 자살은 분명 자살이었다. 여의사는 일생 전체를 배신당한 꼴이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사내와 결혼을 하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했던 것이다.사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전방에 가 있을 때 여의사는 사내의 집안살림을 맡아 노인네들을 보살피고 장차 시누이가 될
계집애들 뒷바라지까지 해냈다. 제대하고 나왔을 때 사내는 탱자보다 작은 그것 두 쪽뿐이었다.
여의사는 집안의 이단자가 되면서 변두리에 병원을 개설했다. 비록 전세로 시작한 것이기는 했지만.
부부의사의 열성으로 의원은 병원으로, 전세집은 4층 빌딩으로 바뀌었다.
사내의 바람기는 빌딩을 세우기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빌딩에 근사한 병원을 설립할 공공연하게 병원의
간호원 가운데 얼굴이 반반한 여자에게 살림을 내주며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여의사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친정 식구의 눈총과 자식들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투자가 너무 억울해서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보잘것없는 사내의 뒷바라지가 이 따위 서글픈 결과를 가져오게 된 미움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이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사는 꼴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여의사는 죽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재산을 빼돌려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가족의 처절한 호소를 묵살할 만큼 지독스런 노랭이짓을
하면서까지 재산을 챙겨 스물 두 살짜리와 함께 도망간다는 것을 알았다.
여의사는 남편과 담판을 시작했다. 사내는 여의사의 얘기를 무시한 채 여의사가 평생을 바치다시피한
병원까지 팔아 치우려고 했다. 여의사에게 남는 것은 약소한 위자료 정도였다. 이미 많은 액수가 빼돌려져 있었고
스물 두 살짜리 간호원은 외국에 나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의사는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사람에게 보내는 유서와 진정서를 남기고 가버린 것이었다.
사내는 눈치 빠른 사내였다. 여의사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고 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을 본 것이었다. 유서와 진정서를 없애 버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는 것 한 장만을 유일한 자살의 증거인 것처럼 남겨 둔 것이었다.
"그래서 떠나시게 되셨군. 혼자 잘 처먹고 잘 퍼대고 살고 싶다 이거군. 돈쓰고 빽써서 가서 뭘 하나.
더 높고 더 멋지고 그러면서 더 가기 쉬운 곳이 있는데. 황천이란 말 들어 보셨겠지? 썩 괜찮은 곳이지.
너 같은 사람은 꼭 가봐야 할 거야. 대환영일걸. 현수막 걸고 카퍼레이드 해줄 거야. 어때, 미국보다 황천 가는 게."
"제발 이러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 다 했잖습니까. 약속했잖아요. 사내답게 약속하기로 했잖아요."
"약속했지. 아암, 사내답게 약속하고말고. 그런데 이런 걸 아는지 모르겠어. 악당, 더 비겁한 놈 취급하지.
다만 뒤에서 총 쏴도 악당이나 비겁자 취급 받지 않는 사람이 있어. 애인 잃은 예쁜 여자, 부모를 악당에게 잃은
어린애가 그 원수를 뒤에서 총으로 빵 하고 갈겼을 때. 내 말 알아들어? 개썅."
나는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 사내를 벽에 세워 놓고 곰삭은 파김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사내가 축 늘어져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같은 새끼는 밤새도록 맞고 새벽에 세대 더 맞아야 돼."
나는 사정 볼 것 없이 사내의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 앉은뱅이 턱 차듯 두들겨 팼다.
사내는 까무라쳐 누워 버렸다. 마담은 눈이 신지 얼굴을 돌리고 일어났다. 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저 새끼 튈 거 알고 있었어?"
마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붙잡지 않았어. 너두 저 꼴 되기가 소원이라면 허튼 수작해도 좋아.
지금 난 주먹이 근질거려서 미치겠거든. 어때? 입 좀 놀려보겠어."
마담은 그저 죽는 시늉으로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했다.
"이 술집 남겨 주고 가는 조건이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애초 그럴 줄 알았으니까요."
"이런 넋 떨어진 여자 같으니. 이 술집이라고 남겨 놓은 줄 알아? 이것조차 넘겨 버린 걸 왜 여태 몰랐어?
저 새끼가 여자만 있다면 발바닥에 흙 안 묻히고 살겠다."
"네, 뭐라구요? 정말예요?"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되물었다.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마담에게 사내의 죄업과 달아날 궁리를 낱낱이 얘기해 주고 넋빠진 사내에게
전후 사정을 그 자리에서 자술서에 기록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내가 어째서 오른손만은 다치지 않게 했는지
그때서야 알았고 여자는 사내의 지독한 행위를 치 떨며 들었다. 새벽녘에 마담은 사내를 법정으로 끌고 갈
것에 동의했다.
"시집 간 여자들에 대해선 마담 당신 스스로 보호해 줄 의무가 있소. 무슨 말인가
마담은 내 말대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 술집은 당신 거요. 저 새끼한테 분명히 돌려받게 하겠소. 이건 어차피 당신 명의로 돼 있고
저 새끼가 위조해서 팔아치운 거니까."
괘씸한 생각대로라면 마담에게도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피해자인 셈이었다. 늑대에게 간을 빼앗긴 연약한 토끼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간 빼앗긴 토끼의 귀를 잡아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간만 빼 준 것이 아니라 쓸개,
허파까지도 빼 준 셈이었다. 나는 최소한 그녀의 쓸개와 허파만이라도 찾아 주고 싶었다.
"너,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여기서 배부르게 살 수 있지만 그 동안 네게 당한 그러니 네 손으로
네 재산의 반쯤을 갈라서 나누어 줄 용의가 있는지 없는지 말해 봐.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 준다면
정식으로 고발할 생각은 않겠다."
사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하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해 주시겠습니까?"
워낙 다급했던 모양이었다.
"너 같은 친구는 가버리는 게 낫지. 거기가서 여기서처럼 악착같이 해치우는 건 말 않겠어.
번갯불에다 콩을 구워 먹든 벼락치는데 피뢰침 들고 춤을 추든 말야. 가능하면 여기서보다 더
악다구니 써서 살길 바라마지 않겠다. 내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 쥐만 하면 말이다."
떠들썩하게 돈을 벌고 콧대높은 여자를 제 맘껏 다루어도 내가 구체적으로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나는 그가 되도록 문제를 일으키는 사내이기를 바랐다. 이 땅을 떠나서,
제발 이 땅덩어리 안에서만은 그 따위 짓거리를 하지 말기를 바랐다.
내게 발목 잡힌 사내치곤 행운아에 속했다. 내가 어떤 놈인데 그 정도로 풀려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너 때문에 파렴치범이 되어 버린 집부터 해결하러 가자."
마담과 나는 갑작스럽게 한패가 되어 버렸다. 마담은 그 동안 빼앗긴 육체는 어쩔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 손해를 면했다는 위안 때문에 내 편이 된 것이었다.
뜨고 웬일이냐고 물었다. 박씨는 사내에게 깍듯이 절을 했다.
"원장선생님께서 며칠 동안 박씨 아저씨 문제를 곰곰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나는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박씨에겐 어울리지 않는 거금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죽은 마누라가 안다면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의 액수였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줄 모르고 원망만 했습니다. 정말 제가 쥑일 놈입니다."
박씨는 봉투 속에 얼마짜리가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선 그 돈 가지고 논이나 몇 마지기 사세요. 꼭 사세요. 제 간곡한 부탁입니다.
사내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인심이나 쓰자는 속셈에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습니까. 흙 파 먹고 사는 놈이 말입니다."
박씨는 봉투 속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마 박씨의 생전에 그렇게 크게 눈을 떠 본 적은 없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박씨가 받아온 막걸리를 두어 사발씩 들이켜고 나왔다.
박씨는 굽힐 수 있는 데까지 허리를 굽혔다.
"기분 좋지 않습니까?"
나는 갑작스럽게 사내에게 공손해졌다.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그 동안 죄를 너무 졌다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
우리는 박씨가 안 보일 때까지 괜히 손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속상해하지 마시고 아까 약속대로 도장이나 파고 통장이나 수두룩하게 만듭시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값에 대한 보상을 강제로라도 갚게 되어 마음이 편하다는 표정이었다.
은행 앞 도장 파는 집에 가서 우리는 도장을 열 아홉 개나 팠다. 그리고 은행에 들어가
온라인 통장마다에 우리가 미리 약속한 대로 돈을 입금시켰다.
"눈치 채지 않게 잘 좀 전해 주세요."
사내는 내게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그날 밤, 우리는 코가 비뚤어지게 마셨다.
이튿날 저녁에 병원 침대에 누워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첫댓글 속이 후련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