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서유
다 아는 판국에 新별주부전 외
식었소 우리는 그러니 나는 왼쪽으로 당신은 오른쪽으로 서로가 잘 모르는 사이처럼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테이블에서 나는 문득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본 것 같소만 입천장에 혀가 닿지 않는 딱 그 정도 깊이에 숨어 얼굴을 바꾸고 있소 세상에나, 등껍질이 배꼽에 달라붙을 지경이오
늦잠 자던 토끼와 등껍질을 도둑맞은 거북은 눈만 뜨면 달리기를 하오 이인삼각으로 묶어버릴까 전깃줄에 구워버릴까 욕지거리가 올라오는 목구멍을 애써 틀어막고 깩깩거리다 아주 죽을 지경이오만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나지 않을 경주라는 건 이미 세상이 다 알지 않소 이것은 불공정의 오랜 표본이거늘 아직도 저들에게 배팅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벨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거요 묶어버릴까 구워버릴까 그냥 뚝 잘라 문고리에나 걸어두시는 게 어떻겠소
당신은 소주 한 잔과 국물 한 스푼으로 간(間)을 맞추고 우리는 한 뼘 더 멀어지지만 결국 여우 차지가 되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거늘
여우님 여우님 찬양가를 부르며 벽을 쌓는 무리와 그 뒤를 따라 피리 불며 난장을 벌이는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오 이런 가관이 또 어디 있겠소 주먹 맨드라미 같은 돼지 간을 씹어 먹다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다가 깨진 맨드라미 화분 위로 번들거리는 비곗덩어리 때문에 10년 치 소화불량에 걸려버렸소
다 아는 판국에 세상은 다시 별주부전을 쓰고 내 멀쩡한 간이 시름시름 앓다가 싱싱한 간을 찾아 변절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수족관마다 파다하다 하니 가을 전어 맛보기는 물 건너간 모양이오 입맛도 집 나간 마당에 토끼 따라 채식주의자로 전향해 볼까 하는데 어찌들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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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오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소리 없는 것들과 뒹굴면서 나는
점
점
점
먼지의 입장으로 고요해졌다
세로로 확장된 창문 속에는
마지막 화요일이 서 있고
달에 호텔을 짓겠다는 어떤 가사는 아름다웠다
개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애매하게 길들여진
발자국 안으로 모든 바깥이
모여들었다
작고 검었으므로 충분했다
동경하는 것으로 머물면 잠시 행복할 수 있었다 나의 불행이
유예되는 것 같아 잠시라는 순간을
붙들고 살았다
살아가고 있다
생리를 시작했다
곧 배가 불러올 텐데 내가 낳을 아이는
누구의 거짓말인지
눈은 언제나 고전적이고 나는
고딕풍으로 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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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 200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7년 <현대시학>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부당당 부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