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타문학(Meta-literature): 절망을 그린 Bondone, Munch, Wegmann, Ensor
윗글에 인시(引示)되거나 곁들린 (본도네, 뭉크, 새뮤얼 월도, 앙소르, 베그만의) 그림 6편과 함께 아래에 어영부영 소집된 미술작품 23건은 절망의 겉면들이나 표면들이나 양상들을 얼추 에둘러, 아니면, 얼마간 곧이곧대로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 작품들 중에는 십자가에 못질되고 매달려 “나의 신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Eli, Eli, lama sabachthani?)”(☞ 참조)라고 신을 원망하듯이, 어쩌면 절망스럽게, 신음하거나 절규하는 예수를 가깝게나 멀게 묘사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저런 신음이나 절규가 정녕, 애오라지, 오직 절망만 직설하느냐는 의문의 정답은 당연히 죡변의 몫이 아니다.
(2023.12.28.11:13.)
한국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림, 또는 그런 상태”나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극한 상황을 직면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상태”라고 풀리는(설명되는; 정의되는) 낱말 “절망(絶望)”은 “희망을 잃음”이라고 풀리는(설명되는; 정의되는) “낙망(落望)”의 유의어(類義語; 비슷한 말)이다.
(1~2) 아래왼쪽그림은 프랑스 화가·관상학자·미술학자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19~1690)의 1698년판 유고 《정념들을 묘사하는 방법(Méthode pour apprendre à dessiner les passions)》에 수록된 원화(原畵)를 각판(刻板)한 프랑스 판화가 장 오드랑(Jean Audran, 1667~1756)의 1702년작 〈극심한 절망(Extreme Désespoir)〉이고, 아래오른쪽그림은 오드랑의 판화를 밑그림으로 삼아 각판한 잉글랜드 판화가·출판업자 캐링턴 보울스(Carington Bowles, 1724~1793)의 1770년작 〈절망(Despair)〉이다.
(3) 아랫그림은 잉글랜드에서 주로 생활한 스위스 화가·작가 존 헨리 퓌즐리(John Henry Fuseli;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Johann Heinrich Füssli, 1741~1825)의 1769년작 〈절망의 동굴(The Cave of Despair)〉이다.
(4) 이미 게시된 모깃글(☞ 아수라반문법: 한국 대학입시 농어촌 도시 교육 사회 지방 소멸 노인 문제)에는 브리튼 출신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의 1772년작 〈절망의 동굴(The Cave of Despair)〉이 인시되었다.
(5) 더 일찍 게시된 모깃글(☞ 한국어 인문학 과학 논문 글쓰기 작문)에는 헨리 퓌즐리(요한 하인리히 퓌슬리)의 1779년작 〈고대 조각품의 웅장한 파편들에 압도되어 절망하는 예술가(The Artist Moved by the Grandeur of Antique Fragments)〉도 인시되었다.
(6) 아랫그림은 스코틀랜드 화가만·평가 아이저크 크룩섕크(Isaac Cruikshank, 1764~1811)의 1792년작 〈텅빈 전당표(典當票), 혹은 절망의 먹구름(The Ticket's a Blank or the Clouds of Despair)〉이다. 탁자에 반쯤 걸친 전당표에 적힌 “블랭크(Blank)”라는 낱말은 더는 아무것도 전당포에 맡길 수 없는 일가족의 곤궁한 처지를 상징한다.
(7) 아랫그림은 스웨덴 조각가 요한 토비아스 세르겔(Johan Tobias Sergel, 1740~1814)의 1795년작 밑그림 〈극심한 절망(Extreme Desperation)〉이다.
(8) 아랫그림은 잉글랜드 만평가 조지 뮤어개트로이드 우드워드(George Murgatroyd Woodward, 1765~1809)의 밑그림을 각판한 잉글랜드 화가·만평가·판화가 토머스 로울런드슨(Thomas Rowlandson, 1757~1827)의 1800년작 〈절망(Despair)〉이다.
(9) 아랫그림은 잉글랜드 시인화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1805년작 〈욥의 절망(Job's Despair)〉이다. 욥은 유다교(유대교; 유태교)·기독교 경전 《욥기(The Book of Job)》의 주인공이다.
(10) 아랫그림은 잉글랜드 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의 1835년작 〈절망의 동굴(The Cave of Despair)〉이다.
(11) 아랫그림은 브리튼 화가 제임스 샌트(James Sant, 1820~1916)의 1850년작 〈전황을 살피는 용기, 불안, 절망(Courage, Anxiety and Despair Watching the Battle)〉이다. 비록 극히 드물게라도 이 그림을 볼 “거의” 누구나 짐작하겠듯이 최우측에 묘사된 여인이 절망을 상징할 것이다.
(12) 아랫그림은 스코틀랜드 화가 앨릭잰더 크리스티(Alexander Christie, 1807~1860)의 1851년작 〈오셀로의 절망(Othello's Despair)〉이다. 오셀로는 잉글랜드 작극가(作劇家)·시인·연극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1603년작 비극 《오셀로(Othello)》의 주인공이다.
(13) 아랫그림은 잉글랜드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의 1869년작 〈크리스트의 (예수의) 머리 습작(Study for Head of Christ)〉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고 야훼에게 절규했을 예수를 거의 곧바로 연상시킨다.
(14) 아랫조각품은 프랑스 조각가 장-조셉 페로(Jean-Joseph Perraud, 1819~1876)의 1869년작 〈절망(Le Désespoir)〉이다.
(15)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Évariste Vital Luminais, 1821~1896)의 1878년작 〈절망(Désespoir)〉이다.
(16) 아랫그림은 폴란드 화가 표트르 스타치에비츠(Piotr Stachiewicz, 1858~1938)의 1885년작 〈화실의 유령들: 절망(Phantoms in the Studio: Despair)〉이다. 이 작품에 묘사된 유령은 독사-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Medusa)이다.
(17) 특정한 종교인에게는 어쩌면 절망보다는 얄궂은 희망을 티끌만치나 털끝만치라도 더 많이 암시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을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자크 앙네(Jean-Jacques Henner, 1829~1905)의 1879년작 〈예수의 무덤: 크리스트의 죽음(Jesus au tombeau: Le Christ mort)〉이다.
(17) 아랫그림은 잉글랜드에서 활동한 프랑스 화가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우(James Tissot; 자크 조셉 티소; Jacques Joseph Tissot, 1836~1902)의 1893년작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이다.
(18)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마르셀 루(Marcel Roux, 1878~1922)의 1905년작 〈절망(Le Désespoir)〉이다.
(19) 네덜란드 화가 알버트 아우구스트 플라샤르트(Albert August Plasschaert, 1866~1941)가 1913년에 완성한 아랫그림의 제목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이다.
(20) 아랫그림은 핀란드 화가 크누트 마그누스 엔켈(Knut Magnus Enckell, 1870~1925)의 1919년작 〈절망(Epätoivo; Despair)〉이다.
(21) 괴기하고 음산하게 보이는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의 연대미상작 〈절망(Désespoir)〉이다.
(22)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알베르 모랑(Albert Morand, 1859~?)의 1920년작 〈절망의 규모(Les grandeurs du désespoir)〉이다.
(23) 어쩌면 평범하면서도 흥미롭게 보일 수 있을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루이 포랭(Jean-Louis Forain, 1852~1931)의 연대미상작 〈자식을 향한 부모의 절망(Le désespoir de ses parent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