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 목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날은 동방 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 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새로운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사랑과 공경함으로 효성을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효자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그래서 효경을 배우거나 효경에 있는 말을 해석 할 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효경의 오묘한 이치를 부분적으로나마 해석할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스스로 해석한 부분에다 살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모두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가는 것은 이제야 겨우 철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희망이며 간절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면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겁을 내고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희망적인 말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용기를 가지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오.” 솟아날 구멍은 정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기적처럼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이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말은 궁지에 빠진 사람들이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는 비참한 좌절의 순간에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기회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래의 말은 “하늘이 무너져도 효자(孝子)날 구멍 있다.”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하늘이 무너지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살아날 사람이 있으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효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효자만 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는답니다. 그러나 유독 하느님께서는 효자(孝子)만 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자’를 발음하면 일반적으로 구개음화(口蓋音化)법칙이 있어서 ‘효자’는 ‘소자’로 발음되고, ‘형’은 ‘성’으로 발음되고, ‘흉’은 ‘숭’으로 발음되곤 합니다. 그런데 '효자가 소자'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무식하게도 ‘솟아날’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사상과 충효사상을 강조한 세상에서 정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효자로 살았는지에 대한 말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효자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과 생각을 잘 아는 사람들은 드물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효성스러운 자녀가 될 수 있는지는 모두의 숙제입니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을 삭제하고,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생각하면서 효의 개념도 바뀌고, 신앙의 가치관도 바뀌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 많은 것들이 삭제 당하고, 많은 가치들이 사장(死藏)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효성은 낡은 가치관으로 알고 있고, 무엇이 효도인지 구별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었으며, 어쩌면 효에 대한 많은 것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효성의 개념을 만들어가고, 그런 가치관을 사람들은 키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또 새로운 효도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효도의 수준에 자신을 계속해서 맞추어 살아야 하는 도전을 계속하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효자로서 선별되어 살아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효경 제2장 天子章(천자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子曰 ; 愛親者不敢惡於人(자왈 ; 애친자불감오어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감히 미워하지 아니하고 敬親者不敢慢於人(경친자불감만어인)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은 남을 감히 업신여기지 아니한다. 愛敬盡於事親(애경진어사친) 사랑과 공경함으로 어버이를 섬기는데 다 한다면 而德敎加於百姓(이덕교가어백성) 이 도덕적 가르침이 모든 백성에게까지 미쳐서 刑於四海(형어사해) 천하에 모범이 되니 蓋天子之孝也(개천자지효야) 이것이 천자의 효도이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딸들이니 이 효경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사랑과 공경함으로 효성스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새로운 효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지만 그 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효자의 가치기준은 사랑을 얼마나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사랑을 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효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들은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식들은 사랑을 받기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효도의 기준이 부모들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고, 누이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효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모에게 효자도 되지 못했고,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하였으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많이 우울하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