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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계명 -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20: 4-6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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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1계명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4절부터 시작되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2계명을 배우겠습니다.
이 두 계명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 계명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언급이고, 둘째 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언급으로, 하나님을 섬기되 헛된 방법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고 ‘이것이 우리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된다.’ 하면서 섬기는 것은 제2계명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 계명이 거짓된 신을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면, 제 2계명은 거짓된 예배를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 20:23에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비겨서”라는 말은 “나를 만든답시고” 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우상을 만든다면 대략 세 가지 용도에서 만들게 됩니다.
☛하나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부처상을 만드는 것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숭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인천상륙작전을 했던 곳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들어서 세운 것이나 세종로 사거리에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만들어 세운 것, 한글 창시자 세종대왕 동상 등입니다. 이런 조각을 세우는 이유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을 후대 사람들이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동기로 조각을 합니다.
로마에 가면 대리석으로 다윗을 조각한 다빈치의 조각품도 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존재들도 볼 수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교육적인 목적이나 예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활동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모세 시대에 예배의 처소로서 성막이나 성전이 만들어 질 때 주님은 브사렐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재능을 주셔서 여러 예술 작품을 만들게 하신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모세도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고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될 때가 문제인 것입니다.
옛날의 왕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왕이 단순히 정치적인 총수가 아니라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하든지 혹은 신격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왕인 바로는 태양신의 아들일 뿐 아니라 신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중국의 황제는 천자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큰 신상을 세우고 모든 신하들에게 그 신상에게 절하라고 명했습니다. 북한에는 곳곳에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통치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종교의 힘을 이용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정치적인 힘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왕이나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마음까지 지배하고 싶어서 종교적인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것이 왕이나 지도자의 동상을 세우고 그것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태국에는 푸미폰 국왕의 사진이 동네마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있고 거기에 합장하여 예를 표하고 꽃을 바칩니다. 왕의 동상만 보고도 황제가 거기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고 그 동상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고 상상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사진만 보고도 부모님이 집에 계신 것 같아서, 그 사진 앞에 엎드려 절 합니다. 어떤 집은 하도 부부싸움을 하도 많이 해서, 나중에는 식탁 벽에 예수님 그림을 붙여 놓았더니 덜 싸웠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이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어떠한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단호하게 당신을 새겨 만들지 못하게 명령하셨을까요?
더 놀라운 것은 이 두 번째 명령을 하시면서 저주와 축복을 덧붙여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간주해서 삼 사대까지 벌을 주시고, 대신에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므로 천대까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이 둘째 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을까요?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자기의 형상을 여러 곳에 세워 놓는 이유는 자기가 실제로 거기에 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허수아비를 세워 놓는 이유는 자기가 항상 거기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다른 논에도 가야 하는데 새가 날아오니 자기 대신에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것입니다. 만약 농부가 언제나 그 밭에 있을 수가 있다면, 그런 바보 같은 허수아비를 세워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창조주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조물주이시고, 우리는 하늘의 별들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한 손바닥에 놓으시고 관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 우주가 너무나 좁은 공간일 뿐입니다.
시139:7-10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나님 몰래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무엇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을 형상화 한다면, 형상 앞에서는 엄숙한 체하고 거룩한 체하지만, 그 앞을 벗어나면 다시 흐트러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외식주의 신앙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형상화 하면 그 형상은 그곳만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전락하게 되고, 곳곳마다 형상이 필요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 형상이 서있는 지역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 신 취급을 받습니다.
페루, 칠레, 브라질, 필리핀,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을 가보면 이런 성상들을 집에도, 산에도, 성당에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이런 인간의 짓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모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모독하는 커다란 죄가 되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런데 신약성경은 이런 우상이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골3:5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상을 우리 마음속에서도 만들어 낼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상이란 내마음과 내존재를 사로잡아 참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고 오직 우리로 그것만을 탐하게 하는 일체의 탐욕이 모두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우상 공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에 절대로 형상화해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 상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신을 새기는 이유는 자기의 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세웁니다. 신은 많은 사람을 도와야 하니까 손이 많겠지 하고 수많은 손을 붙여놓았고, 신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겠지 하면서 길게 째진 실눈을 그려 넣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모양을 가진 물체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필요가 없이 자신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말씀으로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완전히 거룩하신 분이며, 그분은 우리와 같은 눈을 갖지 아니하셨으나 빛을 만드셨고 모든 것을 다 살피시는 전지하신 분이며, 그분은 우리와 같은 팔을 갖지 아니하셨으나 온 세상을 주도면밀하게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의 상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발상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하신 것은 결국 그것을 숭배하게 되기 때문 입니다.
5절 “그것들(가시적 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얼마나 하나님이 단적으로 우상예배를 싫어하시는 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세계 모든 고급 종교들가운데 유독 유대교와 기독교(특히 개신교)전통이 신(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 배경이 되어 온 것입니다.
성상을 옹호하는 정교회나 오늘의 카톨릭 전통은 이런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모든 시간마다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신 주님-그 주님을 내가 직접 뵙고 경험할수 있는데 꼭 예배의 대상으로서 성상이 필요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배후 저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본당 후면 복도에 서있는 제게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저 뒤에 서있는 저를 지나쳐 제 사무실로 들어가 오피스 구석에 있는 제 사진앞에 가서 인사하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좀 이상하다 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매주 교회 올 때마다 제 사진 앞에서 인사하고 뭐라고 중얼 거리며 그 일을 만일 계속하는 분이 계시다면 …. 그때 그 사진은 더 이상 사진이 아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3. 모든 피조물은 인간 보다도 못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나 땅의 짐승이나 바다 속의 어떤 물고기 형상이라도 그런 것들이 신비한 것 같이 보여도 우리 인간보다도 못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섬기면 우리가 얼마나 유치해지는 것입니까? 더구나 그런 하찮은 피조물을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때 산 아래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죽으면 하나님도 죽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제는 자기들을 인도해 줄 신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면서 아론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말대로 금 고리, 팔찌들을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는, 이 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준 신이라고 하고, 그 송아지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키우다가 잡아먹는 송아지처럼 생겼을까요? 이런 상상과 조각하는 일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악입니다.
여러분이 찍은 사진 중에 아주 마음에 들지 않고 괴상하게 나온 경우 어떻게 합니까? 그 사진을 남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줍니까? 아니면 찢어버립니까? 그게 짐승의 얼굴이 아니라 분명히 자기 자신의 얼굴인데도 조금만 잘 못 나와도 기분 나빠서 찢어버리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데,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물건처럼 만들어 세워놓고 ‘이게 하나님이다. 이걸로 하나님을 상징하자’ 하면, 하나님께서 기분 좋으실까요?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죄악입니다. 창조주 이신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손으로, 다른 피조물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실 수 없는 모독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엄히 금하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요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남미의 카톨릭은 완전히 우상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말씀은 사라지고 형상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도 예배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로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일부 교단들에서 강단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제단상이라는 것을 강단 뒤에 두고, 설교하는 단은 좌우로 물리쳤습니다. 제단 상 양편에 촛대를 설치하고 강단 뒷벽의 조명 비취는 십자가를 달고, 그 아래 커다란 성경을 진열하는 교회들이 늘어납니다. 이것은 제 2계명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행위로, 우상 만들기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거의 틀림없이 말씀을 덜 중시합니다.
아마 우리교회도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강단에 안치하면,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 입니다. 교회는 금방 숫적으로 부흥할 것입니다. 신이 없다는 불교에도 보이는 불상을 세워놓으니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가서 절하며 빌고 재산을 바치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교회에 안치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겠습니까?
삼위 하나님을 각각 새겨 만들되, 성부 하나님은 보기만 해도 자기 죄가 떠오르도록 두렵게 만들고, 성자 예수님은 내 모든 죄와 고통과 짐을 다 짊어지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만들고, 성령님은 누구나 찾아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형상으로 만들어 강단 뒤에 안치하면, 목사님이 설교를 죽을 쑨다 해도 상관없이…하나님을 만나 기도하려고 목욕 재개한 선남선녀들이 줄줄이 찾아와서 천번만번 절하면서 하나님 앞에 복을 기원하고 헌금을 바칠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무언가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아시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고 제 2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게 남기셨으나 당신의 형상이나 유품은 단 한 점도 남기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약에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 조각이나 주님의 피 묻은 수의가 남아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만지고 그것 앞에 가서 절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유품은 다 거짓말, 사기)
이 계명이 예배당을 깨끗이 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강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나, 꽃 등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허례에 이르지 아니하는 한에서 귀한 것입니다. 교회의 강단은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아니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돌아가서,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편의주의 신앙생활을 하려는 얄팍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언제든지 우리를 완전하게 주관하기를 원하십니다. 밤이나 낮이나,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그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주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나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두렵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떼어 놓을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한곳에 세워놓으면 내가 원할 때만 만날 수 있고 원하지 않을 때는 찾아가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 앞에 갔을 때에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되고 거기서 벗어나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로 만들어 놓으면 그 하나님은 내 안방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내 침상에서 일어나는 음모에 대하여는 모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액자로 만들어서 벽에 걸어놓으면 내가 출근 할 때 따라오지 못할 것이고 직장에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들어 일정 장소에 놔두면 그런 편리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악한 마음으로 신을 형상화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악한 시도이고 그것은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과 재능과 모든 것을 주신분이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형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 말씀을 내 마음에 항상 품고 순종하며 살면, 내 삶과 행위를 하나님이 주관해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질투가 무엇입니까? 질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내 남편 곁에 어떤 여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남편은 나만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의 주변에 다른 남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아내는 나만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사이에 무엇이 끼어들면 질투와 분노가 생기고 살인까지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속이 좁고 옹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하여 질투를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서 우리 같은 피조물의 사랑을 받으려고 질투까지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와 당신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당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죄와 형벌 속에서 형편없이 망가진 것을 건져주셨고 씻어주셨고, 너는 내 것이라고 당신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훨씬 진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당신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 하나님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어떤 행위도 금지하신 것입니다. 이 계명을 바로 지키려면, 요4장24절과 롬12장1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형식과 형상숭배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원문을 더 정확히 번역하면 ‘성령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응답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12:1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영적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받고 돌아가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로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사무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가르쳤습니다. 미가선지자도 “일 년 된 수양이나 천 천의 강수 같은 짐승의 기름이나 맏아들의 생명을 드리는 것보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6:6-8)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상앞에서 신을 상상하면서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전을 벗어나면 해방된 기분으로 제멋대로 사는 삶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태도이므로, 그런 사람을 질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의미의 신앙의 상징까지도 우리는 우상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우리 교회에 방문하시는 분들이 우리 교회에 십자가 표시가 없다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경배할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에 딸들에게 값비싼 십자가 목걸이는 사주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살아계신 주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자가 되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신앙교육은 실패한 것입니다.
공식예배를 통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고, 돌아가서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참 예배이고, 그런 사람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순종하여 날마다 산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주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 경고를 압도하는 은혜의 약속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장에 보면 인간의 지혜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2장에 보면 인생이 추구하는 일체의 즐거움, 쾌락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3장에 보면 인간의 모든 기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4장에 보면 권력과 성취의 헛됨을 말합니다.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꿈의 허무를 말합니다. 6장에 보면 재물의 헛됨, 욕망의 헛됨을 말합니다.--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외(존경)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들의 사랑의 고백을 위한 엎드림-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가 청년의 때부터 그렇게 할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전12:13에 “일의 결국(결론)은--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6절을 읽어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의 명을 따르는 것은 저주스런 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명을 따르는 것은 신명나는 일입니다.
요일5:3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라면 사랑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온 몸으로….
이런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못할 일이 없는 순종의 각오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 이런 예배를 드려 보셨습니까? 이런 예배가 갈망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물으셔야 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혹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은밀한 신을 예배하는 분은 아니신지요?
우리가 만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리대신 다른 소리를 듣고(돈,출세,인기) 있다면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나님의 예배자라고 할수 있을까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기 배우자와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자신의 마음은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버렸다면 그가 어떻게 부부의 진정한 사랑의 감격에 빠질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른 어떤 일의 성공보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른 어떤 유산을 남기기 보다 예배의 영광을 물려주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이땅의 성도들의 모든 가정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 땅과 이 역사를 고치시고 치유하실 것을 믿습니다. 살아있는 예배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