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3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3주)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봅니다
렘18:1-11; 시139:1-6, 13-18; 몬1:10-17; 눅14:25-33
토머스 머튼 신부님의 후기 저작 중 『선과 맹금』이 있습니다. 이 책 맨 앞부분에 동양의 선에 관심을 갖고 몰려드는 서양인들을 동물의 사체에 몰려드는 맹금들의 이미지로 비유한 글이 하나 실려 있습니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고, 그 의미는 심오합니다. 그 글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부육(腐肉)이 놓여 있는 자리에, 맹금들이 선회하다 하강한다. 삶과 죽음은 둘이다. 산자가 사익을 위해 죽은 자를 공격한다. 죽은 자는 이로 인해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죽은 자를 깨끗이 먹어치우기에 그들에겐 오히려 이득이다. 혹은, 당신이 득과 실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면, 그것들은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당신은 선 연구를 얻을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영성,” “깨달음,” “단순한 도취”에 대해 야단법석인 자리에는 종종 사체 주위를 맴도는 매들이 있다. 이 맴돎, 이 선회, 이 하강, 이 승리의 축하는 선 연구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선은 그 누구도 살찌우지 않는다. 발견될 시체(body)는 없다. 맹금들은 시체가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자리를 찾아와서 한동안 선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들이 떠났을 때, 거기에 있었던 그 “무nothing,” “무체no-body”는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이 선이다. 선은 항상 거기에 있었지만,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은 선을 놓쳤다. 선은 그들이 찾는 종류의 먹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튼 신부님의 글에 나오는 맹금들과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허다하게 많은 무리의 사람들은 묘하게 비슷합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탄압과 천대 속에 살던 군중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이 땅에서 보다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에게서 얻을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러이러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26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27절),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33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글자 그대로 모든 가족 관계를 끊고, 무소유를 실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한 바탕이며 토대가 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의 틀은 너무도 견고하고 사회의 압력은 강력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소유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 행복은 미래에 있다는 착각, 내가 처한 상황과 주변 사람들이 바뀌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망상, 모든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 우리의 고집스런 생각과 집착은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생각과 집착을 멈추고, 우리를 휘두르고 상처 주도록 그것들에게 내어준 힘을 거두어들이는 삶의 방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안전지대로부터 벗어나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와 기쁨,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아울러 늘 저 너머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고 있으면, 현재 상황에 대한 본질을 바로 보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주님 안에 현존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가게 되는 길입니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며 자기를 깊이의 눈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실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 있는 그대로의 온전함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그 무엇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참으로 아름답고, 선하고,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켄 윌버는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합일의식에 저항하고, 신을 피해 달아나며, 도(道)와 싸운다고 말합니다. 물 자체이며 수원(水原)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기보다 축축한 것을 찾아 끊임없이 파도를 옮겨 타면서 현재의 경험에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삶의 어떤 면을 거부하고, 자기에게서 보지 않으려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존하기를 저항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저항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깨달음은 사실 대단하고 거창해서 평범한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좋은 기분과 같은 특정한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앉아있을 때, 존재하는 마음 그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욕망, 바람, 의도, 소망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포함한 우리의 영성수련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의 실체를 점차 드러내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저항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임이 분명해지면, 하나님께 승복하고 내어맡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게 됩니다. 저항이 점차 해소되면서 우리의 시도나 노력을 멈추고 자기를 그저 내어맡기게 되면, 분리되고 소외된 나 또한 서서히 용해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지금 이외에 다른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나와 너 그리고 세계의 경계는 사라지고, 온전한 하나만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되어가면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온전함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과정을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에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토기장이가 물레를 돌려서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18:6b)
이미지는 사람의 외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속에 담겨있는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드러나도록 사람의 내면에서 깊이, 공명, 질감(texture)을 찾으려고 분투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외부의 사건은 내면의 경험으로 변형됩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생생하고 입체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내어맡기고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물레를 돌리는 토기장이의 손안에 있는 진흙은 물에 젖어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합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마사지하듯이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모양을 잡아갑니다. 토기장이가 원하는 모양으로 그릇이 빚어지지 않으면, 언제든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칠거나 강압적이지 않고, 장인의 손길을 통해 아름다우면서도 쓸모 있는 그릇이 빚어지는 창조적이면서 예술적인 과정입니다. 우리를 빚어나가시는 주님의 손길은 다정하고 부드럽습니다. 그 손길에 진흙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자기를 내어맡길수록, 본연의 내가, 본래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이 본문을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몰락을 경고하는 심판의 메시지로만 읽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백성들에게 그 길에서 돌이켜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삶을 재창조하라는 초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는 토기장이이신 주님처럼 우리 자신이 아티스트가 되어 삶을 유연하면서도 창조적으로, 아름답고, 지혜롭게 가꾸어 나가며 살아가길 주님은 바라십니다.
우리의 욕구와 고집스런 생각, 집착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자유와 지혜, 창조성과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는 본연의 나를 회복하는 영적 여정에 고난과 역경은 언제나 따르기 마련입니다. 신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들의 서사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 주님의 손길에 저항하고 있는 자기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깊이 호흡하면서 자기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지요. 변형과 성장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우리는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시교독으로 함께 읽은 시편 139편의 시인은 자기의 삶이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빚어져가고 있음을 바라보고 고백합니다. 시편 139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18절까지 전반부는 자기를 샅샅이 알고 계시고 모든 순간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고백하는 일종의 지혜시고, 19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원수들로부터 고통 받는 자신의 처지를 간구하는 탄원시입니다. 139편 전반부는 시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시로 일컬어집니다. 제가 이 시를 천천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주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가 빚어지고 있음을,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온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삶 속에서 바라보고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그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 안에 이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가만히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기에 너무 피곤하거나, 영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엔 너무 불안하고 우울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때가 허다합니다. 그런 무기력한 순간에도 우리는 바라보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행동하고, 말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울 때, 우리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고 응시할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어디에나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가 주어집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 깨어나 보면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음을 언제나 고백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눈을 열어주셔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