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동무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께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1. 요한복음 8:31-32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캐하리라.”에서 어떤 자유인지 제대로 알고자 합니다.
2. 4복음서 중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이 더 많은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이 찿으리라 or something like..
라고 하면서,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았음 합니다. 몇 년 전 어느 세대주의이며 날마다 휴거를 기다리는 어느 목사님이 저보고 주님이 더 많이 받은 자들에게서 더 많이 찾는다며, 저보고 고아들과 팔렸다가 도망 온 여자들 선교하러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알고 계시는 지금의 제 형편을 포기하고 무조건 거기 가려고 지금 상황에 대해선 별 준비를 안했는데.....영국에서 모른 것이 연기됨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제 개인적으론 영국에서 연기한 것이 주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라고 생각하죠 (크리스쳔들에겐 우연이 없다기에)....그 곳에 갔으면 아마 열심히 일도하고 나름대로 복음도 전했을 것이고 또 그들을 향한 사랑이 깊었을지는 모르지만, 제 영혼은 복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썩어갔으리라 여기죠. 그래서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님은 요한복음 8:31-32인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를 알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전하는 설교에서, 또는 예수 믿는 신자들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님이 언급한 요한복음 8:31-32에서의 진리, 예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진리는 이 구절이 다루어지고 있는 본문의 내용에 의해서 이것이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는 이 구절이 말씀되고 있는 21-38절에서 보아야 하며, 그리고 이와 함께 근접해 있는 구절인 12-20절과의 관련에서,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1-11절과의 관련에서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8:1-11에서는 예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셨으며,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가셨을 때의 일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 앞에 세우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는데(신 22:22-24), 선생님은 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라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빌미를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린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신 중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께서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하실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일어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 둘씩 슬그머니 자리를 떠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됐습니다.
예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예수님이 물으시자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너는 죄로부터,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이다. 그러니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간음을 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정죄함으로써 죄의 낙인을 찍어 그 여자를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 여자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죄인된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위하여 간음을 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이러하다면, 발각이 됐든 발각이 되지 않고 은밀함에 있든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결코 없으며, 이는 또한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종 되어 있으며, 그러한 그들을 율법 아래로 끌고 가두고서 그의 모든 죄에 대하여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합니다.
누가 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요. 누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는지요. 모든 사람은 절망에 있으며 낙담하며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장에서 간음을 행하다 붙잡힌 여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이 많은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동안 기세등등했던 그들의 기가 완전히 꺾였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도, 나이 젊은 사람도, 여기에 남자도 여자도, 그 누구도 자신이 ‘죄 없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을 행하다 붙잡힌 여자와 같이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여자와 같은 악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돌로 치는 것에서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손에 들었던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간음을 행하다 붙잡힌 여자처럼 간음을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죄의 이런 저런 죄에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현장에서 간음을 행하는 여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붙잡아 성난 군중이 되어 예수께로 끌고 와서 그 여자를 정죄하고 심판할 것을 요구하였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동일한 죄인임이 드러나자 그 부끄러움에 슬그머니 자리를 떠 자신들의 죄악된 몸을 감추었습니다. 이들 중에 말이죠. 그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곧 단 한 사람도 간음을 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돌로 침으로써 정죄할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정죄하여 심판하는 자리에 앉은 자는 단 한 사람의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를 뜨고 없을 때 예수님은 홀로 남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 주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정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명확히 드러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심으로써 더 이상 죄는 그 여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으며 모세의 율법 또한 율법 아래 그 여자를 두고서 정죄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간음을 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게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요. 어떻게 이 여자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요. 그것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께서 이 여자의 의가 되어주시고 죄를 물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죄의 종에서 자유한 자가 되게 하셨으며, 또한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8:12-20에서 현장에서 간음을 행하다 붙잡힌 여자를 지은 죄에서, 그리고 정죄의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은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신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요한복음 첫 장 서두에서부터 알려주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여기서 사도 요한은 태초 - 창세 전 -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태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분이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고 있었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 1:5).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주이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8:12-20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으나, 어두움 속에 있는 이들은 예수님이 예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며 그 증거는 진실하지 못하다고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록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을 증거한다고 할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며, 자신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나, 예수님에게서 고소할 빌미를 찾고 있는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자신의 증거가 참된 것은 그들처럼 사람의 기준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아버지 또한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가 함께 증거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두 사람이 증거하면 참되다’(신 17:6; 신 19:15 )고 기록돼 있는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배척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는 어디 있소?”라며 계속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라며 그들은 예수님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예수님의 아버지도 모르는 무지와 불신앙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그를 보내신 그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인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니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당연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님이 의문을 갖는 구절이 있는 8:21-38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자인, 그래서 이 세상으로부터 오신 자가 아닌 하늘에서부터 오신 자이심을 믿지 않는 그 죄로 인하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나, 예수 - ‘인자’로 말해짐 - 께서 높이 올려질 때에,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입증함에 비로소 ‘이분은 진정(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라고 알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는 어떤 일도 자신의 뜻대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을 듣는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종(노예) 되어 매여 있는 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에서 벗어나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었기에,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있지 않았던 적이 한시도 없었기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라고 말입니다.
님이여,
이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무엇인지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죄 가운데 죽을 것’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신,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심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높이 들려질 것’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죄로부터 구원하실 것이기에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있지 않고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에 있는 ‘자유한 아들’이 될 것입니다. 즉, ‘자유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요 그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게 된 그 예수님이, 곧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신 그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따름에 있게 하신 ‘그 진리’가 죄의 종으로 있는 그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님이 “요한복음 8:31-32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에서 어떤 자유인지 제대로 알고자 합니다.”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은 님이 주로 섬기며 따르는 믿음에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님을 죄에서 구원하여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있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심으로 이제는 죄의 종으로 살 필요가 없게 하셨으니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로 말이죠.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쁘시게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마음에 원하는 대로 맘껏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님의 마음을 그 누구도 억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말이죠. ‘죄의 종으로 살 것이냐?’,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 것이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해 주신 것이니 과연 예수께서 행하신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한 진리의 자유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이 진리의 자유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생명으로 영생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자신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진리에 의한 자유함이 없으므로 죄의 종으로 있으며, 그들은 ‘죄 가운데 죽을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4복음서 중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이 더 많은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이 찿으리라 or something like...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았으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러한 이유로 님이 겪은 일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세대주의이며 날마다 휴거를 기다리는 어느 목사님이 저보고 주님이 더 많이 받은 자들에게서 더 많이 찿는다시며, 저보고 고아들과 팔렸다가 도망온 여자들 선교하러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알고 계시는 지금의 제 형편을 포기하고 무조건 거기 가려고 지금 상황에 대해선 별 준비를 안했는데.....영국에서 모른 것이 연기됨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제 개인적으론 영국에서 연기한 것이 주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라고 생각하죠 (크리스쳔들에겐 우연이 없다기에)....그 곳에 갔으면 아마 열심히 일도하고 나름대로 복음도 전했을 것이고 또 그들을 향한 사랑이 깊었을지는 모르지만, 제 영혼은 복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썩어갔으리라 여기죠. 그래서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읽은 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더 많이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이 찿으리라.”는 구절은 누가복음 12:35-48에서 ‘깨어 있으라’를 말씀하시는 것에서의 47-48절 두 구절인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인 듯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겉으로는 깨끗한 자임을 보이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어 더러운 바리새인들의 외식(위선)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종교적 경건한 모양을 가져나가는 것이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그들을 조심할 것을 주의하게 하시며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따름에 있는 제자들을 주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그날에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게 하실 것’이며, 이렇게 인자가 그들에게 왔을 때 깨어 있어 준비하고 기다림에 있던 그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예수님 주위로 몰려와 있는 군중 속에서 하시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이야기하십니다만 정작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대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들어서 "누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이겠느냐?“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그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과 자기 종들을 맡기고서는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말한 대로 하지 않겠느냐? 주인이 어느 때에 돌아오더라도 돌아와서 볼 때에 주인이 시킨 대로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언제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님은 비유로 드신 주인이 혼인잔치를 위해 집을 떠나게 됐을 때 주인의 재산을 맡기고 주인의 종들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긴 것에 주인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주인이 시킨 대로 하고 있음으로 주인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에 있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리석고 불성실한 종이 함께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인이 빨리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라며, 오랜 뒤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인이 맡긴 종들을 엄하게 대하며 학대까지 하면서 술판을 벌여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냄으로써 주인을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에 있지 못함에 따라 생각지 않은 날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주인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받고 청지기직을 빼앗기고 벌을 받을 것임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교회에서 설교를 행하는 것에서 신자들에게 주인이신 예수께서 맡긴 직무(일/사명 등 등으로)를 책임있고 성실하며 충성되게 일한 자는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보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상을 받을 것이나, 책임없이 불성실하고 불충성한 자는 주인이 돌아왔을 때 책망을 듣고 벌을 받을 것이라며, 주인으로부터 책망과 벌을 받지 않고 칭찬과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니 주인의 마음에 들게 주인이 기뻐할 수 있도록 종이 맡은 직무를 충성스럽게 열심히 잘하자는 것으로 말합니다.
만일 설교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크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기에 순종함으로)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 재림 - 그들이 행한 것에 따라서 칭찬과 상을 받을 것이고 책망과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을 받게 되지만 또 어떤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과 벌을 받는 자로 분류가 되게 됩니다. 이는 심지어 예수님을 믿어도 믿음으로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인정을 받는 일 잘하는 자로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천국 문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의 초점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있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는 어리석고 진실하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책망과 벌을 받는 제자가 있을 것이니 주의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어리석고 진실하지 못한 청지기를 함께 말씀하신 것은 청지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의 지혜로움과 진실함을 부각시키며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강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맡긴 대로 하지 않는 종에게는 책망과 무서운 벌이 내려질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누구든지 주인이 맡긴 대로 하는 종은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학교에서 새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오늘부터 한 학년씩 등급하였습니다. 1학년은 2학년이 되고, 2학년은 3학년이 되어서 좀 더 의젓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다시 일년동안 자신들이 맡은 학년의 과목을 맡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결석하지 말고 지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개근상을 모두 타세요. 1년 개근하면 1년 개근상을 타는데, 6년동안 개근해서 졸업할 때 6년 개근상을 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이 교장 선생님은 바랍니다. 그럴 수 있죠?” 라고 하니까 학생들은 소리를 높여 “네!” 라고 대답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학교 마치는 대로 곧장 집으로 오너라. 그러면 떡볶이를 맛있게 만들어 줄게. 그렇지 않고 다른 데 들러 놀다 오면 맛있는 떡볶이는 없어.” 라고 하니까 아이가 “네, 알았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교장은 학생을 개근상을 타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분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장은 새학기의 학습에 있는 학생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며, 학부모는 자기 아이를 맛있는 떡볶이를 먹이기 위해서 학교 끝나자 마자 집으로 바로 올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시고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좇는 유대인들은 주인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의 율법 - 하나님의 율법 - 에서 알게 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를 좇지 않고 단지 종교의 경건한 모양을 좇아 위선에 있습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니 참으로 어리석고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의 어리석음과 진실하지 못함이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배척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함에 있게 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따르는 지혜로움과 진실함에 있는 제자들에 대하여 얘기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입니다. 이들은 주인이 맡긴 대로 하는 참으로 지혜롭고 진실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 지혜로움과 진실함에 있음으로써 주인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주인을 맞이할 준비에 있습니다. 이러한 종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어라’고 하신 ‘깨어 있는 자’입니다. 즉, 주인의 뜻을 알고 그 준비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이 칭찬과 상에 있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칭찬과 상은 주인이 돌아옴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비유에 앞서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러한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좇는 많은 사람들은 계명 하나 하나 중하게 여기고 이것에 대한 책임을 질 것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받을 벌이 참으로 중합니다. 그러한 뜻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책임을 질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들이 요구한 책임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지 못하고 한 사람은 주님의 만남을 통해서 사하심을 받을 것이기에 더 이상 그들에게는 무거운 벌이 있지 않습니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나타내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도적이고도 악의적으로 훼방하고 있기 때문에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그들이 받을 벌은 금생에서만 아니라 내세에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참으로 무거울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다.”(마 12:31; 막 3:28-29) 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뜻에서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님이 알고자 한 구절의 뜻이 이러한 것입니다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초점은 앞서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으로 어리석고 진실하지 못함에 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주로 받아 섬기며 따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으로 지혜롭고 진실하다는 것이 강조하여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및 그들의 가르침을 좇는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진실하지 못함을 부끄럽게하십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님은 질문을 하는 것에서, 님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세대주의 신앙에 있으며 날마다 휴거를 기다리는 어느 목사님이 님에게 주님이 더 많이 받은 자들에게서 더 많이 찾는다며, 저보고 고아들과 팔렸다가 도망 온 여자들에게 선교하러 가라고 했는데, 이는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여 말하는지 그 본의를 알지 못하고서 말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 적용함으로써 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잘못 적용한 것에 의해서 거기에 맞춰서 만들어져가는 삶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잘못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님은 자신의 형편을 포기하고 무조건 거기 가려고까지 하였으나 작금의 처한 상황으로 인해서 그렇게 진행되지 않고 연기된 상태에서 님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 눈을 떠 점차 진리의 밝음에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러한 일을 이루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고 큽니다.
부디,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더욱 지혜 있으며
슬기로워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Dear Pastor
Thank you so much. I am unable to use Korean language that please forgive me for writing in English.
별 말씀을요.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시겠는지요.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영어를 자유 자재로 사용하시는 님이 부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