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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K 생각] ㅡ 윤석열 분석
1. 사적인 인간
공적 마인드가 결핍된 지나치도록 사적인 인간이 윤석열이란 사람이다.
은밀한 사적 거래를 관계 개선이나 문제 해결에 자주 사용하려는 습성이 있다.
검찰총장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어떤 의원이 김건희씨 관련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하자, 멋쩍게 웃으며 나중에 사적으로 만나 알려드릴 수 있다고, 국회라는 공적 자리에서 말하는 걸 보며,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 점점 확신으로 굳어진다.
2. 통치 수단 : 회유와 협박
윤 대통령의 통치 수단은 한 마디로 회유와 협박이다. 굳이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권력을 사용해서 당근과 채찍으로 군림하려는 속셈이다. 결코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지기 밑에서 기면 한몫 챙겨주고, 거절하거나 반항하면 제거하거나 가족 친지 지인들까지 괴롭힌다.
따라서 협치와 설득의 정치는 완전히 실종이다.
3. 정책 판단 : 탑다운 방식
윤 대통령의 정책적 판단은 매사 즉흥적이다. 기분에 좌우되어 정책 결정을 하다보니 시스템을 자주 먹통으로 만들게 된다.
한 개인의 판단이 정부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철저히 탑다운 방식으로, 국민 의견을 듣고 합의를 얻는 보텀업 방식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4. 포악한 성정
화를 자주 내고 참을 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입도 뻥긋 못하게 한다. 사람을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일부 가까운 인사들에게만 후하고, 나머지 인사들은 언제든 토사구팽의 대상이다.
오기와 아집으로 이루어진 기본 성정이 보복심이다.
5. 약점
칼(권력)을 주면 주는 대로 마음껏 휘두르려 하기에, 마음껏 휘두르라고 이것저것 던져주면 자기 기분에 취해 살인마(폭정)가 되어가, 종내엔 마을(민심)에서 쫓겨난다.
6. 용기 없는 비겁함
들리는 소문으론, 부부싸움에서 멱살잡이 보다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문제 처리 방식도, 직접 대응하기 보다는 제3자를 시켜 행사하는 스타일이다. 검언유착 고발사주 사건이 그 대표적이다.
그리고 문제가 확산되면, 본인은 뒤로 빠지고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스타일이다. "날리면" 사건이 대표적이다.
7. 인생의 말로
추측컨대, 말로가 그리 아름답지 않을 것 같다.
2. 2023년
[K 생각] ㅡ 윤석열 분석 (2)
1. 문재인 대통령의 용병술 -1
한때 "문모닝!"이란 말이 유행했다. 박지원 의원이 하루가 멀다하고 문재인 정부를 때렸다. 박 의원의 비판이 아침 인사처럼 매일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박지원 의원을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겨우 입막음으로?
문 대통령은 사적인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공적인 사람이다. 추측컨대,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정부 비판하는 그 큰 에너지로 당신께서 직접 정부의 일원이 되셔서 일을 맡아서 해주시오."
그 후로 정부는 더 잘 돌아갔다고 보였다.
박지원 전 원장이 국정원장이 되어서 사심을 품고 사적으로 움직였다고 보진 않는다.
공적으로 열심히 일하셨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박 원장으로선 얼마나 초라해지실까. 그러진 않으셨으리라.
2. 문 대통령의 용병술 -2
윤석열 검찰총장 중심으로 "검란"이라 해서 한참 시끄러울 때,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셨다.
"우리 윤석열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입니다."
단순히 검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였을까? 추측컨대, 이런 뜻이었을 터이다.
"당신은 정부를 같이 이끌어가는 정부 일원으로서,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봐주시기 바랍니다."
젊고 힘이 세다고 늙고 힘 없는 아비 앞에서 근육 자랑, 힘 자랑하는 자식이 있을까? 그건 패륜이고, 공적으로는 역심이고 반란 아닐까?
그러나 윤 총장은 자기 힘을 앞세워 그의 무도함을 멈추질 않았었다.
대통령이 해외 방문을 할 때마다 청와대를 압수수색한다고 설쳐댔다. 막장 정치 드라마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3. 윤석열의 정치
문재인 정부에서 역심을 키워가며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역심을 키워준 게 김건희씨였는 지, 천공이었는 지, 아니면 원래부터 반골의 두상을 지녔는 지는 모르겠으나, 정치는 근육이나 힘을 가지고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국민들도 많이 계몽되었고, 민주주의도 정착 단계를 넘어 원조격인 미국에게조차도
인정받는 선진국의 나라인 고로,
한 개인이나 한 조직이 어쩌지 못하는 두터운 민주주의의 나라다. 그건 이미 2016년에 입증됐다.
지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은 잠시 기분 나쁜 개꿈 한 번 꿨다 생각하리라.
3. 2023년
[K 생각] ㅡ 정경심 판결의 오류
1. "정의(定義)를 내리는 목적은 혼란을 막는 데 있다."는 것이, 정의(定義)에 대한 정의(定義)다.
2. 사전적 정의
사전에서의 사전적 정의는 대개 확장적 나열식이다. A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단어 B나 C를 동원한다. 따라서, 반대어와 동의어 혹은 어원을 찾게 된다.
3. 논리적 정의
논리적 정의는, 외연적 정의가 아니라, 내포적 정의로서 '유와 종차에 의한 정의'라고 불린다. 즉,
"햄버거는, 맥도널드, 웬디스, 버거킹 등이다."라고 할 때 외연적 정의에 해당하고, 가리키는 범위를 나열하게 된다.
단, 이 때 누군가 샌드위치를 가져와서 햄버거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한동훈 같이 기본이 안 되어있는 자가 대개 그렇다.
"등(等)"이란 말이 있으니 샌드위치도 햄버거가 된다는 억지 주장으로, 혼동을 막기 위해 내리는 정의(定義)를 오히려 혼동을 일으키는 데 악용하는 사례다.
"햄버거는, 패트, 양파, 치즈 등을 빵 사이에 넣은 패스트푸드다."라고 할 때 내포적 정의라 부르며, 공통의 특성으로 설명(정의)한다.
유와 종차에 의한 정의는 내포적 정의의 대표적 정의로서 여기선 생략하는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정의가 널리 인용된다.
4. 설명적 정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선 설명이 필요한데, 비경험적 관념에 관한 설명은 규범(규칙)을 이해하면 된다.
수학처럼 규칙을 알면(이해하면) 되기에, 문제풀이를 하기 전에 수학적 정의를 먼저 이해하게 된다.
경험적 구체적 사물에 대해서는 관찰을 통한 혹은 이론에 의한 설명이 된다. 경험적 과학적 설명이 된다.
5. 과학적 설명 ㅡ '과학지식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체적 담론 안에서의 어떤 문장 혹은 어떤 낱말의 의미는 그 담론을 구성하는 언어의 구문론적syntactics, 의미론적semantics 그리고 화용론적pragmatics 원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유추됨이 입증되고, 또한 한 개별적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만유인력의 물리학적 법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는 사례임이 구체적으로 제시됐을 때 그 현상은 說明되고 따라서 理解된다."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문법, 의미, 실제사용 등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6. 두 개의 오류
ㆍ'정의(定義)에 의한 존재 강요의 오류'
ㆍ'술어적 '이다'와 동일성의 '이다'를 혼동하는 오류'
어떤 존재가 언어로 표시될 수는 있지만, 언어가 있다고 해서 그 존재가 반드시 있는 아니다.
가령, 신(god)은 가장 완전하고 최고로 선하고 최초의 원인이라고 정의했다고 해서 신이 존재한다고 증명되는 게 아닌 것처럼.
7. 인턴과 인턴십
판사가 인턴과 인턴십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민씨는 인턴활동을 했지 체험학습을 한 게 아니라 불법을 저질렀다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조민씨가 제출한 서류는, '인턴 활동 확인서'가 아니라 '인턴십 활동 확인서'였다는 것.
'인턴'과 '인턴십'은 뭐가 다른가?
조민씨는, 회사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다들 받는 보수를 받지 않았고, 학생 신분이면서, 체험활동으로서의 인턴십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제출 서류에도 "인턴십"이라 명기됐고, 교육부 지침서에도 인턴십은 체험활동을 뜻한다고도 되어 있다.
즉, 사전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인턴'과 '인턴십'은 다른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민씨는 불법을 저지른 게 없게 된다.
결국, 판사가 '인턴'이란 잘못된 단어 하나를 가지고, 문법적으로도, 의미로서도, 실제사용에서도, 오판을 해서, 결과적으로 한 젊은이의 인생을 파탄냈다는 결론이 된다.
자료 : 빨간아재
4. 2021년
책임 없는 자유도 자유일까?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그렇고,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램지어 교수에 대한 하버드 총장의 "학문의 자유"란 발언을 통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무엇에 대한 책임이냐고?
일단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겠다.
뻔히 예측 가능한 결과가, 많은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초래하거나,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함으로써 잘못된 길을 가게 할 때, 그것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권리로서 인정해야 하는가다.
학문은 권력을 가르치지 않는다. 순수한 권리를 일깨워줄 뿐이다. 더불어 권리엔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이 함께한다고도 가르친다.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지지해 준 하버드 총장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학교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진실을 좇기는 커녕 오히려 진실을 가리고 왜곡시켜 가짜뉴스들을 연속적이고 대량으로 생산해낸다면, 기능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신(god)의 존재를 믿으며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신과 같은 보편자를 닮으려거나 지향하려는 마음이 안 생긴다면, 법조차 생겨날 여지도 없고 무법천지의 세상에서 짐승들의 축제를 매일 보면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감히 신을 대신하려고자 한다면, 인류에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와 평등의 정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간의 자유나 자유의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학문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파렴치한 짓이다.
인간의 권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음(천부인권)을 망각한 게 아니라면,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자기 마음대로 꺼내 쓰는 것이 아닌 것 또한 알 것이다.
코로나 감영병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태에서 "의료파업"을 연거푸 발설하는 의료계의 의료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의약(醫藥) 역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재능과 재료들임을 뿌리부터 잊은 것 같다. 의료기술이 자기들 재주로만 여기는 풍조가 대세라면 세상은 이미 크게 망가진 것이다.
세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하늘이 의지하는 것을 도외시하고 자기 재주로만 만들려고 하면,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세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상이라는 것이다.
의지로서의 자유는, 자유의 기원에서도 그리고 결과의 예측에서도, 한참 빗나간 행위들이 범람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겠다!
5. 2020년
[신천지와 미래통합당]
미국에선 '신천지'를 소개할 때 "새로운 누리"라고 설명했답니다.
새로운 누리 > 새누리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위장, 위성정당) > 우한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 대구, 경북 > 미래통합당(=새누리통합당)
이와같은 연상 작용은 지나친 비약일까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통합시키는 방편으로 '코로나19'를 선택한 것에 아마도 신천지와 미통당(미래통합당)이 의견일치를 보았나 봅니다.
온 국민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마찬가지로, 정부 비난에만 올인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제가 만난 대구, 경북 사람들 중 문재인 대통령을 욕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제', '북한 퍼주기', 그리고 이젠 '코로나19'로, 단지 미워하는(증오하는) 이유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마치 광란에 가까운 신천지 광신도들 같습니다.
이것이 대구의 재앙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6. 2020년
[기도]
기도는 어떤 효과를 보자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의 참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는 숭고한 아름다움입니다.
기도는 절대자에의 순종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절대자께 늘 겸손할 것을 다짐하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분노와 공포를 다스리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기도는 순수의 표현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한 물음입니다.
기도에는 어떤 기대도 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원망도 담지 않습니다.
기도는 뭔가를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한 사람은 기도를 통해 병들고 곤궁한 사람을 궁휼히 여기며,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다짐합니다.
기도는 작은 힘으로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기도로 이루는 역사는 하느님의 뜻이며, 나의 소망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자연 인과의 고리 속에서도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마음의 불안과 공포를 소멸시키기 위함입니다.
크기의 비례로 하느님을 재단하며 하는 기도는 하느님을 속되게 하는 불경스러움입니다.
오늘 나의 기도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 말고, 하느님의 비난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7. 2019년
[소득주도성장의 역설?]
나라 전체가 침울 모드로 들어 섰다.
최하위층(1분위)의 소득이 17.7% 줄은 반면, 최상위층(5분위)는 10.4% 늘었다는, 즉 양극화(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통계치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모든 언론이 이를 "비극", "참사", "역설" 등으로 일제히 표기했다.
여기서 차분히 생각해 보자.
세계 성장률 침체, 보호무역주의 발호 등으로 수출이 줄어들어 내수로 뒷받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수 마저 흔들리면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악순환 사이클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비를 늘려야 하기에,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높여주는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을 꾀했다. 즉 기업주도, 생산주도가 아닌 가계소득주도인 것이다. 이것이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낙수효과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낙수효과라는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인상키로 한 것이다. 이것이 최저임금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최저임금제가 일자리 늘이기와는 역행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여건이 나빠졌고, 일용직의 고용이 줄어들었다.
한 예로 작년에 160만원 받던 홀리스 프렌차이즈 커피숍 알바 월급이 현재 230만원이 되었다고 한다.
주당 수당과 야근 수당 때문에 임금을 1.5배 지급해야 하는 소기업 고용주의 고민도 들어 있다.
페인트공의 일당은 20만원에서 26만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고용을 늘리기는 커녕 줄여야 할 판이다.
한편으로 편의점 어떤 알바는 월수입이 2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줄었다고 한다. 일 시간수를 3시간씩 줄였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서민들의 고용 상황은 악화됐다.
여기에 인구수는 줄면서 동시에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최빈층(1분위)을 형성하는 건 노령층이 주가 된다.
게다가 4차산업혁명시대로 접어들었다.
일자리는 결코 빈곤층에 맞춰지지 않는다.
또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빈곤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더우기 정부는 올해 혁신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정부의 정책 구조가 최빈곤층 20%의 일자리에 맞춰지지 않는 이유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새 시대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노령화 빈곤층의 일자리는 딜레마 속에 빠져든 것이다.
기술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는 없고 오로지 시간(일당)으로서만 감당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은 그래서 더 소외되기 쉽다.
일할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일률적으로 모두에 적용해야 하는 최저임금제의 딜레마 아닐까?
광주형 일자리를 생각해 보자.
현대차의 경차 공장을 광주에 짓는데, 기업과 지역과 노동자가 협약하는 것이다. 통상 연봉 6천만원을 3천만원, 즉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부분에서 일부 지역과 중앙이 보조해 준다는 것이다.
이 시범 사례가 성공하면 각 지역들 모두 덤벼들 판이다.
또한 북한이 개방되어 북한 노동자의 임금을 결정하는 기본 토대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
애초에 나는 최저임금제의 적용에 있어서 지역별 차등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시행상의 난관이 있었으리라.
내 생각의 근저에는 LA와 뉴욕에서의 경험이 있다.
세탁소 일을 하는데, 뉴욕은 시간당 8불인 반면 LA에서는 10불이었다. 이 때문에 뉴욕에서 LA로 이주한 사람도 있었다.
또 LA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사촌형수는 시간당 임금이 너무 쎄다고 푸념했던 게 기억된다.
어쨌든 최저임금제와 소득주도성장의 단기적 결과만을 보고 정부를 비판하고 나아가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행들이 길을 가다가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한 길을 선택하고 결정해서 한참을 갔는데 계속해서 잘못 왔다고 불평불만들을 쏟아내는 것도 옳지 않다.
문제 없는 상황은 없다.
꽃밭이라고 보장되는 길도 없다.
소득주도성장의 길을 가고 있는데 자꾸만 딴지 걸고 대안도 없이 그 근본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옳지 않다.
정부만의 문제로 보기 보다는 우리 자신 모두의 문제로 보고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가 아이가 잘못을 하게 되면 아이탓만 하면서 야단만 칠 줄 아는 건 어른이 아니다. 집안 전체의 문제로 보고 함께 고민하는 모습이 참어른의 모습인 것이다.
잘못을 잘못 아니게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임 아닌가?
미움과 비난과 증오로서는 어떤 문제도 풀 수 없다.
K / 2025.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