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朴載赫 (1895 ~ 1921)】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하시모토서장 처단의거’ ."
1895년 5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범일동(凡一洞)에서 아버지 박희선(朴喜善)과 어머니 이치수(李致守) 사이의 독자로 태어났다. 이름의 한자 표기가 다른 재혁(載爀·在赫·在爀)으로 나오는 자료들도 있다. 1907년 범천동(凡川洞)의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에 입학하였고, 동년 5월 국채보상 의연금 21전을 냈다.
1909년 부친이 별세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1년 3월 육영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들어가 1915년 3월 제4회로 졸업하였다. 상업학교 시절에 최천택(崔天澤)·오재영(吳哉永)과 교유하며 의형제를 맺고 이후 항일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재학 시절인 1913년 최천택·김병태金(鉼泰)·박흥규(朴興奎) 등과 함께 대한제국기의 보통교과용 국한문본 도서였던 현채(玄采)의 『동국역사』를 등사기로 찍어서 학우들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다.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이어서 3회 차 배부 때 경찰에 발각되어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1915년 최천택·오택·김인태金(仁泰, 이명 김철성(金鐵城)) 등 친우 16인과 함께 비밀결사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매월 한 차례 등사판의 단보를 내고 경남 일원의 뜻있는 청년들에게 보내어 동지 규합을 도모하며 자체 수양회·연수회를 갖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반년 만에 그 사실이 경찰에 탐지되어 오택·김인태·박흥규 3인과 함께 붙잡혀 구금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부모들의 구명운동으로 일주일 후 풀려났다.
1916년 4월 부산와사(가스)전기회사(釜山瓦斯電氣會社)의 전차 차장으로 취직했다가 곧 그만두고, 경북 왜관(倭館)의 친척 박국선(朴國善)이 경영하는 곡물점에 들어가 일하였다. 그러다가 1917년 6월 주인에게 700원을 차용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고, 영어를 익혀 미국으로 건너가려 했는데 좌절되어버렸다. 1년 후 1918년 6월에 귀국하여 부산에서 2개월 여 지낸 후 다시 상하이를 거쳐 필리핀으로 건너가 일본계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1920년 4월 상하이로 돌아와 7월까지 머무르던 중, 육영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우 김병태를 통해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독립운동 가담을 권고받았다. 이 제안을 수락해 의열단에 입단(入團)하였고, 가사 정리를 위해 7월 19일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 계획이 일경에 탐지되어 6월 이래 20명 가까운 단원 및 조력자들이 검거·체포되고, 폭탄도 압수된 사실(밀양폭탄사건)이 7월 30일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공표된 직후 김원봉이 송금한 여비 100원을 찾아서 8월 6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편으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가서 하선하고 모지(門司)를 거쳐 세 번째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서 김원봉으로부터 다수 동지를 체포한 일제 경찰에 복수하고 의열단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부산경찰서 투탄거사를 지시받았다. 아울러 러시아산 1902년 식의 주철제(鑄鐵製) 원통형 폭탄 1개와 자금 300원을 받았다. 이 자금으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가 좋아한다는 중국 고서들을 구입하여 고리짝에 쟁여놓고, 폭탄도 돈 50원과 함께 밑바닥에 감추어 넣은 후 8월 31일 상하이를 떠났다.
기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내린 후, 당초 예정이던 시모노세키에서의 관부연락선 승선은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릴 우려가 있으므로 일부러 대마도(對馬島)로 가서 이즈하라(嚴原)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9월 7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앞서 9월 4일 나가사키에서 상하이의 김원봉에게 상업연락 서신으로 위장하여 보낸 편지의 말미에, 연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써 간다“(熱落仙他地末古 對馬島路徐看多)”라는 차음식(借音式) 암호문구를 덧붙여 보냈다.
그러나 입국 사실은 경찰에 탐지되어 예의 주시되었고, 부산경찰서의 사카이(坂井) 형사 등이 친지들을 찾아와 탐문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에 입국 이후 13일까지 일주일간 최천택·김영주(金永柱)와 함께 동래온천·해운대·범어사(梵魚寺) 원효암(元曉庵) 등지를 돌아다니며 거사 기회를 노렸다.
9월 13일, 최천택과 함께 용두산(龍頭山)에 올라가 경찰서 경내와 주변을 내려다보며 정찰하고 귀가하였다. 이튿날 14일 오후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한 후 책보자기에 폭탄을 넣어 휴대하고 전차로 부산역까지 이동한 뒤 2시 30분 경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정문을 지나 곧장 1층으로 들어선 후, 집무 중인 서장 하시모토 경시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담화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보자기를 끌러서 진기한 중국고서를 보여주는 척하며 폭탄을 꺼내들어 탁자 밑으로 서장을 향해 내던졌다.
폭탄은 탁자 다리에 맞아서 튕겨 나오며 터졌고, 실내 집기류와 유리창이 부서짐과 동시에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천장을 관통하여 2층 사법실까지 날아갔다. 그 폭발로 복부와 우측 무릎 관절에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서장은 오른쪽 다리에 경상을 입었다.
거사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혀 부립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은 후 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으나, 함구하고 일절 불응하였다. 한편 최천택·오택·김영주 등 6인도 며칠 사이에 연루자로 붙잡혀가서 혹독한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부인하였다. 단독범임을 극구 주장하였고, 결국 동지들은 모두 예심 종결 때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방면되었다.
1920년 10월 16일 이른바 폭발물취체규칙 위반과 살인미수로 기소가 결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같은해 11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노다(野田) 검사정(檢事正)으로부터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 해 11월 6일 1심에서 건조물 침입 및 파괴, 폭발물 사용, 살인미수 경합죄이나 정상을 참작한다 하여 무기징역을 받았다. 1심에 대한 검사의 항소로 1921년 2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사형이 선고되었고, 즉시 상고하였지만 이유 없다며 각하되었다. 변호인이 법률적용 오류를 이유로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해 3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상처는 어느 정도 나았으나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면회 온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 후 “왜놈 손에 사형 당하기 싫어서” 단식에 돌입하여 9일 만인 1921년 5월 11일 기진하여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숙환이던 폐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시신은 노모와 최천택이 인수하고 5월 14일 기차 편으로 운구되어 부산 고관역(古舘驛)에 도착하였다. 이때 역 앞에 모여서 애도하는 친척·친구·시민들을 경찰이 강제해산시켰고, 장례에는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가족·친족만 참가하게 하였으며 입관 때도 인부 2명만 쓰도록 제한하였다. 부산 좌천동(佐川洞)의 공동묘지에 묻혔던 유해는 1969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1948년 동지들이 정공단(鄭公檀) 옆에 ‘의사 박재혁비(義士朴載赫碑)’을 세웠고, 1981년 모교인 부산진초등학교(육영학교 후신)로 옮겼다. 1998년에는 부산진구 초읍동(草邑洞)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박재혁 검거 보도(『매일신보』 1920. 10. 5) [판형1] |
|
박재혁 사망 보도(『동아일보』 1921. 5. 17)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