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두려워 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선택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사물이나 식물 또는 동물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이성, 곧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생각으로 인해서 좋고 나쁨 곧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되며 우리는 그것을 통상 자유의지라고 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라는 것이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어떤 원인에 의해서 발생되었으나 순수한 자기 의지라고 착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 의지가 있느냐는 문제는 오랜 역사 가운데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두 사람의 사상을 먼저 고려해 보고 우리가 통상 말하는 자유의지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러한 규정에 의해서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되는 것을 두려워 해야만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참생명을 얻고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자 한다.
Ⅰ자유의지[ 自由意志 , free will]란 무엇인가? 1)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자유를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규정한다. 하나는 정념의 강제로부터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인간의 의지가 정념의 강제에 의하지 않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의지는 정념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찰』에서는 자유를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로 규정한다. 그는 스피노자와 달리 인간의 의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즉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로, 우리가 의지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험은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경험의 대표적인 예로 방법적 회의 과정에서 보여준 자유를 든다. 즉 방법적 회의 과정에서 그는 의지에 따라 명석 판명하게 확실하지 않은 것은 믿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지는 많은 것들을 참이라고 판단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칭찬 또는 비난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선택의 자유를 일부 스콜라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무차별적인 자유(libertas indifferentiae)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의지는 다른 것보다 어떤 특정한 것에 더 기울어질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가 그 기우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선택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지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기운다 하더라도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인간 의지의 선택 능력이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신의 선택 능력 못지않게 무한하다고 말한다. 2) 스피노자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행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먼저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이란 말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말에서 제약과 예속을 떠올린다.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을 깨는 것을 자유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되어 움직인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호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의지란 타의 원인에 의하지 않은 순수한 자기 원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지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개체는 항상 다른 개체들, 즉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들’에 의존하여 실존한다. 개체는 실존하지만 항상 조건부 실존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개체와 환경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자유가 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곧 인과적 필연성의 인식에서 온다. 즉 우리가 그 인과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의 어떤 것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해서 우리가 통상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생각과 선택은 실상 자신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자기 원인에 의한 진정한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생각에 반론을 펴는 하나의 사고 실험이 있다. 쟝 뷔리당이 말했다고 알려진 사고실험으로, 어떤 배고프고 목마른 당나귀가 있다. 그리고 당나귀 앞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동일한 만족을 주는 건초 묶음과 물동이가 놓여져 있다. 하지만 그 당나귀는 자유의지가 없고 계산적 판단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당나귀는 물을 원하는 만큼 건초를 원하고, 건초를 원하는 만큼 물을 원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어서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에게 두 종류의 선택이 서로 다르지만 선택하는 사람이 느끼기에 완전히 동일한 가치의 결과를 낸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충동과 사유로 비롯되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답변으로부터 그가 정의하는 자유의지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정의를 다르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의지란 어떠한 외부적 원인이 존재한다면, 그 원인이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원인이 없는 선택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통상 말하는 자유의지란 그 선택의 원인을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가 순수하게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데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가령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것은 외부적 원인(자신의 욕망과 뱀의 유혹)이 작용했기 때문에,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은 순수한 자유의지의 행사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이성이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을 사용했더라면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국 우리가 통상 말하는 자유의지란 이성으로 인한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이성을 따르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제1원인(신=실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오게 되는 결과들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신학의 예정론이며, 철학이나 과학에 있어서 결정론적 사고관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결정론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그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결정론적 사고를 지지하는 흐름과 반대하는 입장을 간단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Ⅱ과학적 입장 1) 지지 https://youtu.be/PJWTRKUd8Hg 인간의 의식은 단지 뇌세포들의 반응에 불과하다. 고전역학의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물체의 초기 조건이 주어지면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루어진 세상, 인간의 감정과 의지는 초기 조건 즉 빅뱅 시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롭게 마구잡이로 행동한다면 그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글을 읽는 독자의 현재 모습이 0.1초 전의 모습에서 연속된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0.1초 전의 모습에서 연속된 것일 것이고, 이렇게 무한히 과거로 이어진다면, 독자의 현재 모습은 물체가 발생한 어느 시점으로부터 결정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독자는 태어날 때 이미 이 글을 읽는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라플라스의 악마의 악몽'1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뉴톤 역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태는 결정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은 도덕적 일탈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더라도 그것은 초기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양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만일 한쪽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법으로 형벌을 내려야 할 근거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자들은 물질에는 물리적인 법칙이 적용되지만, 인간의 정신이 작용되는 의식에는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뇌과학이 발전하여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도 물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의 의지나 의식조차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물리적 법칙에 종속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따라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까지도 물리적 법칙에 종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데 이 글이 독자의 눈으로 읽혀져 뇌신경에 전달되는 과정은 모두 원자의 운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은 글자가 망막에 맺혀질 것이고 맺혀진 상이 뇌신경을 통하여 뇌에 전달된다. 글자를 인식하는 과정은 글자의 모양이 망막에 맺혀지게 하는 빛의 전달 운동으로 설명된다. 망막에 맺혀진 상은 전기 신호로 바뀌어 뇌까지 전달되며, 의식 중 시각의식을 담당한 세포들이 그 전기적 신호를 분석하여 뇌세포의 세포막을 자극시켜 글자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글자를 인식하게 하는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조건에 의해서 결과는 결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카오스 이론에서 얘기하듯이 예측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어쨋든 결정은 된다. 2) 반대 존재론적 환원주의(ontological reductionism)의 입장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事象)이나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을 환원주의(reductionism , 還元主義)라 한다. 이는 다양한 수준의 물질이 갖는 '부분-전체'관계에서 전체의 속성이 부분들의 속성과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존재론적 환원은 인간의 정신적 문제를 물질로 환원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기서 정신이 물질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물질과 정신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이 있는가 하면, 정신도 결국 물질에서 나오므로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일원론, 곧 유물론이 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원론의 한 측면으로 여겨졌던 정신이 복잡한 물질현상으로 이해됨에 따라 이원론은 설득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유물론과 존재론적 환원론을 모두 수용하면, 정신적 존재의 속성이 물질적 속성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신적 속성이 물질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과 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전자는 존재자의 수준과 속성의 수준 모두에서 수용하는 것이고, 후자는 오직 존재자의 수준에서만 수용하는 것이다. 이 중 후자는 특정한 물질의 경우 환원이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이해를 위해서 예를 들어보자. 물(H2O)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물, 수소, 산소는 각각 존재자이다. 물이란 존재자의 속성은 수소 2개의 부분과 산소 1개의 부분이라는 존재자의 속성과 이 두 부분의 속성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존재론적 환원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적 속성이 물질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은 물의 속성이 수소와 산소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며,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은 물은 수소와 산소의 속성과는 전혀 별개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다시 두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질 때는 물의 속성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즉, 정신이 물질로 환원될 수는 있어도 그것은 단지 존재자의 차원이지 존재자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후자의 주장이다. 이 후자의 주장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모두 물질로 환원이 될 수는 있지만 그 환원된 부분들이 정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는 정신의 일부인 자유 의지는 환원론적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된다. 즉 빅뱅 이후 원소들의 결합으로 인한 진화의 결과 모든 현존하는 물질과 인간으로 진화되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정신적 부분인 자유의지라는 속성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양자 역학적(Quantum Mechanic) 입장 모든 물질은 양자화 되어 있고 미시세계에서는 양자화된 상태가 확률적 파동의 상태로 존재하며 인간이 그것을 관측했을 때만 확실한 입자상태로 결정된다는 과학이론이다. 예를 들면 방사선 동위원소가 분출되는 확률이 1/2인 상자 안에 고양이가 들어 있을 때, 스윗치를 작동시킬 때 방사선이 방출되면 고양이는 죽는다. 그러나 방출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게 될 것이다. 이제 스윗치를 한번 작동했다면, 상자 안의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이 양자역학의 이론에 따르면, 고양이는 죽어 있고 또한 살아 있다. 이것은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중첩되었다는 뜻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관측할 때, 비로소 죽었든지 살았든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적용해보자. 오늘 점심을 짜장면으로 먹을 것인지 짬뽕으로 먹을 것인지 결정(둘 다 선호도가 같다고 가정)하려는 순간까지는 단지 1/2의 확률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선택하는 순간에 어느 한쪽이 사실로 확인된다. 즉 미래는 확률로 존재하다가, 미래가 현실이 되는 순간 사실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현재라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는 어느 것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오직 확률상태로 존재하다가, 그 순간이 되어야만 현실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정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지하는 것이다. Ⅲ신학적 입장 1-1. 어거스틴의 은총론(恩寵論) 어거스틴의 인간론(人間論)에 의하면 인간은 태초에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홀로 자유하시며 최상의 선(善)이신 하나님의 자유하신 뜻에 따라 그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선은 피조자의 선이요 한정된 선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선이 그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타락한 인간에게 선의 존재는 남아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타락 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 자체를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기능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이 상실된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 때문에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잃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 같은 인간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가 타락 전에는 선을 택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항상 악(惡)만 택하게 되었고 구원 후에는 선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타락 전 상태와 타락된 자유의지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받은 상태에서만이 인간에게 진정하고 완전한 자유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타락 후부터 구원 받지 못한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이것은 결국 죄짓는 데에만 자유롭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자유개념은 그의 철저한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은혜)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 초기에는 마니교의 숙명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자신의 회심을 생각할 때 구원에 이른 것이 자기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죄에 예속화됨에 따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은총은 침례로부터 출발하며 유아도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죄 된 인간의지에 미치는 감화력으로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1-2.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지녔다고 보았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인간은 자유하다는 어거스틴의 사상과는 다른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제자인 켈레스티우스(Caelestius)에 의해 명확하게 정리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에 전파되었고 어거스틴의 주장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그 당시 모든 라틴 교회에는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에서 하나님의 독력설(獨力設, monergism)을 주장하여 중생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자유 그 자체는 은혜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런데 펠라기우스가 나타나면서 인간에게 중생을 일으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어거스틴과 펄라기우스의 논쟁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가 혹은 인간의 일인가?”하는 질문에 이르게 된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아담의 자유의지나 그 후손의 자유의지는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본능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인간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말한다. 이와 같이 원죄의 부인과 침례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인간 의지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는 412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이단(異端)으로 정죄되고 펠라기우스는 416년 밀레브대회, 카르타고 대회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자유를 통하여 선을 택하며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교회 안에서 한 분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이후로 계속해서 인간의 능력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준비한 선각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되는 듯이 보이는 교회 역사의 원류는 조금씩 유형을 달리했더라도 바로 펠라기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3.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펠라기우스의 정죄(定罪) 후에 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절대적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반감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예정 교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심어주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레린스의 빈센트(Vincent of Lérins, ?-445)를 통하여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예정이 하나님의 예지 즉 예견된 신앙과 순종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半) 펠라기우스주의가 말하는 자유의지론은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유전병과 같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타락으로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를 자유케 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 의지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구원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은 529년 오렌지 회의에서 배격되었으며 오렌지 회의를 통해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확정했다. [출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naver.com 2)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의지론 2-1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에라스무스는 이 책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란 '사람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것들에 전념하거나, 이런 것에서 돌아설 수 있는 인간 의지의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에 선행하며 우선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그 은총과 협력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은총이 주도적 원인이고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차적인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은총과 의지는 함께 행동한다." 에라스무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는 은총을 얕잡아본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의지와 책임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성경의 많은 구절과 교회의 오랜 전통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의하면,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운명론으로 귀결될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모든 약속, 충고, 축복, 저주도 헛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보상을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도덕이 폐기되고 세상은 혼란과 무질서로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덕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깡그리 부정하는 루터의 과격성과 배타성이 로마교회의 부패와 타락만큼이나 세상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포도주가 사람을 술 취하게 하고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다고 해서 포도나무를 잘라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듯이, 인간의 의지가 죄를 짓는 기회를 찾는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과격성을 비판했다. * 교각살우(矯角殺牛): 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 2-2 루터의 '노예의지론' 에라스무스의 책을 읽은 루터는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위태로움에 처했음을 자각하고 에라스무스 책 분량의 거의 4배에 달하는 긴 답변서를 내놓았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오히려 감사를 표하는데, 그것은 그가 제기한 이 문제, 즉 '우리 의지가 영원한 구원과 관련해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가, 혹은 은총의 역사 아래서 단순히 수동적인가'하는 것은 종교개혁운동에서 너무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전자를 이야기했다면, 루터는 후자를 주장했다. 루터는 이 문제가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세상에 소동이 생기고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결코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루터가 긴급하게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대해 장황한 논박을 펼친 이유다. 루터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자기 능력과 소유와 관련해 자신의 자유 선택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거나 방치해 둘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다른 한편 하나님과 관련해 혹은 구원이나 저주와 관련해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니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나 사탄의 의지에 종속된 포로요 백성이요 노예다." 루터의 요점은 인간이 일상생활의 여러 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고 또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적어도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뜻에 철저히 속박되어 있기에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루터가 볼 때에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이 구원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기에, 이런 점에서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라고 할 수 있다. 3) 알미니우스와 칼빈의 논쟁 3-1. 칼빈주의(Calvinsm) 루터가 신학적 권위를 인정받아 아우구스부루그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을 인정하는 무리들이 형성되었고, 라인 지방과 스위스에서는 칼빈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고 "기독교 강요와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인정하는 무리로 형성되었다. 특히 교회론, 정치론이 서로 달라지면서 각 도시나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나는 신앙 고백들이 만들어졌다. 이 신앙고백들은 신조(creeds), 신앙고백(confession), 요리문답(catechism) 등으로 구성하였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의존하는 가장 큰 뿌리로 자리하고 있다. 당대의 선진들이 고민하던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성경에 근거하여 고백적인 선언으로 문서화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속한 신앙적 단체이며, 어떤 내용을 믿는 신앙을 가졌는가를 밝히려면 "역사적 신앙 고백적 칼빈주의"(historicl confessional cavinism)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앙 고백적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주장하는 복음을 요약하고 전수하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각각 다른 신학 사조가 형성되었다. 칼빈주의 신학의 계승으로 개혁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순수하게 지켜온 신앙 체계를 세웠는데 그것은 ①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②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오직 은혜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충분한 의로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③오직 그리스도만 (Sola Cristus)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역하시고 갖고 계신 것, 특히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들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④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Deo Gloria) 이 믿음은 신자로부터 모든 업적을 취하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모든 영광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만 돌려드린다. ⑤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진실된 설명에 의해서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선택)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지혜를 성령을 통해 주시고, 그러한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 대속의 피를 흘리셨으며,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또 그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께 끝까지 구원하시어 성화로 나아지게 된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점을 발생시킨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의 책임, 인간의 방종 등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의 자유의지 부분이 불명확하거나 매우 약화시킨 결과 죄를 지은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3-2. 알미니안 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 주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학자였던 야곱 알미니우스(Jocob Arminius, 1560-1609)에 의하여 주창한 이론을 말한다. 알미니안 주의는 칼빈주의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좀 더 강조한다. 1610년에 알미니안 학파의 우이텐 보르게가 칼빈주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발표한 5개 조항 항변론은 다음과 같다. 1.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2. 우주적 속죄, 보편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3. 부분적인 타락 (Partial Dpravity) 4. 항거할 수 있는 은혜(Grace to resist) 5. 은혜의 상실(Loss of grace)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선택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누가 그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선택받을 것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의미의 예지적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주장한다. 엄밀히 말해 선택은 주권적이지도 않으며 우리의 공로를 배제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2.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인류적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동등하게 구원을 이루셨지만 신자만이 그 유효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속죄 사역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3. 인간이 심각하게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하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과 회개에 대한 복음의 초청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죄인들은 그들의 선택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성령에 의해 거듭나는 것이다. 4. 인간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내적이고도 은혜로운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그에 대응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한정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5. 알미니우스와 초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르트 신조"(1618)가 제정될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도의 궁극적 견인 교리를 부정했다. 그들은 신자가 계속해서 믿지 않는 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3-3. 웨슬리안주의(Wesleyanism) 웨슬레 주의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외적 부르심" 즉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 "내적 부르심" 즉 성령으로써 말씀을 적용하도록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웨슬레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음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펠라기우스와는 다르다. 또한 하나님은 항상 기다리시고 인간이 어느 때나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과도 다르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인 행동이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칼빈주의자와도 다르다. 웨슬리주의는 알미니안주의의 도덕적 행위들을 지키면서도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고"이신칭의"의 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웨슬레는 칼빈과 이중예정설과 알미니안의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믿음 구원설 가운데 균형을 잡는 구원론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이 웨슬리의 구원론이다. 그는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로 구분하는 칼빈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외적 부르심) 성령으로 말씀을 적용하신다고 주장하는데(내적 부르심) 이 두 가지 일반적 소명과 유효적 소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을 강조한 웨슬레는 인간의 죄와 타락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어느 학파보다 강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쳐 모든 인간은 전적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 된 것으로 보는 가운데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으로서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일부 장로교인들이 웨슬리의 신학을 인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단정하고 있지만 웨슬레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무지의 소치이다. "웨슬레에게 나타나는 구속의 의미는 만인구원설이 아님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구속론은 소시너스파나 일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만인 구원론과는 아주 다르다" - (웨슬레 조직신학 156쪽) 특히, 예정론 교리에서 창세 전의 예정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 칼빈의 예정론에 맞서 웨슬리는 지금 여기서 믿는 자의 구원을 주장했고,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대해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Ⅳ결론 인간의 자유의지의 행사, 즉 이성에 의한 선택은 하느님의 예정의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다. 예컨데 야곱과 에서의 경우 복중에 이미 그들의 운명이 예정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이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역시 그들의 자유의지가 작용되어 나타나는 결과가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을 전제해서 그 결과(운명)가 확률적으로 예측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처해지는 나쁜 상황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그는 구원받은 사람에 비해 당연한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결코 불리한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 넓은 모래 밭에서 필요한 모래를 누군가 채취해 갈 때, 채취되지 않은 모래는 더 나쁜 선택을 받은 것인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결코 불공정한 선택이 아니다. 인간이 구원이 된다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와 같으며, 선택받은 자들에게 그것은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만일 선택받지 못한 것이 불리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선택받은 입장에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진다면 그것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불리하게 적용될 여지는 없다. 이 부분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정이란 인간이 인식하는 예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는 예정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 전제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가장 최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현재 세계에 진행되고 있는 방식보다 더 좋은 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저서 <에티카>의 정리2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러한 수용은 예수께서 하느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믿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작용한 결과이다. 좋게도 나쁘게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결과를 낸다고 믿는 것은 가장 긍정적인 인식이다. 자신의 인식은 곧 믿음이며 인간은 그의 믿음대로 결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옳은 길을 걷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건하게 두려워하는 방식인 것이다. ---------------------------------------------------------------------------------------- 1 <라플라스의 악마> 수학 법칙 중의 하나인 '라플라스의 변환'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적 천재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1749~1837)가 고안한 가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로 "주어진 한순간 자연의 모든 존재의 위치와 운동 상태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에게는 어떤 것도 불확실한 것은 없고,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다. 즉,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 상태를 알고 있는 악마가 있다면 결정된 미래를 눈으로 보는 듯 생생히 예측할 수 있다'는 가설 속의 존재에 후대의 작가들이 악마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2 정리 33: 사물들은, 산출된 것과 다른,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도, 어떠한 다른 질서에 따라서도 산출될 수 없었다. 증명: 왜냐하면 일체의 사물은 신의 주어진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났으며 (정리 16에 의해),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정리 29에 의해). 그러므로 만일 사물들이 다른 본성을 가질 수 있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결정되어 있어서, 결국 자연의 질서가 달라졌다면, 신의 본성도 역시 현재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정리 11에 의해) 그 다른 본성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둘 이상의 신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이른다(정리 14의 계1에 의해) 그러므로 사물들은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도, 어떠한 다른 질서에 따라서도 산출될 수 없었다. Q. E. D. 주석1: 필연적이라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 또는 원인에 의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가능이란, 그 본질 또는 정의가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작용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그 사물이 산출되게 하는 외적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이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본질이 모순됨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모순되지 않음을 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의 연쇄작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 것도 확실히 단언할 수 없으면, 그 사물은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으므로, 그에 따라 그것을 '우연적' 또는 '가능적'이라고 부른다. 주석2: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사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완전한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났으므로, 최고의 완전성을 가진 신에 의해 산출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것은 신에게 조금도 불완전성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의 완전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단언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반대쪽에서부터는, 앞에서 밝힌 것처럼, 신이 최고의 완전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내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다른 방식으로 신에 의해 산출되었다면, 우리가 가장 완전한 절대자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여 신에게 귀속시켜야만 했던 본성과는 다른, 별개의 본성을 신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불합리한 것으로 거부하고 기꺼이 심사숙고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 (정의 7), 즉 절대적 의지와는 다른, 별개의 자유를 신에게 귀속시키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만일 그들이 문제를 숙고하고, 우리의 증명들의 연쇄를 올바르게 고찰한다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신에게 귀속하고 있는 그 자유를 단지 무의미한 것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학문의 중대한 장애물로서 아주 버리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정리 17의 주석에서 말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나는 설사 의지가 신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사물들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또는 어떤 질서에 따라서도 신에 의해 창조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밝힐 것이다. 이점은 우리가 다음의 것들을 살핌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첫째, [그들은 스스로] 각각의 사물이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신의 결정 및 의지에만 의존함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스스로] 모든 신의 결정들은 영원에서부터 신 자신에 의해 확립되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에게 불완전성과 변덕을 선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 안에는 '언제'라는 것이 없고 '이전'도 '이후'도 없으므로 오직 신의 완전성으로부터만 신은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정할 수 없고, 정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즉 신은 자신의 결정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설령 신이 또 다른 자연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혹은 영원에서부터 신이 자연과 그것의 질서에 관하여 다른 어떤 것을 정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신에게 어떤 불완전성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신이 자신의 결정을 바꿀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자연과 그 질서에 관하여, 자신이 정한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정했다면, 즉 자연에 관하여 그 밖의 어떤 것을 원했고 생각했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지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신의 본질과 완전성을 조금도 변경하지 않고 신에게 또 다른 지성과 의지를 귀속시키는 것이 허용된다면, 어찌하여 신은 지금 피조물들에 관한 자신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완전함을 유지하는가? 왜냐하면 피조물들과 그 질서에 관한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과 완전성에 관련해서 동일한 것이며, ㅇ떠한 방식으로든 신의 지성과 의지는 파악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가 아는 모든 철학자들은 신 안에는 가능적 지성이 전혀 없고, 단지 현실적 지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정했듯이, 신의 지성과 의지는 본질과 구별되지 않으므로, 만일 신이 별개의 현실적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신의 본질도 필연적으로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처음에 추론한 것처럼) 만일 사물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과 다르게 신에 의해산출되었다면, 신의 지성과 의지, 즉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신의 본질은 <현재 존재하는 것>과 다른 것이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불합리하다. 따라서 사물들은 어떠한 다른 방식이나 다른 질서에 따라 산출될 수 없으므로, 그리고 신의 최고의 완전성에서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신이 자신의 지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면서 가지는 완전성과 동일한 완전성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할 만한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사물 안에는 완전성도 불완전성도 없으며 사물 안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 때문에 사물이 완전하게 되거나 불완전하게 되며, 선하거나 악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신의 의지에만 의존한다." 따라서 만일 신이 원했다면, 현재 완전한 것이 극히 불완전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현재 사물 속에서불완전한 것이 극히 완전한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결의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인식하는 신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자신이 사물들을 인식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을 인식하도록 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것은 , 내가 방금 밝혔듯이 대단히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논증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능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물들이 다르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도 필연적으로 달라져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의 의지가 달라질 수 없다(앞서 완전성에 의해 명백하게 밝힌 것처럼). 그러므로 사물들도 또한 다르게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신의 임의로운 의지에 종속시키며, 모든 것을 신의 재량에 의존하게끔 하는 이 의견은, 신이 선을 지향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좀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이들은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신이 활동 중에 모범으로 삼거나 일정한 목적으로서 지향하는 어떤 것을 신의 밖에 상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히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밝힌 것처럼 만물의 본질 및 존재의 제1이며 유일한 자유원인인 신에 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불합리한 주장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불합리성을 반박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