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CIM 10:59 – 10:68_경험과 지각
VII. Experience and Perception
VII. 경험과 지각
59 It is impossible not to believe what you see, but it is equally impossible to see what you do not believe. Perceptions are built up on the basis of experience, and experience leads to beliefs. It is not until beliefs are fixed that perceptions stabilize. In effect, then, what you believe, you do see. That is what I meant when I said, "Blessed are ye who have not seen and still believe," for those wh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will see it. The resurrection is the complete triumph of Christ over the ego, not by attack but by transcendence. For Christ does rise above the ego and all its works and ascends to the Father and His Kingdom.
59 네가 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네가 믿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불가능하다. 지각은 경험을 기반으로 구축되며, 경험은 믿음으로 이끈다. 믿음이 확고해져야 비로소 지각이 안정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너는 네가 믿는 것을 본다. 그것이 바로 내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축복받았다.”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것이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공격이 아닌 초월을 통해 그리스도가 에고에게 완전히 승리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로 에고와 에고의 모든 소행 위로 일어나 아버지와 그의 왕국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60 Would you join in the resurrection or the crucifixion? Would you condemn your brothers or free them? Would you transcend your prison and ascend to the Father? For these questions are all the same and are answered together. There has been much confusion about what perception means because the same word is used both for awareness and for the interpretation of awareness. Yet you cannot be aware without interpretation, and what you perceive is your interpretation. This course is perfectly clear. You do not see it clearly because you are interpreting against it and therefore do not believe it. And if belief determines perception, you do not perceive what it means and therefore do not accept it.
60 부활에 동참하려는가, 십자가형에 동참하려는가? 너의 형제들을 정죄하려는가, 해방시키려는가? 너는 너의 감옥을 초월하여 아버지께 올라가려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같으며, 그 답도 같다. 이제껏 지각의 의미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는데, 같은 단어가 의식뿐만 아니라 의식의 해석에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해석 없이는 의식할 수 없으며, 네가 지각하는 것이 곧 너의 해석이다. 이 수업은 더없이 명백하다. 네가 이 수업을 명백하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수업에 불리하게 해석함으로써 이 수업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은 지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 수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각하지 못하기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61 Yet different experiences lead to different beliefs, [and with them, different perceptions. For perceptions are learned with beliefs,] and experience teaches. I am leading you to a new kind of experience, which you will become less and less willing to deny. Learning of Christ is easy, for to perceive with Him involves no strain at all. His perceptions are your natural awareness, and it is only distortions which you introduce that tire you. Let the Christ in you interpret for you, and do not try to limit what you see by narrow little beliefs which are unworthy of God's Son. For until Christ comes into His own, the Son of God will see himself as fatherless.
61 하지만 다른 경험은 다른 믿음으로 이끌며, [그와 함께 다른 지각으로 이끈다. 지각은 믿음과 함께 학습되며] 경험은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새로운 종류의 경험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는 그 경험을 점점 덜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은 쉽다. 그리스도와 함께 지각하기 위해서는 전혀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각은 너의 자연스러운 의식이며, 네가 끌어들이는 왜곡만이 너를 피곤하게 만든다. 네 안의 그리스도가 너 대신 해석하게 하고, 하느님의 아들에게 합당치 않은 편협하고 하찮은 믿음으로 네가 보는 것을 제한하려 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62 I am your resurrection and your life. You live in me because you live in God. And everyone lives in you, as you live in everyone. Can you, then, perceive unworthiness in a brother and not perceive it in yourself? And can you perceive it in yourself and not perceive it in God? Believe in the resurrection because it has been accomplished, and it has been accomplished in you. This is as true now as it will ever be, for the resurrection is the Will of God, which knows no time and no exceptions. But make no exceptions yourself, or you will not perceive what has been accomplished for you. For we ascend unto the Father together,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ever shall be, for such is the nature of God's Son as His Father created him.
62 나는 너의 부활이요 너의 생명이다. 너는 하느님 안에 살기에, 내 안에도 산다. 그리고 네가 모든 이 안에 살 듯, 모든 이가 네 안에 산다. 그렇다면 어떤 형제 안에서 가치 없음을 지각하면서, 그것을 네 안에서는 지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것을 네 안에서 지각하면서 하느님 안에서는 지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활을 믿어라. 부활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네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진리일 것이듯, 지금도 진리이다. 부활은 시간도 제외 대상도 모르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제외 대상도 만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너를 위해 성취된 것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듯, 아버지께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아버지가 창조하신 대로의 하느님 아들의 본성이다.
63 Do not underestimate the power of the devotion of God's Son nor the power of the god he worships over him. For he places himself at the altar of his god, whether it be the god he made or the God who created him. That is why his slavery is as complete as his freedom, for he will obey only the god he accepts. The god of the crucifixion demands that he crucify and his worshipers obey. In his name they crucify themselves, believing that the power of the Son of God is born of sacrifice and pain. The God of the resurrection demands nothing, for He does not will to take away. He does not require obedience, for obedience implies submission. He would only have you learn your own will and follow it, not in the spirit of sacrifice and submission, but in the gladness of freedom.
63 하느님의 아들이 가진 헌신의 힘도, 그가 숭배하는 신의 힘도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는 그가 만든 신god이든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God이든, 자신이 믿는 신의 제단에 자신을 바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노예 상태는 그의 자유만큼이나 완전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받아들이는 신에게만 복종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의 신은 자신이 십자가형을 집행할 것이니 숭배자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의 숭배자들은 하느님 아들의 힘은 희생과 고통에서 생겨난다고 믿으면서, 그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부활의 하느님은 앗아가기를 뜻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복종은 굴복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다만 네가 희생하고 굴복하려는 마음이 아닌 자유의 기쁨 속에서 너 자신의 뜻을 배워서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실 뿐이다.
64 Resurrection must compel your allegiance gladly because it is the symbol of joy. Its whole compelling power lies in the fact that it represents what you want to be. The freedom to leave behind everything that hurts you and humbles you and frightens you cannot be thrust upon you, but it can be offered you through the grace of God. And you can accept it by His grace, for God is gracious to His Son, accepting him without question as His own. Who, then, is your own? The Father has given you all that is His, and He Himself is yours with them. Guard them in their resurrection, for otherwise you will not awake in God safely surrounded by what is yours forever.
64 부활은 너의 충성심을 기쁘게 끌어낼 것이니, 부활은 기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부활에 마음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네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너를 해치고 모욕하고 겁주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날 자유를 너에게 억지로 떠안길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 제공할 수는 있다. 그리고 너는 그 자유를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은혜로우셔서 그를 아무런 의문 없이 당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너 자신의 것인가?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셨으며, 그것들과 더불어 아버지 자신도 너의 것이다. 그들의 부활을 잘 보호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영원히 너인 것들에 안전하게 둘러싸여 하느님 안에서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65 You will not find peace until you have removed the nails from the hands of God's Son and taken the last thorn from his forehead. The love of God surrounds His Son, whom the god of the crucifixion condemns. Teach not that I died in vain. Teach rather that I did not die by demonstrating that I live in you. For the undoing of the crucifixion of God's Son is the work of the redemption, in which everyone has a part of equal value. God does not judge His blameless Son. Having given Himself to him, how could it be otherwise?
65 네가 하느님 아들의 손에서 못을 뽑고 그의 이마에서 마지막 가시를 제거하기 전에는, 평화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아들을 둘러싸고 있건만, 십자가의 신은 그를 정죄한다. 내가 헛되이 죽었다고 가르치지 말라. 반대로 내가 네 안에 살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죽지 않았음을 가르쳐라. 하느님의 아들에게 언도된 십자가형을 무효화하는 것이 구원의 일이며, 모든 이에게는 구원 안에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역할이 하나씩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결백한 아들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당신 자신을 그에게 주셨거늘, 어떻게 달리하실 수 있겠는가?
66 You have nailed yourself to a cross and placed a crown of thorns upon your own head. Yet you cannot crucify God's Son, for the Will of God cannot die. His Son has been redeemed from his own crucifixion, and you cannot assign to death whom God has given eternal life. The dream of crucifixion still lies heavy on your eyes, but what you see in dreams is not reality. While you perceive the Son of God as crucified, you are asleep. And as long as you believe that you can crucify him, you are only having nightmares. You who are beginning to wake are still aware of dreams and have not yet forgotten them. The forgetting of dreams and the awareness of Christ comes with the awakening of others to share your redemption.
66 너는 너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너 자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다. 하지만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다. 하느님의 뜻은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십자가형에서 이미 구원되었다. 그리고 너는 하느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자를 죽게 할 수 없다. 십자가형의 꿈이 여전히 너의 눈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지만, 네가 꿈속에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고 지각하는 한, 너는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고 믿는 한, 너는 그저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다.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너는 여전히 꿈을 알아차리고 있으며, 꿈을 아직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네가 다른 이들을 깨워 너의 구원을 공유함에 따라, 꿈을 잊고 그리스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67 You will awaken to your own call, for the Call to awake is within you. If I live in you, you are awake. Yet you must see the works I do through you, or you will not perceive that I have done them unto you. Do not set limits on what you believe I can do through you, or you will not accept what I can do for you. For it is done already, and unless you give all that you have received, you will not know that your Redeemer liveth and that you have awakened with Him. Redemption is recognized only by sharing it.
67 너는 너 자신의 부름에 깨어날 것이니, 깨어나라는 부름이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안에 산다면, 너는 정녕 깨어있다. 하지만 너는 내가 너를 통해 행하는 일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가 이미 그 일을 너에게 행했음을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통해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에 제한을 두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내가 너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행해졌다. 그리고 네가 받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 한, 너의 구원자가 살아있고 너도 그와 함께 깨어났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구원은 오로지 공유될 때만 인식될 수 있다.
68 God's Son is saved. Bring only this awareness to the Sonship, and you will have a part in the redemption as valuable as mine. For your part must be like mine if you learn it of me. If you believe that yours is limited, you are limiting mine. There is no order of difficulty in miracles because all of God's Sons are of equal value, and their equality is their oneness. The whole power of God is in every part of Him, and nothing contradictory to His Will is either great or small. What does not exist has no size and no measure. To God all things are possible. And to Christ it is given to be like the Father.
68 하느님의 아들은 구원되었다. 오로지 이런 알아차림만을 온아들에게 가져다주어라. 그러면 너는 구원에서 나의 역할만큼이나 가치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너의 역할에 대해 배운다면, 너의 역할은 분명 나의 역할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고 믿을 때, 너는 나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에 난이도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의 모든 아들은 그 가치에 있어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동등성은 곧 그들의 하나인 상태다. 하느님의 모든 권능은 그의 모든 부분에 있으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크기도 양도 없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닮았다.
[출처] [4월 30일] 텍스트 10:59 – 10:68 (한국 기적수업 공부 모임) | 작성자 도서출판 기적의 향기
첫댓글 네가 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네가 믿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똑같이 불가능하다.
믿음이 확고해져야 비로소 지각이 안정된다.
결과적으로 너는 네가 믿는 것을 본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축복받았다.”
부활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공격이 아닌 초월을 통해 그리스도가 에고에게 완전히 승리한 것이다.
부활을 믿어라.
부활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네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다만 네가 희생하고 굴복하려는 마음이 아닌
자유의 기쁨 속에서 너 자신의 뜻을 배워서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