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절두산 탐방 4 -《아리랑의 노래》
구대열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보고 절두산 교회에 올랐습니다.
‘올랐다’고 하기에는 너무 평평한 길이군요.
그러나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터키-그리스 기행 중 최근에 쓰고 있는 순례와 수도원과도
뭔가 통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일생의 독서계획’이니 ‘평생 읽어야 할 책 100권’ 등을 통해 명저들을 소개받지요.
그런데 서양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부터 괴테나, 동양의 <논어>, <맹자>, <사기> 등 명저가 아니라
우연히 책방에서 ‘이게 뭔가?’ 하면서 산 책으로부터 감명과 감흥을 받은 책이 있나요?
나에게 그런 책이 한 권 있습니다.
Nym Wales and Kim San의 <Song of Ariran>입니다.
‘중국 혁명에서 한 한국 공산주의자(A Korean Communist in Chinese Revolution)’이란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출판 연도는 1941년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건 1972년도 판인 것 같습니다.
1973년 말이나 1974년 초 런던의 학교 옆 헌책방에서 산 책입니다.
Nym Wales가 김산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둘이 공동 저자로 나옵니다.
Nym Wales는 모택동 전기인 <Red Star over China>를 쓴 Edgar Snow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미국 기자이자 작가입니다. 원명은 Helen Foster이구요.
Nym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춤, 노래, 문예 등에 뛰어난 숲의 요정 님프(Nymph)이며
Wales는 영국 웨일즈 혈통에서 따온 것으로 Edgar Snow가 지어주었다는 것 같은 데
워낙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확인할 수 없군요.
그런데 ‘아리랑’이 Arirang이 아니라 Ariran으로 되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 책이 발간된 1941년 Nym Wales가 김산으로부터 들을 발음 그대로 옮긴 것이겠죠.
양자강 이남 강서성 서금(瑞金)의 근거지에 대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의 소공전(掃共戰)에서
모택동이 간신히 벗어나 1만 리 장정을 끝내고 섬서성 연안에 도착한 것이 1935년 10월.
10만이 출발했으나 도착했을 때는 2만여 명.
Helen Foster는 1937년 연안에서 미래의 남편 Edgar를 만났고 공산혁명에 참여한 한국인 김산을
보게 되었던 겁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1905-1938)입니다.
연안 근거지가 워낙 어수선하던 때라 경비를 맡은 공산당 공안 담당자인 강생에 의해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는데 45년이 지난 1983년 중공당이 복원시키지요.
Nym Wales는 김산과 짧은 만남과 그의 이야기에 끌려
‘아리란의 노래’라는 김산의 전기를 만들었지요. 책 첫 장에 내가 해륙풍(海陸風)이라고 적어 둔 걸 보면
김산이 중국 공산주의 운동 초기인 1927-28년 남부 광동성 연안 해풍, 육풍, 줄여서 해륙풍까지 내려가
공산 봉기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책이 나온 1941년이라면 국민당의 계속된 토벌에 맞서면서
모택동이 당과 군을 정비하여 소위 ‘연안정신’을 창조하며 공산당 제1인자로
장기집권을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아리랑의 노래> 책 표지
책에 관한 소개는 이 정도로 마칩니다.
왜 한 한국 혁명가의 일대기를 ‘아리랑의 노래’라고 했을까요?
김산은 Nym Wales에게 아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의 서문에 ‘아리랑’ 가사와 김산의 ‘해석’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분은 우리말로 씁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of man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Ariran is t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후렴
Oh, twelve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sand li
of mountains and rivers
후렴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 River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sand li
are also lost
후렴
고을마다 그들만의 아리랑이 있다고 선배 한 분이 말합니다.
김산의 아리랑도 그중의 하나이겠지요. 잘 알려진 것으로 진도, 밀양, 정선아리랑이 있지요.
경복궁을 지을 때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일꾼들은 신세타령과 노역의 설움을
자신들 마을의 아리랑 가사와 곡조에 맞추어 불렀겠지요.
몇 년 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선정위원인 임돈희 (동국대교수, 고고인류학과) 동문이
이들 아리랑을 취합하여 유네스코에 등록한다고 노력하셨는데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 이제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네’,
그리고 ‘아리랑은 설움에 찬 고개/ 아리랑 가는 길은 돌아오지 못한다네.’는 최고의 비극성을 보여줍니다.
반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나
혹은 2절에 나오는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는
김산의 노래에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아/ 인간들이 이생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던가?’라고 되어 있네요.
김산의 4절 ‘아리랑은 설움에 찬 고개/ 아리랑 가는 길은 돌아오지 못한다네.’는
오늘날 희망의 찬가로 바뀌어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로 바뀌었군요.
아리랑 노래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의 근본을 잃게 되었구요.
김산은 조국의 광복과 평등사회를 꿈꾸고 중국으로 망명한 혁명가입니다.
조선 정부에 대한 증오가 그의 글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아리랑 고개 꼭대기에 거대한 노송이 한 그루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곳이 수백 년간 정치범을 비롯한 사형수들을 처형한 장소였다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이촌동 새남터인가? 절두산은 프랑스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조선이 병인박해로 대응하던 때 사형장이 되었으니 그 뒤 이야기일 것이구요.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의 죄수들이 이 나무에 매달려 처형되고
그 시신은 옆에 있는 절벽에 매달아 두었다고 합니다. 한 젊은이가 감방에 있을 때 이 노래를 지어
열두 고개를 넘어 처형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불렀다고 하네요.
김산에게 있어 아리랑은 죽음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리랑이 죽음의 노래라는 걸 거부하지요.
‘우리는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를 비극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D.H.Lawrence의 절규같이 들립니다. 김산은 아리랑이 말하는 죽음은 패배가 아니며
수많은 죽음에서 승리가 태어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신을 승화시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통하는군요.
‘이천만 동포여’와 ‘압록강을 건넌다.’라는 마지막 두 구절은
1910년 이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하면서 만주나 중국 본토
그리고 일본에도 수많은 다른 가사의 아리랑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책에 감명받은 것은 김산이 중국인으로 귀화하여 공산혁명에 참여하고
장정에도 나섰다는 그의 혁명 이력에 끌려서가 아닙니다.
그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한국인들은 많고 또 거의 잊혔습니다.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라느니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라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러
너무나 익숙했던 ‘아리랑’에 ‘아, 우리가 모르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라는 새로운 사연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패한 조선과 망국의 치욕에 대한 김산의 울분에도 공감했지요.
그러나 그가 불러준 아리랑은 해일 같이 나를 덮쳐버렸습니다.
사육신이나 홍경래 농민군, 동학군의 전봉준 등 수많은 농민 반란군,
그리고 순교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사형장소는 달랐겠지요.
신유박해(1801)을 비롯하여,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등 굵직한 기독교 박해만 4번 있었죠.
서울로 들어오는 4 대문 앞에 십자가를 던져두고 이것을 밟고 지나면 비기독교인이고,
피해 가면 기독교인으로 처형되었다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리랑의 노래’와 연상되었다면 나만의 착각일까요?
절두산 성지 성당으로 오르기 전 널찍한 광장이 있고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멀리서 방문객을 맞더군요. 김대건은 1821년생으로 1845년에 잡혀 다음 해 병오박해 때
새남터에서 25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순교합니다.
그의 유해를 복원한 두상은 강골인 선비의 기상이 보입니다.
절두산 광장 성당 김대건 신부 동상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도 인상적이군요.
위에는 순교한 분의 머리 셋이 따로 떨어져 있고 아래에는 손이 밧줄에 묶여있네요.
머리카락이 잡혀 당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세 얼굴이 모두 멍하니 허공을 올려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처연합니다. 천국을 기원하는 것인가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순교의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무엇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입구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성당 앞 광장에는 상투를 풀어 십자가 윗부분에 못으로 박은 밧줄에 매달고
손은 십자가에 묶인 정하상((丁夏祥) 바오르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그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丁若鍾)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분이며
정약용의 형이니 정하상은 그의 조카가 되군요.
위 조각상은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되기 직전의 모습이라 합니다.
그런데 조각상이 너무 단아하고 아름답군요. 안내원이 처형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 처참한 상황을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네요. 정하상과 아버지는 배교하면, 즉 기독교를 버리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벼슬을 주겠다는 회유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세속인인 나로서는 이들의 순교나 혁명에 뛰어든 김산이 일면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의 소리에 이끌렸겠지만 지긋지긋한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민속신앙 미륵 사상이 내면에서 꿈틀거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2023.7.22.)
성당 앞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 바오르 상
<이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박사(런던정치경제大/LSE)/한국일보 사회~외신부 기자(견습22기)역임/
近著: "Korea 1905~1945"(From Japanese Colonialism To Liberation And Independence),
"삼국통일의 정치학", "제국주의와 언론"/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