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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亮淵 이양연 1771(영조 47)~1853(철종 4).조선 후기의 문인.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자는 진숙(晉叔), 호는 임연(臨淵). 아버지는 정언 의존(義存)이다. 1830년(순조 30) 음보(蔭補)로 선공감첨정에 오른 뒤 도사?호조참판을 거쳐 1852년(철종 3) 동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시에 뛰어났는데 시풍이 호매격렬(豪邁激烈)했다.
민요시 〈촌부 村婦〉〈전가 田歌〉〈해계고 蟹鷄苦〉 등이 대표적이다.
저서로 〈석담작해 石談酌海〉〈가례비요 家禮備要〉〈상제집홀 喪祭輯笏〉이 있다.
村 婦 시골마을 아낙네
君家遠還好(군가원환호) 자네 친정은 멀어서 오히려 좋겠네
未歸猶有說(미귀유유설) 집에 가지 못해도 할 말이 있으니
而我嫁同鄕(이아가동향) 나는 한동네로 시집 와서도
慈母三年別(자모삼년별) 어머니를 3년이나 못 뵈었다네
自輓(자만) 내가 죽어서
一生愁中過(일생수중과) 한 평생 시름 속에 살아오느라
明月看不足(명월간부족) 밝은 달을 보아도 만족하지 못했소
萬年長相對(만년장상대) 이제부턴 만년토록 마주 볼테니
此行未爲惡(차행미위오) 황천 가는 이 길도 싫지 않다네
躱悲(타비) 슬픔을 참고
入門還出門(입문환출문) 문으로 들어가려다 도리어 나와서
擧頭忙轉矚(거두망전촉) 고개 들어 황망히 두리번거리네
南岸山杏花(남안산행화) 남쪽 언덕엔 산살구꽃 가득하고
西洲鷺五六(서주로오륙) 서편 물가에는 대여섯 마리 해오라비가 보이네
(躱 피할, 몸 타, 矚 볼 촉)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몇 달 상관으로 떠나 보낸 가장의 아픔이 은근하면서도 둔중하게 다가온다.
제목에서 보듯, 슬픔을 표나게 내세우는 대신 ‘딴청’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슬픔과 아픔을 자극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節食牌銘 절식패명(절식위한 경계의 말을 적은 팻말)
適喫則安(적끽즉안) 적당히 먹으면 편안하고
過喫則否(과끽즉부) 지나치게 먹으면 편치 않다
儼爾天君(엄이천군) 의젓한 너 천군이여
無爲口誘(무위구유)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客夢 나그네의 꿈
鄕路千里長(향로천리장) 고향 길 천리나 길고
秋夜長於路(추야장어로) 가을밤은 길보다 더 길구나
家山十往來(가산십왕래) 고향 산을 열 번이나 오갔어도
簷鷄猶未呼(첨계유미호) 횃대의 닭은 아직도 울지 않네
(簷 처마 첨)
村家 시골집에서
抱兒兒莫啼(포아아막제) 아가야 아가야 울지 말아라
杏花開籬側(행화개리측) 살구꽃이 울타리 곁에 피었구나
花落應結子(화락응결자) 꽃이 떨어져 열매를 맺으면
吾與爾共食(오여이공식) 아가야 너하고 함께 따 먹으리라
村夕 촌락의 저녁
秋日在林稍(추일재림초) 가을 해 나무 끝에 떠있고
淸陰落溪水(청음낙계수) 맑은 그늘 개울물에 떨어진다
山屋兒呱呱(산옥아고고) 산집의 아이 엉엉 울고
山婦婑未已(산부유미이) 산촌 아낙은 아직 방아를 찧는다
(婑 아리따울 유)
山亭 산속 정자
山亭白日閒(산정백일한) 산속 정자에 낮이 고요한데
山鳥啼兩兩(산조제양양) 산새는 짝지어 울고 있어라?
柳絮飛將下(유서비장하) 버들개지 날아 떨어지려다
輕風吹復上(경풍취부상) 미풍에 불리어 다시 올라간다
(絮 헌풀, 버들개지, 헌솜 서)
老婦夜中績 한밤중의 길쌈
老婦夜中績(노부야중적) 늙은 아내 한 밤중에 길쌈하다가
先聞山雨時(선문산우시) 산 비 막 내리는 소리 들었네
庭麥吾且收(정맥오차수) 뜨락 보릴랑은 내 거둘 테니
家翁不須起(가옹불수기) 당신은 일어날 필요 없어요
白鷺 백로-1
蓑衣混草色(사의혼초색) 도롱이 의색이 풀빛과 같아
白鷺下溪止(백로하계지) 백로가 냇가에 앉았네
或恐驚飛去(혹공경비거) 혹여 놀라 날아 갈까 봐
欲起還不起(욕기환불기) 일어나려다 다시 그대로 앉아버렸네
白鷺 백로-2
白鷺宜白沙(백로의백사) 백로는 백사장서 놀아야 하니
莫向春草碧(막향춘초벽) 봄풀 푸른 곳엔 가지 말아라
不須自分明(불수자분명) 모름지기 스스로 분명하지 않으면
易爲人所識(역위인소식) 남들이 알아채기 쉽게 된단다
깃털 빛깔이 흰 백로는 흰 모래사장에서 놀아야 제격이다.
그런데 자꾸 봄풀 푸른 속으로 날아드니,
그 흰 빛깔이 초록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백로야! 여긴 네가 놀 데가 아니니 백사장에 가서 놀아라.
네가 네 몸가짐을 옳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 있는 곳을 금방 알아챌 게 아니냐!
秋草 가을 풀
秋草莫怨霜(추초막원상) 가을풀이여, 서리를 원망말라
秋殺亦生道(추살역생도) 가을의 죽음은 새로 사는 길이라
却從地上蘇(각종지상소) 도리어 땅에서 소생할 것이라
人生不如草(인생불여초) 인생이란 풀만도 못한 것인가
秋花 가을 꽃
霜林餘衰草(상림여쇠초) 서리 내린 숲에 시든 풀 남아
草花紅半瘁(초화홍반췌) 화초에 꽃들은 반이나 시들었다
病蝶力耐風(병접력내풍) 병든 나비 억지로 바람 참으며
搖搖貼不離(요요첩불리) 한들거리며 붙어서 떠나지 못한다
迷藏鳥 술래잡기 새
遠遠迷藏鳥(원원미장조) 저 먼 곳의 술래잡기 새
迷藏岑樾春(미장잠월춘) 산 그늘 봄날에 술래잡기 하누나
藏身鳴自衒(장신명자현) 몸 감추고 스스로를 뽐내며 우니
愧爾隱非眞(괴이은비진) 네 숨음이 참 아님 부끄러워라
(樾 나무이름 월)
半月 반월
玉鏡磨來掛碧空(옥경마래괘벽공) 옥 거울 갈다듬어 벽공에 걸었더니
明光正合照粧紅(명광정합조장홍) 밝은 빛 화장할 때 비춰보기 딱 알맞네
宓妃織女爭相取(복비직녀쟁상취) 복비와 직녀가 서로 갖겠다 다투다가
半在雲間半水中(반재운간반수중) 반쪽은 구름 새에 반쪽은 물 속에
(宓 엎드릴, 편안할, 성 복)
절식패명(節食牌銘
조선조 영조때에 살았던 저명한 실학자 성호(星湖)이익(李瀷)의 저서에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있는 글입니다.
절식의 의미는 먹을 거리가 있는데도 조절하는데 있습니다.
양생법(養生法)에서도 늘 먹는 것을 경계했었다. 준생팔전(遵生八箋)에서도 "도에 넘치게
굶주리거나 포식하면 비장(脾藏)을 상하게 한다"고 하여 도를 넘는 과식이나 절식(絶食)을
경계했다.
또 "날마다 경계 할것은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것(一日之忌 暮無飽食)"이라 하여 저녁에 포식하는 것을 특히 금기시 했다. 준생팔전은 도가의 양생법을 정리한 책으로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혓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알고있는 상식에 부합해 다이어트의 방법으로 새겨들을 방법이다.
옛 사람이라고 음식을 앞에 두고 참기 쉬울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절식을 다짐하는 글이 간간이 보인다.
송대의 중국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글에 "음식을 줄여 먹자(節飮食說)"을 보면
나는 오늘부터 하루 동안 먹고 마시는 양을 술 한 잔 고기 한 조각으로 그칠 것이다.
귀한 손님이 있어 상을 더 차려야 한다 해도 그보다 세배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덜할 수는 있어도 더 할 수는 없다.
나를 초청한 사람이 있을 때에는 미리 이 다짐을 알려준다.
주인이 따르지 않고 더 권하더라도 그 이상은 먹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첫째 분수에 맞으니 복이 길어질 것이요,
둘째 위가 넉넉하니 기운이 길러질 것이요,
셋쩨 비용이 절약되니 재산이 늘어날 것이다.
(원풍6년8월27에 쓴다)
소동파 같은 멋쟁이가 사소한 문제를 두고 좀스럽게 글을 지었다고 생각하면 ,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그는 술 한 잔, 고기 한 조각으로 식사량을 제한해 분수를 지키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음식 비를 줄이는 세 가지 효과를 노렸다.
그의 네가지 조심할 일(書四戒)에 또한
수레나 가마를 타는 것은 다리가 약해질 조짐이고
골방이나 다락방은 감기 걸리기 십상이고
어여뿐 여인은 건강을 해치는 도끼이고
맛난 음식은 창자를 썩게 하는 독약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창자를 썩게 한다는 말.....
천 년 전 한 이국인의 생활 모토가 현재 우리의 일상에 적용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으니 말이다.
조선의 선비 성호는 자신을 "천지간의 좀벌레 한 마리"라 표현했다 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생각을 가진 성호는 양심적인 선비였다.
그런 그에게 최선의 경륜과 양책(良策)은 다른 아닌 절식이였다.
안 먹을 수는 없지만 줄여 먹을 수는 있기에, 그는 한 그릇에서 한 홉의 쌀을 덜어내는
절약을 실천했다.
조선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는 점, 더구나 일하지 않는 부자들이 너무 많이
먹는다는 비판에서 음식물 하나까지도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작은 노력을 통해
큰 효과를 노린 사회사상가인 성호의 식견을 보게된다.
한 그릇에서 한 숟가락의 쌀을 덜어내는 절미 운동을 벌인다면 한 고을에서도 일년에
이천 말의 쌀이 걷힌다.
이렇게 모인 쌀을 저축하고 빈민에게 나누어주기를 바랐다.
성호이외에도 많은 선비들이 건강과 섭생의 문제로 절식을 권유했는데,
순조 때에 저명한 시인인 이양연(李亮淵)이 지은 절식패명 즉 "절식하기 위한 경계의
말을 적은 팻말"은 열여섯 자로 짤막한 잠언이다.
적당이 먹으면 편안하고 適喫則安 적끽칙안
지나치게 먹으면 편치 않다 過喫則否 과끽칙부
의젓한 너 천군이여 儼爾天君 엄이천군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無爲口誘 무위구유
천군은 몸의 주재자인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젊은이들이 밥을 먹을 때마다 한 사람이 이 팻말을 두두리고, 거기 적힌 글을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좌중의 사람들에게 과식하지 말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이 잠언은 다이어트하는 사람을 위한 표어가 아닌가 한다.
절식해야 하는 이유를 차분한 논조로 설파한 성호의 논리적인 글보다 오히려 피부에
와 닿는 글이라
당장 식탁 옆에 붙여두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요즘같이 풍성한 음식에, 호화스런 부?에서 과연 이런 절식패명을 소리처 외쳐본다면
미친이 취급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夜 雪 밤눈
서산대사
踏雪夜中去 (답설야중거) 눈을 밟으며 밤길을 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이 시조는 서산대사 휴정의 한시입니다. 근래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문신인
이양연(李亮淵)의 시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1948년 남북협상 길에
나선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때, 이 시를 읊으며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백범은 이 구절을 즐겨 써서, 지금도 그 필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兒莫啼 아막제
抱兒兒莫啼 포아아막제 아가야 아가야 울지 말아라
杏花開籬側 행화개리측 살구꽃이 울타리 곁에 피었구나
花落應結子 화락응결자 꽃이 떨어져 열매를 맺으면
吾與爾共食 오여이공식 아가야 너하고 함께 따 먹으리라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다.
풋보리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들녘에 보리알이 여물려면
아직 멀었다.
집집마다 양식이 떨어져
쌀독이 비고 먹을 것이 없다.
해마다 봄이면
넘어야 하는 보릿고개다.
아이들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허옇게 피었다.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다
부황기로 누렇게 붓기까지 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참꽃(진달레)도 따먹고
보리깜부기도 핥아 먹는다.
어른들이야 배고픔을 참지만
철없는 아이들은 울기만 한다.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은 찢어진다.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어 본다.
아가야 울지 말아라,
지금 살구꽃이 울타리 곁에 피어 있다.
저 살구꽃이 곧 떨어지게 되면
그 떨어진 꽃 가지에
바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그 때 익은 살구를
나와 네가 함께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겠느냐.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살구라는 말을 듣고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배고픔을 달랬을
그 때의 정황을 생각하면 차라리
눈물이 앞을 가린다.
봄날은 그렇게,
오고가고 또 오고갔다.
술래잡기 새
조선 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의 <미장조(迷藏鳥)>란 작품이다.
`미장迷藏`은 우리말로 하면 술래잡기라는 말이다.
미장조 迷藏鳥
遠遠迷藏鳥 원원미장조 저 먼 곳의 술래잡기 새
迷藏岑樾春 미장잠월춘 산 그늘 봄날에 술래잡기 하누나
藏身鳴自衒 장신명자현 몸 감추고 스스로를 뽐내며 우니
愧爾隱非眞 괴이은비진 네 숨음이 참 아님 부끄러워라.
시에 붙은 주석에는 "우리나라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이 뻐꾸기 소리를 내므로 뻐꾸기를 이름하여 술래잡기새라고 한다"고 써놓았다. 아이들이 술래잡기 놀이를 할 때, 술래가 저 숨은 곳을 못찾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으면 숨은 녀석은 `뻐꾹 뻐꾹` 하면서 공연히 제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그래서 술래를 저 있는 쪽으로 유인하자는 속셈이다.
그렇다면 3,4구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 조선 중기 권응인의 <송계만록>이란 책에 보면 뻐꾸기 은사(隱士)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들이 강호자연이 좋다고 강호에 숨어 살면서도 현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뻐꾹 뻐꾹 하며 자기 존재를 알리는 뻐꾸기처럼 나 여기 숨어 있다며 세상을 향해 저 있는 곳을 알리려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 뻐꾸기 은사들은 숨어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숨어사는 뜻높은 선비라는 소문을 얻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는 풍자다.
다시 말해 선비들이 입으로는 귀거래를 되뇌이고 은거를 예찬하면서도 속 마음은 티끌 세상에 있어, 자꾸만 세상을 향해 제 존재를 드러내려 하는 꼴을 두고 권응인은 눈꼴이 시어 `뻐꾸기 은사`란 말로 이들을 조롱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술래잡기 놀이를 할 때 뻐꾹 뻐꾹 하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뻐꾸기는 영문도 모르고 술래잡기새란 별명을 얻은 셈이다. 제 몸을 봄 숲 속에 감추어 두고 자꾸 나 여기 있다고 뻐꾹 뻐꾹 하고 우니, 너의 속셈도 아마 숨는데 있지 않고 나 여기 있으니 찾아오라고 제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는 모양이라고 삐죽거린 것이다.
이런 것은 뻐꾸기의 생태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한편으로 당시 지식인의 행태와 관련되는 재미있는 생각을 읽게 해 준다. 새가 늘 인간의 가까이에 있었던 까닭이다.
晩詩
“문을 들어서려다 다시 나와서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 거리네
남쪽 언덕엔 산 살구꽃이 피었고
서쪽 물가엔 해오라비 대여섯.”
팔십 평생을 살면서 처와 3남1녀의 자식을 모두 생전에 잃은 이양연(1771~1856)이
둘째 아들을 떠나보내고 쓴 이 시엔 ‘슬픔’이나 ‘눈물’ ‘아픔’ 등의 시어는 없읍니다.
대신 자신의 슬픔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 슬픔을 피하기 위해 딴전을 피우며
애써 눈물을 삼키는 심정을 그렸습니다.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추사가 유배지에서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곱던 모습 희미하게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보니 등불만이 외롭게 타고 있어라
가을비가 내 잠을 깨울 줄 알았더라면
창 앞에다 오동나무 심지도 않았을텐데"
(이서우가 꿈 속에서 아내를 만나고).
반월 半月
옥 거울 갈다듬어 벽공에 걸었더니
밝은 빛 화장할 때 비춰보기 딱 알맞네.
복비와 직녀가 서로 갖겠다 다투다가
반쪽은 구름 새에 반쪽은 물 속에.
玉鏡磨來掛碧空 明光正合照粧紅
옥경마래괘벽공 명광정합조장홍
宓妃織女爭相取 半在雲間半水中
복비직녀쟁상취 반재운간반수중
宓 성복, 편안하다, 몰래 , 비밀
조선 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의 〈반월(半月)〉이다. 옥을 갈고 다듬어 둥근 거울로 만들었다. 푸른 하늘에 걸어 놓았다. 환한 빛이 쏟아져서 화장할 때 내 얼굴을 비춰 보기에 꼭 알맞다. 저 예쁜 거울을 서로 차지하려고 복비(宓妃)와 직녀가 한판 큰 다툼을 벌였던 모양이다. 복비는 태고적의 황제 복희씨의 따님이다.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낙신(洛神)이 되었다.
낙수의 여신인 복비와 하늘에 사는 직녀가 서로 제 화장 거울로 삼겠다고 다투다 둥근 거울은 그만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그래서 반쪽은 여태도 하늘 위에 걸려 있고, 나머지 반쪽은 물 속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물 속에서는 복비가 화장이 한창이고, 구름 사이에선 직녀가 단장이 열심이다. 하늘 위 반달이 물위에 비친 것을 시인은 둘이 사이 좋게 나눠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픔
入門還出門 문을 들어서려다 되려 나와서
입문환출문
擧頭忙轉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대네.
거두망정
南岸山杏花 남쪽 언덕배기엔 산 살구 꽃이
남안산행화
西洲鷺五六 서편 물가엔 대여섯 마리 해오라비가
서주로오륙
제목의 뜻은 `슬픔을 억누르려`이다.
늙마에 아내를 잃고,
같은 해에 둘째 아들마저 먼저 보낸 뒤 지었다.
바깥 일 보고 여느 때처럼 문을 들어서는데,
맞아주는 이 없는 빈 마당에 기가 턱 막힌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그냥 되돌아 나왔다.
공연히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이 두리번거린다.
아! 살구꽃은 지난해 봄처럼 피었고,
물가에는 해오라비 가족이 오순도순 한가로운데,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엔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