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는 인생
본 문 : 수 23 : 1 - 16 2008/11/23주일 낮
지난 번 갑작스럽게 내린 첫눈은 제 마음을 적잖게 당황하게 하고 민망하게 했습니다. ‘첫눈이 내려서 다들 즐거워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당황했다고 하는 것은 첫눈을 맞을 준비를 미처 못 했기 때문입니다. 고즈넉한 가을의 정취를 아직 마음껏 누리지도 못하고, 찬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여유 있는 마음으로 아직 주워보지도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교회 승합차의 바퀴가 다 닳아서 교체를 해야 하는데, 조금씩 미루다가 교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망했던 것은 아직 단풍도 들지 않은 파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거리를 뒹구는 모습이 너무나 어색하고 안 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전과는 다르게 금년 첫눈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 예쁘게 내렸지만, 제 마음엔 썩 즐겁게 맞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이제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할 나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고 느껴질 때 인생은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처럼 용기백백하고 힘 있던 장수 여호수아도 이제 나이 많아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서 거듭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14절에서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하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도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드는 단어가 아마 이 ‘늙는다’와 ‘죽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인생의 무력함과 쓸모없음과 추함과 같은 말들을 연상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늙는 것을 막아 보려고 애를 씁니다.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건강식품을 먹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젊음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때려 막으려 하지만 백발은 어느 새 지름길로 오고 만다’고 우탁의 시조는 한탄하지 않았습니까? (우탁의 시조, ‘한손에 가시들고 한손에 막대들고’). 늙음이 깊어지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요,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렇다면 늙는다는 것은 꼭 비참한 것이고 가능하다면 꼭 회피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잠16:3) 말씀합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고 말씀합니다. 젊을 때는 힘이 있어 아름답고, 나이 들어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백발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철이 든다’라고 말씀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생이란 계절이 깊어간다는 뜻입니다.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4계가 있습니다. 꽃이 피는 봄이 있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여름이 있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이 있고, 모든 것을 떨치고 죽음과 휴식으로 돌아가는 겨울이 있습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때가 어느 때인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열매를 맺어야 할 때이건만 봄과 여름에 머물러 꽃을 그리워하거나 아직도 푸른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계절은 아름답습니다. 봄에는 꽃의 향연입니다. 5월 무렵에는 신록이 눈부십니다. 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잎들과 작열하는 태양의 힘을 느낍니다. 가을의 열매들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열매들이 열릴까 하며 그 풍성함과 충실함에 감탄합니다. 열매가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마지막 단풍이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다 찬바람이 불면서 모든 잎들이 떨어지지만 그 쓸쓸함이 주는 묘한 맛이 있습니다. 겨울은 모든 것들이 죽습니다. 사실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우고 봄을 기약하며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4계절 또한 아름답습니다. 아기는 아기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호기심과 천진난만함이 있습니다. 청년시절은 청년의 도전정신과 준비하는 과정이 아름답습니다. 중년은 그 열매로 영향력 있는 모습을 드러낼 때입니다. 노년은 인생을 겪은 연후의 지혜가 있고 여유가 있고 비움과 내어놓음이 있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때에 맞추어 산다는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 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성경에서도 늙는다, 죽는다는 말이 나오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처럼 노년의 힘을 찬양하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이삭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울 정도가 되었지만 두 자녀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삭에게 있는 축복권을 서로 받으려고 안달입니다. 늙었지만 힘이 있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하고 고백하지만 그는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의 축복이라 하여 자기 12자녀를 하나하나 축복하며 그 운명을 결정합니다. 모세 또한 그렇습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고 성경은 전합니다. 모세는 죽음에 이르는 나이가 되도록 자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 근처까지 인도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까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율법을 강론합니다. 모세가 하루 동안 강론한 말씀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모세 또한 12지파를 하나하나 축복합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마지막도 아름답습니다. 황혼이 더 빛나고 아름답듯이 영적 거장은 그 마지막도 아름답습니다.
나이 들고 늙었다 하지만 결코 무기력하지 않고 추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늙음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은 늙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가야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모세는 그가 지은 시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고백합니다. 인생은 마치 풀의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베어 지는 것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인생은 한번 호흡 하는 사이에 다 지나가는 것 같이 무상하다고 그 아픈 현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참 지혜는 바로 이런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연한이 짧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두에게 늙는 날이 있고, 죽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늙음과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숙명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죽음은 우리 인생을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갑자기 암 진단이 내려질 때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이 바짝 듭니다.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인생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 느끼던 것들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그것 없이는 못살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근심과 염려가 되었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듭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던 알프레드 노벨의 일화입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유럽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광산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도 다이너마이트는 유용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벨은 무심코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사망 기사가 어느 프랑스의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의 형이었던 루드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신문사가 잘못 보도했던 것입니다. 이 사망기사도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노벨을 더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 헤드라인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하다.”
노벨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음의 상인’이라 부르는 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전쟁과 파괴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치명적인 무기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돈을 번 셈이 되었습니다.
이 일 후 노벨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자신이 모은 전 재산으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한 각 분야의 과학자들을 시상하는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노벨을 떠올릴 때 그 누구도 그를 전쟁 상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노벨상은 개인과 나라가 서로 받고자 원하는 더없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망 오보 기사가 나간 8년 후인 1896년 노벨은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때 사망기사의 제목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살다간 믿음의 사람 노벨 사망하다”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인생은 더욱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온 세상이 가는 길로 자기도 가야하는 것을 깨닫고 준비를 합니다. 여호수아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말씀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평생에 지켜왔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의 좌우명이 되었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형통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 마지막 유언도 역시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23장의 전체 고별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승리하고 복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패배하고 이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24장에서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하고 계약을 맺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사실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승리한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가 노년을 힘 있게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평생을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충성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충성된 삶을 산 사람은 후회하지 않고 노년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죽을 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확실하게 간증합니다. 14절입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할렐루야!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자기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에 실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은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일당 천의 용사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모세는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하게 하였다고 신명기 32장에서 증언했습니다(신32:30).
여러분, 그렇다면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가 지나간 옛날 말씀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이라는 단어입니다. 8절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9절도 보십시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신명기에서는 한글개역 성경으로 “오늘”이라는 단어가 72회나 등장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세가 말씀을 전하던 그 오늘이지만, 이 오늘은 말씀을 읽는 자가 사는 오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여전히 살았고 운동력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4:12).
오늘날도 여호수아처럼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을 이기고도 남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를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 한 분 있는데, 이 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김교신이란 분입니다. 이 분은 처음으로 ‘성서 조선’이란 말을 만들어 냈던 분입니다.『성서조선』이란 잡지를 일일이 제작해서 배달까지 했습니다. 김교신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성서 위에 놓으려 했습니다.
“우리는 다소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조선에 줄 바 가장 귀한 선물은 신기하지도 않은 구약성서, 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다.”
김교신 선생은 민족의 희망은 오직 성서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성서조선』이란 잡지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고의 선물은 ‘성서’ 1권뿐이니 양자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성서조선』은 1942년에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은 연못 속의 개구리를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는 글을 올렸다가 일제에 의해서 폐간되고 맙니다. 김교신 선생은 이 사건으로 1년 옥살이를 한 후 흥남질소 비료 공장 사감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지냅니다. 당시 전염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선생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보다 그들에게 옮은 장질부사로 1945년 별세하게 됩니다.
김교신 선생처럼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민족을 일깨우고 복음을 전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이만큼 복음화 되고 또한 근대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말씀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하나님 말씀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신자본주의의 무자비한 경제 논리만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직 효율성, 오직 경제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의 위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경제와 물질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몰라도 신앙인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질 중심의 사고는 오늘 여호수아가 비판하고 있는 가나안 우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 신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으로 바알 신입니다. 바알 신은 비와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농사의 신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여름철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든 식물들이 메마르고 죽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서 농사가 시작됩니다. 바알은 바로 이 농사의 신으로 여름철에는 죽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서 다시 살아나는 신입니다. 비가 올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바알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풍요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 바알 우상을 섬기면 농사가 잘되고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우상입니다.
사실 우상의 본질은 우상을 매개로 한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이 구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물질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여호와와 친근히 하라는 말로 권면합니다. 8절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그리하면 9,10절과 같은 승리가 주어집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할렐루야!!
하지만, 그 반대의 길, 가나안 족속을 친근히 하며 그 우상을 섬기는 길로 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1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그에 대한 대가는 13절입니다.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여러분, 진정한 평화와 안식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그 중심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세상과 너무 친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가까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 명이 천명을 당하는 힘 있는 인생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셔요.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의지함으로 일당천의 힘 있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힘있는 인생' 이란 설교의 말씀 고맙습니다 우리 회원님들 은혜스런 말씀 차분히 읽어보십시오~
네! 은혜스런 말씀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살기가 힘듭니다. 천을 이기고도 남을 힘있는 삶이 될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마음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이들어 늙어간다는것을 서글프게만 생각되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구나 철이들고 특히 신앙의 철이 들다고 생각하니 아직 부족하기만 한 내 신앙이 희망에 빛이 보여서 좋습니다. 좋은말씀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