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해 드린대로 오늘부터 <음악사의 뒷얘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길고 긴 클라식 음악역사의 뒤안길에서 벌어졌던 재밋는 에피소드들을 모아 주옥같은 음악과 함께 연재할 예정입니다. 종전과 다름없는 변함없는 성원 바랍니다.
*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한 장면...이하 생략
[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
말년의 모차르트(말년이래봤자 30대 초반이 조금 넘는 나이였지만)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1791년 10월 그는 가까운 친구이자 클라리네티스트인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걸작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를 작곡합니다.
이 곡은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 영화 <엘비라 마디간> 때문에 인기를 얻게 된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시켰던 영화는 바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습니다. 시드니 폴락이 메가폰은 들었고 명우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아 1985년에 세상에 나왔던 영화입니다.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7개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 카렌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덴마크 여성입니다. 영화의 원작은 소설 형식을 띤 회고록입니다. 1937년 출간됐습니다. 카렌 블릭센이라는 여성이 여주인공 카렌의 실제 모델입니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했던 남자 주인공 데니스도 역시 실재했던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아프리카 대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유뷰녀 카렌과 역마살이 낀 로맨티스트 데니스의 그림 같은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이 영화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이 영화는 ‘잃어버린 낭만의 환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낭만 속에는 현대의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원시적 자연’도 포함되어 있었겠지요.
1980년대 중반, 고만고만한 일상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아프리카의 장엄한 풍광과 거대한 커피 농장을 배경으로, 아무런 계산도 깔리지 않은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이 벌거숭이처럼 펼쳐집니다.
영화 속의 데니스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직업이 사냥꾼인 그는 아프리카에까지 축음기를 가져와서 음악을 듣습니다. 영화에서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의 2악장이 곳곳에서 흘러나옵니다. 카렌과 데니스가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 또 초원에서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에서도 느린 템포의 2악장이 잔잔하게 흘러나옵니다.
결국 카렌은 남편인 브릭센 남작과 이혼하고 데니스에게 청혼하지요. 그러나 데니스는 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방랑하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적당히 놀고, 적당히 안주하려고 돌아가려고 하지요.
하지만 데니스는 돌아갈 곳을 아예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에게는 의례 비극적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법입니다. 영화 속 데니스의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음악으로 돌아갑니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효과적인 악기입니다. 일단 넓은 음역이 그렇지요. 클라리넷의 음역은 여성의 음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3옥타브 반 정도의 음역을 지녔는데, 여성의 알토에서 소프라노까지와 거의 흡사합니다. 현악기 중에서는 바이올린이 이와 비슷한 음역을 지녔습니다.
클라리넷은 넓은 음역을 오가면서 다양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음역의 다른 목관악기, 이를테면 오보에 같은 악기와 차별됩니다. 다시 말해 오보에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거의 동일한 음색을 지녔습니다.
물론 그것은 장단점의 문제라기보다는 악기 고유의 특성이라고 봐야 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색이야말로 오보에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반면에 클라리넷은 음역마다 음색이 바뀌면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빠르게 오갈 수 있다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다시 말해 클라리넷은 순발력이 뛰어난 연기자에 가깝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로맨틱한 성품을 지닌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1791년 9월 28일부터 11월 15일 사이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0일 전에 완성했다는 얘기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모차르트는 같은 해 12월 5일 <레퀴엠>을 작곡하던 도중에 병사했습니다. 그래서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는 모차르트가 세상에 남긴 최후의 협주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1악장은 3개 악장 중에서 길이가 가장 깁니다. 전체 연주시간 약 30분 중에서 거의 절반 가량을 차지합니다. 먼저 오케스트라 합주가 첫 번째 주제를 제시합니다. 산뜻하고 매끄러우면서도 음악적으로 균형 잡힌 선율입니다.
그것을 현악기들, 이어서 관악기들이 차례로 받아서 연주합니다. 그 주제 선율은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제1악장은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 잡힌, 그래서 고전적인 격조를 보여주는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모차르트 특유의 유머러스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케 합니다. 화려한 독주 기교를 뽐내는 카덴차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클라리넷이 곳곳에서 빼어난 기교를 펼쳐 보입니다.
* 카덴차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나 독창자가 별도로 독립적으로 연주하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부분을 말합니다. 이 때 오케스트라는 숨을 죽이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함께 기억되는 2악장은 느린 아다지오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반주로 깔리면서 클라리넷이 주선율을 연주합니다. 마치 클라리넷이 아련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제 선율이 점점 희미해질 무렵, 오케스트라가 다시 한 번 그 선율을 노래합니다.
이어서 조바꿈(조바꿈에 대하여는 설명이 난해해서 생략합니다), 다시 클라리넷이 슬픈 곡조를 노래하다가, 역시 오케스트라가 그것을 받아 연주합니다. 뒤를 이어 클라리넷이 카덴차풍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지만 주조(主調)는 역시 슬픔입니다.
잠시 후 원래의 주선율로 돌아와 클라리넷이 느리고 슬픈 노래를 다시 부르고, 현악기들이 잔잔하게 배경으로 깔립니다. 마지막으로 클라리넷이 테크니컬하면서도 정갈한 연주를 한차례 선보인 후 막을 내립니다. 코다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납깁니다.
* 코다
이탈리아어로 원래는 '꼬리'라는 뜻입니다. 뜻 그대로 음악의 결미에 덧붙여진 부분을 말합니다. 악보에서는 결미 부분으로 넘기고 싶은 마디 위에 D.S.Al.Coda라고 붙인 후, 악보 최후반에 코다 파트를 삽입하여 표시합니다.
3악장은 경쾌하고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문을 엽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역시 모차르트답습니다. 하나의 주제가 여러 개의 삽입부(중간부)를 사이에 두고 여러 차례 반복해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치 빙글빙글 도는 듯한 원무(圓舞)의 느낌을 풍기지요. 물론 이런 음악적 설명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음악을 받아들이는 내 몸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악장의 서두에서 클라리넷이 경쾌하게 연주하는, 짧게 부서지는 스타카토풍의 주제 선율은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악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들려올 겁니다.