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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8) 사람 낚는 어부,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성경에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漁夫)였다. 성경에는 물고기가 나오는 대목이 많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비유된다. 손으로 물건 만드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장인(匠人)처럼 어부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적으로 매우 낮았다. 잡은 물고기들은 지금처럼 큰 것과 작은 것, 흔한 것과 희귀한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등을 구분하여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가공한 후 시장에 팔거나 외국에 수출했다.
예수님 시대의 모든 종류의 상업은 로마 제국의 엄격한 법률에 따라야 했다. 세금 징수자들은 잡힌 물고기를 보고 세금을 부과했다. 예수님 시대에 랍비나 레위인이나 제사장 중에도 어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물품 수요가 많아지면서 어부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많이 변하게 되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과거에 멸시받던 직업이 많은 이들이 원하는 직업으로 바뀌는 경우는 많다. 물고기는 유다인들의 주요한 음식물이었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레위 11,9-12 참조)
첫 번째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던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이다. 그 당시 일꾼들을 고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아주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마르 1,20-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죄의 바다에서 사람을 낚는 것은 구원과 심판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부르심은 성경에서 가장 일반화된 단어 중 하나로 많은 경우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 부르심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응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증언을 통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목적을 지닌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히 물고기와 깊은 관계를 지닌다. 스승의 십자가형을 확인한 후 많은 제자들은 허탈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본래 직업인 어부로 활동했다.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은 후 주님을 비로소 알아보는 장면이 있다.(요한 21,6-7 참조) 초대교회에서 물고기는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이 시간에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나는 매일 무엇을 낚고 있는가?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 심지어 부모도 버리고 따랐다. 성경의 언급처럼 즉시 따랐을까? 주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나섰을까? 꼭 모두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고 많이 망설였으리라 추측해 본다. 또한 다른 개인적 욕심을 지니고 따른 이들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시간이 흐르며 완성으로 다가간다.
[성경 속 희망의 순례자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을 두고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로마 4,18 참조) 희망할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많은 후손과 땅을 주고, 복을 내리며,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여정은 시련으로 가득했고, 하느님의 약속은 거듭하여 연기되었습니다. 이집트에 살 때에는 파라오 때문에, 그라르 땅에서는 아비멜렉 때문에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고, 사라를 통해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무효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으로 사라는 무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내려온 아브라함은 스켐에서 베델, 네겝 지방에서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네겝에서 베델로, 헤브론에서 다시 네겝으로 갔으며, 그라르 땅에서 살다가 브에르 세바로, 다시 헤브론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주민으로 살면서 그가 죽기 전에 소유한 유일한 땅은 사라의 장지로 산 막펠라에 있는 에프론의 밭과 동굴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창세 15,18 참조)은 공허하게만 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75세에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86세 때였고, 이사악을 얻은 것은 100세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37세 되던 해에 사라가 죽었고, 그 후 그는 크투라에게서 여섯 자녀를 더 얻었습니다. 결국 그가 얻은 자녀가 총 8명이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별만큼 많은 후손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를 한결같이 지켜 주시는 성실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힘입어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로마 4,21) 하느님의 약속은 사백 년이 지나서야 성취될 것이지만(창세 15,13 참조),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로마 8,25 참조)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일이 꼭 그렇게 이루어지리라는 긍정적 표지들이 충분히 많을 때는 굳이 희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할 근거가 없어도 희망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과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굳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희망의 어머니입니다. 성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계속 희망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말한 대로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정의를 향해 기울어져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아모스서
시대 상황
기원전 760-750년 북이스라엘을 예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남유다를 우찌야가 통치하던 시절에 근동 지역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내부의 혼란으로 주춤하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틈을 타 예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던 시리아(아람)를 몰아내고, 여호아스 임금 시대에 빼앗긴 땅을 되찾아 이스라엘의 영토를 거의 다윗 시대만큼 확장합니다. 또 인접 지역과 활발한 국제 무역을 통해 북이스라엘은 유례없는 국가적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평화의 시기를 맞아 국가 내부적으로도 하느님 뜻에 충실하며 모든 백성에게 평화와 안정이 고르게 분배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안정과 번영은 내부적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임금과 지도자들은 풍요와 향락에 빠져들었고, 지주들의 착취 때문에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은 억압과 학대 속에 살아야 했고, 부의 양극화 현상이 사회 구조적 악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문 앞 광장에는 재판하는 관리들이 뇌물의 수준에 따라 판결을 달리했고, 고리대금업자들은 부채를 진 사람을 노예로 삼는가 하면 담보를 강제로 압류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정성스러운 예배가 행해져야 할 성소는 사제 계급과 부르주아의 결탁으로 종교는 관료적 국가종교로 변모하였고, 예배는 껍데기뿐인 허례허식으로 채워졌습니다. 번영과 안정이 오히려 무서운 해악과 치명적 독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아모스를 부르심
북이스라엘이 이런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안정과 번영이 지속되리라 믿고 있을 때, 남유다의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7km 정도 떨어진 작은 산악 마을 트코아에서 목양업에 종사하던 아모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7,15) 마치 ‘사자가 포효’하는 것 같은 하느님의 명령에 사로잡힌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베텔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신탁을 전합니다.
마치 남한에서 양을 기르던 사람이 북한의 평양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잘못을 꾸짖고 멸망이 임박했다고 선포하는 것에 비길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듣는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제도권 사제들은 미칠 노릇입니다. 그래서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공공질서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반역자로 몰며 남유다로 추방하려 합니다.
아모스의 신탁 : 질책과 심판의 경고
예언자가 고발한 이스라엘의 주된 잘못은 사회에 팽배했던 부정과 불의였습니다. 특히 강하게 비판하는 죄목 한 가지는 가난한 이들의 희생으로 누리는 상류층의 사치입니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종으로 팔려 갔고(2,6 참조), 부유한 이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6,4) 향유를 바르고 술을 퍼마시며 흥청거렸고, 사마리아의 부유층 여인들은 “우리가 마실 술을 가져와요.”(4,1)라며 사치와 향략을 즐겼습니다. 권세 있는 이들의 집에는 술과 음식이 넘쳐났고,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 내었다.”(5,12ㄴ)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정의를 세워야 할 재판마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아직도 이스라엘이 건재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속은 모조리 썩어 있다며, 이스라엘의 죽음을 선고하는 애가(哀歌)를 부릅니다(5,2).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을 일삼는 자들에게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5,10)라는 말로 질책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며 가난한 이를 착취하는 이들에게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5,11)라고 고발합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5,1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다가왔음이 두 개의 환시로 예고되자, 아모스는 “주 하느님, 제발 용서하여 주십시오.”(7,2) “주 하느님, 제발 멈추어 주십시오.”(7,5)라고 하며 이스라엘을 위해 전구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세 개의 심판 환시에는 아모스의 전구조차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이제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멸망만이 남아있음을 예고합니다.
현재 북이스라엘의 삶이 죽음과 멸망을 불러들이고 있음을 예언하며, 아모스는 하느님께 전구하여 심판을 막아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결국 파국과 멸망을 해야만 잘못을 깨닫고 구원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의덕(정의)의 거울이신 성모 마리아
아모스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사회 제도와 구조 속에서 불균등한 부의 분배, 아쉽기만 한 사법부의 판단, 더디고 편파적인 입법부의 결정은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사회의 모순 부조리,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가진 자들의 사치와 향락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개인주의에 중독되어 “남이야 어찌 되든 간에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 “지구야 어떻게 되든지, 지금 당장 편한 게 좋다.” “다른 나라에서 사람이 굶어 죽든, 전쟁이 지속되든 나와는 상관없다.”라며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우리는 “의덕(정의)의 거울이신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군단의 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사회 지도자층이 되어 법을 바꾸고, 정책을 개선할 수는 없지만 지금 각자 삶의 자리에서 ‘너를 배려하고, 너를 먼저 돌보고, 너를 지지하는 것’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모습이자, 이 시대의 아모스로 살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뭐라꼬예?] 다윗의 도주와 요나탄의 우정
사울의 사위가 된 다윗
사울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내어놓고 다윗을 회유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내 맏딸 ‘메랍’을 아내로 줄 터이니, 오로지 너는 나의 용사가 되어 주님의 전쟁을 치러 다오.”(1사무 18,17) 이렇게 말한 사울이지만 정작 다윗을 사위로 삼으려니 장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화근이라 생각한 것일까요? 막상 딸을 주기로 한 때가 다가오자 그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그 결혼을 사양했었기는 하지만요.
그러던 중 사울의 다른 딸 ‘미칼’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 딸을 미끼 삼아 다윗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자신의 신하들을 부추겨, 필리스티아인의 포피 백 개만 바치면 사울의 사위가 될 수 있다고 다윗에게 귀띔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용기로 충만한 다윗은 필리스티아인 이백 명의 포피를 바쳐 사울왕의 사위로 충분한 조건을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사위로 삼았지만 하느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고 자신의 딸마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고 질투하여 자신의 평생 원수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없애버리고자 자신의 딸들마저 미끼로 내어놓은 사울의 못된 마음과 음흉함에 할 말을 잃습니다. 추악한 질투심이 우리 인간의 나약한 이기심을 파고들면 얼마나 깊은 병을 앓게 되는지요! 나 자신은 어떤가요? 내가 지금 누군가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다면, 정작 나의 사악한 마음이 잘못된 것 아닐까, 먼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을 감싼 요나탄과 미칼,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을 좋아한 요나탄은 이를 다윗에게 알려주며 조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어찌하여 임금에게 죄를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안겨준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냐, 또 그렇게 죄를 지으려는 것이냐 따졌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음의 말로 맹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1사무 19,6) 다시 전쟁이 일어나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을 크게 무찌르자 사울은 또다시 질투에 사로잡혔고,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창을 던졌으나 실패한 사울은 전령들을 보내며,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아침이 되면 그를 죽일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를 알아챈 미칼은 다윗을 도망가게 했는데, 사울이 이를 알고 어찌하여 자신을 속이고 원수를 빼내어 목숨을 건지게 했느냐 물었습니다. 미칼이 사울에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저에게 ‘나를 빼내 주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1사무 19,17)
그렇게 목숨을 건진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이 그를 잡으려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보내는 전령들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아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하였고, 급기야 뒤따라간 사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하였고, 그날 하루 밤낮을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지요. 다윗은 하느님의 보호로 사울의 악한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탄 왕자를 찾아가 사울왕의 악행을 알렸습니다. 그는 요나탄에게 사울의 진심을 떠보도록 한 후 들에 숨어 지냈습니다. 다윗이 자리를 비운 지 두 번째 되는 날, 사울은 요나탄에게 어찌하여 다윗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요나탄이 집안의 제사를 지내러 가도록 다윗을 보내주었다고 둘러대자 사울이 다음과 같이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이 더럽고 몹쓸 계집의 자식 놈아! 네가 이사이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것이 바로 너의 망신이고 벌거벗은 네 어미의 망신이다. 이사이의 아들놈이 이 땅에 살아있는 한, 너도 네 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자는 죽어 마땅하니, 당장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들여라.”(1사무 20,30-31) 사울의 말에 요나탄이 항의하자, 화가 난 사울은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요나탄은 들로 나가 숨어있던 다윗을 찾아가 자신이 알게 된 사울의 생각을 사실 그대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게. 우리 둘은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 내 후손과 자네 후손 사이에 언제까지나 증인이 되실 것이네.’ 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는가!”(1사무 20,42)
다윗을 향한 요나탄의 마음에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가져야 할 우정의 본보기를 봅니다. 진정한 우정은 ‘단순한 사랑의 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에 바탕하고 이기심을 극복하는 정감’과 같은 것 아닐까요? 요나탄은 자신의 왕좌마저 위협할 수 있는 다윗이었지만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를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정을 맺는 당사자들 사이에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그 우정을 견고하게 할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은 참된 우정을 맺을 가능성에 훨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복된 교우들 사이의 우정은 결국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갈 은총의 길이 될 것이고요.
도망한 다윗의 행보
무기도 챙길 겨를 없이 사울에게서 달아난 다윗은 아히멜렉 사제를 찾아가 잠시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쳐 죽인 골리앗의 칼을 받아 나왔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필리스티아 지방의 갓 임금 아키스를 찾아갔는데, 아키스의 신하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경계하자 극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고자 미친 척 연기를 하는 것이었지요.
목숨을 건진 다윗은 아둘남의 굴속으로 몸을 피하였는데, 아버지와 형제들을 비롯한 다윗 집안의 사람들, 그 밖에도 빚진 사람들을 비롯한 곤경에 빠진 사람들, 갖가지 불만에 찬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약 사백 명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이끌고 모압 임금에게 몸을 맡겼으나, 가드 예언자의 말을 듣고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의 헤렛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도망의 길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친 연기까지 마다치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말씀에 순명하는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이를테면 다윗은 예언자로부터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자 자신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또 그렇게 제공된 은신처를 망설임 없이 나왔습니다. 자칫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겼기에 가능했을 일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많은 위기의 순간이 닥칠 수 있겠지요. 그때마다 나의 은신처를 찾아 숨어들기 이전에 하느님 뜻을 찾아 길을 나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분명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니까요.
요나탄의 놀라운 겸손과 우정
다윗과 그 부하들의 소식을 듣게 된 사울은 다윗에게 도움을 준 놉의 사제들, 그 사제들이 살던 성읍의 주민들, 심지어 어린이와 젖먹이, 소와 나귀와 양들까지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한편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이 크일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을 구해냅니다. 이때 다윗은 하느님께 여쭈어보고서 허락을 받고 싸우러 나갔으며, 사울이 그곳으로 자신을 해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하느님께 여쭈어보고 광야의 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물렀던 다윗은 지프 광야의 호레스에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 살았습니다.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찾아와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게. 나의 아버지 사울의 손이 자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네. 결국은 자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고, 나는 자네 다음 자리에 있게 될 것일세. 아버지도 그걸 아신다네.”(1사무 23,17) 요나탄은 하느님 앞에서 다윗과 계약을 맺고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은 요나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죠? 요나탄은 임금 자리를 물려받을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다윗의 능력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보다 못한 처지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질투와 착각과 자만심을 떨쳐버리고 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지혜와 겸손의 덕을 구해봅시다.
[하느님 뭐라꼬예?] 사울 왕을 대체할 다윗의 등장
사울의 변명과 체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계속 변명을 늘어놓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이에 사울은 그제야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사무엘에게 간청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사들이 두려워서 주님의 분부와 어르신의 말씀을 어기고 그들의 말을 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와 함께 돌아가시어, 제가 주님께 예배드리게 해 주십시오.”(1사무 15,24-25)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울이 하느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였기에 이미 하느님께서도 그를 내치신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 사무엘을 사울이 붙잡다가 공교롭게 사무엘의 겉옷 자락이 찢어지게 되었지요. 사무엘은 이 일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며 하느님의 결정을 전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 … 그분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1사무 15,28-29) 그럼에도 사울은 또 간청하였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만, 제 백성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제발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 저와 함께 돌아가시어, 제가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예배드리게 해 주십시오.”(1사무 15,30)
그리하여 사울이 사무엘과 동행하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살려준 아말렉 임금 아각을 죽이게 하였고, 라마로 돌아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무엘은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은 사제가 아니면서도 하느님께 번제물을 바쳤고 완전봉헌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사무엘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는 책망을 듣고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울은 임금으로서 백성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분의 용서를 받는 일이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으러 길을 떠나되, 이를 사울이 알지 못하도록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길을 나서는 체하며 ‘이사이’의 아들들과 베들레헴 성읍의 원로들을 제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의 명에 따라 이사이가 일곱 아들을 보였지만,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는 사무엘의 생각과는 다른 아이 다윗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형들 한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니 하느님의 영이 내려와 머물렀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사람들처럼 보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우리의 생각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겉모양만 보고 쉽게 판단하려는 자신을 자각하며,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께 올바른 인식을 주십사 겸허한 청을 드렸으면 합니다.
소년 다윗이 사울 왕을 섬기다
하느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고 이제 악령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악령을 달래기 위해 비파를 탈 사람을 구하자는 요청을 임금에게 드렸고, 이에 양을 치던 다윗 소년이 적임자로 불려 왔습니다. 신하들은 이때 다윗을 천거하며, 그를 비파를 잘 타는 재주가 있는 사람, 풍채가 좋은 힘센 장사이자 전사, 언변이 좋은 사람, 게다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울에게 불려 와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고 특별한 사랑을 받아 그의 무기병이 되었습니다. 악령이 사울을 괴롭힐 때면 다윗은 비파를 타 그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골리앗을 눕혀버린 다윗
필리스티아인들이 군대를 소집하여 이스라엘군을 치러 올라왔고, 양쪽 군대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높은 곳에 대열을 갖추었습니다. 필리스티아 진영에서 거인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아버지의 분부를 받고 전장에 나가 있던 형들을 위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울분을 토했고,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모하게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소년 다윗을 만류하는 사울에게 다윗이 말하였습니다. “그(골리앗)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전열을 모욕하였습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1사무 17,36-37)
확고한 자세로 사울의 허락을 받은 다윗은 사울이 하사하는 갑옷을 만류한 채 겨우 막대기 1개, 돌멩이 5개와 무릿매 끈만 지니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골리앗 장수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사무 17,46-47)
다윗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골리앗을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리고 목을 치자 필리스티아인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고, 도망가는 그들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사들이 뒤쫓아 가며 공격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사울 앞에 나아가 말하였습니다. “저는 베들레헴 사람, 임금님의 종 이사이의 아들입니다.”(1사무 17,58)
소년 다윗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이란 하느님께 달린 일’이라는 깨달음으로 막대기와 돌멩이를 들고 용감하게 거인에게 맞섰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선 다윗의 믿음과 용맹을 보며 기도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다윗처럼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갈 용기를 주소서!”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질투
사울은 그날부터 다윗을 왕궁에 붙잡아 두었는데,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다윗에게 마음이 끌리어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출전하여 승리하였고,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군인들을 통솔하는 직책을 맡겼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말로 다윗을 자신과 비교하여 칭송하자 이제 자신의 왕위마저 뺏길 것을 염려하여 다윗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울은 비파를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지며 살의를 드러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시도가 실패하자, 사울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다윗에게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앞에 나서서 출전하는 다윗을 좋아하였습니다.
사울은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다윗을 질투하였습니다. 사울은 능력 충만한 신하를 시기하여 적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는 나라면 그를 제대로 바라볼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미움으로 눈이 멀게 된 나머지 자칫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지도 모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