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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묵상글 들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뜻.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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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는 뜻
시편 기도를 하다보면 원수들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고 어떻게 신앙인이 복수의 기도를 바치는지,
그래도 되는지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복수는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인데
내가 그것을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김으로써 복수가 기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다윗은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참회를 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그런데 어찌 우리야가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지은 거라고 합니까?
전에 보고 싶었던 밀양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주 강한 신앙적인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다가 신앙을 가지면서
간신히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로 하고 감옥을 찾아갔는데
그 원수는 이미 하느님 용서를 받았기에 주인공의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인공이 용서해주지 않아도 자기는 이미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에 주인공은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하느님께 뺏긴 것 때문에
하느님께 분노하는 영화로 기억하는데 제 기억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길게 꺼낸 것은 다윗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우리야에 대한 죄책감 없이 하느님께만 죄 지었다고 생각했다면
같은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거라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인간에게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는 그 껄끄럽고 쉽지 않은
과정을 회피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아주 간편한 수단이 되고,
우리 인간은 밀양의 그 살인자처럼 하느님의 용서를 악용할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 그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참회한 후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주님,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삽고'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죄 고백은 인간의 용서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 반대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하느님을 믿더라도 하느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용서를 주고 받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다윗에게 죄란 단지 한 인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를 파괴하는
죄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 죄를 지은 거라고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일 겁니다.
가정을 해봅시다.
형이 동생을 죽였다면 동생에게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죄를 지은 것이고, 부모에게 더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인이라면
다윗처럼 죄를 지으면서도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갇힌 것이고, 자기 안에서도 죄 안에 갇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은 내가 죄 지은 그에게 얽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얽매여 있다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울 수 없고 기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할 수 없고 하느님께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든 것과 모두에게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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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도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작가처럼,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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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조급하게 허둥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전히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어서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느냐고 하소연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침몰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야속하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애쓴 이들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더 누리고 사니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래도 당신의 섭리를 믿어야 하나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위업은 너무나 훌륭하고 그분의 모든 분부는 제때에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이게 무어냐? 어찌된 일이냐?’ 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제때에 풀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이 모여들고 그분의 말씀으로 한마디로 그 물이 저수지가 된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39,16-18).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겁내지 말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주님과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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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백성이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다윗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올린 것도 잠시, 그 축복을 배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도 그 죄악을 감추어 보려고 얕은 꾀를 쓰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충직했던 부하 우리야와 그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왕(聖王)이라고 칭송받던 다윗이 갑자기 그 거룩함의 가면을 벗고 교묘하고 간사하게 자기 죄를 감추려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안쓰럽다가 다음에는 교묘하다며 손가락질하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도 죄를 지을 때 또 다른 다윗이 되어 가는 경우를 겪으면서 자책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는 인간의 전형적인 교활함과 교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전해 주었던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하셨습니다. 즉, 나탄이 다윗을 찾아와서 들려준 비유는 이미 수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겨우 암양 한 마리만을 키우는 가난한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다윗도 그 부자의 악랄함에 분노를 표시했지만 나탄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나탄이 전해준 이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윗의 귀와 가슴에 꽂히자 다윗은 항복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에 즉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 또한 죄를 짓는 교활한 모습과 함께 인간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일화는 교묘하게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 즉 슬기롭게 그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하느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된 위기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잠재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고물을 배게삼아 잠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태를 진정시키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앞의 ‘잠잠해져라’는 명령은 배를 집어 삼킬 듯 덤벼들던 바람에게 하신 듯하고, ‘조용히 하라’는 명령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 이야기로 가르치신 후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피곤해지신 예수님이야 출렁이는 배 안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비유의 가르침을 군중의 맨 앞에서 듣고도 도무지 깨달음이 없었던 제자들로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거센 돌풍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풍 같은 자연현상을 가라앉히시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 안을 들뜨게 하고 있던 극심한 불신의 바람을 가라앉히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신 직후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자연현상의 위기 속에서 믿음을 타박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람을 말 한 마디로 잠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범람하는 강물에다 대고 기도하면, 부르짖으면 비가 그치고 강물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난 후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무릇 비유란 하느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지만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신비요 진리를 보이는 사물과 사태에 빗대어 설명하는 화법입니다. 그 모든 비유에서 결론은 알아들을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그 귀는 마음의 귀인 것이며, 깨달음이기도 하고 단연코 믿음입니다.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닫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감히 그런 죄악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우리야를 죽여서라도 죄를 감추려는 더 큰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이나 기도로써는 거센 돌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달리 말하면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전례적 기도의 기본이 이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 우리를 가로막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 믿지 말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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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프로 권투 선수의 전적이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다면 어떨까요? 권투로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권투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낫다는 소리도 많이 들을 것입니다.
영국의 피터 버클리라는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권투를 했습니다. 300회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전적은 300전 4승 256패 12무였습니다. 심지어 5년 동안 88연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기자가 계속 권투를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릴 적 나는 걸핏하면 말썽을 부려 경찰을 애먹였습니다. 그런 제가 권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했습니다. 권투는 제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연습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비록 패배로만 가득한 그의 전적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승리만 인정하는 곳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세상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일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한가운데 왔을 때 갑자기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배는 고깃배고, 이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어부가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부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가을에 이런 돌풍이 자주 불어 닥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주무셨다는 기사가 여기에만 나옵니다. 전교 생활의 고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은 돌풍이 절망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워서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말씀하셨고, 곧바로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무서워하느냐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는 말씀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정리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와 절망이지만, 그 안에서도 기쁨과 만족을 체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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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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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합니다.
극장에 가서 영화 안 본 지가 5년이 넘었습니다. 2014년에 본 한국 영화가 아마 마지막 영화 관람이었을 것입니다. 원래가 영화를 싫어했냐고 묻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저는 영화광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때에는 돈이 없어서 한 편 값에 두 편을 볼 수 있는 삼류극장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면서 영화보다 책에 더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영화 보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맘껏 졸다가 나오는 곳이 극장이 된 것입니다. 책 읽는 것은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니 졸지 않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광이 독서광으로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저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속단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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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죄와 벌, 인과응보, 사필귀정’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런 원리와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에서는 때로 그런 원리와 원칙을 넘어서는 일들이 가능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용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데 그것을 잠재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가기도 합니다. 용서를 넘어서 천국으로 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표징입니다.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걷기도 합니다. 사필귀정의 원리를 넘어서는 표징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웁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도 인과응보의 ‘틀’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고, 믿음으로 병자를 고칠 수 있고, 믿음으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고, 영적인 길입니다.
2022년을 시작하면서 가톨릭평화신문에 한 독자가 기고한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사제는?’입니다. 오늘은 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사제는 땅 속을 흐르는 물이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기술자이다.
사제는 가을 고향이다.
사제는 오곡백과의 씨앗이다.
사제는 긴 긴 여행을 떠나는 쓸쓸한 이웃을 언제나 배웅해 준다.
사제는 희로애락의 감성마저 담배 연기에 날려버린다.
사제는 하얀 눈물 한 방울마저 술잔 속에 감추어 마셔버린다.
사제는 흐르는 사계절 쉬지 않고 그물을 던져 어부로서의 소명을 완수한다.
사제는 가시밭 돌길을 신앙의 아스파트로 만드는 고독한 노동자다.
사제는 바위산 깊은 골짜기에 화전을 일구는 순교자의 후예다.
사제는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물안개 꽃이다.
사제는 희망과 용서는 기쁨과 평화의 열매라고 힘주어 표현한다.
사제는 종갓집의 종손이다.
사제는 세상만사 인간사를 하느님의 뜻대로 진행하시라는 화살기도 속에 흘러가는 청춘이다.” 저는 ‘사제는 바위산 깊은 골짜기에 화전을 일구는 순교자의 후예다.’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5대째 천주교를 믿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라는 교우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죄와 벌,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라는 세상사의 ‘틀’을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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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적 안정과 평화
-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믿음 -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혀 미풍으로 바꾸신 주님이십니다. 지난 하느님 나라의 네 비유에 이은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구해 낸 주님의 기적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나라이신 예수님과의 일치가 내적 안정과 평화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풍랑은 미풍으로 변하면서 내적안정과 평화입니다. 참으로 세상이나 공동체가, 개인이 내적으로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은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인생항해중 난파되거나 조난당한 공동체나 개인이란 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라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흡사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집처럼 위태해 보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내부는 견고하지 못하고 날림공사 집처럼 참 허술하고 엉성해 보입니다.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복합적이라 해결도 난망해 보입니다. 우선적 주요 원인은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믿음의 일치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주 강조했던 내용이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고 태풍을 미풍으로 만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미풍은 폭풍이 되지 않고 폭풍은 미풍으로 변하면서 실현되는 내적 안정과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화가 상징하는 바 참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인생항해중 험한 풍랑으로 위기에 처한 위태한 국가나 가정, 교회 공동체나 개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난데없이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신 주님을 통해 주님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하신지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믿음의 일치를 이룬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배안 제자들의 조치가 참 신속합니다. 제자들은 공동체의 중심이자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깨우며 도움을 청합니다. 참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즉시 중심이신 주님을 향한 구원 요청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는 평소 중심이신 주님과 믿음의 일치를 굳건히 해두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아마 이 기도가 없었다면 요셉 수도공동체라는 배는 중심을 잃어 벌써 난파되었을 것입니다. 난파 위험에 처한 배 안 제자들의 외침이 흡사 절박한 기도처럼 들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즉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돌풍을 미풍으로 바꾼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깨어 중심이신 주님과 믿음의 일치를 살 때 미풍이 태풍으로 변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태풍도 곧 고요한 미풍으로 변해 내적평화와 안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바로 공동체의 중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이신 당신을 잊은 제자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바로 가까이 중심에 계신 주님께 대한 믿음 없음을 질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공동체든 개인이든 내적평화와 안정에 주님과 믿음의 일치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에게 주어진 평생 화두와 같은 질문이자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현이요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심으로 내적안정과 평화를 회복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이런 삶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과 믿음의 일치가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의 불행이 한 눈에 드러납니다. 다윗의 완전 범죄는 하느님 눈에 낱낱이 폭로됩니다. 어제 말씀드린 노자의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의 진리가, 즉 그 무엇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진리가 그대로 입증됩니다. 세상 다 속여도 하느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나탄 예언자의 예화를 곁들인 설명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실감이 갑니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나탄의 말에 적극 동조할 때 나탄은 다윗을 직격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탄의 이런 직언의 용기,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엄청난 불행이 예고됩니다. 다윗 가정 공동체가 다윗의 대죄로 인해 완전 난파된 느낌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잊음으로 유혹에 빠져 중심을 잃은 결과 자초한 재앙의 불행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다윗의 회개입니다. 바로 어제 오늘 화답송 시편은 다윗의 애절한 회개의 시편입니다. 회개는 하여 용서는 받았지만 이어지는 다윗의 보속의 시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회개에 이어 시련의 보속을 묵묵히 믿음으로 끝까지, 한결같이 받아들이고 견뎌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윗과 솔로몬을 빗댄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입니다. 다윗처럼 회개하여 용서받고 다시 하느님 희망의 끈을 꼭 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구원입니다. 얼마전 교황님의 감동적인 강론 말씀을 나눕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에 놀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시다.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사랑이시고 부드러우시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 잘못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닫힌 마음에 놀라신다. 그 닫힌 마음이 그분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분 하느님은 당신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 없음에 놀라신다.”
절망의 하느님이 아니라 희망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이요 정말 대죄는 스스로 자기를 닫아버리는 자포자기의 절망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오늘 지금 여기 중심에 계신 주님을 향해 활짝 마음을 열어 믿음의 일치를 이룰 때 내적안정과 평화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런 믿음을 선물하시어 마음과 공동체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어 내적 고요와 안정, 그리고 평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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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하느님 나라에 관한 네 개의 비유로 채워진
예수님의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마르 4,1-34 참조).
그날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쪽으로
가실 때 “거센 돌풍이 일어” 배 안에 물이 가득 찹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였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듯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바람이 멎고 호수는 고요해집니다.
풍랑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은 놀라운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부족하였던 것은 ‘믿음’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 믿음이 없느냐?”
마르코 복음에서 믿음은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우리 믿음의 항해는 언제든지 거센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십니다.
바람과 호수, 모든 것이 그분 손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마르 3,14 참조),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이 곤경 속에서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난관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파도가 잔잔해졌다.
바다가 잠잠해져 그들은 기뻐하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인도해 주셨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을 위한 그 기적들을”
(시편 107[10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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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맞서며, 인간의 것은 나약함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여 일으켜 세우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작은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항해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라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이 거센 파도가 치는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인내심과 참을성을 지켜보시고, 죄인들의 참회와 회개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그분께 열심히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함께 희생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니 그분은 “죽은 것”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분은 지치셨지만(요한 4,6 참조), 고생하며 근심하는 사람들의 안식이시다.(마태 11,28 참조) 그분은 잠에 무겁게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게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고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가지신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와 같이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을 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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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 39)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어떤
시간도
지나가는
시간이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센 돌풍의
은총이다.
거센 돌풍은
고요와 평화로
바뀔 것이다.
거센 돌풍도
평화도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다.
깊어지는
믿음의
시간으로
이어져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간절한
평화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거센
돌풍 속에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우리를
믿음으로
성장시키고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고 가신다.
우리 삶의
자리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주님이시다.
주님 앞에
우리의
두려움까지
조용히
내려놓는다.
도와주시고
잡아 당기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도 사랑을
체험한다.
주님 사랑은
한계가 없다.
주님이
길이이다.
주님이
다시 길을
열어주신다.
겁 먹지
않는다.
동행하시는
주님께
맡겨드리는
삶의 순간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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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인생의 선장이신 예수님 ♣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고통과 시련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배에 타고 계신 그분을 호수 건너편으로 모시고 갑니다(4,35-36).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이 거의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으나 그분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4,38).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4,38) 하고 투덜댑니다.
언뜻 보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분께서 제자들이 죽을 위험을 맞고 있는데도 무책임하게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임지려고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악의 세력인 풍랑을 꾸짖어 가라앉히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4,39). 그분은 인간이 겪는 엄청난 고통과 위기마저도 당신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시어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40)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걱정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경외합니다(4,41).
우리네 인생 또한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인생의 배에 스스로 오르시어 함께 항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처럼 인생사 전부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상황에 휘둘리며 걱정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 앞에 주님을 보지 못한 소경이 되어버리곤 하지요.
행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는 동안 겪는 인생의 위기와 온갖 위험과 실패, 고통과 시련 중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인생의 배에 타시어 모두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바로 곁에 계시는데도 그분이 아닌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시선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결정적 열쇠임을 기억하며, 고통과 위기를 그분과 함께 나누어야겠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을 내 인생의 배에 모시고 있음을 믿을 때 어떤 고난과 죽음의 풍랑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하지 말고,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몰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선장이신 주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도 사랑으로 나를 책임져주시고 힘이 되어주시며 그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배를 혼란에 빠뜨리고 전복시키는 것은 '불신'과 ‘근심 걱정’입니다. 그것은 나를 주님으로부터 갈라놓고 두려움과 불안의 풍랑 속으로 내몹니다. 위험한 상황이나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늘 함께해주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배의 선장이심을 부인하고 궁극적인 해결책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세상 걱정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떤 어려움과 고통을 겪더라도 선장이신 주님을 알아보고 믿으며 흔들림 없이 그분의 뜻을 따르는 행복한 인생 항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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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한 주님 현존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돌아보니 저는 크고 작은 배들을 참 많이 탔습니다. 업무상 초대형 유조선에도 참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도로 사정이 열악해 장거리 이동을 위해 연안여객선도 많이 탔습니다. 최근에는 생업을 위한 작은 낚싯배까지...
언젠가 기상악화로 배가 끊겨 한 며칠 작은 섬에 묶여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어선을 빌려 타고 통영항으로 나올 때의 기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넘실거리는 큰 파도 앞에 제가 탄 작은 배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 번씩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올 때는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했지만 배에서 내리기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육지에 내린 저희 일행 모두의 얼굴에는 사색이 완연했습니다. 저는 그때 바다 무서운 줄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항해하다가 거센 돌풍을 만난 제자들이 느낀 두려움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엄청나게 높은 파도 앞에 느낀 공포심이 얼마나 컸던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크게 부르짖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복음 4장 38절)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뒷쪽에 누으셔서, 배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천하태평 예수님의 탁월한 유머감각이 다시 한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그토록 느굿하고 여유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은 생각에 그분을 흔들어 깨우며 볼맨 목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삶 속에서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점 한 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주님 현존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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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에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돌풍에 배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예수님은 고물을 베고 주무시기만 하십니다.
제자들은 배가 가라앉기 직전에서야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일어나는 욕구가 ‘생존 욕구’입니다.
그리고 그 생존 욕구의 대표적인 것이 ‘소유욕, 성욕, 명예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라 하여 ‘삼구’(三仇)라 부릅니다.
이 생존 욕구가 살아있는 한 하느님의 뜻, 곧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제가 초등학생 때 성적조작을 해서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다른 아이에게 시험지 점수를 매기는 것을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점수를 매기다가 서로 상대의 것을 2개씩 더 맞게 고쳐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80점대가 되었고 저는 90점 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 두 시험지를 대충 점수를 매긴 상태였습니다.
우리 것을 고치는지 안 고치는지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날이 저의 생일이었는데 낚시 채로 종아리가 시커멓게 맞았습니다.
이런 것이 명예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명예를 높이려면 누군가는 나 때문에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내 점수가 우선이니 남이 나 때문에 점수가 떨어지는 피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권력이나 경쟁에서 이기려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회에서 사랑할 수 없는 본성으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생존 욕구에 길들어가는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요? ‘원죄’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의 탓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모도 그렇게 그 부모에게 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죄의 굴레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니콜 르페라는 자신이 애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엄마도 그 이전에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르페라의 아버지는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시에 퇴근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식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이 또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항상 초조해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을 만나 이런 불안이 많이 해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빠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30분이나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르페라는 식탁 아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르페라의 존재를 까맣고 잊고 두 손을 비틀며 초조하게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르페라는 자신의 존재가 잊힌 두려움을 세발자전거를 타는 데 집중하며 잊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받은 상처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는 무언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자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작은 생명체(르페라)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 순간, 엄마는 정서적으로 내게 반응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나의 욕구나 두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불안감과 트라우마 반응에 잠식당해서 당면한 위협에만 집중했을 때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와 같은 사소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아무도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줘’라는 핵심믿음을 구축해갔다.”
르페라의 엄마는 르페라를 상처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안했을 뿐입니다.
다행히 아빠가 오는 것이 보이자 이 모든 상황은 끝이 났지만 르페라가 받은 엄마로부터의 상처는 르페라 역시 생존 문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커다란 계기가 되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또 다른 교훈도 얻었다. 내적 동요는 오직 외적 요소로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처럼 나도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아빠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장을 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혹은 누군가가 정서적으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극히 오싹한)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절망에 바지고 비이성적으로 되거나 사랑받지 못할 때는 유년기의 그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또다시 창가에 붙어선 엄마가 보였다.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주는 사람이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저 사람이 필요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 생존 욕구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를 주어 그 생존 욕구를 대물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누군가에게 집착할 수 있지만 참다운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죽음까지 책임질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먼저 생존 욕구부터 해결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마치 생존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는 부모처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며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죽음보다 더 강하신 그분을 깨워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삼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생존을 부탁하지 맙시다.
그냥 그분께 맡기고 오늘을 살아갑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웃을 위해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며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 있다는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발견합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믿음만으로 이미 생존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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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3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사무엘기에서 나탄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다윗, 그의 집안에서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는다. 그가 주님을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자, 그는 "주님께 죄를 지었소"하였고,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낳아준 아기가 죽자, 단식하며 방 바닥에 누워 밤을 지내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호수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 돌풍으로 배에 물이 거의 차 올라왔는 데도 뱃고물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라 깨우자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하라. 조용해져라. 하였습니다. 그때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의조건, 현상 곧 그 질서도 바꾸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드리는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겠다.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할 것이다.’”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
그의 궁 원로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2사무 12,1-7ㄷ.10-17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 4,35-41
실천
인간은 자신이 탐욕과 오만으로, 자기 힘과 지위를 부끄럽게 사용합니다. 다윗도 그런 누를 범했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고 또한 그의 남편을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 잘못을 합리화하고 죄에서 또 죄를 낳게 합니다. 주님은 나탄을 통하여 그의 죄와 악행을 밝히셨습니다. 그의 집안에 재앙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악을 저지를 때 그 순간은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심의 소리와 주님 그분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윗 그는 그의 죄가 주님의 말씀으로 밝혀지자, "주님께 죄를 지었소"하면서 자기 참회 자리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양심의 소리나, 죄를 밝히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릴 때 바로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흐름과 변화와 거셈까지도 다스리시고 바꾸시는 주님이십니다. 곧 돌풍과 호수까지 복종시키는 주님임을 믿습니다. 사람, 가정과 교회, 사회의 모든 돌풍의 상황과 환경을 바꾸실 수 있는 힘과 권위의 주님이십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그분을 따릅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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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2022년 1월 29일 토요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4,35-41)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12,1-7ㄷ.10-17)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0)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 및 범죄의 내용을 지적하신 후, 사무엘서 하권 12장 10~12절에서는 이같은 흉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다윗에게 임할 엄중한 징계를 예언하신다. 그래서 주의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과거와 대조되는 이 시점을 가리키는 '앗타'(atha; '이제'; now)라는 부사를 가지고 시작하면서 그 징계가 엄중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로 타쑤르'(lo thasur)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로'(lo) + 미완료 구문'으로서 다윗이 이 징계를 영원히 안고 살아야만 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음이 항상 그 가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생존 당시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밧 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들이 죽었으며(2사무12,16~23), 다윗의 딸 타마르가 다윗의 장자 암몬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으로(2사무13,1~22)인해서 타마르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였으며(2사무13,23~29), 압살롬은 부친 다윗에게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하는 등 죽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2사무15,1~18; 18,9~15). 그러나 '영원히'에 해당하는 '아드 올람'(ad ollam)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는 다윗 당대로만 그치지 않았다. 즉 다윗 사후 그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위 찬탈을 노리다가 동생 솔로몬에 의해 처형되었고(1열왕2,1-11),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그뿐 아니라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두 왕국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다가 결국 바빌론과 아시리아에 의해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에 보내신 징계의 칼부림은 다윗 자신이 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칼에 대한 보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심은 죄악의 열매를 거두어야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시는데 그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심으로써 악의 씨를 뿌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셨다(갈라6,7). '네가 나를 무시하고 ~ 때문이다' 앞의 사무엘서 상권 12장 10절 전반절에 언급된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공의의 심판의 근거를 설명하는 후반절은, 이유의 접속사 '키'(ki)뿐만 아니라 사무엘서 하권 12장 6절에서 다윗이 부자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문장에도 등장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에케브'(eqeb)를 사용하여 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다윗은 그 비유 속의 부자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가혹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자신의 입으로 부자에 대해서 엄중한 심판의 선고를 한 다윗은, 동일한 근거에서 내려지는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이미 사용된 '무시하고'라는 표현을 여기서 다시 한번 사용하여('베지타니'; bezithani; because you dispised me),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근본 동기가 바로 당신을 무시하는데 있음을 강조하신다. 물론 다윗의 범죄는 인간의 윤리 기준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범죄의 동기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경멸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했다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모든 것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오늘 주셨다. (마르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 그날- 앞 34절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신 그날, 예수님께서 풀이해 주신 그 말씀으로, 호수 저쪽, 風浪이 이는 호수(세상)를 건널 수 있는 힘, 그 실력이 되었기에 ‘건너가자’ 하신 것이다. 그 힘은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복음 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풀이 그 말씀(힘)을 모르는 군중은 두고 떠나신 것이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 그런데도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온다.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따라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위해 따라온 것이다. 곧 하느님의 뜻을 위한 신앙이 아닌 자신의 뜻,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열심을 부리는 모습이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 돌풍 같은 호수(세상)의 물(힘), 그 물이 배(교회)에 거의 가득 찼다는 것이다. 창조 이튿날의 물- (창세1,6.10.21)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살았다) 그리고 그 큰 용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속이는 그 뱀이다. (묵시12,9) 9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자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 그러니까 윗물은 하늘의 생명을 주는 생명수, 말씀을 뜻하며, 아랫물은 땅(세상)의 바다, 땅의 말을 뜻하는 것으로 곧 뱀의 속이는 말을 먹은, 사람을 죽이는 돌풍 같은 말(물)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말, 법이 그릇되다 하신 것이다. 성령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다. (요한16,8)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배(교회) 안으로- 돌풍 같은 세상의 물, 말이 거의 찼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교회) 안에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 38ㄱ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 앞 34절의 모든 비유를 따로 풀어 알려 주셨던 그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힘)의 믿음이 배(교회) 안에, 제자들 안에 잠자고(죽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두려움이 앞선다. 38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 먼저 풍랑을 일으키는 바다(뱀)의 말을 꾸짖으신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 따로 풀이해 주었던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어디 갔냐.?’ 물으시는 것이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따로 풀어 주셨던 그 비유의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고(잊고),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세상의 물, 말에 따라 예수님을 보니, 죄인들을 구원하러 속죄 제물로 오신 창조주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모르게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을 쫓는 헛된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히브11,1-3)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루가17,20)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로마8,24)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코린4,18)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왜 보이는 것을 쫓는 헛된 신앙을 살까?. 아랫물, 곧 바다의 뱀의 거짓말을 듣고 신앙을 살기 때문이다. (마태15,9)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갈라2,21)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은혜)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이 헛된 것이다.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십자가의 代贖, 구원의 眞理, 생명의 말씀, 福音이다. (필립2,16)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코린15,2)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자~ (히브11,17-19)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약속)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느님께서 ‘떠나라’고 하셨을 때 떠나던 중, 하란의 문명, 우상 등, 그 화려함에 안주하고 싶어 그곳에 머물렀다. 그때 하느님께서 다시 찾아 가셨다. (창세12,1-2)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 하란(세상)의 그 헛된 복이 아닌, 하늘의 이름 참 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람은 그 복을 자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떠났는데 그의 나이 75세였다. 떠나던 중, 기근이 들자 다시 유혹에 빠진다. 이집트(세상)로 들어가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왕에게 넘기고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창세12,10~이하)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른 후에 또 저지르게 된다. 창세20장) 그때 다시 하느님께서 찾아 가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사라도 아브라함도 무사히 나오게 된다. 그후 기다려도 자식을 주시지 않으시자~ (창세15,3-4) 3 아브람이 다시 아뢰었다. “저를 보십시오. 당신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 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4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그가 너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 = 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그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자신들의 생각, 지혜로 사라의 여종 하가르 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아브람의 나이 88세였다. 하느님의 약속, 그 계약을 어긴 아브람을 떠나셨다. 13년 뒤에 다시 찾아오신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불앙하고 두려웠다. 왜? 하느님의 말씀, 약속을 믿지 못하고, 조카 롯과 집안 상속자 엘리에제르, 그리고 육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기까지- 자신의 생각, 지혜로 후손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할례의 계약을 세우신다.(남자의 생식기능을 죽이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福(자식)을 다시 약속하신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을 수 없어 웃으며 자신의 육의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받아 주실 것을 고집한다. (창세17,18-19) 18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하고 아뢰자, 19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 그리고 그 후~ (창세18,10) 10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 그래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둘 다 계속 헛웃음만 짓는다. 하느님의 약속을 비웃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약속하신 이사악을 주신다. 이브라함은 그때서야 알았다. 인간의 방법, 힘, 지혜, 능력으로는 하늘의 상속자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서 ‘바쳐라’ 하셨을 때 바칠 수 있는 실력(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히브11, 19)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믿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 믿음이 없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신 하느님,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역사를 통해 일 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생명, 구원으로 이끌어 내신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속셈으로 온 힘, 열성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특히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한 베드로를 믿음의 순교자로 만들어 내지 않으셨던가.~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였다. ☨ 천주의 성령님! 믿음없는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멘!!!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마르4,35~41)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9~41) '꾸짖으시고'로 번역된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는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경우에 베드로를 향해서(마르8,33), 더러운 영을 향해서(마르1,25; 9,25), 열병에 대해서(루카4,39), 그리고 여기서는 바람을 향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 인간과 영계와 질병에 대해서까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권세가 미치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원 사업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를 꾸짖으셨으며, 질병과 부마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을 꾸짖으셨고,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막는 풍랑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꾸짖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표출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권위있는 활동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희생 제사를 바치며 달래거나 겁을 주는 방법이 아닌, 권위있는 말씀으로 꾸짖는 방법을 이용하셨다. 한편, '바람'과 '호수'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가 동시에 등장하는 점이나 마르코 복음 4장 39절 후반절에서 호수더러 잠잠하라고 했는데,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점을 보면 그렇다. 구약 성경에서 '호수' 또는 '바다'는 욥기 38장 8~11절, 예레미야서 5장 22절에서 태고의 혼돈을 나타내며, 시편 69장 2절이하와 이사야서 43장 2절에서는 의인이 당하는 시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타신 배를 삼키고 그들을 죽이려 하는 호수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39절의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페피모소'(pephimoso; be still)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 분사 '페피모소'(pephimoso)는 그리스 문학의 이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령 제압을 위한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예수님 활동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부르짖음을 듣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역사는 오로지 주 하느님께 돌려지는 구약적 배경을 갖는다(시편107,29.30).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41절의 '복종하는가?'에 해당하는 '휘파쿠에이'(hypakouei; obey)의 원형은 '휘파쿠오'(hypakouo)인데, 여기서는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으로 쓰였고, 어떤 곳에서는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형인 '휘파쿠우신'(hypakouousin)이 쓰였다. 복수로 쓰인 것은 '바람과 호수'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풍랑의 원인을 여러가지 자연적인 요소들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단수로 쓰인 것은 풍랑의 원인을 한 위격 또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연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흉폭해져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자연을 악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락한 자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조종받는 자연도 이 모든 세상을 재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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