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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14) 신학과 경륜(經綸) -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
제목을 보고 신부님들이나 신학 공부를 하셨던 분들이라면 ‘아, 저거 삼위일체 배울 때 참 많이 들었던 용어지’라는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살짝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 분들도 있으시겠죠. 다른 교우분들은 ‘삼위일체만 이야기해도 어려운데 내재적이니 구원경륜(경륜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다스림, 또는 그런 능력입니다)적이니 하는 말은 또 뭔데 붙어서 더 어렵게 만드나’ 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내재적, 구원경륜적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신비에 접근하고 그것을 설명해 온 두 가지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세 위격이시다”와 같이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신비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성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이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는 사실과 같이 인간이 역사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물을 예로 들어볼까 합니다. 인간은 흐르는 강, 내리는 비처럼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물을 체험합니다. 목이 마르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며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것도 알고, 더러운 것을 씻어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물에 대한 경험이 쌓이며 물에 대한 지식도 늘어갑니다. 물 자체에 대해 연구도 하기 시작합니다. 온도 변화에 따라 물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도 알고 수소와 산소가 결합되어 있다는 물의 분자 구조 같은 것도 알며 물이라는 것에 대해 학문적으로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시작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삼위의 하느님으로, 그러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유일하신데 세 분으로 체험된 이 문제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정리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기에 다양한 생각들이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이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는 이 과정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이단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개념들을 활용하여 올바른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믿을 교리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어려운 신학적 설명을 들으며 ‘이런 건 난 모르겠으니 그냥 믿으면 되고 신학 하시는 분들이나 알아서 하시겠지’란 마음을 먹는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우리 삶에 잘 와닿지 않는 학문적인 설명보다 우리의 구체적 삶 안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만,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는 분리되어선 안 되며 사실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신학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를, 경륜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모든 업적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업적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비가 그분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밝혀준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6항).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주보(主保) 성인
주보 성인은 하느님 앞에서 신자 개인 또는 한 공동체를 중재하고 보호하는 수호자로 정한 성인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인 성녀 중 각자 공경하는 분을 정해 주보로 모시고 특별한 보호를 청하면서 그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때, 자신이 공경할 성인 성녀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습니다. 때로는 삼위일체 하느님, 예수님의 생애나 이름, 성령, 성모님의 칭호, 천사의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주보 성인을 모시는 신학적 근거는 ‘모든 성인의 통공’(2코린 13,13) 교리와 하느님 백성 각자는 예수님 안에서 저마다 고유한 역할을 맡는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1코린 1,9; 10,16; 12,13) 교리입니다. 교회에서 주보 성인을 정하여 공경한 것은 4세기 초부터입니다. 당시에는 주로 사도나 순교자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는데, 특히 순교자의 경우 무덤이나 유해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다 545년 라벤나 교회를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하면서부터 천사들도 주보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를 도시의 주보 성인으로 정해 공경한 최초의 사람은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339?~397)입니다. 그는 그 도시에서 순교한 성 제르바시오(Gervasius)와 프로타시오(Protasius)를 386년에 밀라노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후, 400년경에는 주보 성인의 개념이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주보 성인으로 선정되는 기준이 순교자 유해의 안치 여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은 점차 느슨해져 나중에는 ‘그 지역과 관련된 성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예로, 밀라노의 주보 성인은 훗날 성 암브로시오로 바뀌었고, 이탈리아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경우 성 루도비코였으나, 1922년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와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로 정해졌습니다.
우리 교구의 주보 성인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입니다. 예전에는 7월 5일 김대건 신부님의 경축일을 ‘대축일’로 지냈지만, 같은 성인의 축일을 동일하게 두 번 지낼 수 없다는 지침에 따라 9월 20일에만 한국 순교자들 ‘대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7월 5일 미사를 ‘신심(기원) 제1등급’ 곧 대축일 급으로 지낼 수 있게 결정하였고, 우리 교구는 오늘 교구의 주보 성인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신심 미사를 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참고로, 20년 전 2004년 6월 24일 의정부교구의 설립을 알리는 칙서가 나왔을 때, 이를 주한 교황대사관과 서울대교구에서 공식 발표한 날이 바로 7월 5일이었습니다. 오늘 의정부교구의 주보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경축 이동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교구의 모든 신자를 끊임없이 축복해주시도록 김대건 신부님께 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가톨릭 신학] 산들이 주님 앞에서 흘러내렸습니다(판관 5,5ㄱ)
유변학(流變學)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고체가 액체처럼 흐르거나 변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유변학에서 사용하는 개념 중에 ‘드보라의 수’(Deborah number)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물체가 변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관찰 시간으로 나눈 값으로, 그 숫자가 1보다 많이 크면 물체가 변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그 물체는 고체에 가까운 특성을 갖는다는 뜻의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한 시간 단위로 관찰했는데, 그 물체가 열 시간이 걸려 변화했다면, ‘드보라의 수’의 값은 1보다 큰 10이기 때문에 고체에 가까운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개념을 처음 제안한 마르쿠스 라이너(Markus Reiner)는 판관 드보라가 부른 노래(판관 5,5ㄱ)에서 그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드보라의 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판관 5,5는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시나이의 그분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판관 드보라가 가나안 임금 야빈과 싸워 이긴 후에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 중 일부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우리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5절의 앞부분입니다.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여기에서 ‘떨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nāzal)입니다. 이 동사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떨다/흔들리다’(to quake)이고 다른 하나는 ‘흐르다’(to flow)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번역도 가능합니다. “산들이 주님 앞에서 흘러내렸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영어 성경들이 이러한 번역을 선택합니다. [예) “The mountains flowed with water at the presence of the Lord.”(NASB)] 이 두 번째 번역을 보면, 어떻게 이 구절이 유변학과 연결될 수 있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보라의 수’라는 개념 안에서는, 산도 흘러내릴 수 있습니다. 관찰 시간을 아주 오랜 기간으로 늘리면, 산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관찰 시간을 변화시켜 의미를 찾는다’는 관점은 신앙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지나고 보니 하느님의 뜻이었다.” 일상의 짧은 순간에는 하느님의 뜻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간을 조금만 더 길게 본다면, 당시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의 손길을 나중에라도 느끼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산을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거대한 산도 조금씩 계속 변화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던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 주고 계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해도 언제나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며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건 못 참지] (8) ‘감사합니다’와 ‘찬미합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과 기쁜 소식에 감사 · 찬미
“선생님, 독서 말씀 끝에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응답하고 복음 말씀 끝에는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응답하나요? 똑같이 하면 안 되나요?” 전례부 학생이 제게 묻습니다.
그렇지요. 똑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왜 다르게 하는지 예전에 저도 참 궁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미사로 들어가는 말씀 전례 부분 중 ‘독서·화답송·복음 환호송·복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말씀 전례의 중심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잘 읽고, 잘 응답하는 예절로, 말씀이 백성에게 선포되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예식의 한 부분입니다. 독서자의 입을 통해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지금 직접 나에게 해주시는 시간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서는 평일엔 한 번, 주일과 대축일에는 두 번 봉독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말씀의 풍성함을 나누는 시간으로, 전례 시기와 축일 등 해당 시기와 조화를 이루며, 그 시기의 특징과 익혀야 할 내용을 반영하는 말씀으로 구성됩니다.
제1독서는 신약의 일을 보여준, 그날 복음과 관련된 내용을 구약성경에서 선택합니다.
제2독서는 복음 말씀 생활화와 관련된 사도들의 서간(편지글)을 선택합니다.
화답송은 성경 말씀을 듣고 외치는 응답의 노래이며 독서와 관련된 내용으로, 구약성경의 ‘시편’에서 인용합니다.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은, 매 주일은 작은 부활 축제로서 주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와 기쁨의 날이기에, 우리는 알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를 외치는 것입니다.
또 잠시 후 선포될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복음(기쁜 소식, 곧 예수 그리스도)을 받아들여 깊이 새겨 둘 준비를 하게 합니다.
복음서는 3년을 주기로 가해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는 루카 복음서가 선택됩니다. 요한 복음서는 매년 전례 시기에 맞춰 선택합니다.
독서를 봉독할 때 “○○○의 말씀입니다”라고 밝히는 이유는 저자, 또는 성경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어떻게 이해되고 체험되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독서자가 독서를 마치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응답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과 지혜를 비춰주셨음에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사제가 복음 선포 끝 부분에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면,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에 찬미로 응답하는 것으로,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말씀 전례의 최고 절정입니다. 사제가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하면, 신자들은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응답하면서 ‘이마·입술·가슴’에 작은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들을 들으면서 우리도 복음을 머리로 깨닫고, 입으로 고백하여 말씀을 전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생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말씀이며, 그리스도 자신의 상징으로 보기에 부제와 사제만 선포합니다. 신자는 복음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어서서 복음을 듣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1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삼위일체 하느님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에 바치는 성호경의 내용,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가 그것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만(특히 식사 전에) 무의식적으로 순식간에 할 때도 많아서 그 의미를 별로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 자체가 하나의 기도문이라는 것도 잊은 채 손은 이미 이마를 거쳐 가슴을 지나는 가운데 순식간에 외워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처음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세례를 시작으로 모든 성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집니다. 최근 교황청 신앙교리부에서는 성사 집행에 규정된 ‘동작과 말’에 대한 설명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하는 전례문을 집전 사제가 임의로 바꾸어 “창조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라는 식처럼 한다면 그 세례는 무효이며, 만약 그런 세례를 받은 이가 견진을 받는 경우 심지어 사제품을 받아도 모두 무효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미국에서 실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신 하느님이심이 표현되어야 하며, “이름들”이 아닌 “이름”으로 한 분 하느님께서만 계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3항)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계시의 내용이며 우리의 신앙 고백인 만큼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들에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신앙 진리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며, 다른 신비들을 비추는 빛(가톨릭 교회 교리서, 234항)으로 어떤 것들이 신앙 진리인지를 밝혀 주는 기준이 되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어렵다, 인간은 본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저 믿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저 믿어야 한다며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 신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막아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창조 업적과 구약의 계시 안에 그 자취를 남겨 두시고,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파견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계시하여 주신(가톨릭 교회 교리서 237항) 이 신비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해 온 결과들을 마주하며 정말로 내가 무엇을 내 신앙이라고 고백하는가, 나는 매일 무슨 기도를 바치며 살고 있는가를 의식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짧은 지면에 삼위일체 신비를 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며 자칫 쉽게 표현하려다 오해를 낳을 수도 있기에 제게도 조심스러운 작업입니다. 여기에서는 교리 지식에 대한 우리의 ‘문해력’을 높여보자는 것이 목적이니 교회가 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신앙 교리를 정형화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여러 신학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중심으로 우리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작업을 함께해보려고 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
오늘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을 통한 일치를 도모하고자 정한 교황 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30년경부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냈는데, 현재는 6월 29일 대축일에 가까운 주일로 정해 지내고 있습니다.
교황을 가리키는 라틴어 ‘Papa’는 본래 주교나 대수도원장 또는 총대주교 등 지역 교회의 최고 장상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 8세기 이후 차츰 교황에게만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 재위) 때부터는 교황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 「교황청 연감」 (Annuario Pontificio)에서는 교황을 ‘로마의 주교’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서방 교회의 최고 사제’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 대주교’ ‘바티칸 시국의 원수’로 표현합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단의 으뜸으로 세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는 교회 공동체의 대표로서 하느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역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42~43년 로마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고 그곳에서 자신의 첫 번째 편지를 썼으며(1베드 5,13 참조)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64년 순교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권위와 책임을 계승하는 이로 인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266대 교황입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직무를 이어받아 예언직과 사제직과 왕직을 수행하며 그에 따라 교도권(敎導權), 신품권(神品權), 통치권(統治權)을 갖습니다. 그중 교도권과 관련하여, 교황은 가르침에 있어 ‘무류권’(無謬權)을 갖습니다. 이는 교황이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최종 결정을 사도좌에서(Ex cathedra) 공식적으로 선언하면 그 내용에 오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단, 여기서 개별 교구장이나 개인 학자의 자격으로 주장하는 것에까지 오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모든 신앙인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일치의 토대가 되어 전 세계 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실 수 있게 그분께 필요한 힘과 용기를 내려주십사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의 질서(창조 신학)
지난 달 신학교 환경 동아리 학생들과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예술과 전시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작가들의 메시지가 어렵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모든 시각 장치들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파괴 행위와 환경을 저버린 무관심의 대가를 표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감상은 전시공간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진전에서 본 작품들이 보여준 모습은 환경 파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참혹하고 복잡한 여운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문제의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왜 지구의 신음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일까? 어쩌면 위기 해결을 위한 방식과 접근 자체에서 아예 맥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닐까?’
환경 전문가들은 제멋대로 자연을 개발하는 인간의 욕심이 기후 위기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위임받았다는 성경의 내용(창세 1,28; 2,15 참조)이 자연을 도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요. 인격적인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인간을 우상시하고 자연을 도외시하는 문화를 만들었으니, 인간과 자연 사이에 위계를 없애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창조 신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한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모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이끌고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5항 참조) 이러한 ‘신앙적 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만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거나, 반대로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나 비관론적 체념으로 정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시회를 개최한 작가들이나 사진 속 환경운동가들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살리고자 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할지라도 올바른 인간관이 무너지면 안 될 것입니다. 환경 전문가들은 이제 곧 지구의 기후는 회복 불가능한 위기에 봉착한다고 경고합니다. 반복된 경고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디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생태계의 보존과 쇄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 회심하고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창조 질서 수호에 힘쓰는 인간의 활동과 협력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질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에 있을 때 제 목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