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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 성경은 우리에게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창조는 성부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창조가 성자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 타납니다
창조
(1. 성경은 우리에게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창조는 성부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창조가 성자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냅니다.)
D.M.로이드 존즈
창조교리에 접근함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논점들.
1. 우리는 창조에 대한 충분히 자세한 설명이나 원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설명이 완전히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은 이 설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서11:3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창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분명해야만 합니다. 창조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태초에 이전에 존재한 재료를 사용하시지 않고 모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겨나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 자신과 구별되지만 항상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존재를 만드셨다”(Berkhof).
세상은 하나의 구별되는 생존을 하지만 항상 하나님에게 의지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골1:17).
3. 일반적인 논점은 성경이 창조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른 결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에 대한 어떤 필요성도 없었습니다. 또한 창조는 그의 사라아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창조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창조교리에 접근함에 있어서의 성경적인 논점들.
1. 성경은 우리에게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창조는 성부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창조가 성자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1:3절에서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골1:16절도)
창조는 또한 성령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창1:2에서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40:13에서 “누가 주의 영을 헤아릴 수 있겠으며, 주의 조언자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삼위일체의 완벽한 작품입니다.
2.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창조의 시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서두에서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과 시간은 함께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3. 창조에 대해 성경에서 사용된 언어들에 대한 흥미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전에 존재하는 물질의 도움없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바라”(bara)입니다. 이 단어는 찬세기 1장에서 3번나오며,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만 사용됩니다. “바라”는 결코 현존하는 재료들과 연결되어 사용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합니다(창1:1,21,27). 둘째, 현존하는 재료로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는 “아사”(asah)입니다. 이 단어는 창조의 날들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역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창1:7,16,25-26,31). 그리고 셋째, 선재하는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야찰"(yatsar)입니다(창2:7). 그러나 이 용어들은 분명히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처음 두 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대답은 주로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이 절들이 한 과정 안에 두가지 단계를 설명한다는 것이고, 2) 두절 간에 큰 간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에서 볼 때, 1절은 사단과 천사들을 포함한 최초의 천지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천사들의 타락의 결과로 재앙과 멸망이 닥쳤고, 2절은 재건과 재구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두 번째 해석에 찬성할 만한 점이 두가지 있는 것같습니다.
첫째로,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말은 황폐함과 파괴를 암시합니다. (사24:1;렘4:23)
두 번째로, 창조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계속 창조의 날들에 대한 성경의 자세한 설명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날, 빛의 창조: 빛과 어두움이 분리, 낮과 밤이 생겨남.
둘째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의 분리 생겨남. “위”는 구름, “궁창”은 창공을 의미.
셋째날, 바다와 마른 땅의 분리. 초목들로 이루어진 식물의 왕국이 생겨남.
초목들의 세가지 유형: 1. 풀 2. 씨 맺는 채소 3. 씨가진 열매맺는 과목들.12절그 종류대로)
넷째날, 빛의 전달체로서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 창조됨. 천체들의 기능은 낮과 밤을 나누는것임. 날시의 변화, 미래의 중요한 사건들, 다가올 심판에 대한 징조들과 활동,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연속에 영향을 미치고 빛의 역할도 담당.
다섯째날, 새들과 물고기들이 창조됨. 21절과 25절에 나온 “ 그 종류대로”
여섯째날, 먼저 동물들이 창조, 인간창조(25절“하나님이... 만드시니” - 인간창조의 특별성)
첫째날
빛의 창조
네째날
빛의 전달체의 창조
둘째날
하늘의 창조와 물의 분리
다섯째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의 창조
세째날
물과 마른 땅의 분리
인간과 짐승의 거주를 위한 땅의 준비
여섯째
땅의 짐승들, 육축, 땅에 기는 모든 것과 인간의 창조
'날'에 대한 이해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음 문제는 날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주요한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이 단어가 하루 24시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고,
두 번째 견해는 긴 기간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를 선호하는 이류는 성경의 창세기 1장에서 ‘날’로 번역되는 단어가 항상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창1:5,16,18에서 이 단어는 낮시간을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5,8,13절에서는 빛과 어두움을 나타내며, 창2:4절에서는 창조의 6일들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는 이 동일한 단어는 “재앙의 날”(렘51:2) 도는 “여호와의 날”(사13:6;욜3:14)과 같은 막연한 기간을 나타냅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8절에서 우리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씀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목적은 영원함과 시간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24시간의 하루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의미가 히브리어의 본래의미하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창세기 1장 도처에 나오는 “밤과 낮”이라는 어구의 중요성입니다. 만일 하루라는 말이 장기간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인다면, 이 밤과 낮이라는 어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즉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하루에 행하신 것으로 설명되는 일을 하시는 데 수백만 년이 걸렸고, 그 다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두움만이 존재하는 밤이 이어졌고, 그 다음에 다시 또 긴 기간이 이어졌다고 하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장기간에 걸친 낮과 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 설명되는 나중의 3일은 분명히 태양에 의해서 결정되는 날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날들은 24시간의 하루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쨋든 태양이 낮과 밤의 구별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24시간의 하루에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이론이 옳다면, 우리는 앞의 3일은 긴 기간을 의미하고 나중의 3일만이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암시가 창세기의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자신이 하신 역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셨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특히 우리가 제칠일을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문제와 관련된 중요성을 주목하십시오. 출20장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맞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8, 11절)는 말씀을 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됩니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논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24시간의 하루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라고 지시를 받은 안식일은 긴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은 24시간의 하루였고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엿새만에 세상을 만드셨고 제 칠에 쉬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수백만년의 긴 기간 동안 쉬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화론
1. 무신론적 진화론 -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무신론자들로 가장 큰 집단입니다.
2. 이신론적 진화론 - 다른 말로 자연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만물을 창조한 다음에 그 하나님은 더 이상 만물에 대해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만물에 힘을 불어넣었고 나머지는 그 자체로 행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지켜보시길 그만두고 그것들이 스스로 계속해나가게 했다”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으로까지 이어진 모든 거대한 변화들은 이런 힘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3. 유신론적 진화론 - 이들은 하나님의 신봉자이며 동시에 진화를 믿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유형과 종들의 발전은 계속되지만 하나님께서 그 발전을 감시하며 그 과정에 자주 개입하신 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자연신교 신도와는 구별됩니다. 이들은 유신론자들이며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합니다.
나의(로이드 존즈) 입장 : 첫 번째 사실은 진화론이 단순하게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못합니다. 그들은 매우 솔직하게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뿜만 아니라 그들은 그런 변화들이 발생한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지질학적 기록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소위 잃어버린 고리에 대한 증거부족입니다. 만약 어떤 형태가 점차적으로 또는 우리가 감지할 수 없게 다른 것으로 변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이에 낀 단계의 퇴적물로써 약간의 증거를 발견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잃어버린 고리는 잠재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어떤 과학자는 “다윈주의는 과학보다 더 종교에 가깝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근본적인 견해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화론 사상이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신성불가침한 신념, 공평한 과학적 탐구와는 무관한 신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은 왓슨(D.M.G. Watson)교수에 의해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동물학자들이 진화론 자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발생하는 것이 관찰되었거나 논리적으로 조리가 서는 확실한 증거로 입증될 수 있기 때문도 아니고, 유일한 대안인 특별 창조론을 명백하게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왓슨교수는 자신의 이론을 증멸할 수 있는 사실들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다는 사상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화론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유신론적 진화주의자를 논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진화론을 받아들여 자신을 어려움 가운데 두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과학적 이론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손상시키지 맙시다. 성경을 부정하는 과학적 이론은 또 다른 이론으로써 대체될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위 과학적 견해라 불리는 일시적인 이론들과 경향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결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복하건대, 진리를 항상 계시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는 사실들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러나 자주 진실한 과학적 정신으로 가장하는 이런 가짜 과학적 독단주의는 완전히 떨쳐버립시다.
3.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대한 이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및 아담의 형상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선택 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창세 전 기록된 생명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해야 한다.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의 수는 창세 전에 확실하게 확정된수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 수를 더하거나 뺄 수 없다32).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4,000 과 무리(계 7:3, 4, 9; 14: 1)는 그것을 암시해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아담에게 속한 무리이며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잠재 되어있어 그렇지 않은 자들과 구별된 무리이다. 그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이룩하신 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떨쳐버리고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과 직접 연관된다. 비단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정확한 의미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서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인 인간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구원에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최종적인 종말과 완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자기 백성에 관한 계획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이미 그의 예정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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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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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더불어 완성될 영광의 세계를 섭리 중에 구상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웅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 27,28).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이미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두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으며 그 백성은 창세전 생명책에 기록하여 선택하신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복을주시며 땅이 백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땅에 기득하여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말히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뜻 가운데서 주어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복을 의미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혈육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든 인간들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그 죄악이 기득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구원을 예정하실 때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기 백성을 염두에 두셨으나 아담의 후손이 번성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백성이 태어나게 된다. 이는 창세기 6장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 과 ‘사람의 딸들’ 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지만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특정 인간들을 유기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육체적 생식력을 통해 태어난 인간들에 대해서는 사탄이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33).
이는 하나님께서 특정인들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아담의 자손들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 공작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닌 아담의 형상만을 닮은 처음 자손 ‘가인’ 의 이름이 ‘위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34). 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위조로서 마귀가 타락한 아담에게 부여한 형상과 통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것이 아니라고 이해 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 신학의 포용성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35).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결코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기록된 생명책에 따라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 불러 모으시며 달리 일부 인간들을 유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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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Augustine,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1. x .30; 라은성, “어거스틴의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 안명준 편, 서울: 이컴비즈넷, 2005,p.78. 참조
34) 최영백, “인류는 타락 이후 두 종류의 인생이었다’, 정통신학, 제 1집, 해서신학연구원, 2005. pp.99-125.
35) 한국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신학교를 자처하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서는 최근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단성을 강하게 견제한 적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단은 제 51회 (2001년 9월),제 52회 (2002년 9월), 제 53회 (2003년 9월) 총회에서 연속적으로, 신학부 유사기독교연구위원회에 제출하는 신학대학원 교수회 연구보고서에서 그 점을 분명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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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간과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가?
선택과 유기를 말한다해도 결국 지구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택을 받은 성도들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관계없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 해야 할 점은 본질상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이는 사실 전혀 새로운 주장이나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외형상 통일한 모습을 하고있다. 그러나 실상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나누어지며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된다.
성경은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한다. 신자와 불신자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종교를 가지고있든 무신론자이든 아무 생각도 없든 모두 죄와 사탄에게 종속되어 있다36).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구분되어 있다.37) 우리가 이에 대한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성경에는 그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들이 나타난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며 영생과 영멸을 구분하는 데서 이미 그에 대한 의미가 확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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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정석, ‘다종교와의 평화와 전도의 사명 목회와 신학, 서울: 두란노, 2005년 3월호. 참조.
37)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1[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원전부터 한 백성을 그의 씨로 주사 그의 씨가 되게 하셨고 때가 되매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칭의되고 성화되고 영화되게 하셨다 우리가 이 고백문에서 볼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씨만 자기 백성으로 선택 하셨으며 이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씨가 아닌 백성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물론 성경에서 ‘씨’ (seed)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롬 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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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범죄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탄의 유혹으로 언한 인간의 범죄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구원은 결국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논할 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나라 하나님의 자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는 점은 잘 이해해야할 내용이다.
6.창세 전 선택의 성경적 근거와 관련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
(1)구약성경의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주의 백성에 관한 창세전 선택과 하나님의 형상 없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소유한 자들에 관련된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앞 부분에는 아담이 범죄한 후 가인과 아벨의 생명을 건 다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문제와 연관된 사건으로 이는 전체 구속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가인은 누구인가? 가인은 아담의 몸에서 출생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탄의 자식이었다. 이는 아벨이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자녀였던 점과 대비된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가인과 아벨은 본질적으로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자 였지만 가인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자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이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나었기 때문이다. 아벨은 동물 제사를 드리고 가인은 곡물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잘못된 주장이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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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광호, ‘가인과 아벨의 제샤’, 교회의 신학적 관심들, 조에성경신학연구원,2004 (2002, 초판), pp.47-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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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기 자녀이다. 가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을 방해하는 자였다. 그는 메시아의 오시는 통로를 차단하려는 자로 사탄에 속한 자였다.
그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여자의 후손(창 3:15)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였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의 출생을 가로막는 사악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가인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6,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의 행위적 선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인은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임을 생각해야 한다.
가인은 상대적으로 아벨보다 못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인이 바치는 어떤 제사도 받지 않는 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은 순간적 판단착오로 언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탄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아벨의 혈통을 통한 메시아의 길을 차단하는 가인의 살인 행위는 곧 사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즉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셨다(창 4:14, 15), 그렇다면 가인의 생명이 아벨의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끔찍한 살인에 대한 엄격한 정벌을 해야만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방책이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달리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뭇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가인이 이미 하나님과 무관한 사탄에게 속한 자라는 점과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보호하고자 하시는 큰 뜻이 담겨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해하려는 문제를 방치했다면 그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도 엄청난 혼란이 닥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생명을 박탈하지 않은 것은 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 때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노아 홍수 이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이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2)고 기록된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과 ‘사람의 딸들’ 의 구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란 ‘약속의 자녀’ 라는 말과 상통하는 개념이며 '사람의 딸들’ 이란 ‘육신의 자녀’ 란 의미이다39).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닮지 않고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사람의 딸들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 과 ‘사람의 딸들’ 의 혼합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정체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임과 동시에 메시아 오심의 통로를 둔화시키고자 하는 마귀의 술수였다. 그것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악에 빠진 것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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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Keil Delitzsch, 구약주석, 창세기 6:2; “ 하나님의 아들들’ 과 자람의 딸들’ 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세 가지 상이한 견해들이 있어왔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 이란@왕들의 아들들,@천사들, @셋족속이나경건한지들이며,또한 (사람의 딸들’ 이란@ 낮은 서열의 백성의 딸들,@ 일반적으로 인류의 딸들,@ 가인 족속 또는 경건한 자나 하나님의 자녀와는 대조되는 나머지 인류로간주된다.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Keil Delitzsch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를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이들들을 천사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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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여기에서 죄의 관영함이란 일반적인 사회적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방해하려는 세력이며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신 것은 자연적인 생식을 통한 간접 창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연 생식을 통해 허용하신 피조 세계의 생명체로서 인간들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한 심판의 대상으로 삼은 인간은 창세 전에 자기 자녀로 선택하신 그 자녀까지 포함 하는것은 아니다.
또한 성경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 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아는것처럼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여러 명 있었다.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있었으며 이삭을 낳은 후에도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유일한 독자(獨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다른 육신의 여러 자녀는 배제하고 오직 이삭만을 유일한 약속의 자녀로 부르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삭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독자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히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 를 드렸느니라(히 11:17).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자로 이삭을 ‘약속의 자녀 곧 성령을 따라 난자’로구분(갈 4:23,29)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영적인 형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루어진 언약과 연관된 실제적 출생을 의미한다. 나아가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 28)고 함으로써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창세 전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삭과 같이 성령을 따라 출생한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태중에서부터 구분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한 구분이었다. 태중에 있는 아이들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인식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들이 범죄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야곱은 자기 자녀로 인정하시고 에서는 사생자로 이야기 하셨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인 여부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선인과 악인이 저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또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살인’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 는 명령과 살인하라’는 명령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언약 백성에 대해서 살인을 엄금하셨다. 만일 살인하게 되면 통해 보복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살인을 엄금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가나안 땅 불법 거주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셨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순순히 물러가지 않을 경우에는 인정을 베풀지말고 진멸하고 도륙하도록 명령하셨다(신 20:16-18, 창조). 이는 그들을 인간취급 조차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살인금지와 살인명령을 동시에 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임의적인 판단에 의해 다른 사람을 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이 모든 생명의 주인되심을 천명하고 계신다.
(2) 신약성경의교훈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것은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의 구분은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다. 즉 그것은 창세 후에 출생한 인간들의 행위나 다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존재적 설명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해 마귀의 자식이라 단언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과 무관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의 출생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40)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요일 3:10). 사도 바울 역시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한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녀에 대하여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말씀하신 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셨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물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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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John Calvin은 요한복음 8:44 주석에서, ‘주님은 지금 이미 두 번이나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바 곧 그들이 마귀의 자녀’ 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천명하셨다.
만일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의 영구적인 원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그렇게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William Hendriksen은 요한복음 8:44 주석에서 “유대인들이 육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혐인 것은 분명하였다. 하지만 영적으로 도적적으로 -이것이 문제이거니와- 그들은 마귀의 자녀’ 였다… 즉 그들은 변함없이 마귀의 소원을 실현하려고 의욕하고 있다(현재 계속법 시제). 그러므로 마귀가 그들의 아비’ 임이 틀림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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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악한 씨 곧 가라지는 악한 자의 이들들이며 그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가 세상에 자기 아들들을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41).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비유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를 주시고 그에 대해 해석하시는 의미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사도 비울은 이와 관련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교회에 관련된 교훈을 주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되었음을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다(엠 1:4, 5, 11;3:11). 특히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는 그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 : 22-24)
여기에서 살며보아야 할 부분은 22절의 “구습을 쫓는 옛 사람”과 24절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하나님을 따라 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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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Hendriksen, 마태복음13:38, 39 주석. 참조.
42) 에베소서 4:24에 대한 한글 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번역이 명확하지 않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그러나 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NASB등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 입어야한다. 새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공동번역).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표준새번역). “put on the new self, which in [the likeness ofl God has been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truth"(NASB); 이광호, “에베소에 나타난 교회론 고찰" 성경적인 교회개혁 이론과 실제, 달구벌기독핵술연구회 · 영남뉴스앤조이 공동 학술 발표회 자료집, 2005.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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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형상에 짓눌려 관계적으로 잠재된 상태에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드러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끊어진 관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펀지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미리 알고 계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것을 작정하고 계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 30).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중 미리 알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친히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며 영화롭게 하신다.
6. 결론
우리는 한국 교회의 창세 전 선택 구원 교리에 관한 이중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상당수 한국 장로교회들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인 신앙고백 문서들을 사문화死文化시키거나 박제화 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관념화한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실정에 놓여 었다. 그렇게 되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시하는 칼빈주의를 외견상 표방하지만 실상은 알미니안주의보다 더욱 심각한 인본주의 사상을 따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예외없이 모든 것에 제한적인 인간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여전히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굴레에 빠진 제한적인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놀라운 뭇을 다 혜아릴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그의 경이로운 뭇을 알아갈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해 들어야 한다. 역사적 시대와 지역성에 따라 형성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배제되는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송}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 자기 백성의 선택에 관련된 문제는 쉽사리 이해할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의 놀라운 뭇을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는 가운데하나님의 영광을노래할수있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완벽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통해서 보여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성도들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가지지 않은 채 타락한아담의 형상만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분명히 알수 있는것은하나님의 택한백성의 수가창세 전에확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생겨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생명책에 이미 그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었다. 그 생명책은 필요에 따라 첨가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
의 창세 전 선택 이론의 근간이며 정통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나아가 성도의 견인 문제 역시 창세 전 예정 가운데 확증되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고백이 더욱 견고해질 수 었다.43)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미혹하여 좌에 빠뜨림으로써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다. 지금도 사탄은 그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 가운데 빠져 헤매도록 끊임없이 미혹하고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의 미혹에꿀까지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독자 이삭과하나님과 무관한 여러 자식들이 출생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삭의아내 리브가는 한 태중에 하나님의 자녀인 야곱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에서를 동시에 잉태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가운데서도 혈통적으로 언약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구원계획을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자역사 가운데서 그 경륜을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를통해이루어가시는하나님의창세전작정에따른다.하나님의구원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선택을 받아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주어진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 전에 이룩된 그의 예정과 선택에서 사실상 완료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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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따른 성도의 견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7장 ‘성도의 궁극적 구원’ , 제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그의 성령에 의하여효과적으로 불러 성화시키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아주 타락할 수없다. 그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끝까지 참아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형상을 닮은 백성을 결코 영원한 멸망에 버려 둘수 없음을분명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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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인간들을 동일한 선상에 세워두고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다른 어떤자들은 유기하시기로 작정하여 따로 구분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주의 깊게생각해보아야한다.
우리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 생식력에 따라 인간들이 번성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모든 인간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살아가는통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창세 전에 선택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자들 싸l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궁극적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 시대는 이전에 없던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극도의 혼란에 치닫고 있다. 사악한 인간들이 첨단 과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직접 개입하는 일들이 이미 보편화되고 있다. 트렌스젠더 및 성전환 수
술의 일반화와 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인간배아복제 및 줄기세포와 관련된 문제들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급속하게 요구하고있다.
우리는 결코 쉽지 않은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심과 인간의 왜소함을 온전히 깨닫는 가운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굳건히 서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
4. 인간의 타락과 메시아 언약
사탄은 감히 하나님께 직접 저항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타락한 사탄은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지만 직접 그에 대항하여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사탄은 기회가 되는 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려는 사악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 대신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공략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사탄의 첫 번째 공략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공략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감히 하나님과 직접 맞서 싸울 수 없는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욕되게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범죄에 빠지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들이 거기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며 살도록 허락하신 것은 자기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타락의 늪에 빠지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꾀했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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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Klass Schilder는 Heidelberg Catechism 주석서 (Heidelbergsche Cathecmsmus. vol. 1, Goes: Oosterbaan & Cointre, 1947, pp.296, 297)에서 하나님이 Adam을 창조하실 때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을 뿐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 안에 그대로 보존되도록 허락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타락한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벌카우어도 그 주장에 찬동한다
(G. C. Berkouwer, Man : The Image of God, Trans. by Dirk W. Jelema,Grand Rapids: Eerdmans, 1962); Ant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개혁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CLC, 1990. pp.33, 34).
45) J. CALVIN , Commen떠η of Genesis, 1:26. 칼빈은 인간에게 존재하던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파괴를 말하면서도 타락후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느냐에 대해 일관성 있는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상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 칼빈은 몇몇 성경주석에서는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말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됨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J. Calvin, CommentaIy, Eph.4:24; n Cor.3:18. 참조), 그렇지만 그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손상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들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J. Calvin. Institutes, 1.15.4; n .2.12; n .2,17; m, 7.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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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의 중앙에 심겨진 선악과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상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뛰어다니며 동산 중앙의 선악과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 나무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하셨으므로 그들이 동산 안에서 활통하며 그 나무를 볼때마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배신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파괴당하게 되었다. 45)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과 한 편이 되었다. 사탄과 친구가 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공하신 영역이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의 지배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을 상실한 그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인간은 결코 상호 조화될 수 없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스스로 예정하신 그의 뜻을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언약의 말씀을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선언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범죄에 빠진 인간은 더 이상 아무런 능력이 없다. 놀라운 언약의 말씀이지만 완전히 부패한 인간은 그 의미를 받아들일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즉 타락한 인간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파괴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은혜의 언약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하신 자기 자녀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한 언약에 기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작은 이유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라는 큰 이유가 동시에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원천이다.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것과 비교된다. 범죄한 후에도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채 상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무관한자들에게는 아담의 형상만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선택된 자녀에게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형상과 함께 존재했다면 불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없이 아담의 형상만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의 흔적을 지닌 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 언약을 주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벽한 그의 형상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며 자기 자녀에게 베푸신 은혜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흔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히는 일을 하시고 높은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동]1:3).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원래의 형상이 다시금 부여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인간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메시아 사역의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가셨다.
2,하나님은 타락한 피조 세계를 사랑하시는가?
타락한 피조 세계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모든 피조 세계 역시 죄악 세상 가운데 가둬지게 된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 세계 역시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함을 말하고있다.
성경은 자연이 가졌던 원래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 땅은 가시와 영정퀴를 내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땅 자체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아담은 땅을 갈고 기경해야만 양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자연의 아름다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속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산천초목을 비롯한 다양한 꽃들의 아름다움을 보게된다. 그리고 드넓은 바다와 밤 하늘의 별들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고 느끼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바 아니라는사실이다. 타락한 인간이 경험하는 아름다움은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든 불신자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적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그런 류의 아름다움은 부패한 인간과 타락한 자연 사이에서 발생하는 조화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런 아름다움이 될 수 없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완전히 상실한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감정적인 조화를 통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된다.
우리는 이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면서 일반 은총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보통 말하는 일반은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와는 다르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일반 은총 개념 속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저주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인간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은총 개념과 반대의 저주 개념이 뒤엉켜 있어서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결국 저주라 이해해야만 한다. 즉 인간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은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무관하다.
도리어 일반 은총의 개념은 인간을 일시적으로 만족케 함으로 인해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도리어 저주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과거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노아 홍수 이전 시대와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은 채 온 세상으로 흩어져 가던 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오늘날우리 시대처럼 우주와 자연의 조화 가운데 살았다. 그들 역시 이른 비와 늦은 비 가운데서 양식을 얻었으며 그런 자연 환경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면서 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인해 살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라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도 함께 죄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죄악 세상 가운데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완전히 타락한 인간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화와 문명 역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죄에 갇힌 자연의 현상이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는 우주의 크고 광대함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며 여전히 보존되는 자연의 오묘한 법칙을 통해 인간의 왜소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성도들에게 허락된 우주 만물과 자연에 대한 일반 은총의 개념이 무신론자들과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즉 하나님 없는 일반 은총이란 구속의 은총 가운데서는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3.가인과 아벨 그리고 그 후예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게 된다.
성경은 그 인간들 중 특별히 가인과 아벨을 소개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하나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것이다.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가인은 자신의 종교적 판단에 근거해 제물을 바쳤으며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 가운데는 인간의 범죄 이후 주어진 메시아 언약에 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성경에는 가인이 곡물로써 제물을 삼은 사실과 아벨이 양을 번제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바쳐지는 제물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셨던 것은 그가 택하신 언약의 자손 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분노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일반적인 구속사 가운데 부정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결코 일반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을 맨 처음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그것을 존속 살해의 악한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것도 본질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의 오심을 직접 방해히는 사탄적 (Satanic) 사건이라는 점이다. 즉 사탄은 가인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시는 통로를 절단하려고 했다. 사탄은 결국 그 악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지속하셨다.
아벨이 죽고 난 후 하나님께서 셋을 허락하신 것이 그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부부 관계를 통해 셋이 출생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벨을 잃은 아담과 하와를 위로하기 위해서 셋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아벨 대신에 셋을 허락 하셨다. 사탄은 이 세상에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방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셨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아벨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메시아 언약과 연관된 인물이었다면 가인은 사탄에게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인은 사탄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을 대적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가인이 ‘하나님’ 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간섭하시며 그를 향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탄도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사탄의 하수자들인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를 향해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하며 섬기는 것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불신자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정신을 차려 진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기독교적 활동을 한다고 해서 모두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교회를 통해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서 모두 주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아벨이 죽고 나서 가인을 통해 인간의 본격적인 문명과 문화적 활동이 드러나게 된다. 창세기 4장에는 타락한 인간들이 얼마나 문명적이었으며 문화적이었던가 하는 점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인간들이 개발한 문명과 문화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타락한 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마저도 그로 인한 유혹에 완전히 노출되어있다.
우리는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들이 보통 900살 정도의 삶46)을 살면서 얼마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웠을까 하는 점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범죄한 인간들의 관심은 하늘 왕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땅에 있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초기인간들의 멸망을 초래하는 빌미가 된다.
5.에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 천국의 실재를 보여주심
메시아의 통로를 절단하는 사탄적 악행을 저지른 가인의 후예가 이 세상의 문명과 문화를 통해 인생을 즐기며 누리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고귀한 생명을 잃은 아벨과 그의 삶을 상속받은 셋의 후예는 이 세상의 가치관들로 인해 도리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영원한 천국에 속한 자들로 이 세상의 가치를 수용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동시에 아담의 후손이었으므로 그로부터의 유혹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며 먹고 마시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 역시 그와 동일한 유형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값어치를 이 땅이 아니라 천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역사에 나타나는 양상이며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인 삶의 가치 기준을 이 땅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천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다.
에녹의 사대 역시 그와 동일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담으로 인해 죄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과 상이한 가치관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중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자녀에게 놀라운 위로가 되 는사건을보여 주셨다. 그것은 상정이나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에녹을 산 채로 천상으로 데려가셨다.
“에녹이 하나님과 통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히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 5)
이제 우리는그 의미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에녹을 살아있는 채로 히늘로 데려가셨을까? 그렇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 었을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그것이 일차적으로 에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어려운 좌악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에 놓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탄은 천국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이 세상을 탐하며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성도들은 세상적인 유혹이 끊임없이 넘치는 현실과 미래에 임하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사이에서 심한 갈등을겪게 된다. 그런 환경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면 어린 성도들의 신앙은 이론화되어 점차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결여된 이론적인 신앙으로 인해 천국소망을 향한 실천적인 신앙은 약화되어 가기 쉬운것이다. 에녹의 시대 역시 그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편 중에 에녹을 살아있는 채로 천상의 나라로 불러 올리셨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에녹의 사건을 통해 자기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이며 놀라운 사랑을 보게 된다.
5.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 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1, 2)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며 사람의 딸틀은 누구인가? 이 말이 과연 단순한 상징적인 것일까?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구속사적 의미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이란 말그대로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인간들로서 하나님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인간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자들이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아담으로부터 출생했다. 따라서 죄 가운데 출생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여자의 후손’ 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딸들’ 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아담의 자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담의 몸에서 출생했을 뿐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성경은 노아 홍수 이전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부러워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의 후예가 발전시킨 문명과 문화를 부러워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세속화 현상과 동일한 개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통혼하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인 각 개인이 불신자들과 직접 혼인했음을 의미하고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갔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를 통해 깨달아야 할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천상의 가치를 벼리고 사탄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거룩한 천상의 의미와 타락한 이 세상의 의미가 뒤엉켜 가치에 대한 변질과 혼합 현상이 일어났음을 말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가치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의 가치를 보고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기를 좋아하며 세속적으로 변질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즐겨했던것이다.
범죄한 인간들의 공간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서로 공유하고 있는 공간이다. 겉보기에 동일한 사람들이지만 속성상 상이한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아담의 후예로서 죄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 역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타락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아담의 딸들이 구조적으로 훨씬 더 익숙하며 편리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가치와 상반되는 천국의 가치를 소유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본질적으로 범죄한 이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가야 할 존재이며 아담의 자녀는 본질적으로 세상을 순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세상의 가치에 역행하는 속성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을 가지게 되지만 그 가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상적으로 즐거울 수 있다. 죄에 빠진 모든 인간은 자기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세상적 가치를 수용하려는 자연스런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에 익숙해지면 진리를 향한 갈망보다 세상을 향한 타협적 만족을 새로운 덕목으로 삼게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세속주의 혹은 혼합주의적 가치가 타락한 인간의 눈에는 더욱 훌륭해 보이는 결괴들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네피림’ 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 난 네피림은 힘과 지도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네피림이란 ‘타락한 자들’ 이란 의미이다. 네피림은 평범하지 않은 이상한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담의 자손으로서 보통인간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은 노아 홍수 이전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있었다(민 13:33). 이 말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는 네피림이 많이 살았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네피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네피림의 판이 되어 간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6.노아 홍수와 노아 언약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아 홍수를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죄에 물든 인간의 속성과 경험적 사고에 의한 것이다. 한편 과학자들 중에는 노아 홍수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를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적 증거가 성경계시를 보완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인간의 오만일 수 있다. 어떤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 과학적 입증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성경에 계시된 자체가 어떤 과학적 증거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학자들 중에는 노아 홍수가 국지적으로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노아 홍수는 전 지구를 뒤덮는 전체적인 사건이었다.47) 그 홍수로 말미암아 노아의 가족 여넓 명 외에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죽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원인이 인간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심판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타락한 것은 피조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천지 만물이 함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맨 처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을 때 땅이 가시와 영정퀴를 낸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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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노아 홍수는 그 후 인간들에게 구전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고대 중근동 세계에는 그에 대한 변형된 내용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그 대표적이다. 대홍수와 관련된 내용들은 다양한 변천을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아메리카 대륙 등 전 세계적으로 남아 었다. 한국에도 그에 관한 변형된 설화들이 남아 있다. 경남 창녕군 화왕산 정상에 있는 배바위 전설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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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자연현상들에 대해서는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지구상에 발생하는 모든 재앙들을 하나님의 심판과 직접 연결 짓는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각현상이나 우주적 환경이 아담의 범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홍수 이후까지 살아남은 노아와 그 가족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아와 그 가족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던 것이 과연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인가?
오늘날 대다수 교인들은 그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복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홍수 이후에 더 오랫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복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물에 빠져 죽을 때 생명을 건졌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복이라 할 수 없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발달한 문명 가운데서 문화적인 생활을 누렸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당시 문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 당시의 사회 구조를 짐작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추론할 수 있다. 노아가 거대한 방주를 건조했을 때 사람들은 그 대단한 능력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상당한 문명과 문화를 누렸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회에 살던 노아와 그 가족은 홍수 이후에 모든 문명을 상실하게 된다. 노아 홍수는 앞 시대의 문명이 후대에 전달되는 통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문명을 맛보고 그것을 누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 모든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의미한다.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문명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굶주림과 가난에 직면한다면 그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문명 가운데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교통, 통신, 전기, 전자, 인터넷 등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중 대다수는 좋은 집에 살면서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현대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극도로 가난한 힘 든삶을 직면하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될까?
노아의 가족들은 기존의 모든 화려한 문명을 상실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풍요로운 삶을 맘껏 누리다가 고통을 맛보지 않고 일순간에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노아의 가족들은오랜 기간 동안의 홍수를 겪고 방주가 땅에 내렸을 때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으며 소위 문화 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과거의 풍요로운 삶은 기억에만 남아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가 노아의 가족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사회라면 가정에 심각한 불화가 닥친다 해도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소수가 모여 사는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노아의 가족의 경우에
는 모든 인간들이 죽고 난 후 불과 여넓 명만 남아 있는 형편에서 그들에게 심각한 가정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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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학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인간의 윤리적인 부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멸하였으며끼녹 17:27)라는 말씀을 당시의 윤리적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으로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윤리적 타락의 일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하신 것은 진리에 대한 인간들의 타락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홍수 이후의 노아의 음주 사건과 그에 따른 가정문제에 대한 노아의 판단과 행동이다. 만일 노아 이전의 사회가 술을 마시고 타락한것에 대한 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었다면 노아는 그런 식으로 포도주를 과음하지없t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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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노아가 포도주를 과음48)한 후 벌거벗은채 자고 있을 때 함이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게된다. 그것으로 인해 노아는 함의 가계를 저주하게 되었다. 자식을 저주하는 아버지를 본적이 있는가? 한 집안에 살면서 아버지가 한 아들을 축복한 반면 다른 한 아들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자식들 간에 서로 원수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아가 함을 저주하고 셈을 축복한 것은 노아의 단순한 개인적 판단으로 돌릴 수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는 예언적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을 특별히 선택하여 홍수로부터 구출하셨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틀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그들이 홍수 이후에 즐거운 삶을 살면서 인생을 누리도록 할 목적으로그들을 홍수에서 구출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에게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을 선택하여 홍수에 빠져 죽게 하지 않으신 것은 역시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 과 직접 연관된다. 노아 홍수 이전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통흔함으로써 또다시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을 훼방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는 그 구원 사역을 지속하셨다.
노아 홍수는 단순히 사람들을 죽이는 심판 행위 이상으로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한 과정에 놓여 있다.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메시아 오심을 방해했을 때 셋을 통해 자기 자녀를 위한 구속 사역을 지속하셨던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 되어야한다
[출처] 창조 ( 성경은 우리에게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창조는 성부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창조가 성자의 작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작성자 김에스겔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