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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
1 |
1950년 ~1953년 |
6·25 전쟁 |
6·25전쟁은 우리역사에 있어 가장 가슴아픈 역사이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우리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 고아,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는 6·25전쟁을 통헤 오늘날 남북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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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45년 |
8·15광복 |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이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우리의 소망과는 다르게 한반도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6·25 전쟁을 격었다. 왜 광복이후에 우리는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하였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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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960 |
4·19혁명 |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부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다. 4·19 혁명은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발생하였으며, 결국 이승만 독재정부가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안타깝게도 4·19혁명이 바로 민주주의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나, 419혁명은 우리민족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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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987 | 6월 민주항쟁 |
6월 민주항쟁은 5·18민주화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 권력형 비리와 부패 사건, 언론통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경 탄압 등을 배경으로 전주환 정권에 저항하며 일어난 거국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은 4·19혁명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반민주적 헌번을 개정하여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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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2000 |
6·15남북공동선언 |
2000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련은 베를린 선언을 통하여 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화복지원 등을 골자로 남북한 대화 추진 들을 밝혔고, 같은 해 6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게 되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남북관게의 진일보한 발전이라고 평가하는 이뉴는 첫째, 대화와 협력·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북문제를 미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이 아닌 당사자끼리 해결하자는 의지를 확실히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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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표 범위 : 민주주의의 성장과 민족의 웅비
2. 발표 주제 : 예고된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6.25
3. 관련 연표
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945년 |
8.15 광복, 38도선 분할 (8월.25일), 조선 인민공화국 성립 (9월 6일) |
얄타회담 (2월 4일~11일), 포츠담 선언 (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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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대한민국정부 수립 (8월 15일) |
제1차 이랍‧이스라엘 전쟁 발발, 세계 인권 선언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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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6.25 전쟁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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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
4.19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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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
5.16 군사정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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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성립 (1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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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 (8월 20일~1992년), 10월 유신 (10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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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
6.23 평화 통일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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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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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6월 민주 항쟁,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 (1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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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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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10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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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9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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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김대중 정부 수립 (2월 25일~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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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6.15 남북 공동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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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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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세계 무역 센터 테러 (9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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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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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크 전쟁 발발 (3월 20일) |
※ 다음 발표
가. 발표자 : 송지은
나. 범 위 : 지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다. 제 목 : 지배세력으로 알아보는 한국의 변화
라. 주요 내용(100字이상)
- 지배계층의 성향에 따른 한국사의 변화와 민중과 지배계층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변화 함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이 좀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한정된 귀족정치에서 조선시대의 관료정치로 기득권의 세력이 더 늘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지배층의 세력 변화와 역사 속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지배계층의 성향이 달라짐에 따라 민중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댓글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이념의 차이가 결국 6.25동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며 서로 다르다는 점이 극복되지 않고 심화 되면 전쟁과도 같은 극한의 대립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도 타인과 나의 서로 다른 점을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다원화되어가는 미래는 더더욱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에게 타인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길러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 분열은 이념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이해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돌이키기 어려운, '분단'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이념이 외세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립하지 않고, '복지'와 '자유' 등의 긍정적인 개념들을 인정하고 절충했다면 전쟁이 아닌 타협을 이뤄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념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받아들인다면 6·25전쟁의 학도병과 같은 안타까운 희생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수용 또한 이념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면 안 되며, 시비를 정확히 따지고 연구하여 적용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6.25동란은 한반도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의 상처가 아직 남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모든 이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념이나 사상의 자유도 생겨서, 여러 이념이 수용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념의 대립이 발생하고, 무장투쟁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념을 인정받기 위해 무력까지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념은 삶의 방법과 질 향상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나, 이것이 전쟁까지 이어진다면 그 근본 목적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폭력을 동반하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무력을 통한 행동은 절대 인류 보편적 가치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무력이 남기는 것은 오직 '상처'뿐입니다.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황폐해진 국가, 잃어버린 가족,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형제 등이었습니다. 혹자는 폭력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6.25동란은 한 민족이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전쟁을 하고 갈라서게 된 전쟁입니다. 어떤 일이든 폭력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념대립으로 인해 서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고 미움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간이 꽤 흐른 현재의 국제적인 상황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남북분단의 이유로 타국의 무시를 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방법인 전쟁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확한 근거를 들어 서로의 이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상대의 이념에 대해 받아들일 수도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6.25 동란은 남과 북의 이념 대립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서로에 대하여 흑백논리만을 앞세워 우리가 아닌 너희는 나쁜것, 좋지않은것 등으로 규정지어 버리고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이 서로 타협을 할 줄 모르고, 서로의 이념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하지 않고 맹목적인 신념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6.25동란은 이념차이에서 시작된 한민족 최대의 비극입니다. 애초에 세계를 상대로 화합하며 살아도 부족한 상황에, 동족끼리 무자비하게 짓밟고 헐뜯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점에서 최대의 비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분쟁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분쟁이 없도록 진정한 화합의 자세를 이끌어 내야 합니다.
6.25동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전쟁보다도 규모가 컸고 치열했던 전쟁이었습니다. 그만큼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500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가 있었고, 재산 손실도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움직였고, 결집했습니다. 6.25동란이 우리나라가 성큼 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엄청난 개인적인 희생을 딛고 그 고난을 이겨내어 오늘날의 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힘든 시련도, 이미 닥친 것이라면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저 좌절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6·25동란은 민족들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많은 고정관념과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사람들은 나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민족들끼리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화합과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현재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6·25전쟁의 상흔(傷痕)은 우리 사회에서 없어지지 현재진행형의 역사입니다. 6·25 동란은 이산가족, 통일문제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전쟁은 미·소 이념 대립과 그에 따른 냉전체제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민중은 강대국들의 이념인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개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쉽게 선동되었고, 그 결과 되돌릴 수 없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이를 통해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남한은 정세를 살피지 못하고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6.25동란에 큰 손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선 군대를 조직적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한은 단지 외국에 의존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로 국방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남한이 주위를 살피고 철저한 준비를 했었다면 이러한 비극적인 참사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