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 문태준 |
고니발을 보다 / 고형렬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눈둑을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마른
풀하나 건들지 않는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작은 발가락들이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반짝이는
그 사이로 눈발이 영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게는 그들의 집은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
끝없이 눈들이 붐비는 하늘 속
고니들은 눈송이도 건들지 않는다
1954년 전남 해남 출생, 속초에서 성장함.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대청봉 수박밭』『해청』『사진리 대설』『성에꽃 눈부처』『김포 운호가든집에서』『밤 미시령』 동시집 『빵 들고 자는 언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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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씻으며 / 이재무 늦은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 하루치의 모욕과 수치가 둥둥 물 위에 떠오른다 마음이 끄는대로 움직여 왔던 발이 마음 꾸짖는 것을 듣는다 정작 가야 할 곳 가지 못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기웃거린 하루의 소모를 발은 불평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날 나는 지나치게 발을 혹사시켰다 집착이란 참으로 형벌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텅빈 구멍 탓으로 발의 수고에는 등한했던 것이다 나의 모든 비리를 기억하고 있는 발은 이제 마음을 버리고 싶은 가보다 걸핏하면 넘어져 마음 상하게 한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으며 부은 발등의 불만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 국문과,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3년 무크지《삶의 문학 》에 시 <귀를 후빈다>를 발표하며 등단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 섣달 그믐』『몸에 피는 꽃 』『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 |
발바닥이 따스하다 / 최광임 돼지 족을 샀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면도날로 잔털을 발라낸다 하얗게 드러나는 살점 부드럽고도 파리하다 지저분한 밥구시와 똥 묻은 몸뚱이 어릴 적 사립문 옆 우리 속 돼지들, 생각해보니 우리 밖을 걸어본 일 없는 발이다 국산 아닙니다만 맛은 같습니다 머리와 몸통 내장까지 다 내주고서라도 우리 밖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먼 이국을 건너 온 발만 남은 돼지 평생 한 곳에 자리하고 살았던 만큼 드넓은 세상으로의 이탈, 저 발들은 꿈꾸었을지 모른다 통양파와 생강 대파 냉한 수족에 뜨거운 기운이 돌게 한다는 계피나무까지 툭툭 분질러 넣는다, 매운향에 칼질 사이 묻어나던 들척한 비린내가 가신다 일을 마치고 막기차 타는 밤이면 피가 돌지 않는 다리 주무르다 새벽을 맞기도 한다 가끔은 더욱 안온한 우리와 부실한 다리 탐하거나 탓하기도 하다가 차창 밖으로 내달리는 세상, 가장 큰 우리 속에서 화르르 찜통이 넘친다 뜨거운 세상을 얼마나 걷고 또 걸었는지 우둘투둘 발등의 살점들 다갈색으로 그을렸다 관절마다 건강한 촌부의 마디처럼 굽어있다, 울컥 발바닥이 따스하다 1967년 전북 변산 출생 전주기전여대와 대전대 문예창작과 졸업 대전대 문창과 대학원 박사과정.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다층', '빈터' 동인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
245 / 마경덕 235 ……240 245 내 발 245 사이즈 235에 10을 보태니 발이 편하다 치수 10의 의미는 내 몸이 무겁다는 증거, 발목 아치형의 뼈가 가라앉아, 이미 나를 받쳐 든 기둥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하이힐로 치켜도 흘러내리는 숫자 10 10은 10톤의 무게 처진 몸을 구두 뒤축에 매달아 보지만 금세 발이 내게 보내는 문자메시지, 위험! 위험,! 멀리 가지 마세요. 당신의 반경은 6센티.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그 소리, 마치 ‘하산, 하산하세요’ 로 들리고. 키 짧은 어느 개그맨 15센티가 넘는 뒤축에 올라 목을 반자나 늘리고 아래를 내려다본다는데 바닥에서 멀어질수록 몸이 먼저 안다. 삐끗, 발목이 위험하다 235 ……240 245 멀리도 왔다. 지상에 닿을 날이 멀지않았다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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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 이성복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 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하실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1952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7 <<문학과지성>>에 시 <정든 유곽에서>로 등단 1982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금산』』『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등이 있음. |
당신 발바닥 쓰시마섬 같애 / 최정례 이불 밖으로 삐죽이 빠져나온 당신 한쪽 발 엎어져 자고 있는 발바닥이 바다 위에 섬 같애 숨도 쉬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자고 있는 쓰시마섬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대 토요또미 히데요시도 쓰시마에 기지를 구축하였고 왜 그 생각이 나나 모르겠네 젊어 징용가서 다시는 못 돌아온 고모부 절벽 위에 고사목처럼 살다 이제는 죽은 지 오래된 고모 바다 한가운데 엎어진 배처럼 조용히 떠서 자고 있었네 새벽에 혼자 깨어 들여다보니 참 멀리도 떨어져 나간 당신 발바닥이네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왜(倭)의 물은 한모금도 안 마신다며 생으로 굶어 죽은 최익현의 발자국도 그 섬에 떠돈다는데 그로고 보니 혼자 방황하는 당신 발바닥이네 당신의 몸 가장 궁벽한 곳, 가장 쓸쓸한 곳 회사는 넘어가고 친구들의 부고장은 하나둘 날아오고 술도 담배도 끊었지만 잠이 안 온다고 뒤척이더니 그 나라에서도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쓰시마래 작은 섬 앞바다에 역관 백여명을 돌풀에 휩쓸려 보내고도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조선사람들은 믿었다는데 당신 발바닥은 영 딴 나라 같네 동떨어져서 낯설기만 하고 당신의 쓰시마, 쓰시마섬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0년「현대시학」에 시「번개」등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으로『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붉은 밭』『레바논 감정』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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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발 / 함순례 어스름 할머니민박 외진 방에 든다 방파제에서 그물 깁던 오십줄의 사내 지금쯤 어느 속정 깊은 여인네와 바짓가랑이 갯내 털어내고 있을까 저마다 제 등껍질 챙겨가고 난 뒤 어항의 물비늘만 혼자 반짝인다 이곳까지 따라붙은 그리움의 물살들 밤새 창턱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사랑이 저런 것일까 벼랑 차고 바윗살 핥아 제 살 불려가는 시린 슬픔일까 몸이 자랄 때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다를 헤매야 하는 소라게야 울지 말아라 쓸쓸해하지 말아라 게잠으로 누워 옆걸음 치며 돌아가야 할 누더기 등껍질 촘촘 기워간다 물 밀려간 자리 흰 거품 걷어내며 기어 나오는, 소라게의 발이 뜨겁다 1966년 충북 보은 출생 1993년《시와 사회》신인상 수상 시집『뜨거운 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