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짜타 못의 치유 -
☆ 2014년 가해 4월1일 (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수원] 타종교를 통해 우리 믿음을 성찰할 수 있어야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에제 47, 1 - 9. 12
† 복음 : 요한 5, 1 - 16
★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주님의 집인 성전 오른쪽에서 솟아 흐르는 물을
본다. 그 물은 건널 수 없을 만큼 큰 강이 되었고, 바다로 흘러들어 바닷물이
되살아나게 한다(제1독서).
★ 벳자타라는 못 가장자리에는 그 못물이 출렁일 때 들어가면 치유된다는
믿음으로 많은 병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거기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
하나를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 이 치유의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물을 보았네.'일
것입니다. 이 물은 생명을 뜻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들도
치유와 생명의 물을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감지하는
분위기는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생명력이나 감동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이 출렁이면 치유의 힘을 갖는다고 믿고 그 순간을 노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하고 살벌합니다. 그들은 물속에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며 다른 이들을 밀쳐 내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대목을 가만히 묵상하노라면, 이렇게 자신만을 돌보는 곳에는 진정한
생명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치유는 현실이 아니라 소문일 따름이며,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구원의
물은 사실은 조갈을 느끼게 하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이러한 벳자타 연못의
광경은 수많은 행복의 소문 사이를 헤매는 가운데 자신의 생존에만 힘쓰며
이웃을 밀쳐 내는 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는 점을 보게 합니다.
그 못가에는 속절없이 다른 병자들에게 밀려나 겨우 자리만 지키는 한 병자가
있었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앓으며 치유의 요행을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가
이제 치유되어 일어나 걷습니다. 그는 허상이 아니라 정말로 구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영험하다는 출렁이는 물의 힘이 아닙니다. 그에게 다가오신
예수님께 간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남보다 빠르거나 강하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행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자이신 주님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이에게 구원과 치유의 꽃이 피어납니다. 구원은 업적이나 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선물이며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핑계없는 무덤 없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 5,1-16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대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언젠가 어느 잡지사의 기자로부터 원고청탁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솔직히
저와는 무관한 주제이기에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정중하게
거절했었지요. 그러자 그분께서는 제가 예의상 한 번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매일 글 쓰시니까 이 정도의 글은 누워 떡먹기잖아요.”
제 머릿속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운 글들이 나오는 줄
아시는가 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커다란 벽에 부딪혀서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분의 간곡한 부탁에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만 될
뿐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점점 초조해지면서 성당 안에서 묵상하는
시간이 길어졌지요. 하도 글이 써지지 않아서 포기할까도 생각했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인지 결국 글이
완성되어 제 시간에 보낼 수가 있었지요.
만약 그 당시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또 어렵다고 포기했다면 제 글이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묵상하니 그래도
만족스러운 글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막막함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누구도 이러한 체험에서 자유로운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냥 포기하고 드러눕는다면 나를 통해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내가 드리는 즉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제 묵상 글에도
썼듯이,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중심이 되려고만 하다 보니 기도의
응답이 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온갖 불평불만으로 주님을
대하고 동시에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이 과연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는 사람일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던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서른여덟 해 동안 병고를 견디며 벳자타 못을 지키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평하지 않고
언젠가는 벳자타 못이 출렁 거릴 때 첫 번째로 들어가 치유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기다렸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기다림에
비해 우리의 기다림은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주님께 청하면서,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그 시간들을 없애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교육을 받는다. 하나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교육이고,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 배우는 교육이다. 그리고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
(에드워드 기번).
호빙 효과(‘좋은생각’ 중에서)
토머스 호빙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낙제생이었다. 그는 퇴학을 면하려고
조각 수업을 듣기로 했다. 미술엔 자신 없지만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다.
첫 시간에 교수는 낯선 물건을 들고 와서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느냐고
물었다. 미술과 학생들은 상상력을 동원해 그럴듯한 대답을 했다. 자유를
상징하는 새나 조화를 의미한다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다. 호빙의 차레가 왔을
때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매끈해서 예술품이라기보다 꼭 기계 같습니다. 어떤 용도가 있어
보입니다.”
그의 대답에 교수가 칭찬했다.
“자네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군. 꾸밈없이 말하는 자세도 좋고...”
실제로 교수가 보여 준 물건은 산부인과에서 사용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미술과 학생들은 기계를 예술품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솔직한
대답으로 인정받은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전공을 미술로 바꿔 열심히 공부했고
예술 감정사로 성공했다.
교육 심리학에서는 호빙처럼 늦게나마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경우를 ‘호빙 효과’라고 한다. 인정해 주는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잡지에서 본 글입니다. 나의 말 한 마디가 다른 이의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말을 주로 하십니까? 힘을 빼는 말이 아닌, 힘을 주는 사랑의
말을 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47,1-9.12 요한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 5,1-16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생명의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 함은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있음이 평범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을 갈망함은 생명을 갈망함을 뜻합니다.
하느님 생명에 뿌리내려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편 구절이 그대로 인간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42,2-3).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63,2).
바로 이게 사람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저 역시 새벽마다 하느님이 목말라 저절로 눈 뜨게 되고 묵상했던 강론을
씀으로 갈증을 해소시키곤 합니다. 생명은 흐름입니다.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 되어, 생명의 강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사랑의
강(江)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제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셋째 연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가, 잘
쓰고 못 쓰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야 하고 강론도 끊임없이 써야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죽지 않고 '살기위하여'입니다.
끊어지면, 고인물이 되면 죽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는 천년만년 하느님 기다리는 정주의 산으로, 안으로는 천년만년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과연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으로 사시는지요.
웅덩이에 고인 죽은 물 같은 안주의 삶은 아닌지요.
진정 살아있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이요
끊임없이 맑게 샘솟는 우물같은 삶입니다.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새삼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흥미롭습니다. 1독서의 주제는 '생명의 강'이요, 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못'으로 모두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이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47,9.12).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은총을,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 역시 주님의 '생명의 강'이 되어 살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생명의 베짜타 못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진짜 생명의 베짜타 못이 었음은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들어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예수님은 38년 동안 앓는 이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진짜 생명의 베짜타 못인 예수님을 곁에 둔 병자의
하소연입니다.
"일어나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베짜타 못가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남으로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병자입니다.
이어 치유, 구원 받은 병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충고가 의미심장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꼭 죄의 결과가 병은 아니지만 은연중 죄와 병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죄가 많기에 갖가지 병들도 많은 오늘날의 현실이요, 죄의 용서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가 뒤따름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주님은 매일미사은총으로
우리 죄의 용서와 더불어 영육의 질병과 아픔을 치유해 주시고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당신의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당신의 희망이 옳다는 것을 전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당신의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2014년 가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요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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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엄마와 두 딸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사건과
같은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스마트 폰 속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대화는 단절되고 관계가 재미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타이르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진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이기적이 되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벳자타라는 못이 효험이 있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38년간 못에 들어갈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헤아려
보며, 별 다름 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작년 묵상과 별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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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 그 중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
안에서, 가장 선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가장 악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38년간 누워있는 상태로 누군가 자신을 벳자타라는 치유의 못에 집어
넣어주기를 기다렸다 합니다. 38년이라면, 당시 인간수명을 생각해봐도
대부분의 삶을 그렇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곳에 있던 아픈 이들과 그들의 가족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38년간 몸을 가누지 못해 누워있던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를 본
예수님의 마음이 오죽이나 안타깝고 서글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냥 지나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탄식도 하셨을 겁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 노랫말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꽃보다 아름답게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일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사람이건만,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이 가련한 이의 이야기는, 2천년 전, 어느 별난 곳에서
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어느 곳에서도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아픈
이야기입니다.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인간으로의
회복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저 감동이나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마음들이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던 그분의 삶이었고 유언이
아니었겠습니까?
사람이 꽃보다도 아름다울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끝까지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희망이 거짓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타종교를 통해 우리 믿음을 성찰할 수 있어야
2014년 가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복음 : 요한 5,1-16
< 타종교를 통해 우리 믿음을 성찰할 수 있어야 >
지난 봄, 우리 가족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물이 있고
풋대추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대추나무가 서 있는 그런 집으로 말입니다.
셋방을 전전하던 끝에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라서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 딸 때문에 언제나 주인아주머니의 잔소리를 귀에 달고
살아야 했던 엄마가 누구보다도 좋아했습니다. 이삿짐을 풀자마자 내게
주어진 일은 담장 가득한 낙서를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서툰 글씨, 어딘지 모를 주소, 약도....
나는 깊고 아득한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 낙서를 말끔히 지웠습니다.
“아, 다 지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비비고 나와 보니 내가
애써 지운 글씨들이 모두 되살아나 있었던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도깨비가 왔다 갔나? 아니면 달빛에 글씨가 살아나는
요술담장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 낙서를 다 지우고
엄마한테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깨끗하게 잘 지웠네... 우리 착한 딸.”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일어났습니다. 누군가 어제와 똑같은 낙서를 가득
해 놓은 것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나는 낙서를 지우면서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을 내 주리라 마음먹고
저녁 내내 망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두 소년의 그림자가
담장에 어른거렸습니다. 범인임이 분명했습니다.
“형!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이거 보고 이사 간 집 찾아올 거라고 그랬지?”
“물론이지, 아빠는 집배원이었으니까 금방 찾아오실 거야.”
형제는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가 이사 간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담장 가득
약도를 그리고 또 그렸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이후 낙서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집 담장엔 그 삐뚤빼뚤한 낙서가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 1, 지워지지 않는 낙서]
매번 지워지는 담장 위에 또 매번 자신들이 이사 간 집 약도를 그리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죽었더라도 그들 마음
안엔 여전히 살아계신 분인 것입니다. 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다시 자신들을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38년이나 자신의 병이 고쳐지기를 기원하며 매일 연못에 나와
있었던 병자는 38년을 지치지 않고 희망한 사람입니다. 38년이란 숫자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가만하면 평생 기다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38년 동안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이
병자는 언젠가는 꼭 자신의 몸이 고쳐지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 희망의
바탕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자신 바로 옆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신데도 천사가 연못 위로 내려오기만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세상에 왔는지조차 몰라서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모르지만 구원받기 위해 다른 종교를 선택한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이 틀렸지만 믿음도 있고 희망도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실 분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중에도 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착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슬람 신자들도 만나보았지만 진정
순박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이름은 다르지만
어떤 절대자를 희망하며 그 보편적 가르침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하여 ‘하느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닌가?’라며 절망하고 포기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고, 쉽게 그분께 대한 우리
희망을 접는다면, 그들보다도 약한 믿음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종교가 가톨릭교회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면 더
완전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평생 동안 응답을 주시지 않았어도 끝까지 희망했던 베짜타 연못의
병자의 믿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4월1일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 5,1-16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동네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았던 우물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사용해도 부족하지 않았던
우물이 신기했습니다. 우물은 넘치는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우물 안에
적당한 양의 물이 있었습니다. 어린 제게 우물보다 더 신기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네에 설치한 ‘펌프’였습니다. 펌프의 작은 입구에 한
바가지의 물을 부어 넣고 펌프의 손잡이를 저으면 물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한 바가지의 물을 부었을 뿐인데 물은 한정 없이 나왔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이 땅속에 있는 물을 부르는 ‘마중물’
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중에 펌프를 사용하는 분들을 위해서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남겨 놓았습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든지 물을 얻을 수
있는 지금의 삶이지만 그만큼 물의 소중함과 고마움은 덜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중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율법과 관습이라는 땅 속에
숨어있던 참된 자유와 진리의 물을 퍼 올릴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욕심이라는 땅 속에 숨어있던 사랑과 희망이라는 물을 퍼 올릴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좌절과 불안 그리고 근심과 두려움이라는 땅 속에
숨어있던 용기와 자신감이라는 물을 퍼 올릴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펌프는 ‘십자가와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와 희생은
정말 소중한 것들을 끌어 올렸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라는 선물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기꺼이 마중물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봄을 알리는 꽃처럼 희망의 꽃을 보는 것입니다. 간첩조작
사건, 문서 위조 사건은 그냥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던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짜타’라는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길 원합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지만 아무도
저를 저 연못으로 데려가 주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연못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분들은
하나씩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치 누워있던 환자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하는 일이 조금 잘
되면 성당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자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가난해도, 지금 힘들어도
하느님을 찾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들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나오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남편이 나가면 함께 나가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우들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 있어서 성당에 안 나온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분들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금전적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크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재정적인
이유가 있어도, 가족들과의 문제가 있어도, 이웃과의 문제가 있어도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리모컨입니다.
“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서울] 창조의 기운이신 하느님
2014년 가해 4월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 5,1-16
창조의 기운이신 하느님
방대한 우주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지구는 작은 별 하나일 뿐이지요.
아주 미소한 지구별의 표면변화로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곤 합니다.
그러나 지구별의 표면조건으로 수많은 생명이 피어나 이어가기도 하지요.
많은 생명을 쓸어 가는 그 기운은 많은 생명을 살릴 힘도 있다 봅니다.
그보다 더 큰 창조의 기운이신 하느님은 순간에 새 창조도 가능하지요.
그 큰 기운님을 아빠 아버지라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탄이 절로 나네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8~9)”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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