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분 / 국내미개봉>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마이클 카코야니스
출연 : 캐서린 헵번 /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 캔사스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여우상 수상
- 전미 비평가협회 최우수 여우상 수상
<트로이의 여인들>의 줄거리는 생소하지 않다. 트로이 왕비 헤큐바, 그녀의 딸 카산드라,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당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헛된 명분의 잔인한 폭력에 짓밟히는 것은 항상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남성 영웅 신화이다. 남성 영웅들이 전쟁에 패함으로써 적국의 노예로 전락한 헤카베, 안드로마케, 카산드라 같은 트로이의 여인처럼 영웅 신화에서 여성은 희생양이었다.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니아가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물이 된다든가, 프리아모스의 딸 헤시오네의 헌상 등 신화에서조차 대부분의 여성은 ‘여성이란 이름만으로’ 박해를 받는 모습이 부각된다. 역사 속에서 젊은 여인들은 전쟁 직후 혼란 속에 살아남기 위해 매춘을 강요당해왔고, 정복자의 만행과 더불어 전쟁에서 무고한 희생자는 여자와 아이들이었기에 비극은 극대화될 수 있다. 단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원형으로 인지되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고대 희랍과 근대 한국의 이슈를 문화의 복합적인 수용으로 풀어낸 이번 작품은 자기정체성을 원근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데서 유효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화려한 소비문화의 한켠에서 얼마나 많은 ‘트로이의 여인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까.
캐서린 헵번 Katharine Hepburn
할리우드에서 가장 탁월한 여배우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할리우드 스타 중 가장 할리우드 스타답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우선 그녀는 전통적인 미인이 아니다. 물론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에서처럼 우아하게 차려입은 상류층뿐만 아니라, 「실비아
스칼렛(1935)」에서처럼 남장을 하고서도 대단히 고혹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재능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녀의 연기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지 큐커가 감독한 이 영화들은, 미국의 스타 배우들 사이에서 헵번을 매우 비범한 존재로 만드는 특징적 차이들을 잘 보여준다. 마르고
운동 좋아하는 중성적인 말괄량이에 거의 남성적인 강인한 독립심, 부유한 배경과 훌륭한 교육, 뉴잉글랜드 상류층 성장기에서 생겨난 자신감과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외과의사와 여성 참정권 운동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브린 모어 칼리지에 진학하기도 전인 10대 때 연기를
시작했다. 학교 졸업 1년 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단역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여러 감독과 제작자들을 상대로 언쟁을 일으키는 솔직한
말버릇 때문에 연기 경력은 유연하게 굴러가지 못했다. 그녀는 큐커의 「이혼증서(1932)」에서 존 베리모어의 딸로 영화에 데뷔했다. 앞에서 말한
두 편 외에도 그녀는 「작은 아씨들(1933)」과 「어떤 휴가(1938)」, 「키퍼 옵 더 플레임(1942)」에서, 그리고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의 동반자였던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주연한 「아담의 갈빗대(1949)」, 「팻과 마이크(1952)」 그리고 텔레비전 영화 「폐허 속의
사랑(1975)」까지 큐커와 함께 작업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트레이시와의 조화는 아홉 편의 영화에서 계속 이어졌다.
몇 년 동안
영화사의 큰손들은 그녀를 '박스오피스의 독약'이라고 여겼는데, 그녀의 지적인 우월성과 허튼 짓을 허용하지 않는 성실함, 철저한 자기 존엄성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다양한 수준의 잡다한 영화를 만들었고 그중 「앨리스 애덤스(1935)」와 「실비아
스칼렛」이 가장 나았으며, 「퀄리티 스트리트(1937)」와 「스테이지 도어(1937)」, 「베이비 길들이기(1938)」와 「어떤 휴가」로 마침내
본 궤도에 올랐다. 캐리 그랜트의 상대역으로 나온 마지막 두 편에서는 코미디와 어둡고 진지한 드라마 양쪽 모두에 총명하고 민감한 재능을 갖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녀의 능란한 타이밍 감각과 뉘앙스가 살아 있는 미묘함 그리고 민첩한 지성은 오늘날까지도 그 빛이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할리우드는 그녀의 상업적 잠재력에 대해 염려하고 불안해했다. 스칼렛 오하라 역을 놓친 그녀는 몸소 「어떤
휴가」의 작가인 필립 배리를 고용하여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각본을 맡겼다. 그녀가 트레이시 로드 역을 맡고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다음으로 그녀는 그 희곡의 판권을 갖고 MGM으로 가서 박스오피스의 성공이라는 보상을 받고 세 번째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뒤 다시 영화계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그녀의 다음번 프로젝트인 「여성의 해(1942)」는 트레이시와 함께 한 첫 코미디였고 그녀의
페르소나가 조금 부드러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점이 그녀에 대한 영화사와 관객 모두의 애정이 더 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1948)」과 「아프리카의 여왕(1951)」, 「써머 타임(1955)」같은 영화는 그녀의 한결같은 인기를
증명했지만, 초기의 역할들이 강렬하게 부각시키던 그 날카롭고 번뜩이고 섹시한 열정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또한 그녀는 일의 빈도도 줄이기
시작했는데, 주요한 이유는 트레이시와의 아주 잘 알려졌으면서도 매우 사적인 관계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 갑자기(1959)」와
「밤으로의 긴 여로(1962)」,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1967)」, 「겨울의 라이온(1968)」, 「트로이의 여인들(1971)」 같은 많은
작품들은 연극적이거나 문학적인 원천과 어조까지 갖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장 빼어난 작품들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감상성이 점점 많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런 감상성은 「집행자 루스터(1975)」와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은퇴 중에 워렌 비티를 위해 출연한 「러브 어페어(1994)」의
카메오 역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말년의 얼마 안 되는 작품들 중에서 그녀와 비슷하게 사랑스러운 심술꾼인 헨리 폰다와 연기를 겨루었던 「황금
연못(1981)」은 그녀의 재능에 아깝지 않은 적절한 영화였다. 캐서린 헵번은 의심의 여지없이 1950년 이전에 이룬 성취들로써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 결실들은 지금까지도 아주 간단히 말해, 말 그대로 굉장하기 때문이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4.10 2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